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1

#1.

그냥 걷고 싶었을 뿐이다. 밤길을 걷고 싶었다.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네온싸인이 아니라 시린 달빛과 꿈틀대는 별빛을 받으며 밤길을 걷고 싶었다. 그렇게 쫓아다녀온 지리산행은, 그래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잘 걸었다. 걷다가 다쳐서 지금은 제대로 못 걷고 있다. ㅠㅠ

 

 



오며가며 버스 안에서 잤다. 가는 길에 간장 오타맨과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2일 동안 산길을 걸으며 천천히 얘기 나눠도 되겠다 생각했던 것인데 돌아오고 나니 그게 전부였다. 아쉽다. 쉬운 만남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창 밖으로 지나갔을 수많은 풍경들은 그리 아쉽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버스 안에서 보게 되는 바깥 풍경이라는 것이, 모두 그렇고 그런 것 같았다. 게다가, 깎이고 잘려나간 몸뚱아리를 보고 있어야 하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다. 그렇게 헤쳐놓은 길 덕분에 나는 한 시간, 두 시간을 절약해서 목적지에 닿는다. 차마 "좀 더디 가도 되는데..."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3.

벽소령으로 가는 길 초입에 빨치산 토벌의 궤적을 설명해놓은 게시판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후방을 교란하여 사람이 죽고 다치는 비극의 종식을 지연시킨 것이 빨치산이란다. 그러나 훌륭하게도 모두 토벌하였으니 그 역사를 감상하시라, 뭐 이런 거다. 해방 전후의 사회주의자들이, 문득 생각났다. 동일한 사실을 다르게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학의 매력이다. 그러나 역사의 매력은 동일한 서술에 대해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4.

차량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있는 곳부터 '산'행이 시작됐다. 이미 버스를 타고 들어온 구불구불한 길부터도 산인데 산길을 걷는 맛은 흙을 밟아야 알 수 있다.

 

#5.

벽소령 길은 처음이다. 두번째 가면서 이런 말이 우습기는 하지만 처음이다. 그만큼 벽소령에 대한 환상 비슷한 것이 있었다. 절벽을 에돌아 구불구불 넘어가는 길 같은. 가로 폭이 2m는 되는 길이었다.

 

#6.

벽소령 산장에 닿을 때쯤 깜깜해졌다. 동쪽으로 초승달이 슬며시 떠 있었고 쏟아지는 별들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별구경 한다며 담배를 한 대 피는 동안 손이 얼었다. 걷기를 멈추고 나니 산의 추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나마 바람이 세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겨울 별자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던 때가 있었다. 그걸 어떻게 다 잊었는지 모르겠다. 마차부자리, 황소자리, 큰개, 작은개 자리, 쌍둥이 자리 ... 이름들만 기억난다. 하늘에 흩뿌려진 점들을 이어 '자리'를 만드는 것까지도 하겠는데 모양과 별자리 이름이 연결되지 않는다. 참내...

카펠라라는 별을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파랗게 반짝이는 겨울 별이다. 그 별을 잊지 않으려고 주위의 별자리들을 외웠다. 마침 과학동아 소녀였던 나에게 겨울별자리 이야기가 담긴 별책부록이 남아있었다. 구름이 걷힌 날은 책을 보며 별자리 하나하나를 새겼다. 서울 하늘은 아무리 맑아도 볼 수 있는 별이 몇 개 안돼서 별자리 찾기가 참 쉽다.

별자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사람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설레임 비슷한 것이 있었나보다.

 

* 잠깐 퀴즈 ^^;

겨울철 별들은 더 밝게 보인대요. 왜 그럴까요?

 

#7.

산행을 시작할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편치 않았다. 고관절의 flexion(한글로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ㅠ.ㅠ)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벽소령에서 좀 쉬면 괜찮겠지 했는데 세석으로 넘어가는 길을 나서려니 통증이 더 심해졌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었다. 별빛이 너무 고왔기 때문.

세석으로 넘어가는 길에 드문드문 멈춰서서 하늘을 봤다. 사실, 간장 오타맨이 쉬면서 별도 좀 보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마구 걷기만 했을 지도 모른다. 다리가 불편해 여유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하늘이 이번 산행의 전부였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별들이 꿈틀댄다. 그토록 빽빽하게 들어차있으니 저들도 갑갑한지 파르르 떨면서 주위의 빛들을 밀쳐낸다.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건지도 모르지.

 

#8.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세석에서 몸을 좀 녹이고 장터목까지. 밤길이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은 바닥이 잘 분간되지 않았고 중간중간 올라선 봉우리들에서는 산아래 마을과 도시의 가로등이 마을의 경계를 분명히 말해주는 밤이었다. 옆에 나무들이 주욱 서있어 산인가보다 했고 모르는 짐승의 발자국들이 간간히 보여 산이구나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산이라 길도 그리 험하지 않았고 꽤나 널찍했다. 스패치가 무색하게시리 눈이 별로 쌓이지도 않았다.

울릉도에서 혼자 걷던 산길 생각났다. 눈이 무릎 위로 쌓인 데다가 길도 넓지 않아 걸어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놓지 못하던 길이었다. 그럴 때 만난 것이 네발짐승의 발자국이었다. 반가웠다. 그것만 따라서 산길의 반 정도를 걸었다. 길을 살펴볼 생각도 안하고 한참을 따라 걸었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돌 때쯤 그 발자국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혼자서 길 찾아 갈 걱정을 하느라 그 네발짐승이 떨어진 건지, 내려간 건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게다.

혼자 걷는 길과 함께 걷는 길은 다르다. 여러모로. 눈이 많이 쌓이고 덜 쌓이고의 차이는 아닌 듯하다.

 

-헥헥,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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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5 12:08 2005/02/1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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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리산 2

    2005/02/17 14:51

    * 이 글은 미류님의 [지리산 1] 에 관련된 글입니다. #9. 장터목을 지나 제석봉을 향해 걸었다. 해발고도가 높아져서인지 길이 제법 얼었다. 몇 번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제석봉에 닿을 때쯤 동쪽

  2. 지리산

    2005/08/01 21:16

    &nbsp; &nbsp;큰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잠깐 망설였으나 내가 어딘가로 떠나려할 때 망설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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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njang_gongjang 2005/02/15 14: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지리산에서 본 별내음이 풍기네요.
    몇 마디 말못하고 술도 제대로 먹지 못한게 아쉽게 다가오네요.
    언젠가 또 좋은 산행 기회가 있지 않을까?라는 여운 남기는 맛도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언젠일지 모르지만 다음을 기약해 봅니다.
    참 이 글 속에 별빛은 맑네요.
    산행에서 본 별빛이 신년 운수대통을 예견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뭐 내가 지리산 산신령님께 간절히 텔레파시 보낸 효과이겠지만... ^^
    다리가 빨리 쾌유 되기를 빕니다.

  2. 미류 2005/02/15 16: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넵 ^^ 더 늦기 전에 남은 이야기들 써야죠. ㅎㅎ

  3. 2005/02/16 09: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해답을 알려줘욧!!
    아..별헤는 산행.저도 마지막으로 간 지리산행이 생각나요..

  4. 미류 2005/02/16 09:4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해답? 퀴즈 답요? 벌써 말해주면 너무 싱겁잖아요~ ^^;;
    근데 아무도 안 맞추네 ㅡ.ㅡ;

  5. Dreamer_ 2005/02/16 17: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뭐 공기 때문일꺼 같은데 정확히 모르겠네.ㅠㅠ;; 답 궁금해요.-0-

  6. wingederos 2005/02/17 02:4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추워서, 즉 공기가 차서..^^

  7. 미류 2005/02/17 14:5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지리산 2에 정답 공개~ ^^;;
    드리머, 붉은 사랑, 저도 겨울에 공기가 차서 그렇지 않을까 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더랬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