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안복지, 경찰의 혜안?

치안복지라는 말을 처음 본 건 아마 작년 여름. 길에서 현수막을 보고 별 말 다한다며 지나쳤다. 며칠 전 다시 현수막에 적힌 그 말을 봤을 때는 무심코 지나쳐지지 않았다. 

 

치안복지라는 말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획기적인 말이다. 치안이 복지가 되고 복지가 치안이 되는.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을 구분하며 "사회체를 구성하는 출생, 기능, 자리, 이해의 차이들로 정의되는 실재하는 부분들, 실질적인 집단들만을 셈"하는 통치행위를 치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즉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을 구성해내는 원리다. 치안은 억압이나 생명체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을 감안하면, 현대 사회에서 복지제도야말로 치안 원리가 작동하는 핵심적인 기제 중의 하나가 아닌가. 몫을 분배함으로써, 분배자의 위치를 정치로부터 구출해내고, 몫을 분배하는 틀을 만들어냄으로써, '몫 없는 자'를 역시 정치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그러니 박근혜가 문재인 못지않게 열심히 복지를 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지를 둘러싸고 싸울 때 싸움의 대상은 분배가 아니라 분배의 틀 자체여야 할 것. 

 

한편, 공공의 복리와 행복의 증진을 위한 국가의 기능으로 설명되는 복지로부터 출발해보면, 이 시대에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복지란 치안일 뿐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아감벤이 호모사케르를 불러내며 제기한 '벌거벗은 생명'에 복지를 제공할 수 있는 방식의 핵심은 치안일 것이다. 가치 있는 삶, 또는 정치 이전에 '벌거벗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분리해냄으로써 정치를 추방시키는 것이 주권의 작동 방식이라면, '최초의 위법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폭력을 원초적인 법 사실로 정립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 치안 아닌가. 특히나 '안전'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최근 수 년 간 끊임없이 시도되었던 국가의 전략은, 인권침해를 숱하게 발생시키면서도 별 효과가 없는 대책만 쏟아냈다는 점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위치지웠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략을 마련해가야 할 듯하다. 이건 '신자유주의 경찰국가'라는 개념을 통해서 국가권력의 모습을 살폈던 것과는 또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듯하다. 

 

이걸 두고 경찰의 혜안이라고 말하는 건 우습지만, '치안복지'라는 말을 만들어줘서 한 수 배운 느낌이다. '치안복지'에 맞서는 우리의 '정치'는 무엇이어야 할지, 그런 숙제를 받은 셈이군. 숙제검사는 투쟁으로?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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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5 15:17 2013/01/1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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