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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 학력 위조 논란, 공인에 대한 이중적 잣대

1.

공인이란 공적 위치에 놓인 사람을 말한다.
공적 위치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가령 나는 시상식에서 사회비판적인 메세지를 던지는 연예인이나,
악동처럼 과도한 행동을 일삼는 스포츠 선수에게 관대한 편이다.
관대하다는 말 자체가 좀 웃긴데, 그냥 그 선수의 개성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 사람과 생각이 다를 수는 있고 당연히 생각의 차이에 따라 호감/비호감이 생기지만,
그 사람이 무언가를 표현했다는 사실 자체로 '공인으로서 부적절할 행동'을 했다는 비판은 하지 않는다.
여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표현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사람이면 누구나 존중받아야할)
둘째는 그들에게 과도한 공인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대중들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이런 타인에 대한 병적 관심은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해롭기 때문이다.

상대를 공인의 위치에 올려놓고 사소한 부분까지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은 과도한 간섭이다.
한 편으로 타인을 행위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열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때로는 비열하다.
얼마 전 김새롬 씨가 싸이월들에 올린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얼마나 병적 수준까지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지나친  열등감(박탈감), 그래서 또 그에 비례하는 우월감이 타인을 통해 과도하게 투사될 때,
그것은 그냥 폭력이다.


2.

가장 공적 성격이 강한 직업은 정치인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부여받는 공적 성격이란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른데,
아주 도식화시키면 인기가 많을수록 공적 성격도 강해진다.
인기가 많을수록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거리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공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가장 공적 성격이 강한 정치인에게 관대하고,
상대적으로 공적 성격이 약한 연예인에게 과도하게 열폭하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보면
조금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가령 타블로를 보자.
타블로의 학력은 위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대중적 분노의 대상이 왜 타블로인가 하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타블로 논란이 한참일 때 진행된 국무총리/장관/경찰총장/국세청장 내정자들의 청문회를 보자.
극단적 절망+분노=무기력 그 자체.
위장전입은 이미 필수 코스가 되었고 학력 위조, 논문 조작/표절  역시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대체로 부동산 관련 비리들이 덕지덕지 붙는데
상류층이 어디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부동산+교육,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 상류층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그들이 아주 쉽게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온갖 불법 수단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으며, 양심의 동요 따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더 나아가 진심으로 자신들이 한국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으며 심지어 이바지 하고 있다는
그 오만과 위선. 강력한 자기최면이 체화되어 왠만한 충격에는 다치지 않는다.


3.

인터넷이 일상화되고, 케이블 방송으로 연예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채널이 늘어가면서
연예인들의 사소한 생활 하나 하나가 모두 기사거리가 되고 있다.
O양 비디오 사건 따위의 가쉽거리를 주도하던 스포츠 신문들이 생산해내던 것과는
수준이 완전 다른 차원에서 연예인들은 거의 모든 것이 노출되고 있다.
물론 모든 사회적 현상이 일방적인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연예인들은 이런 대중의 과도한 관심을 즐기기도 하며, 때로는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온갖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지금,
역설적으로 리얼과 가상의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 모호하다.
이제 연예인의 삶 역시 내 삶과 강력하게 링크되어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리얼인지 불분명하다.
여기엔 분명 순기능도 있다. 팬덤이라는 독특한 사회 현상 역시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역시 과도하다.
정치인에게 반복되는 절망감은 무기력감으로 바뀌었다.
우습게도 사람들은 가장 더러운 부패집단을 외면한 채,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분노를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종종 연예인들은 과도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만신창이가 되고 때로는 인생 자체가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연예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지난 10년간 생겨난 현상이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계속되는 연예인 자살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사회는 피곤하다. 모든 것을 과도하게 요구한다.
돈과 일과 성공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어떤 이에게는 그 열정의 크기 만큼의 절망으로 바뀐다.
극단적인 경쟁은 곧 으깨질것처럼 불안불안하게 만들고
일상적인 스트레스, 열등감, 불안감, 분노, 박탈감을 극복할 통로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분노를 투사할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나는 타블로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불안하다.
이것은 불안한 우리 삶의 또 다른 반영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오버랩핑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난의 가장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정당한 비난을 돌리자.
정당한 방향으로 분노를 표출해야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무엇보다 사회가 제대로 굴러간다. 그 싸움을 외면한 채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사회적 전쟁을 벌이는 것,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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