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지간 인권...?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이 <좌우지간 인권이다>라는 책을 냈다고 한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절대로 서평이 아니고, 나는 책을 한 줄도 못 읽어봤다. 그냥,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이다. '좌우지간 인권'은 인권에 대한 일반적 이해이기도 하다. 

 

인권이 좌우를 넘어서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국제'규범'이 되어버린 인권을 보수주의자들이 부정하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인권' 등의 담론을 통해 인권에 색깔을 입히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문제는, 저 말이 어떤 정치적 또는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활동하면서 고민이 되는 건 특히 두 가지 지점이다. 

 

하나는, 규범으로서의 인권을 말하는 것과 현실을 바꾸는 것 사이의 간극이다. 이를테면, 주거권. 정부는 유엔 사회권위원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에서, 주거권 실현을 위해 열심히 개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실적'을 보고했다. 결국 쟁점은 주거권이 인권이냐보다는, 주거권 실현을 위해서 어떤 행동이 필요하냐다. 물론 개발 사업이 주거권을 어떻게 침해하는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고, 주거권 실현을 위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도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의 실현을 위한 정책과 제도,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제안하는 단계로 내려올수록, 인권은 명확한 기준이 되기보다는 대략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권의 한계이기보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맞추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다만, 이 단계는 좌우를 넘어선 인권이 다시 좌우를 가르는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다른 하나는, 인권이 좌우를 넘어선 '규범' 자체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 는 규범은 좌우를 넘어서지만, 인권은 그 규범 자체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사회 현실에 맞추어 '규범'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 이를테면,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이명박 정권의 반인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누구의, 어떤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으며,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누구의 목소리가 가로막혔고 들리지 않았는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렸는가. 미네르바 사건이나 G20 쥐그림 등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은 좌우를 넘어서지 못한 정치적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체제를 위협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판단, 그들의 정치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목소리, 철거민의 목소리,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인권이 '후퇴'한 것이 아니다. 인권을 억압하는 체제가 스스로 자신을 재구성하는 과정인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공적인 자리에서 들릴 수 없었던 먼 옛날의 체제와, '어떤 여성'의 목소리는 넘쳐나는 지금의 체제가 다르듯. (잠시 딴 얘기지만, 인권의 '후퇴'라는 문제 설정은 위험하다. 되돌려야 할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야 할 인권의 논리와 감성이 있으므로.)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 보수이며, 체제를 끊어내거나 뒤틀거나 뒤집으려는 것이 진보라면, 과연 인권이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다는 것이 가능한 말일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인권의 '중립성'을 강조하고 국가인권위가 정치적 '중립성'을 갖도록 요구하는 것은 현실 정치에서 효과를 갖는 수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체제를 직시하며 당파성을 벼리는 '인권'을 보거나 듣지 못한다면, 그 수사 자체가 스스로 중립을 자처하며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하는 고착을 자초하지 않을까. 적어도 인권운동은, 그래서 중립을 자처할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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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4 11:17 2013/02/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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