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온 토요일

이다. 여느 때처럼 알바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와 저녁 약속 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써야 할 글들이 몇 개 있는데 어차피 내일도 사무실에 나와야 할 듯해서 아직 손대지 않고 있다.



노숙당사자모임과 함께하는 주거인권학교를 진행했다. 매주 토요일 하던 알바를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오후 3시에 당사자모임 분들을 만났다. 부담스럽고 어색하기만 했던 시간들이 어느덧 설레고 푸근해지는 시간이 되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일주일 단위로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준비하고 평가하는 일정이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고 내 몸은 두통이나 우울, 짜증 혹은 생리통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힘겨움을 발산했다. 지난 겨울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워크샵을 거쳐 4월에 주거인권학교의 문을 열 때는 '시작이 반'이라며 다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로부터 8주 동안 지나온 시간은 정신없이, 그야말로 한 눈 팔 새 없이 지나온 듯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토요일. 주거인권학교가 아닌 사무실에 앉아있는 어색함과 아쉬움을 퍼붓는 비가 덜어주고 있다.

 

당사자의 권리의식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면서 당사자운동과 함께 하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인권교육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운동과 연대하는 인권운동의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특히, 사회권운동이라는, 막연하기만 한, 그러나 중요하다는 점만은 분명한 운동을 모색하는 과정. 인권교육만으로 현실이 바뀔 것이라는 어설픈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남겼는지를 정리하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만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권이다. 그러나 인권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넘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즉 누구도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 질서!에 대한 권리다. 그런 만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빨간 열매나 신동엽의 러브하우스와는 다르다. 그리고 질서를 바꾸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데서 출발된다.

하지만 또한 현실은 우리에게 권리를 요구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질서 속에서 '당사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질서의 유지자로서 살아가기도 한다. 정체성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순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싸움은 어디에서나 시작될 수 있다. 그 계기를 만들어내는, 더디지만 의미있는 과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거인권학교에 참여하신 노숙당사자 분들이 주거권의 박탈에 대해서, 경찰의 인권침해에 대해서 당장 저항하는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권리의식은 교육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들 한 분 한 분이 모두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아니 주체이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싸움은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막연하게나마 느끼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 평가 기사를 내보내면 인권오름의 연재도 끝난다. 프로그램을 나누기 위한 자료집을 만들고 주거인권학교를 하는 동안 드러난, 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못했던 '딱지'(경범죄처벌법 위반에 따른 범칙금, 수만원에서 출발하지만 노역까지 살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문제를 정리하면 마무리도 끝난다. 물론 주거인권학교로 시작한 사회권운동의 고민은 주욱 이어질 테고 노숙당사자모임과의 관계 역시 어떤 형태로든 주욱 이어지겠지. 이제부터 더욱 힘내야. 얍!

 

*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세 활동가가 없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못다 전한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 개인적으로는, FTA와 빈곤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었던 <우리는 어디로>와 많은 시간을 들여 다양한 노숙인 인권문제를 다룬 <우리는 노숙인 인권지킴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다.

 

* 인권오름 연재기사

[노숙당사자모임과 함께하는 주거인권학교]

10 이건 언제 적 얘기야? -현실을 변화시키는 꿈, '보고싶은 인권뉴스'

9  우리는 어디로... - '인권선'에서 점점더 멀어져가는 가난한 이들

8  훠이훠이 인권침해 물렀거라 -힘 모아 인권문제 넘다보니 어느새 인권지킴이로

7  황당 살벌한 편견 -차별을 딛고 노숙인 날아오르다

6  일본 노숙인운동과 만나다 -"노숙인 조직 활성화된 일본 가 살아보고 싶네"

5  살(買) 수 있는 집, 살(住)만한 집 -가격표 없는 '집가게', 상상에 불과할까

4  일용노동의 거리, 요세바와 일본 노숙인운동 -영화 <노가다> 속 또다른 인권현장

3  '살 만한 집'을 찾아나선 퍼즐 여행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 나도 홈리스일까

2  주거인권학교에 바란다

1  '노숙인 이건희씨'를 통해 만난 목소리,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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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0 15:44 2006/06/1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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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oScrum 2006/06/10 16:1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여기 와서 노숙자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하나 더 늘었는데..
    정말로 거리에 노숙자가 많거든요. 시내 중심가에서는 구걸하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걷기가 힘들 정도지요. 처음엔 저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받는 돈이 내가 버는 돈보다 많다는 생각으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다가.. 얼마전부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여기는 다른 나라보다 노숙자에 대한 대책도 잘 되어 있는 거 같고.. 추운 날은 경찰이 돌면서 노숙자들을 데리고 거의 '모델' 수준의 쉼터로 데려다주고, 그게 모자랄 경우 병원 입원실로 데려다 준다고 하더라구요. 취업 교육 등등도 준비되어 있고, 이들에게 지불하는 복지기금도 따로 있고.. 그런데도 길거리에서 자고 얼어죽는 사람들이 많대요. 그래서 왜 그런건지 물었더니.. 그런 시설에 신청을 할 능력 조차가 안 되거나, 사회부적응증으로 그런 시설을 거부해서 그렇다네요. 이 중에 사회가 싫어서 노숙생활을 하는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흠..

  2. siwa 2006/06/10 19:2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일주일에 한번씩(이나!) 정기적으로 그런 프로그램 돌리는게 증말 어려운 일일텐데~ 진짜 수고 많았어 ㅎ 1년넘게 고생하고 고민했던게 알차게 결실을 맺은거 같아. 말했듯이 프로그램 여기저기서 계속 사용하믄 좋을거 같앙~~

  3. 미류 2006/06/13 11: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오, 한국에서도 노숙인 지원활동 하는 분들은 늘 그런 고민에 부딪치는 것 같아요. 물론 캐나다 수준의 지원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거부하는 분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고민이 많으시더라구요. 그런 거부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절망의 끝자락에 이른 사람의 자포자기일 수도 있으니. 아마 대부분 둘 중 하나이기보다는 둘 사이를 오가는 분들이겠죠.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겠죠? 우리 주위에도 사회가 싫은 사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노숙생활을 '시도'하는 사람은 흔치 않죠. 누군가에게, 노숙생활의 이유가 사회가 싫은 때문일 수 있다는 말은, 참 어렵고 슬퍼요. ...

    시와, 지금은 결실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어. 평가는 참 '긍정적'으루다가 했는데~ ㅎㅎ 조금씩 다시 걸어가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