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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2
    북한 - 변화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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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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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 대책

 

 

 

 

 극동의 한 서생이 갑자기 한참 전 한양의 보성대학교에서 있었던 유생 김예슬 선언이 생각이 나 이에 따르는 생각을 잠깐 풀어놓고자 한다.

 

선언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어느 일각에서도 잘 먹고, 잘 살고, 다스린다는 위정자 중에서 이 일을 언급하는 선비가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 보성대학교의 총장이라는 자는 자신의 대학교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음에도 히히덕거리며 '보성학'이라는 수업을 만들어 지네 학교 자랑에 열을 올리지 않나, 연희대학교에 가서 학위 쪼가리 하나 받고 역시 헤헤 거리니 이게 정말 위민위덕의 위정자라고 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의 교육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학문을 닦음에 이미 함양과 성찰은 물 건너 갔고, 자구 하나하나에 열을 올려 이것을 빌미로 과거급제나 입신양명에 이용만 하려 하니 이러한 세태가 이미 각 대학교에 찌들고 찌들었다. 물론 세상이 바뀌어 밥을 곯아가며 글을 읽는 선비는 이제 세상에서 존경치 아니하며, 글을 읽는 선비도 손수 농사를 짓고, 물건을 팔아 사대강 육대주를 오고가는 시대이니 만큼, 실사구시의 학문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법인 것은 사실일지어다.

 

허나 그것이 어느 덧, 한 사람의 인성수양의 시간마저 빼앗을 정도로 광풍처럼 몰아쳐 정신이 없을 정도이니, 사람이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조용한 시기도 있어야 하고, 장마처럼 비가 내리고 폭풍도 치는 시절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향교에서 좋은 대학에 가기위해서 매일매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생활을 해오던 향교의 도령들이 이제 대학에 와서는 또다시 폭풍우치는 삶을 살아야 하니 이것이 인간인가.

 

양학을 배우는 분위기에 맞춰 누구는 이를 '스펙쌓기'라고 말하기도 하거니와, 대학의 등록비는 계속 올라 이미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는 옛말은 소 값보다 비싼 등록비때문에 자취를 감추었으며, 저 사대강 육대주를 넘나들며 물건을 파는 무슨무슨 상사, 무슨무슨 유통 같은 대기업들은 자꾸만 자꾸만 더더 경쟁하고 싸우라고만 하면서 물건을 팔고 남은 이문은 자기가 다 가지고, 직원은 줄이고 이를 다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니 족벌재벌들의 양심이 이와 같다. 그러면서 '아!~ 이 나라의 교육은 어찌 이리 실력없는 유생들만 양산하는가' 한다.

 

경쟁을 시키려면 그에 따르는 논공행상이 주어져야 하며, 우리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감을 심어줘야 할 위정자와 가진 자들일 진대, 이들은 그런 희망도 하나하나 제거해가면서 오호라~ 아방(我邦)의 경제가 심히 위험하도다~! 하면서 꽹과리를 치고 징과 북을 치며 엄살을 떨면서 오히려 백성들과 조정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세태에 문제점을 가지고 한 유생이 한 장의 격문을 붙여 '나는 이러한 대학은 관두려하노라'라고 말한 것은 그 용기 하나로도 강골의 기상이요, 조선 선비의 자랑이다.

 

이를 두고 어느 유생은 '결국 패배자의 한탄이 아니련가'하고 옷고름을 떨치며 비웃고, '이미 황국을 비롯하여 경제가 위기임은 삼척동자가 아는 사실인대, 어찌 복지국가로 회귀하려는고'하면서 비판하는 유생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그 유생도 알마따나 세상이 이리 힘들어지는 것이 사실일진대 언제까지 이를 자신의 탓으로 두리오.

 

극동의 서생이 분노하는 것은 이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모른척하며 계속 하던대로 사는 위정자놈들이다. 보성대학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총장은 자중하며, 대학의 훈장들도 신독해야 할 진대, 그런일이 일어난건지 아닌지 아무 상관도 않고 어찌 민낯으로 유생들을 만난단 말인가.

 

저 조선왕조에서는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라도 성균관 유생과 대간의 비판을 받으면 설사 그것이 억울할 지라도 궁궐에 나아가지 않고 자택에 머무르며 근신하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허나 근간의 관리들은 고개를 뻣뻣히 내들고 이리 허허 저리 헤헤 하면서 풍악을 울리며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사진만 찍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제 와서 주상께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상생해야 한다 말씀하시고, 나라의 근간은 '公正' 두 글자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시었으며, 못 사는 백성들을 위한다며 여러가지 상책을 말씀하시고계시나 극동의 선비가 보기에 그것은 아직 수박 겉핥기요, 언발에 오줌누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사, 농, 공, 상의 비정규화를 타개할 근본적 대책은 보이지 않으며, 대학의 올라가는 등록비를 감면할 길은 근정전에서 논의조차 안 되고 있으며, 먹고 살기 힘들어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백성들에게 기껏해야 한달에 10만원 정도 지원하는 것이 고작이다.

 

전하. 그런 정책은 의적 몇 사람을 각 마을 마다 배치하면서 자네가 이 마을을 풍요롭게 하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대저 고려가 망한 것은 불교의 병폐와 귀족의 토지겸병을 막지 못하고 왕조는 이를 임시방편으로 막으려 한데서 비롯되었으며 결국 태조대왕이 사대부와 손을 잡고 이를 근본적으로 고치시었습니다.

 

조선왕조가 결국 망한 것은 사대부의 부패와 사대당의 치졸한 싸움에 휘몰려 백성을 돌보지 않고 과거는 특채로 얼룩지고, 양반은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고 뜻 있는 선비들이 조정을 등졌기 때문이옵니다. 이를 두고 왕이 눈물을 흘리며 '과인의 반찬은 세 종류를 넘지 않게 하고, 옷은 기워 입으며, 무리한 잡역에 백성이 동원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고 말하였지만 그것이 어찌 근본적인 상책이었겠사옵니까.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은 작금의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을 상고하는 일이옵니다. 전하, 당파에 가리지 않고 널리 선비들의 뜻을 묻고 의정부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며 백성들의 뜻을 헤아려 이 힘든 세상을 백성들이 참고 견딜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지금 백성들은 바람불고 폭풍우치는 거리에 홀로 남겨진 것과 같으니 이들은 지금 주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주상전하를 외면하고 전하를 욕하는 자를 바라볼 것이요, 나라가 살기를 바라지 않고 죽기를 바랄 것이옵니다.

신이 극동의 한 서생일지나 죽기를 각오하고 상소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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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그렇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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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생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름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레벨 : 100(정예)

 종족 : 게르만 (비유대)

 

대중적인 교양의 세계에서 헤겔은 더이상 읽히지 않는다. 아니 읽혀지는 것이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사상은 어렵고, 이제 유행도 많이 지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양의 세계에서는 아마도 현대 프랑스 철학자나 정신분석과 같은 심리학서가 유행이 아닌가 생각한다. 헤겔은 이제 한국에서도 퇴행길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헤겔 철학에 대한 차분한 반성이 가능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광신적인 찬사와 혐오적인 경멸을 떠나서 헤겔 철학의 공과 사를 차분히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헤겔은 하나의 방법만을 가지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였던 철학자인 것 같다. 그 방법이 바로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모든 것은 모순에 부딪쳐 이것을 끊임없이 극복, 지양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중에서 자기 자신은 새롭게 변화한다. 아주 단순한 원리이지만 헤겔은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다.

 

헤겔의 철학은 결국 변증법 하나를 가지고 이것이 어떻게 모순에 부딪쳐 극복지양하면서 발전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변증법을 겪는 주체는 바로 '정신'이다. 이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은 '인간정신'이라는 말처럼 우리 인간의 정신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합된 정신, 공동체적 정신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교실에서 나타나는 반 특유의 분위기, 아우라, 집단적 목적의식, 다른 반이나 학교에 대한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정신이다. 물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지, 헤겔의 정신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논의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헤겔 스스로도 정신에 대하여 신비주의, 종교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서는 우리의 단순한 의식이 그러한 공동체적 정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물론 그 세세한 변증법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헤겔이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헤겔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 근대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정신(민족정신이건 세계정신이건 시대정신이건)이 나타나기까지 지난한 의식의 변증법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하나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젼을 켜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투표도 하고 사회를 까기도 하고 직장에 출근하여 일하는 것은 수많은 의식의 단계가 합쳐서 도달된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말이다. 그 시스템을 헤겔은 '절대정신', 이 한마디로 압축한다. 따라서 이 세계는 과거의 모순이 축적된 하나의 필연이다.

 

그 변증법은 이렇게 인간학의 분야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논리학이라고 하는 헤겔의 저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 개념론, 본질론 등의 추상적인 개념에서의 변증법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은 정신현상학과 방식이 똑 같다. 하지만 이때는 '정신'이라는 말보다는 '이념'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논리학은 쉽게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을 함축한 형이상학 저서이다. 마치 동양의 세계관이 음과 양이 있고 음양의 정동에 의해서 오행이 탄생하고 오행으로부터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이치로 설명되는 것처럼, 헤겔의 형이사학에서는 기본적인 존재의 영역에서도 변증법이 일관되게 통용된다. 존재와 무를 거쳐 생성이 산출되고 이로부터 현존재가 나타나며 또 계속 모순에 부딪치며 새로운 개념에 도달한다. 논리학은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논리 즉, 인과성, 가능성, 필연성,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의 정의, 양과 질이라는 개념 등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게 아니라 변증법적인 자기 모순을 거쳐서 탄생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A이면 B이다'라고 말했을 때에도 사실은 그 안에 엄청난 양의 모순과 그 모순의 충돌과 분열과 극복, 지양, 통일의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 추상적 개념의 발전사이기 때문에 헤겔의 입장을 선뜻 이해하기는 힘들다. 추상적 개념이 발전하는 변증법을 다루는 것이기에 헤겔의 자의적인 설정으로 보이는 것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철학도 있다. 이것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변증법적인 모순의 지양과 발전이 이어진다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자연은 외타존재의 영역, 즉 우리 밖에 객관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영역이기에, 논리학 분야처럼 헤겔이 이리저리 썰을 풀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부족하다. 헤겔은 자신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연의 영역에서 어떻게 변증법적 모순이 적용되는지를 다시 보여주는 재구성 작업에 착수한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학적인 작업에 변증법을 덧씌워 자연에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대한 변증법적 파악. 이것이 자연철학의 내용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 헤겔은 논리학의 방식에서처럼 단순한 공간,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운동과 물질 개념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역학, 물리학, 유기학 등으로 나아간다.

 

헤겔의 자연철학체계는 자연과학의 자연 탐구 방식이 아니라, 변증법적 시각에 따라서 자연의 세계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의 정신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넘어서 정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데에 목적이 있다. 자연 외부에 대한 정신 혹은 이념이 발전하여 결국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정신(정신현상학)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신의 체계에 자연철학을 맞추려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현대 우리의 자연과학적 상식에는 맞지 않는 서술이 곳곳에 보인다. 이것은 헤겔이 살았던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전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헤겔의 자연철학의 방법 자체가 관념적인 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러한 시각에서 뉴턴식의 기계적 자연관을 비판하지만 뉴턴의 자연과학의 엄청난 실용성에 밀려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 한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상대성 이론이후 새로운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변증법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통일로서의 물질을 바라본 것과 아인슈타인의 4차원 시공간의 유사성, 유기체적 자연관이 현대 생태학적 자연관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 등이 새롭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사실 변증법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만들어낸 철학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변화 혹은 역사라는 개념을 철학의 영역, 진리의 영역에 처음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라고 하는 하나의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변화하는 사회, 변화하는 진리관, 역동적인 민주주의, 변천하는 시대 정신 등 근대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여 우리는 헤겔에게 '근대철학의 완성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모든 것은 모순에 부딪쳐 변한다는 것, 지금의 진리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이제 우리시대에는 상식이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막는다든가, 사회가 말세임을 외치며 보수적으로 대응하였지만, 근대 사회의 특징은 이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 이것이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논의하고 연구한다. 헤겔이 말하 듯, 절대정신의 단계에 다다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단계를 한 눈에 파악하고 이것이 모든 변화의 과정이었음을 인식한다. 이 절대정신은 곧 근대의 정신에 다름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이른바 '국가정체성'을 운운하며 사회의 변화상을 탓하거나 낡은 세계관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직 정신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근대인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헤겔은 근대를 준비하고 그러한 근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마지막 근대 이전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후 니체가 등장하면서 근대 비판의 포문을 열면서 현대철학은 시작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재해석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헤겔 좌파의 입장에서 근대 사회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떠오른 사회주의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였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후 20세기 내내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대철학이 헤겔이라는 큰 산을 넘어뜨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서양철학자들이 그를 비판하며 제기했던 새로운 문제들을 나열하는 것은 또 하나의 글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헤겔은 그렇게 현대철학자들이 밟고 올라서서 극복해야 할 표적이 되어 주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독일의 비판철학은 헤겔의 동일성 철학을 하나의 폭력으로 바라보며 탈근대적인 이슈들을 다루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 시대는 여전히 근대와 탈근대의 중간지점에 서 있는 듯 하다. 지나간 세월과 그간 쌓여온 비판의 양 만큼이나 이제 누구도 헤겔의 변증법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은 거대한 산으로서 아직도 밝혀져야 할 사상이 남아 있는 철학적 발상의 보고이다. 이러한 그의 매력은 헤겔에 대한 많은 비판까지 우리가 섭렵한다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한 것인가. 오히려 유물론적 함정에 빠짐으로서 근대에게 발목을 잡힌 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아닐까. 비동일성을 외치며 동일성을 비판한 해체주의의 시도는 결국 또 다른 동일성에 다다르는 하나의 계기가 아닐까. 그들의 말대로 저 멀리서 헤겔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헤겔이 교양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의 노년의 초상화에서 나오는 매서운 눈빛을 보듯, 그의 철학은 설득이 아닌 믿음을 강요하는 듯 오만하고 난해하며,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건방짐과 자만이 엿보이며, 관념적이라는 엘리트주의적 향내가 짙게 배어나고, 정반합으로서 모든 반대와 모순을 절충하고 뭉뜽그려버리는 보수적인 변증법 사상가이다.

 

하지만 나는 헤겔의 철학을 단번에 무시할 정도의 자신감은 없다. 헤겔을 알면 알 수록 기존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스 고전에 열광하였고, 프랑스 혁명을 일평생 지지하였으며, 프로이센의 왕정복고의 반동 속에서도 저항하는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헤겔이었다. 그의 변증법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충과 봉합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 자신으로 탄생하는 것, 모순을 모두 받아들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일신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변증법은 역동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그냥 정반합이라는 보수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고, 해석학적 순환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마르크스식의 진보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아 속의 타자와 타자 안의 자아라는 실존주의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아이러니한 의존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정도 되면 헤겔이라는 산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헤겔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등뒤의 헤겔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는 맞닥드려야 할 던전의 보스로서 헤겔이 등뒤에 버티고 서 있다. 그는 참 두려운 철학자이다.

 

처음으로 돌아오면, 헤겔은 이제 그 누구도 읽지 않지만, 오히려 헤겔을 차분하게 읽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다양한 서양의 고전철학자 중에서 유독 헤겔만이 주목을 받고 대접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헤겔은 '과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이라는 서양철학의 불모지에서 아직도 주목받고 여러모로 밝혀져야 할 철학자들은 수두룩하다. 예를들어 쉘링, 피히테나 볼프,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는 지나가는 말로 다룰 뿐, 그들의 사상의 진수는 아직 완전히 소개되었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헤겔의 사상이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 계몽의 시대는 끝난 것인지, 탈계몽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계몽에 대한 계몽으로서, 즉 계몽의 연장선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물음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계몽과 탈계몽의 대립과 그로 인해 탄생할 새로운 사상을 고민한다면, 역시 출구에서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헤겔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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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모두가 행복한 사회는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생각 자체가 하나의 관념이다. 간혹 가다가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난다.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 그 스스로도 그 행동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그 이상한 행동이 먹혀들 것을 요구하는 황당한 자들이 있다. 특히 윗사람 중에 이런 사람 만나면 골치아픈 일이다.

 

뜽금없이 남의 인생을 모독하는 자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세치 혀를 놀리는 자들, 아무리 낮은 곳에 있더라도 존중해야 할 텐데 전혀 존중하지 않는 자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자들,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것이 순간의 모습일 지라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쾌한 경험이다.

 

한창 사회에서 활동할 나이에 나는 서원에 남았다. 이 결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욕을 먹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이에 대해 가장 많은 욕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욕을 먹을 지라도 그것이 막되먹은 대접을 받을 정도의 중죄에 해당하는 것인가...서원에서 공부하면 안 되는 것인가..

 

새삼 나는 참 많은 무시를 받으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회의 인륜이 땅에 떨어졌음을 느낀다. 그것은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젊은 세대의 예의없음이 아니라 기성 세대의 폭력이다. 형세를 보아하니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무시를 받으며 살 것 같다. 이정도로 많이 받았으면 이제 좀 적응할 만도 한데, 자꾸 화가 나니 나는 아직 수양이 덜 되었나 보다. 맞은 놈이 때린다는 말이 있듯이 나중에 내가 남을 무시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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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 변화준비

북한의 당대표자회의가 9월 초에 열린다고 한다. 뉴스 기사에서는 9월 4~7일 동안 열린다고 보도되었다. 당대표자회의는 공식적인 당내 의사결정 기구인 당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 당 내의 중요한 사항을 의사결정하는 기구로서 당의 주요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의에 해당한다. 조선로동당에서 당대표자회의에 참여하는 인사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들, 당 중앙군사위원, 당 비서국원, 등 당의 상층 인사들이 해당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당대회는 물론, 당대표자회의도 20년이 넘게 열렸던 적이 없어서, 당의 새로운 인사를 임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 정치국위원도 이미 다 사망하여 김정일 혼자 남아 있다고 한다.(김정일은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위원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당대표자회의를 통하여 주요 인사들을 새롭게 확충하면서 그동안 선군정치에 밀려 한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당의 기능을 다시금 정상화시키는 노력을 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것은 당연히 김정일 사후를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김정은(김정일의 3남)이 후계자로서 어떤 중요한 당내 직책을 맡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예상은 어까지나 김정일 이후의 시대는 김정은일 것이라는 대내외의 예상에 기대고 있다.

 

따라서 이번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이 다른 여타 사람들과 함께 최소한 당 정치국 위원이나 당 비서국위원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집단지도체제를 예상하는 사람들도 김정은이 최소한 당이나 군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김정은이 완벽히 김정일만큼의 권력은 얻지 못하더라도 일정한 권력을 잡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후계체제 구축이건, 집단지도체제 구축이건 간에, 이제 북한은 중요한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북한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의 해에 가서야 비로서 드러날 것이며, 이번 당대표자회의는 이를 위한 포석, 혹은 준비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집단지도체제가 구축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입장에 서서, 나는 이번 당대표자회의를 통해서 김정은이 어떠한 당내 직책을 맡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후계체제 구축이네 뭐네 떠들어도 실상 김정은의 이름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시작되었네 뭐네 하는 소문을 믿지 않는다.

 

북한 내부에서 이미 김정은으로의 후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믿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2012년에 가봐야 드러날 것이지, 벌써 부터 이러쿵 저러쿵 떠들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김정은이 김정일에게 가장 맘에 드는 귀염둥이 우리 왕자라면, 그가 주로 활동할 곳은 당이라기 보다는 국방위원회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라면 후계자인 김정은도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도 당 중앙 군사위원직을 차지할 수도 있긴 하다.

 

오히려 당대표자회의에서 당내 직책에 오를 수 있는 김정일의 측근은 오히려 차남 김정철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공직을 맡을 만큼 나이가 찼으며(아마 29세?)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할 때 필요한 인물은 아무래도 김정일의 자식'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김정일의 사후의 북한을 책임지는 것은 북한 당내 엘리트 계층과 김영남, 장성택을 비롯한 김정일의 측근, 그리고 북한의 군부, 그리고 김정일의 자식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들이 김정일 사후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이들 간에 당연히 정치적인 충돌이 일어날 여지가 크기 때문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조선로동당의 기능을 다시금 정상화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 당대표자회의에서 이루어질 것은 당의 새로운 인물들에게 당 직책을 주는 것과 당의 기능을 다시금 정상화시켜 당내 협의 기구와 협의 절차를 확립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북한도 사회주의 초기에는 당내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나름대로 운영되었던 국가였다. 중요한 당의 결정사항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결정하였고, 이것은 곧 언론에도 알려지고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김일성 이외에도 각기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바로 그러한 유연한 상태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김정일이 최근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여러가지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 치루어질 당대표자회의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은 중국에게서 집단지도체제의 운영방식을 배우려 하며, 앞으로의 북한 집단지도체제의 안정화 방안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거없는 완전한 예상에 불과하다.

 

북한이 3대 세습이 아닌, 집단지도체제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북한의 변화에 대한 인민들의 열망을 반영한다. 겉으로는 김정일에 충성한다 하지만, 사실상 인민들은 북한이 자랑하는 사회주의 대가정이 실패하였다는 것, 인민들의 기본적인 생계보장이 이미 후퇴하였다는 것, 많은 수가 굶고 있으며 북한을 탈출하고 있다는 것, 남조선이 사실 중국이 부러워 할 정도로 잘 살고 있다는 것 등등을 이미 알고 있으며 이미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대 세습을 하며 다시금 누구누구의 영도 아래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인민대중들에게 나타나면, 앞으로는 장군님이 10명도 넘겠다면서 냉소짓는 인민들이 늘어날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 북한이 만들어온 국가 정체성이 북한이 새로운 길을 가는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도 집단지도체제구축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공존하던 시절, 소련-중국 간 갈등에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사회주의 권내에서 대외적으로 유연하되 강한 결집력을 갖고 있었던 국가였다. 북한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주체사상을 만들어내면서 북한만의 사회주의 청사진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한 일관된 투쟁적 입장, 모든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순수한 사회주의 이상국가 실현, 스탈린식 사회주의 영도를 표방하고 있었다.

 

특히 순수한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것은 당시 유럽의 수정주의적 입장, 소련의 미국과의 화해, 중국 문화혁명의 급진적 혁명 모두를 배격하고 맑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고집이었다. 이러한 정통적 방식을 고수하는 북한의 국가 정체성으로 인해, 중국-베트남과 같이 북한은 경제개혁과 개방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며 90년대 경제위기를 맞이할 때까지 북한은 개혁,개방을 거부해 왔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느낀 이후에도 결국 이것은 자신들, 특히 아버지처럼 떠받드는 김일성의 '교시'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은 결국 북한 자신이었다.

 

미국에 대한 일관된 반대도 북한의 앞날을 생각하면 어두운 것이었다. 이미 중국, 베트남의 예를 통해서 북한은 사회주의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도 미국과 수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확인하였다. 그러나 온 사회가 반미의 물결로 도배가 되어 있는 마당에 갑자기 미국에게 설설 길 수도 없는 일이고,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지만 이것을 막는 것은 역시나 김일성, 김정일이 만들어 놓은 반미라는 국가 정체성이었다. 북한은 핵을 만들면서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였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3대 세습을 시행한다면 그것은 곧 지금까지의 북한의 국가정체성을 계속 고집하겠다는 절망적인 정치적 제스처일 수밖에 없다. 반미, 핵개발, 개혁개방 반대라는 기존의 북한의 정체성은 인민들에게도 충분히 지겨워질만 해졌다. 따라서 북한이 3대세습을 선택한다면, 북한의 미래는 없다. 자신들의 고집만을 딱딱하게 고집하다가 결국에는 부러지고 말 국가가 바로 조선이 된다. 그리고 그 부러진 가지에 남조선도 아작날 가능성이 있다.

 

나는 북한의 당대표자회의를 관심있게 지켜보고자 한다. 물론 상세하게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북한의 지도자들이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최소한 집단지도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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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군..

1. 도무지 새로운 블로그 타입에 적응을 못하것다. 스킨도 영 맘에 들지 않고, 관리하기도 역시나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소소한 것들에서 왜이리 맘에 들지 않는 것이 많은지....;;;;; 마이너적인 블로그의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은 적응이 잘 안된다.

 

2. 아침에 '희랍어' 수업을 청강하고 있다. 이게 글씨인지조차 의심이 가는 이상한 그림의 글자들을 배우는데 또 왜그렇게 진도는 빠른지 아직 알파벳도 다 못외웠는데 벌써 명사1변화, 2변화, 동사변화, 정관사 변화 등의 절세무공을 펼치니 따라가기가 힘들다. 차라리 고전어 수업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 가서 돈을 주고 친절하게 공부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골천번도 더 했다. 대학의 이 수업은 학생 배려가 많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결국 돈이다..돈...;;

 

오전에는 늦잠자기 일쑤인지라 졸린 것을 간신히 참고 수업을 들었는데, 오후에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지면서 문득, '오늘 아침이 들은 그 수업은 대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문자가 오고가고 꿍시랑 꽁시랑 뭐라뭐라 떠든 것 같긴 한데 말이다...뭐 그래도 청강이니 긴장 확 풀고 그냥 들어야 겠다.

 

3. 할 말이 없다. 완연한 여름날씨의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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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생 속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시 중생 속으로....

개강을 맞이하여 나의 생활에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절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서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기존의 향교 조교일은 계속 진행하면서 향교 내에 지방에 고향을 둔 행자(行子)들을 위한 사숙(이를 두고 일본사람들은 기숙사라 한다)에서 관리감독보조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다시 삼중체제로 돌아감과 동시에 나는 집을 나와 향교의 선비들과 같이 사숙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하여 나는 책값을 벌게 되었다. 그리고 좀더 바빠짐과 동시에, 집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활이 제발 좀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 공부와 조교와 알바를 잘 조화시킬 수 있기를, 내 안의 스승께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기를, 중생들과 더불어 잘 살수 있기를 부처님께 부탁해본다.

어쨌든 이제 또 개강이라능...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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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좌파

진보정당의 분당이후 이제는 정치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진보진영의 자주파와 평등파, 혹은 엔엘과 피디의 세력 갈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네티즌의 일반적인 시선도 민주노동당 = 친북좌빨, 진보신당 = 그렇지 않은 좌파, 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진보가 살아나려면 친북좌파를 없애버려야 혹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진보진영의 성장에 대해 낡고 낡은 북한의 김정일 추장을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일반대중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데에 큰 방해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진보세력은 김정일 찬양세력이라는 말도안되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진영에서 '친북'이라는 딱지는 떼어버려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친북'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과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를 던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친북'이라는 딱지를 뗀다는 것이 외교적으로 북한에 적대적인 기존 보수정당의 기조에 찬성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에 글에서도 썼듯이, 나는 민주노동당과 같이 북한에 온정적인 정당이 하나정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친북이라는 것이 반드시 김정일 체제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며 또한 의미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가르는 민주노동당의 진보적인 대북정책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서술할 생각은 없다. 그저 대북정책의 기조에 가장 민감한 것이 민주노동당이며 상대적으로 진보신당은 '對北'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민주노동당의 대북기조가 김정일 추종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며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보는 '친북'해야 한다는 것, 이때의 친북은 보수정당이 표방하는 '반북'의 반대로서의 의미이며 결코 북한찬양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1. 북한은 어떠한 정권인가.

북한은 사회주의 정권을 표방하고 있다. 남한의 진보진영도 이른바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회주의에서 찾고 있다. 물론 현재 그 '사회주의'라는 스펙트럼은 실로 다양하다. 북한이 받아들인 사회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회주의 체제였다. 북한은 '그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동유럽을 비롯한 중국, 몽골, 베트남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사회주의 체제는 6,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는 그럭저럭 안정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논외로 하겠다. 이에 대한 평가는 사회주의 국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 근 15년째 그 어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원인은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우방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국방비 지출은 경제적 발전에 드는 비용을 많이 잡아먹는 비생산적인 국가운영을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체제를 더더욱 발전시켰다. 스탈린일인독재체제를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독재체제로 이어나가는 "시대 역행적인" 시도를 행하였고 결과적으로 지금 북한의 상황을 좋게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경제난으로 사회주의의 특유의 경제시스템은 무너졌고,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이 무너짐으로써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대가정'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주체사상이라는 그들의 체제 선전을 반영하면, 북한은 '사회주의의 기능을 상실한 주체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2. 북한에 대한 태도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유지하는 미국과 현 정권의 태도에서, 그들의 태도를 정당화하는 기조는 한마디로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을 나누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정권을 북한 인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극악한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고 압박과 견제를 펼치되, 그들의 치하에 있는 북한 인민들에 대해서는 온정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돕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수정당의 이분법적 대북전략에 대해 진보진영은 지금껏 어떠한 대응을 해왔을까. 민주노동당이 지금까지 주사파라고 비난받는 대에는 대북 포용 정책에 대한 어떠한 청사진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우리 인민들에게는 민주노동당이 '무조건 북한 편만 드는 정당'이라고 평가받는 데에는 민주노동당의 탓이 크다.

 보수정당이 '북한 인권, 국군포로, 독재 반대, 북한 핵 반대'라고 외칠 때 민주노동당은 뭐라고 자신들의 온정적인 대북 정책을 변호했는지 의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을 나누는 강온양면 전략은 그 빈틈이 너무도 많다. 먼저 북한 내에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 드러나 있지 않으며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가 그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외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정보가 없다. 북한은 은폐되어 있다. 한마디로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을 나누는 것은 관념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 북한 인민을 대표하는 것은 지금의 북한 정권이 유일하다. 북한에는 북한 정권을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자정작용을 주도할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북한 지도자의 '자기반성'에 의지할 뿐이다. 때문에 북한에 대한 제재는 곧 북한 인민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난 대북포용정책의 기조를 통해 이루었던 대북 지원,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 개성공단의 건설 등은 실제로 북한 정권 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들의 생활에도 보탬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은 꾸준한 + 경제성장률을 나타내 보였다.

현 정권이 북한 정권은 밉지만 북한 인민들은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현재의 강경 기조에서 대북 민간 지원마저 좀처럼 수락하지 않는 것은 그들 전략의 모순을 잘 말해 준다. 북한의 인민에게 온정적이어야 할 정권이 아직도 북한의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지난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예로 들만하다. 그저 해낸 것이라고는 대북인권결의안에서 우리의 태도가 기권에서 찬성으로 바뀐 것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북한 정권의 향방이 북한 인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런 한에서 북한에 대한 포용적 기조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인민들에게 가장 먼저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강하게 나와야 한다. 그러면서도 북한 정권이 아닌 북한 인민들의 자주적인 역량에 대한 무한한 지지를 표방해야 한다. 결국 북한의 정권을 선택하는 것은 북의 인민이요, 어떤 선택을 하든 북한 인민의 자주적 선택을 지지한다고 말해야 한다.

북한의 인민들은 그저 정일이에게 세뇌만 받은 판단력 제로의 인민들이라는 생각이 보수정당에게는 박혀 있다. 말로만 북한의 인민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지 사실 그들은 북한의 인민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김정일 정권이 북한 인민들의 자주적 지지를 받는 한에서 북한 정권을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의 대상자로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들어가야 북한에 대한 비판이 애정어린 비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의 3대 세습이 사실이라면 북한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결국 북한에 대한 태도는 북한 인민들을 대표하는 정권이 현실적으로 현 김정일 정권이기 때문에 그 정권이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기반하는 한에서 교류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겠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을 무조건 비난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북한 정권을 추종하겠다는 것도 아닌, 조건적 지지이며 이런 토대 하에서 민주노동당은 북에 대한 비판과 우려 발언 역시 꺼리지 말아야 한다.

 

3. 북한 인권, 탈북자, 국군포로, 반핵

흔히 하는 비판이 민주주의를 그렇게 부르짖는 진보진영이 왜 북한의 인권문제, 탈북자문제, 독재체제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몇번 이야기했지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우리에게 '괴뢰'도 아니요 '외국'도 아닌 특수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적'도 아니고 '남'도 아니라는 것이다. 적이자 남이요, 남이자 남이 아닌 남이고, 적이자 적이 아닌 적이다.

보수정당과 일부 좌파들의 비판에 대해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대북정책의 기조는 1) 전쟁 반대, 2) 대립적 남북관계 반대이다.

북한의 인권이 심각한 문제이며 몹시 우려스러운 상황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유엔 대북결의안에서 기권을 하든 찬성을 하든 이것은 형식적일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북한의 인권을 외부에서 아무리 욕을 하고 지랄을 하여도 북의 인권이 나아지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다. 실질적인 효과는 북의 경제가 안정되고 발전하여 북의 중산층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요, 이를 통해서 북의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깨닫고 해결해나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중국이 최근에야 빈부격차 문제와 인권 문제를 절실히 깨닫게 된 이유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통해 그 이면의 어두운 측면을 실제로 느끼고, 또 불만의 목소리가 가중된 점이 크다. 모두가 굶어 죽는 가난한 상태에서는 굶어 죽나 수용소가서 맞아 죽나 마찬가지라는 무서운 동일성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탈북자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북에서 탈출한 우리 민족이 낯선 땅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으며 중국은 또 그들을 북으로 강제 송환하기까지 한다. 보수정당의 생각대로 이것을 완전히 해결하려면 북한을 전쟁을 통해 무너뜨리거나, 중국을 압박을 하든 뭘하든 닥달해서 탈출자들을 모두 한국으로 오도록 하는 길 뿐이다. 매우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것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안은 북의 안정된 경제성장을 도와줌으로써 북의 인민들이 북에서 그냥 살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북의 지도자 역시 인민들이 북을 빠져나가는 것을 정통성 약화의 적신호로 받아들일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국군포로 문제는 북을 압박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서로 험악한 사이에서 무슨 인도적 차원 자시고 할 것인가. 북이 국군포로를 우리나라로 송환해도 자신들의 국가정통성에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자신감을 찾는다면 적십자 교류를 통한 이산가족 문제는 물론 국군포로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민주노동당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문제는 너무나 자주 말하였으므로 이제 그만하자. 진보진영의 해결책은 북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1)전쟁반대 2)냉전시대회귀 반대로서 접근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길이다.

 

진보진영, 특히 통일운동세력은 자신들이 정일이 빠돌이가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대북기조가 왜 필요하며 심지어 합리적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친북좌파는 버려야 한다든가, 종북주의자 때문에 우리가 싸잡아 욕먹는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다.

통일운동세력은 북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진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진보세력에게 '친북'은 필연이다. 이 친북은 정일이 빠돌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보의 미래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전쟁의 방지, 그리고 전반적인 복지의 증대에 통일이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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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아...마저...어제가 광복절이었어.....

아무 생각 없이 지내버리고 말았다.

뭐, 시사적인 얘기는 지겨우니 하지 말자.

 

 

이제 슬슬 문론(論文)을 생각할 때가 되는 고로, 주제도 잡았겠다 얼마전 간만에 大老를 뵈었다. 야심차게 문론에서 내놓을 글을 목차로 만들어서 대로께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대로 왈, "괜찮으나 너무 방만하다."(大老 曰 無亂而放漫)

 

그말도 일리가 있었다. 내가 다룰 주제 뿐만 아니라 연관된 다른 선생의 내용들도 마구마구 목차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글을 내놓을려면 내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되리라 생각하셨나보다. 하여,

 

문 왈, "어찌하오리까?" (問 曰 何爲乎)

 

답 왈, "텍스트만 분석해도 족할 것이다."(答 曰 審讀書而足當也)

 

대로께서는 그저 내가 다룰 학자의 해당 텍스트만 열심히 분석하고 파도 충분히 글 하나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셨나보다. 하여, 다시 목차를 써서 찾아뵙겠다 말하고 인사하고 나왔다.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요즘은 그 작업이 심각한 답보상태에 빠져버렸다. 일단 내가 다루는 H선생의 빌어먹을 그 해당 텍스트가 졸라게 어려워서 도무지 이게 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H선생이 말하는 공간은 지가 지를 부정해서 시간이 되지 않나, 또 이번에는 시공이 통일을 하기 시작하더니 장소가 되고 운동이 되고 그리고 웃기게도 이게 또 물질이 된다고 말한다. 음양오행으로부터 천지만물이 탄생하는 그런 경지인건가? 이게 도대체 뭥미? 뭥뭥뭥뭥뭥뭥뭥미?

 

여기저기 눈동냥 귀동냥을 해보니 이말은 당시에는 정말 개소리였지만, 요즘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영향으로 그나마 그럴듯하게 들릴 여지가 생기긴 했나보다. 그래서 어쩌라고....ㅜㅜ 차라리 여기저기 다른 생각들로 짜집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한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텍스트에 집중하니까 내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저 내가 대로에게 결국 不可也라고 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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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라는 것에 대한 배신감.

내가 보낸 10대는 90년대여서 그러한지, 갑자기 2000년 하고도 10년이 더 흘렀다는 사실이 참 새삼스러울 때가 있다.

 

90년대에 생각하는 2000년, 21세기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는 아니었다. 이런 세계는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21세기는 90년대와의 연속적인 세상이 아닌, 완전히 단절적인 새로운 세상이라고  TV에서, 라디오에서, 전문가들이, 학자들이 다들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10대의 감성으로 얘기하자면, 2010년에는 이미 우주여행이 보편화되어 있어야 하고, 로봇이 인간의 힘든 일을 대신하고 있어야 하며,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친환경 녹색 첨단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훨씬 질 높은 삶을 영위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 뻥이었다. 어릴 때 보던 '2020 원더키디'는 정말 공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2020년도 10년밖에 안 남았는데, 그 만화 따라잡을려면 한참 남은 듯 하다. 애도 아니고 갑자기 한숨만 나온다.

 

이 세계는 90년대와 비교하였을 때, 휴대폰 산업과 인터넷이라는 정보통신산업의 발달 외에는 전반적인 측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도 큰 변화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모두가 꿈꾸었던 21세기는 어느덧 '뭐 다 그런거지...'하는 자조와 함께 그때 그때 살아가면서 잊혀지고 있다.

 

나는 억울함을 느낀다. 그런 꿈을 주입했던 당시의 어른들에게 화가 난다. 뭐 그리 잘난 세상이 온다고 그런 오두방정을 떨었을까. 물론 그 어른들도 그런 세상을 기대하였겠지...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은 내 생각에는 진정한 21세기를 맞이하지 못 하였다.

 

21세기는 거창한 꿈으로 시작하였지만 21세기의 인간은 20세기 인간들이 꿈꿔왔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훨씬 암울하고 어두워졌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새로운 경제 위기, 에너지 고갈, 환경 오염,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지역 간의 전쟁, 고용 불안, 빈부 격차로 인해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으로 가득하다.

 

우주여행과 행성개발, 로봇의 활약은 언제쯤 이루어질지....다 개뻥인지도 모른다. 씨부랄 아직도 로봇은 음악에 맞춰 간신히 춤을 출 정도이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우당탕! 어머나 이 비싼 로봇이!) 우주여행은 개뿔, 로켓 발사 기술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냥 지축을 존나게 큰 에너지로 박차고 올라가는 거....(우르르르르르 꿍꽝꿍뽕뿌르르르르르르르 슈슈슈슈슈슉...아 실패라능..) 이런 방식이 에너지 사용이 엄청나다는 것이 최근들어 문제시되고 있다. 행성개발은 당연히 소설 속 이야기일 뿐..

 

내가 어릴 적 꿈꾼 미래는 이런 세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실망하고 있다. 이미 나는 과거인이 동경하는 미래인이지만, 일반적인 삶은 과거인과 다를 바 없다. 어른들은 멋진 세상을 만들지 못했고, 골치아픈 문제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맡아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뻔지르르한 미래를 후손들에게 약속하지 말자. 뭐 먹고 살기 힘들어서 후손들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서 베틀크루져가 떠다니는 그런 세상은 오기나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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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한여름이지만 어쨌든 이번 달만 잘 견디면 적어도 열대야는 없는 날이 올것이다. 여름이라 생각하니 시간이 잘 안가고, 방학이라 생각하니 시간이 잘만 간다.

 

이번 여름은 그다지 할 일 없이 지내고 있다. 할 일이 없다. 할 일거리도 만들고 싶지 않다. 여러가지 할 일들이 있지만 하지 않고 있다.;;;;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게야라고 굳이 변명하고 있다.

 

온난화때문에 이리 덥다고 하지만, 차라리 지구의 기후 변화 패턴이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거라는 의견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래 이제 좀 더워질 차례이다.  이런 걸 간빙기라고 하나....혹자는 빙하기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후아암....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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