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번역자에게 1: 원서검토서 작성법

2009/05/27 12:07 편집자–되기

모처럼 문서 폴더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올려놓는다. 작년 봄에 번역가 K선생님 요청으로, 난생 처음 출판 관련 강의를 할 때 만든 강의안. 수강생은 막 번역자 과정을 마친 초보 번역자들... 내용은 "원서검토서 작성법". 불과 6년차이던 내가 이만 한 걸 쓸 능력은 안 되서... 『편집자가 작가에게』(주디 맨델 지음,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1)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요약해서, 거기에 작년에 정리한, '편집자가 동료 편집자를 위해' 작성하는 "원고검토서" 양식과 통합해서 준비한 것이다.

지금 보니까 철저하게 편집자(출판사) 입장에서 번역자에게 이렇게 하면 [자신의 번역력을] 잘 팔 수 있다고 강요하는, 꽤 자본주의 냄새가 많이 담긴 문건이다 싶다. 아무래도 미국 출판계에서 나온 책을 참조하다 보니... 일단 대상이 학술서 번역자들이 아니라 특히 실용서/교양서/문학 등의 영역에 막 발을 들이밀은, 직업 번역가들을 위한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출판을 산업(꼭 돈을 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책에 대한 낭만적인 접근법 위에서 편집자(출판사)와 대화할 때, 본인이 가진 전문성이나 장점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핵심은 놓치고, 분위기만 좋은 대화만 이어지고, 결과물은 없다. 이것은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좀더 프로페셔널한 분위기를 풍기는 법을 알려 주는 일종의 처세술을 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내가 편집자이다 보니, 번역가들보다는 내 동업자들에게 편리한 대로 요구하는, 나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은 접근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편집자를 위한’ 원서검토서 작성법

 

1. 왜 편집자를 위한 원서 검토서인가?
편집자를 당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서검토서는 담당 편집자와 번역자가 미리 하는 프로포절에 해당한다. 편집자는 번역자와 업무상 직접 접촉하는 사람이며, 출판 과정에서는 역자의 안내자이며, 번역자가 최선의 원고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 제대로 된 검토서를 통해 제대로 된 번역을 제공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 주어야 한다. 

1) 출판사에서 직접 의뢰하는 경우 이때는 출판사에서 해당 번역자에게 출간이 결정되면 번역도 의뢰하겠다는 전제가 어느 정도 깔려 있는 경우. 이때는 검토서뿐 아니라 완제품의 시안이라는 느낌으로 번역 원고를 보여줘야 한다. 외부 번역자에게 검토서를 의뢰하는 경우 출판사에서는 시간 절약을 희망한다. 그 부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2) 번역자가 출판사에 직접 출간 제안을 하는 경우 이때는 번역자가 기획까지 하는 경우로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된다. 이 책이 출간되어야 할 이유나 타깃 독자 등에 대해 출판사가 사전에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해당 언어권 출판 정보와 최신 외서 시장에 대한 이해를 갖출 필요가 있다.

 

2. 이상적인 검토서의 내용과 형식
편집자는 늘 텍스트에 치어 사는 사람이다. 샘플 번역을 제외한 검토서는 되도록 A4 2장 이내로 제한하는 편이 좋다. 간결하게 작성된 편지, 요약, 목차, 본문 가운데 한 챕터를 제출하면 아주 빠른 응답을 받을 수 있다. 편집자의 업무를 훨씬 쉽게 만들어 준다.
원서검토서는 어느 정도 동일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이 책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도, 상상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검토서를 작성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편집자들이 원고를 검토할 때 상상할 수 있도록 의심할 여지없는 충분한 자료를 갖추어야 한다.

— 도서 제목, 원서 표지, 출판사, 판형, 정가, 페이지 수, 일러스트 유무와 컷수 : 책의 내용과 출판 의의뿐 아니라 이 도서의 장정에 대한 세부 사항까지 알려주는 편이 좋다. 이 책의 판형과 장정 방식뿐 아니라, 페이지 수(서양어는 1.5배, 일본어는 1배, 중국어는 약 2배), 사진 수, 원색 및 흑백 사진의 수효까지 알게 해주면 출간 여부에 대해 편집자가 좀더 정확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편집자는 이 책을 출판하는 데 드는 비용을 산출하는 일도 한다. 출판사와 저/역자 사이의 비즈니스는 그 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이 책이 갖게 될 상업성에 달려 있다.
— 개념에 대한 요약: 새롭고 참신한 요소가 발견되어야 한다. 독자에게 친숙하지 않은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최초의 독자로서 편집자가 거기에 열광하고 몰입해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위트가 있고 기발하며 재미있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 | 지극히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 | 독특한 것, 과거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것,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아이디어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제시.
— 하이 콘셉트: 도서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확신을 주어야 한다.
— 포지셔닝과 유사 도서 : 인문/철학 등의 모호한 분야가 아니라 유사 도서를 조사해서 정확한 세부 분야를 제시하라.
— 목차의 흥미로운 번역: 주제를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 체제에 대한 분석도 유용하다. 목차뿐 아니라 각 장별로 구성을 설명한다.
— 장점과 단점 :장점만 나열하지 마라. 순수한 장점은 뒤집어 생각하면 취약점이 될 수도 있다. 단점을 정확하게 적고, 할 수 있다면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 샘플 번역을 해야 한다면, 제일 재미있는 부분을 골라 한 챕터를 전부 한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내용이 왜 중요한지. 그 분야에 다른 책들이 나와 있는지, 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장으로 고르라. 발췌번역으로는 구성의 맛을 볼 수 없다.
— 번역 원고를 언제 입수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정보, 즉 스케줄.

 

3. 검토서의 작성
편집자들은 자주 문장 호응이 일치하지 않거나 오자가 있는 제안서를 받는다. 그러한 관심의 결핍은 번역자의 기본적인 문장 감각을 신뢰하기 힘들게 한다. 제안서는 지적으로 우아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검토서는 그 책의 이력서다. 조심스럽게 작성하라. 요점을 설명하고, 장황하게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 책과 저자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모은다. 되도록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해당 출판사 홈페이지 | 아마존 서평과 등수 | 퍼블리셔스 위클리 | 저자 홈페이지 |구글 검색으로 학술지 서평이나 저자 인터뷰 등 확인 | 해당 지역 대중매체 등, 추천사
— 검토서를 보내는 출판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항상 유익하다. 어떤 장르와 판형의 책을 출판하며, 대표도서(명성, 판매 부수)가 무엇인지 살펴보라. 단순한 감성에 의지한 상상보다 더욱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출판사의 지향과 근접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출판사의 출판 내용과 그 출판사에 어떤 책이 가장 적합한 것인지에 더욱 초점을 맞춘 제안서일수록 출간 가능성을 높인다.
— 자기 자신의 언어로, 쉬운 용어를 사용하되, 적절한 품위를 갖추어서 작성해야 한다. 편집자들은 대체로 우리말에 대한 강박이 있다. 되도록 한국어로 쓰라.
— 감상보다는 팩트 중심으로 서술하되, 설득을 위한 글임을 가정해서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

 

4. 출간 여부 결정
출판사의 편집부는 보통 매주 편집회의를 한다. 편집자가 그 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즉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나 관심을 끄는 것이라면 아주 더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실제로는 작업 방식에 따라 어디서든지 신속하게 처리되기도 하고 아무 오래 걸려서 처리되기도 한다. 적어도 2개월.

— 그 책을 좋아하고 그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고 좋은 도서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편집자가 있는가?
— 그 책에 시장성이 있는가? 책이 나오기를 원하는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는가?
— 그 책을 독자들이 기분 좋게 지불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가격으로 출판할 수 있는가?
— 난해한 주제이거나 국제적인 독자층을 확보할 수 없다면 출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이 영어판으론 판매 부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그것이 매력이 되어 출판할 수도 있다.
— 시장성이 있는지, 제작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지, 정가 책정 문제(그림이 많은 책의 경우 도판 저작권에 대한 지불 문제나 4도 분해 문제 등), 기타의 출판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리서치를 더 해야 한다면, 기간은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5. 함께 일하는 번역가가 되라.
아이디어와 전문성은 저/역자의 것이며, 편집자는 그 판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복잡한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모두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 한 분야의 전문성을 획득하라.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라.
— 한 번에 여러 곳에 제안서를 보내지 말라. 책은 한 사람의 독자를 상정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기획안은 한 출판사를 상정하라. 그 출판사의 성격에 맞춘 출간제안서를 보내라.
— 도서란 잘 만들어지기 위해 제작하는 데 많은 기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편집자는 한꺼번에 여러 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 결국 편집자는 출판 계획이 잡혀 있고, 해당 도서에 대한 작업을 착수할 때에야 개별 도서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 투여하게 된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 편집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가는 권위 있는 본문을 창작하고 생동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전문가인 저널리스트가 완벽한 작가다. 저자뿐 아니라 역자도 해당 주제에 대해 박식할 뿐 아니라 열정적이고, 열광적이어야 한다. 이 주제에 완전히 전념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 본인의 아이디어만 고집하며, 본문 내용이나 디자인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제안을 경청하지 않으려는 저/역자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 협력하면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 번역 이외에 무엇을 더 제공할 수 있을지 여부를 고민하라. 서평, 저자와의 협력 등 모든 것이 유용하다.
— 전문가적인 태도는 책의 집필, 편집, 제작, 홍보, 판매의 과정에 대한 지식에서 나온다. 저/역자는 출판업계의 상황에서 그 책의 출판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 통상적인 계약 방식에 관해(그것이 불리하더라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 대신 계약에 관해 까다롭게 굴지는 말라. 편집자 혹은 출판사를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추정하고 의심하는 경우, 그 저/역자 역시 그렇게 보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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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12:07 2009/05/2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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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적린  2009/05/27 15: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이거 좋네요! 감사. ^^
  2. noi  2009/05/28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이님 글을 읽으니 처음 번역일을 시작할 때 출판사에 보낼 검토서를 작성하며 요령을 몰라 진땀 빼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때 이 글을 봤더라면 훨씬 수월했을텐데..
    앞으로도 잘 참고하겠습니다^_^b
    • 강이  2009/05/28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낯선 사람(편집자/출판사)과 처음 만나 일하는 게 쉽지 않죠^ ^. 그래도 noi님이 책을 내신 M출판사 C대표는 직관과 뚝심을 갖춘 편집자시니까(4년 전인가 제 블로그에서 M선배라 불리는 양반 댁에서 연 연말파티에서 뵌 적이 있죠), 앞으로도 두 분이서 또 좋은 작업으로 좋은 결과물 내놓으시리라 기대합니다.^ ^
  3. EM  2009/05/28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강이님은 제가 아는 이들 중에서 "프로페셔널"이란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시란 말씀이죠... ㅎㅎ (진짜랍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이님께서 쓰시는 이니셜들도 뭔가 더 비밀스런 냄새를 풍긴단 말씀이죠... (쓰잘데 없는 소리..;;)
    • 강이  2009/05/28 2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로페션...이 원래 신 앞에서pro 신앙고백하고fession 직업 종교인으로 살겠다... 뭐 이런 데서 나온 말이라니, 자기 직업을 종교화하면 다들 좀 이렇게 되는 셈이죠. EM님도 프로페셔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자시잖아요.

      1. 마르크스의 이론을 믿는다고 커밍아웃을 했음
      2. 그걸 진지하게 공부해서 믿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까지 하려고 함
      3. 혼자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다 보면, 뭐 궁금한 것도 생기고, 그래서 편지도 주고받고, 글도 좀 쓰다 보면,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
      4. 이러고 저러다 보면,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밥은 먹고 살게 됨.
      이게 신학자와 거의 같은 거잖아요. 아시다시피, 콩트가 사회과학을 시작했을 때는 "종교를 대치하려는 기획"인 측면도 있었구요;;

      (왜 갑자기 화들짝 놀라, 이리 긴 댓글을 달았냐만... 오늘 회사에서 수박 먹다가 G마켓에서 수박 사먹는 법을 설명해 줬더니... 출근한 지 3주일 된 신입후배가 그것조차 프로페셔널...한 어조로 말한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또 내가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대단한 것처럼 포장해서 늘어 놓았군 하는 뜨끔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사실은 삶 자체가 처음 살아보는 거라 매 순간 아마추어 기분을 못 벗어나는 게 제 괴로움이거늘.
      여하튼 프로페셔널...이라는 뜻에는 매춘이란 뜻도 있듯이 진심 없는 판매 행위도 들어 있고, 프로페션한 사람...이라는 말에서 프로페서가 나와서 전문 지식인 혹은 지식을 파는 자...라는 뜻도 들어 있으니... 모두 편집자의 일과 멀지는 않습니다)
    • EM  2009/05/29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로페셔(널)에 그런 심오한 뜻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역시 프로페셔널다우시다는..^^) 하지만 저는 "프로페셔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자"라고 하긴 좀 어렵죠. 아무래도 (아직은) 그걸로 (밥을 먹지도 않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요. 아닌게아니라 요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는 "취미생활"이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그중 하나가, 실제로 (이쪽 동네의) 많은 기성학자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서죠. ㅎㅎ
  4. s  2013/06/22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5. 곰탱이  2015/04/08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퍼갈게요.^^ 저에게 정말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