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2

* 이 글은 미류님의 [지리산 1] 에 관련된 글입니다.

#9.

장터목을 지나 제석봉을 향해 걸었다. 해발고도가 높아져서인지 길이 제법 얼었다. 몇 번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제석봉에 닿을 때쯤 동쪽 하늘에서는 햇귀가 새초롬하게 올라온다. 은근슬쩍 발간 볼을 드러내더니만 이내 지평선을 밝힌다. 같이 갔던 한 친구는 천왕봉 가기 전에 해가 떠버리면 속상해서 울어버릴 것 같단다. 그냥 제석봉에서 좋은 자리 잡고 기웃기웃거리다가 해 뜨나보다 해도 될 것을, 일출과 '천왕봉 일출'은 분명 다르기는 한가 보다.



 천왕봉에 발을 딛고 보니 봉우리 가득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서있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꽤 들어 해를 볼 성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자리를 잡고 섰다. 구름 너머로 해가 출렁거리며 올라온다. 출렁거릴 때마다 지평선의 붉은 기운도 퍼졌다가 움추러들다가 한다. 구름 뒤로 한참을 올라오고 있는 해를 눈치챈 사람들이 하나둘 발을 돌린다.

몇 년 전 지리산 종주를 할 때도 천왕봉 일출은 보지 못했다. 하기는 제주도가 고향이면서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도 본 적 없기는 하다. 해뜨고 해지는 것을 보는 데에 별 욕심이 없다. 해뜨는 하늘과 해지는 하늘이 저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 텐데 만날 때가 되면 만나겠지 싶은 거다. '제대로' 일출을 못 봐서 욕심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구름 뒤에서 몰래 올라오는 해만 봐도 좋던데.

 

#10.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 생각하니 몸이 훨씬 긴장된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훨씬 어려운 데다가 다리가 불편하니 더욱 걱정됐다. 아니나 다를까, 몸은 마음보다 훨씬 걱정이 앞서 쉽게 펼쳐지지를 않는다. 줄곧 걷다보면 불편한 관절에 무리를 덜 주도록 주위의 근육들이 적절히 힘을 배분하고 알아서 운동하기 때문에 통증에 무뎌진다. 훌륭한 기계인 셈인데 그럴 때면 인간의 위대함의 극은 결국 육체성이 아닐까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 하는 동안에 그 근육들의 피로도는 배가 된다.

 

#11.

장터목까지 다시 내려와 밥을 지어먹고 백무동 길로 내려갔다. 3km 정도를 남긴 곳에서 무릎이 확실히 나갔다. 무릎 아래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때부터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내려왔다. 어쨌든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같이 내려가던 사람들과 속도를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먼저 내려가시라 했더니 굳이 같이 가잔다. 느리게 걷는 것 역시 별로 쉬운 일이 아니라 미안했지만 끝까지 같이 가겠다니 고마운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백무동 길은 분명 처음인데도 몇 번 와본 곳처럼 익숙했다. 아마도 경사도나 자갈길의 모습, 길 옆으로 적당히 나무가 우거진 모습이 여느 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중요한 건... 너무 길었어 흑흑

 

#12.

버스를 타는 곳까지 내려왔다. 나 때문에 점심식사가 늦어져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후다닥 파전과 생두부를 먹어치웠다. 후들거리는 다리도 쉬게 할 겸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터라 차마 말을 못 꺼냈다.

산이 좋아서 종종 다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산에 꼭 들어갔다 나와야겠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걷다가 산길이 나오면 들어가보는, 뭐 그런 게 좋다. 그래서인지, 오르는 길로 내려오면 심심하다. 산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보다. 산길이 좋고 산에서 만나는 막걸리집이 반갑고 그렇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조계산길에 있는 보리밥집 같은 거.

 

#13.

서울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잤다.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과 3개월에 한 번은 서울 뜨자던 약속-정확히 말하면 나의 욕심-을 제대로 지키고 있네 하는 뿌듯함이 버무러져 흐뭇한 잠을 자는가 싶었다. 웬걸, 내려올 때 너무 긴장했는지 내내 산에서 굴러떨어지고 넘어지는 꿈 꿨다.

 

#14.

블로그라,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기도 한데 사진 한 장 곁들이지 못하니 썰렁하다. 나는 돌아다닐 때 사진기를 들고다니지 않는다. 없기도 하지만 굳이 구하려면 빌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은 너무 쉽게 찍히거나 너무 어렵게 찍히기 때문인데 그래도 사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사진기를 들고다니지 않는 것에 어설픈 '철학'을 들이대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그런 거지, 뭐

 

#15.

참, 겨울철 별. 겨울에 별이 밝게 보이는 이유는 겨울에 보이는 별이 밝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겨울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별들에 1등성이 많다는 거다. 가장 단순한 답인데 나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그 의식작용이 궁금하다. 내가 질문을 던져본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 그랬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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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7 14:51 2005/02/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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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리산

    2005/08/01 21:08

    &nbsp; &nbsp;큰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잠깐 망설였으나 내가 어딘가로 떠나려할 때 망설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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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mlist 2005/02/17 14: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별의 밝기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있군요. 저는요 찬 공기는 신선하게 느껴져서 차가운 공기는 뭔가 좀 깨끗해서 별도 잘 보일 거라는 당치않은 생각을 했더랬는데... ^^

  2. 미류 2005/02/17 15: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그런 생각했어요. 차가운 공기는 좀 깨끗하지 않을까. 근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그 생각에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

  3. kanjang_gongjang 2005/02/17 16: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백무동 식당에서 술도 한잔 하였잖아요. 술 이야기 빼면 시체죠.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백무동 막걸리 못 마시고 온게 좀 후회스럽네요. ^^

  4. 미류 2005/02/17 17: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쵸? 가시오가피주~ 진짜 맛있었어요 ^^
    근데 걸쭉한 막걸리랑은 다르잖아요~ ㅎㅎ

  5. underground 2005/02/18 03: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사진이 없어도 미류님의 묘사가 살아있어서 글이'생생하게' 다가옵니다...아니 오히려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게 피어나서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는 걸요.^ ^

  6. 미류 2005/02/18 09:5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언더의 상상력의 힘이겠죠~ ^^

  7. kanjang_gongjang 2005/02/18 13:2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다음에 가면 혹여 또 가게 되면 그때는 세석평전에서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해야 겠어요. 그길 백무동보다는 재미 있어요. 내려가는 길이지만 굽이 굽이 맛이 있답니다.(단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은 정말 재미없고...) 돌 계단도 없고.... ^^ 혹여 누군가 갈 기회가 되면 한신계곡으로 한번 내려와 보세요.

  8. 미류 2005/02/18 13:5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