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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님

최근, 아주아주 우연하게 고3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지하철 역에서 걷고 있었는데 저기에 익숙한 사람이 서 계셨다. 자세히 보니 고3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인사를 하고 얘기를 했는데 다행히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래서 같이 열차를 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창들 이야기, 요즘 사는 이야기 등등 말이다. 나는 선생님께 내가 서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님은 놀라셨고, 나는 어떻게든 이러한 충격을 줄여주고자 역사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이런 짓을 하였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저 선생님의 기억 속에는 고고학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 나부랭이로 기억하실 테니 말이다.

 

선생님은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계셨다. 가족들이 캐나다에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굴도 많이 늙으신 듯 보였다. 예전의 날카로운 핸섬함은 없어지고, 중년의 푸근함이 더 느껴졌다. 그만큼 나도 늙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생님은, 절간에 다니면서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교생실습도 왜 오지 않았냐고 하셨다. 거기에 뭐라 대답할 것인가.

 

그때는 대충 이야기하고 넘어갔지만, 왜 그랬겠는가? 나는 고등학교가 매우 싫었다. 씨발이었다. 그나마 고3 담임선생님은 인간적으로 다가왔기에 이렇게 아는 척을 했지, 다른 선생이었다면 쌩 깠을 것이다. 예전 수학 선생이 지금 교장이라는 말도 했었지만 사실 나는 그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는다. 선생님 앞에서는 '예전 수학선생님이 교장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라고 했지만 솔직한 말로는 '예전 수학 선생같은 개자식이 교장이 되었다니 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관이군요.'라고 하고 싶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강압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훌륭하신 선생님이 계셨지만 내 모교는 그런 선생님의 학교는 아니었다. 씨발 선생들의 학교였고, 그래서 부당한 일도 많이 당하였다. 여러가지 일들이 생각난다. 교련 씨발 이었는데, 그 자식이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열받아서 누가 그랬냐고 각 반 돌아가면서 단체 기합을 주었었다. 나는 열받아서 기합 받으면서 일부러 '끙 끙 '소리를 냈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옆 친구가 그런 걸로 씨발이 잘못 보고, 그 친구를 마구 팼었다. ;;;; 나중에 그 친구는 '내가 그랬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건 내가 한 것이다. (미안하다 친구야)

 

 언제는 추운 겨울날 외투를 입고 학교를 등교했었는데 원빵이라는 개씹탱자지새끼가 호통을 치면서 외투를 벗고 다시 교문에서 들어오라고 야단을 쳤었다. 그때 씨발 존나게 열받았었다.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죽이고 싶다. 그 씨발은 음악이었는데 음악시간엔 노래를 부른게 아니라, 주문을 외웠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음악을 음악으로 배우지 않고, 주문으로 배웠다.

 

그 외 많다. 얻어 맞았던 수많은 일은 뭐 그렇다 치고, 특별활동 미술부를 탈퇴하는 것이 힘들었던 기억, 쳐 맞을 때의 기억, 너무나 가혹한 요구를 들어야 했던 주번시절, 야자시간의 공포의 시간 등등이 말이다.  뭐 당시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청소년의 쾌활함과 친구간의 우정이었지, 그게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탈락했을 것이다. 나 뿐이랴, 다들 그렇다. 하니 이런 넋두리를 해봤자 나만 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엄살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딩시절 나는 그저 선생들의 밥이었고, 선생들이 무서웠고, 그냥 아무 특징 없이 선생들 눈에 띄이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다가 고3시절에 교무실에 찾아갔을 때, 의외로 다른 선생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기도 했었다. 처음에 좀 무서웠다. 아니 왜이래? 난 그냥 특징없이 묻혀 가려 했는데...;;;;

 

물론 그렇다고 고딩 시절이 암흑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재밌는 선생도 있었고, 즐거운 친구와의 놀이도 있었고, 추억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약간의 비정상적인 생활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담임 선생님은 언제 한번 찾아오라고, 술이나 한번 먹자고 이야기하셨다. 꼭 연락하라고 하신다. 하지만 내가 과연 연락을 할까? 그 곳에 찾아가기나 할까? 나 자신도 궁금하다. 지금은 아예 그때 아는 척을 하지 말껄이라는 생각도 한다. 다시 그 피의 장소로 찾아간다면 예전의 기억이 다시 나타날 것 같다. 그 시절의 씨발들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곳 말이다.

 

아마도 내가 대학에 와서 집회를 나가게 된 것도 이런 생활에 대한 반항심이 아니었을까, 전에 없었던 반골기질이 생겨난 것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고딩 시절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실컷 봐왔고, 뭘 닮아야 하고 뭘 배척해야 하는지 확연히 체화시키면서 당하지 말고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에 맞는 책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한 시기였다.

 

대학에 와서야 나는 냉소하고 웃는 법,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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