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세시봉, 2탄

남십자성님의 [세시봉, 오독에 기초한 비판 : 과연 누가 편협한가?] 에 관련된 글.

 

이렇게 말을 주고 받는 게 오랜만이다.

토론을 한다고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고 누군가 의견을 바꾸고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고 그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지식과 논리를 사용한다.

토론에서 최선은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열심히 듣는 것, 그리고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꾸미거나 비틀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듣고, 잘 인정할 수 있다면 이미 조금은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세시봉을 다 보게 되었고 굉장히 재밌었다. 언론에서도 호평 일색이었다.

이 때 김선주 씨와 김진숙 씨의 글이 나왔다. 세시봉을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의 언어, 충분히

예상 가능했고 어떤 부분들은 공감이 가는 지적들도 있다. 

 

그런데 남십자성님이 지적한 대로 많은 블로거들이 김선주 씨 글에 불쾌함을 표현했다.

나 역시 불쾌감까지는 아니어도 글을 읽고 난 후 찝찝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할까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자기 감정이 한마디 말로 재단당하는 느낌이 불편한거다.

나 역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세시봉에 열광하면 좀 철없는 애 같은.

(아 물론 철없는 애라는 표현을 들은 적은 없지만 느낌이 그렇다고...)

 

김선주씨가 '타인의 취향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생각없이 세시봉에 열광하는 다수의 감성을 혐오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러나 김선주 씨 글에 그런 말이 없다고 오독이라고 말하는 건 좀 그렇다.

내 글에서 표현에 과장이 있는 건 인정한다.

남십자성님 글 앞부분은 김선주 씨를 옹호하는 내용인데 그 과정에서 '오독'이란 말이 여러번

등장한다.(이 말 들으면 굉장히 기분이 안 좋다. 그래도 냉정을 되찾고...)

내 글이 단어 하나 하나 분해돼서 타인의 글을 오독했다는 결론을 보고 있자면

기자들이 자신의 입장에 맞게 글을 재조합하는 과정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서로 입장에 차이가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글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2.

남십자성님의 글 제목은 '세시봉, 오독에 기초한 비판 : 과연 누가 편협한가?'이다.

제목만으로도 전해져오는 어떤 느낌이 있다. 첨엔 대충 훑었는데 내 글에 대한 언급도 나와서

정독했다.

남십자성님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안되냐고 한다. 아니 된다. 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럴 생각은 없다. 항상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해석의 다양성을 말하고 싶었다. 김선주 씨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걸 피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불편함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니까. 모든 의견에 동일한 무게를 두자는 말이 아니다.

그 이유는 변화의 가능성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다.

내 글은 한겨레든, 시사인이든, 김선주 씨든,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든...

그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글이다. 안타까움이 기본 감성이다. 옹호하기 위해 비판한다.

대상은 너무 명확하다.

그런데 비판의 대상이 있기나 한거냐고 지적은 또 뭔 뜸금없는 이야기인지...뭘 비판하려는건지 다 알면서...

 

남십자성 님은 홍대 상황이 여러 가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 조차도 한겨레나 시사인 같은

진보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해주었다.

우선 그런 상황은 김여진씨 블로그를 통해서 알았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한겨레나 시사인이 늘 그렇게 날카로운 건 아니다. 대체로는 그런 편이지만 조금 아쉬운 거고.

좋아하니까 아쉽기도 한거다. 좋아하니까 비판할 수도 있다. 

남십자성님이 진보 매체를 방어하려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굳이 그런 매체의 소중함까지

각인시켜줄 필요는 없다. 한겨레나 시사인 정기구독한지 몇 년 되었고 애정은 차고 넘치니까.

병역거부로 감옥까지 다녀온 처지라 그런 매체의 소중함은 누구보다 절절한 편이다.

(근데 시사인은 정말 읽을 게 별로 없다. 진짜 편파적 애정이라고 밖에는...)

 

최근에 한겨레가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맥락이 있다.

한겨레는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언론이

이명박 정부보다 노무현 정부가 국방비를 더 썼고, 무기 선진화에 애를 썼다고 말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집요하게 한나라당의 약점을 파고 드는 것. 한겨레의 기본 컨셉이다.

한나라당 집권 반대라는 강력한 슬로건이 있으니 사태분석이 단선적이되고 풍부한 언어들이 실종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세시봉 사태를 바라보는 그런 단순함이다.

분석의 도구를 계급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계급적 관점(혹은 저항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풍요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그러나 계급적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다른 얘기다.

음악이나 영화같은 문화적 현상을 한가지 관점으로 가치를 매기려 하는 건 더욱 조심스럽다.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게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 그에 뒤따르는 김사과씨 글로 관심이 이어진다.)

저항의 측면에서 본다 해도 그런 해석은 오히려 잠재적 저항의 가능성들마저 반감으로 돌려세우는

효과를 가져온다. 김선주 씨와 마찬가지로 나는 무엇이 저항하게 만드는가에 관심이 많다.

늘 이 얘기를 너무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고민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피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동시에 그걸 극복하기 위해 우월감도 생기고 말을 거는 방식은 늘 꾸짖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세시봉에 드나들었지만...'이라고 운을 떼는건 처음부터 대뜸 섭섭하다고 말하기뭐해서 그런

거겠지만 김선주 씨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이 정도가 내가 글을 쓴 이유고 하고 싶은 말의 전부다.

안타까움과 답답함 속에 갈등하면서도 비판의 대상을 비판함으로써 옹호하고자 하는,

그래서 늘 자기번뇌의 연속이기도 하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