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차라리 승점제를 해라

2010/01/19 12:29

'크루그먼의 경제학’(시그마프레스 2008.) 초반 부분을 보면 ‘유인’(Intensive)이란 단어가 나온다. ‘행동을 변화 시킨 사람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그 어떤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만약 단골서점보다 책값이 10% 정도 싼 인터넷 서점을 알아 그 곳에서 책을 산다면 또는 옷이 선착순 50% 세일이라는 말에 아주머니들이 육탄전을 벌인다면 이건 새로운 유인을 가져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킨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내가 책을 읽고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그런데 왜 갑자기 경제학도가 아닌 베이스볼 오타쿠가 경제 개념을 이야기 하냐고? 오늘 이야기 할 주제인 ‘무승부=패’의 존속에 유인 이야기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있었던 2010년 제 1차 이사회를 앞두고 많은 야구인 들이 주목했던 안건은 대회요강 제 2조(승률계산법)의 개정 여부였다. 작년 승률계산법이 승리경기수를 경기수로 나누는 걸로 개정되었다. 별 거 아닌 거 같았던 계산법의 개정이 나비효과처럼 시즌이 끝난 뒤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았다. 무승부를 0.5로 계산하는 ‘종합계산제’나 무승부를 제외한 경기에 승리수를 나눈 ‘단순 승률제’를 적용했을 경우 공동 1위를 차지했거나 우승을 차지했을 SK와이번스가 2위를 기록하는 일이 발생한 것.

 

이에 많은 이들이 승률계산법의 개정을 원했다. 하지만 이사회 결과는 ‘존속’이었다. KBO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 결정에 대해 ‘승률 계산은 무승부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시행 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현행대로 승리 경기수를 경기수로 나눈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과연 KBO의 대답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일까?

 

야구는 시나리오로 이루어진 드라마가 아니다. 사람이 맘먹는다고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조작논란에서 자유로운 이유도 시청자들이 이런 점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임에 무승부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승부=패’를 존속시켰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논란거리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제도를 1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정하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 제도를 고착화 시키려고? ‘끝장승부 제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존속했다’는 음모론까지 생각하게 한다.

 

2009 시즌 경기 중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6월 25일 SK 와이번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를 봐 볼까? 많은 사람들이 당시 12회 말 김성근감독의 선수교체 자체만 기억하고 있지만 그 날의 속사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그 날 SK 와이번스의 등판 기록을 보자. 선발이던 채병룡 선수가 3이닝 4자책점으로 이른 시기에 강판 당했고 올 시즌 선발로도 뛴 고효준 선수가 3이닝을 던진 채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웅천 선수가 7회 말, 정우람 선수가 8회 말 1이닝씩을 던지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아뿔싸, 상대팀의 마무리인 한기주 선수가 9회 초 동점을 허용한 거 아닌가. 꺼져갔던 승리의 불씨를 다시 지피기 위해 9회 말 마무리 투수 정대현 선수를 등판 시켰고 불펜투수에게는 긴 이닝인 3이닝을 책임지게 했다. 운명의 12회 말.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대현 선수는 11회 즈음에 허리통증을 호소했고 남아있던 윤길현, 이승호 선수도 등판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에 등판한 선수가 바로 최정이다.

[##_1C|XWLGIwRly7.bmp|width="307" height="207" alt=""|_##]

▲ “죄 없는 자는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예수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이 해프닝도 죄 없는 자가 김성근 감독에게 돌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KBO 이사회 멤버들은 김성근 감독에게 뭐라 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 네이버 스포츠 캡처

 

이 날의 상황은 투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선두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A팀이 최하위인 B팀과의 경기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타자를 투수로 세운다면? 그것도 다음 날 또 다른 선두권의 팀인 C팀을 상대한다면 말이다. 과연 우리는 무작정 A팀을 향해 돌을 던져야 할까? 이 경기를 비겨서 얻는 유인이 없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강요도 일종의 폭력이다.

 

‘무승부=패’ 존속 결정에 제일 먼저 문제를 제기한 야구인은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이었다. 이후 ‘야신’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이 "KBO 이사회가 야구 현안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의심스럽고 실망스럽다"라며 이번 결정에 우려를 표했으며 대부분의 감독들도 존속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에 맞서서 사장단의 최고령자인 김응룡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감독이 할 일이 있고 이사회에서 할 일이 있다’ 라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삼성라이온즈 팬 분들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김응룡 사장의 발언은 궤변으로 들린다.(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시라. 내가 좋아했던 첫 팀의 감독이셨다.) 감독에게도 사장에게도 현장은 ‘야구장’이기 때문이다. 김응룡 사장이 ‘야구팬을 위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진심으로 야구팬을 위해 다시 한 번 재고해 주기 바란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도 ‘촌극’이란 단어가 붙는 데 전략적인 선택이라면 얼마나 큰 사단이 나겠는가? KBO 이사회는 촌극이 재발할 수 있는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한 마디로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이사회는 분명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새해의 탁상공론이 우승팀을 바꾼 것처럼 조그만 유인 제공 하나가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KBO가 보도 자료를 통해 밝힌 이유로 ‘무승부=패’를 버리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제 3지대인 승점제를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승을 3점 무승부는 1점 그리고 패배를 0점으로 한다면 승리와 무승부에 차등을 주면서도 무승부를 선택해도 얻을 수 있는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구단 사장님 중 한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한 번 고민해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baseballkids/trackback/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