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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 폭력

그렇다. 이미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 마무리는 축제와 같을 것이다. 다수에게 평화로운 축제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그 즈음이 되면 처음엔 내키지 않았던 이들, 반대편에 섰던 이들조차도 교육을 거쳐 각성되고, 일부 개조되지 않은 이들도 사심을 내려놓고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과거 혁명의 경험이 아마 그런 것이었을테다. 그러나 그 승리를 확정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았던가.

 

확실히 현대의 '혁명'은 현대주의적이다. 시작부터 축제다. 너무 쉽게 이겼거나, 사실은 이기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승리의 주체는 따로 있을 것이다. 축제가 끝나면 그 주체가 누구였는지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주의적 '혁명'은 수많은 '시민'을 지지세력으로 삼을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애써 스스로가 '혁명'의 주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누가 축제의 판을 깔아줬을까? 그리고 누가 그 축제의 수를 놓았을까? 언어의 성찬이 필수적이었다. 과거엔 부끄러워 감추어 놓았던 화려한 언어들이 축제의 언어로 둔갑한다. 정치가들, 지식인들, 예술가들 모두 드디어 자신의 정견, 담론, 재주를 뽐낼 기회가 왔다고 여긴다. 사실 과거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었고, 이번 승리를 위한 과정의 일부였다는 사후적 승리관이 배후에 있을 것이다. 그저 과거에 시대를 잘못 만났던 것이라는 주관적 해석도 뒤따를 것이다. 그들의 말 속에서 원망 나아가 저주의 대상이었던 '시민'이 어느 순간 위대한 찬송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를 축제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짜 혁명의 길을 한 걸음씩 걸어냈던 사람도 있다. 축제가 끝날 때 즈음이면 그들이 보일 것이고, 그들은 '패배'를 알면서도 한 걸음 앞으로 내 딛는다. 다수의 '시민'들은 폭력 뒤로 숨을 것이다. 그동안 그래 왔듯이 '폭력'은 시민의 지지를 업고 자행된다. 아마 싸움은 그때부터일 것이다.

 

* 지식의 차이가 소멸 불가능한 것처럼, 국가의 소멸도 불가능하다. 진정한 지식 차이를 극복하는 길이 윤리적 기제를 형성하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권력 문제의 극복 또한 권력 기제의 소멸이나 국가의 소멸이 아니라 권력 작용에 관한 탈국민국가적 윤리 기제의 형성을 통해야 할 것이다. 종말론은 이토록 '현대'적이고 '식민'적이며 '탈역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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