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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르게 그이가 겪은 일


제목 : 우리 모르게 그이가 겪은 일
글쓴이 :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어떤 노동자가 어떤 회사를 다녔다.

그 노동자 이름을... 김철수라 하자. 김철수 씨가 뼈 빠지게 일을 했는지, 빈둥빈둥 놀았는지 그건 김철수 씨와 사장의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일을 했다.
그 회사는 여느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점심시간엔 점심 먹고, 드문드문 회식도 있었다. 회식 자리도 별 다를 바 없어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광란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사장도 다른 회사 사장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는 항상 ‘근로자’들에게 잘 해 준다고 생각하는 듯 했고 근무 시간에 마주쳤을 때 고개 숙여 인사라도 하면 인자한 얼굴로 “응~ 철수, 요즘 잘 지내지?”라며 하나마나한 인사말을 건네곤 했다.



사장이 김철수 씨를 불러서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다.
“김철수 씨(김철수 씨는 사장이 이렇게 씨를 붙여 말하면 더 긴장이 됐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지금 김철수 씨 월급... 한 달에 백오십만 원이지? 그 중에서 매달 이십만 원씩을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김철수 씨 퇴사할 때 몰아서 줄게.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사실 김철수 씨가 적금을 들겠어 뭐 하겠어? 그거 다 받으면 술이나 마시면서 써 버릴 거 아냐. 그러니까 매달 이십만 원씩 적금 들었다 치고 그렇게 합시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김철수 씨는 월급을 받아 술 마시며 쓰지 않았다. 물론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사장이 말하는 대로 술이나 마시며 쓰진 않았다. 김철수 씨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매달 백만 원 정도 보내드리고 있는데, 이십만 원을 덜 받으면 시골에 보내는 돈을 줄여야 할지, 자기 생활비를 줄여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고민은 고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사장에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일 이후 마음이 떴는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생활도 힘겨워졌다.
시골에 보내는 돈을 줄일 수 없어서 자기 생활비를 줄였고, 예전에 비해 먹을 것도 줄이고 술도 덜 마시는 데 항상 돈이 부족했다. 이십만 원이 생각보다 큰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서너 달 지내다가 다른 회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는 일이 비슷하고 월급도 비슷하다 했다.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게 있어 그 회사 사람에게 ‘보증금’에 대해 물었다. 그 회사 사람은 피식 웃더니 뭐 그런 게 있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보증금’만 없다면야... 김철수 씨는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사장에게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한다. 웬 일이람? 의외였다.
이야기 끝에 월급하고 ‘보증금’을 달라고 했더니 사장이 갑자기 화를 낸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돈도 받지 못한 채 회사를 나왔다.

속은 쓰리지만 잊고 지냈다. 일 년 정도 지났나? 누가 그런다. 노동부에 진정을 하면 받을 수 있다고.
도움을 받아 진정을 냈다.

노동청에서 사장을 만났는데 대뜸 “싸가지 없는 새끼”란다. 자기가 얼마나 잘해줬는지 아냐고 한다. 회식도 시켜줬단다. 항상 따뜻하게 대했는데 뒤통수친다고 막 욕을 한다.
김철수 씨는 정말 어이가 없다.
‘보증금’으로 묶였던 돈과 회사 나올 때 받지 못한 월급을 달라는 데 그게 싸가지랑 무슨 상관인가? 화가 났다.
도움을 줬던 사람 말이 퇴직금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게 노동자의 권리란다.
퇴직금까지 다 계산해서 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화가 난다.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더 화가 난다. 화가 아주 많이 난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다만 김철수 씨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고 이주노동자입니다.
여러 경우를 섞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고 한 사람이 겪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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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9 03시12분  미디어충청에 올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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