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웃을 수 있음을

PC 방이다. 황새울 영화제 평택역 안내를 맡게 됐다. 더이상 연행되지 말라는 조직(?)의 배려 혹은 단속인 듯하다. 찌라시 선전전을 같이 하고 블로거들은 본정리로 이동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범국민대회 대오와 함께 있지 않을까...



평택역에 있으면서 마음이 내내 불편할 것 같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꼭 누군가 평택역에 있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결국 역에서 안내를 한답시고 "지금은 마을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막혀 있답니다"라는 말밖에 못한다면... 그게 무슨 안내인가...

 

11시에 모여서 걸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다르게 행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녁 황새울 영화제에서 '으랏차차 인권차력쇼'를 선보일 예정인데 그런 컨셉으로 걸어가보면 어떨까 하는. 나는 직접 본 적 없지만 오래전에 마을을 돌아다니던 유랑극단이나 서커스단처럼 분장도 하고 소리낼 수 있는 악기도 준비하고 간단한 거리극이나 즉흥 퍼포먼스도 하면서, 이를테면, 누군가 '평택아~~ 평택아~~' 부르면 저 앞에서 가던 사람이 '난 평택이가 아니라 평화라니까!'라고 소리지르는, 어이없지만 거리의 일상으로 녹아드는, 그런 걷기.

 

그러다가 가로막는 경찰을 만나면 화를 내면서 항의하고 몸싸움을 하기보다는 광대가 되어 모두를 놀아버리는. 풍자와, 풍자보다는 익살스러움으로...이런 생각을 하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영화제 일 때문에 함께 걸어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찰을 만나서, 정말 경찰과 마주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인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옆자리에서 한 무리의 남성들이 소란을 피우다가 갑자기 술마시는 우리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취해서 몸에 들러붙어 있는 마초근성이 모조리 쏟아져나오는 놈들과는 이야기해봤자 피곤하기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붓고 말았는데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력감과 두려움에 붙들려야 했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쏟아붓고 나면 다를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나는 욕설을 쏟아부었던 때의 그 마음이 두려움 없는 저항이었기보다는 공포에 뿌리를 둔 발악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술집주인이 그 일행을 내쫓은 후에도 분이 삭지 않아 씩씩거려야 했던 것. 그 후로 나는 부당하고 불편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나는 정당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고, 나는 이길 수 있고, 나는 어떤 폭력도 두렵지 않고, 나는 웃으며 이 상황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사지를 붙들려 경찰에 연행되는 상황, 겹겹이 방패를 들고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막아서는 상황에서, 나는 그런 자신감을 만들 수가 없다. 내가 정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지만 내가 웃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기지 않는다. 사지가 붙들린 채로 미란다원칙을 얘기하고 부당한 직무집행이라고 소리질러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길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고 당신들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겠다고, 신분과 소속이 무엇이냐 따져물어도 "당신 같은 사람이랑 얘기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대답을 듣고 나면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상처로 쌓이나 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못 갈 수도 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억류될 수도 있고 맞아서 다치고 아파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들을 수 없는 상황이, 제정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느날 갑자기 전쟁기지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걸 받아들이면서 계속 싸워야 한다는 진실이, 그냥 아프다.

 

그러나 세상에 아름다운 발악이 있다는 것을, 황새울은 보여주고 있지 않나. 지금도 대추리 주위의 곳곳에서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언젠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이겨야만 한다는 절박함으로, 벌써 이기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친구들이 보인다. 그/녀들이 지금은 웃지 못하더라도 함께 싸움으로써 끝내 웃을 수 있음을, 조용히 믿는다. 아직도 하루는 길게 남아있고 우리는 대추리 평화공원에서 함께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오늘 대추리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대추리의 전쟁>은 이제 대추리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벌어질 것이고 우리는 끝내 웃을 것이다.

 

+ 5.15.

웃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쓰지는 말자. 아직 웃을 수 있는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다면. 현실에 발딛지 못한 웃음은 관념의 미소일 뿐. 그것이 현실의 승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웃을 수 있을 때까지 걷고 또 걷기, 하지만 웃으며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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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4 15:00 2006/05/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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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에서 평택역까지 수많은 역들을 거쳐거쳐, 구비구비 시골길을 돌아 우리가 내린 곳은 내리 삼거리. 대추리는 원천봉쇄되었다 하고 그래서 대추리 대신 모였다는 본정리까지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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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티고네 2006/05/15 16: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날 대추리 평화공원에서 무르익은 밤은 너무 아름다웠어요.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대추리 전쟁은 보지 못하고 나왔고
    그래서 너무 아쉽지만...
    정말 좋은 영화제였던 듯^^*
    우리 계속 웃으며 걸어요. 제가 그 길에 어느만큼 함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 슈아 2006/05/15 23: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신감...어려워.

  3. 미류 2006/05/16 11: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안티고네 | 늦어져서 많이 아쉬웠어요, 정말. 못 들어갈 줄 알고 먼저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구. 경찰이 갑자기 길을 열 때는 허무하기까지 하더라는~ ㅡ.ㅡ;;
    같이 걸어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

    슈아 | 앗, 슈아의 분위기가... 늘 자신감을 북돋워주더니... 요즘 몸도 마음도 조금 힘든가봐요? 저도 어렵네요. 좀더 단단해져야겠다고 마음먹는 중. 그런데 그러면서도 조금 헐거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갈팡질팡...

  4. 슈아 2006/05/16 11: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이런 내가 그런 이미지였수? 나도 무지 갈팡질팡인디. 히히. 미류 그래도 힘내삼. 아기 미류가 있잖어. ㅋㅋ. 난 요즘 '상처랑 함께 단단해지기'를 꿈꿔유~~ 그렇지 않음 넘 맘 아파 못 살거 같아. 진짜 진지하게 이 고민을 했었는데 말이지. 지금 결론은 그래. ^^ 우리 언제 이 이야기 찐하게 해야 하는데...참말로...

  5. 미류 2006/05/16 16:5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참말로... 미류가 쑤욱 나와서 쑤욱 자라야 찐하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텐데 ^^ 건강 잘 챙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