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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0/01
    알라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2)
    나그네
  2. 2009/09/29
    소개팅 보고2(2)
    나그네
  3. 2009/09/23
    불로그 7개월을 맞아...(2)
    나그네
  4. 2009/09/12
    수수수
    나그네
  5. 2009/09/09
    아허리아허리랑 쓰어리쓰어리랑....
    나그네
  6. 2009/09/06
    뽀이뽀이폴로르 행성에서..(2)
    나그네
  7. 2009/08/29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그네
  8. 2009/08/27
    아몰래~아몰래몰래몰래~아몰래~(2)
    나그네
  9. 2009/08/21
    에잉, 씨부랄 것~
    나그네
  10. 2009/08/14
    피곤(2)
    나그네

가~~을! 가을! 가을! 가을! 아아~~~~~가을이다!!@!!@##@$$@#%@#!@!@!!!!@!!!^~!!!

 제대로 된 타이밍으루다가 지난 학기에 이어서 이번 학기에도 딱 중간고사 기간에 감기에 걸려주셨다. 왜이리도 절묘한 타이밍인지....나 조차도 신기하다. 아마도 그동안 긴장을 많이 해서 감기에 걸리지 않았던 것인가...그러다가 여유가 생길 때 한번에 몸이 훅 간건가...;;;

 

그래도 할 일은 많고, 그래도 학교는 돌아가고, 그래도 나라는 돌아간다. 어서 빨리 N선생 발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요놈의 N선생님은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마구 잡이로 쏟아놓으셔서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일부분만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Nietzsche, <아침놀> 중에서...

 

274.

인간의 권리와 특권. ㅡ 우리 인간은 일이 잘못 풀릴 때 잘못된 문장을 제거하듯이 자기 자신을 제거할 수 있는 피조물이다. 그것이 인류의 명예를 위해서 행해지든 인류에 대한 동정에서 행해지든,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한 반감에서 행해지든 간에.

 

275.

변화된 사람. ㅡ 지금 그는 유덕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것으로 그는 타인에게 고통만 줄 뿐이다. 그렇게 자주 그를 보지 마라!

 

276.

얼마나 자주! 얼마나 의외로! ㅡ 얼마나 많은 수의 결혼한 남자들이 자신의 젊은 아내를 재미없게 여기다가 정작 아내가 그 반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아침을 경험했는가! 육체는 뜨거운데 정신이 약한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식의 이른바 '잠언'들이 1절부터 575절까지 쭉 이어진다. N선생님은 이런 식의 저작들이 많다. 뭔가 내용을 정리해서 우리에게 논문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시고, 그런 걸 깔쌈하게 무시해주시면서 지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맥락 없이 싸지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버린다. 이런 저작에서 N선생의 사상을 뽑아내는 작업을 해야 하니 철학자들은 참 고생이 많다. 이른바 '신은 죽었다.'라고 하는 N사마의 유명한 말도 이런 잠언 중의 하나로 나온 것 뿐이다.

 

나도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데, 참 답답하다. 감기에 걸려서 머리도 잘 돌아가지도 않고 말이다. 뭐,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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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 구속영장 이메일로 받으시고 징역 10일 감축의 행운을 누리세요~~

나이를 들어서 그런지...천박한 언론의 활동이 눈이 확 띄인다. 대체 그렇게 공부 좆나게 해서 언론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인터넷 뉴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다음이라든가 네이버 등에 들어가서 주요 뉴스를 확인하려 할 때마다 왜, 도대체 왜 '무슨무슨 연애인 뒤태', '누구누구 몸매 작살', '무슨무슨 드라마 대박', '육덕여왕 좆실이 쭤퍼공주와 대결' 등등의 이상야리꾸리한 신변잡기적인 소식들을 먼저 접해야 하는가 말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느냐지 누구 여자 연애인의 뒤태가 아니며 요즘 어떤 드라마가 인기 있는지도 아닌 것이다. 왜 이따위 짜증나는 기사가 메인에 올라가는지 정말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기사를 보는 나도 참 한심하고 그거 올린 기자와 제휴 싸이트도 가관이다.

 

아니, 적어도 3년 전만 해도 이런 기사는 별로 없었는데 말이다. 요즘 들어서 이런 기사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이것도 이명박 때문인가? 응? 그런건가? 으응? 

 

하여 요즘 들어가는 뉴스 싸이트는 '민중의 소리'(자주파의 기관지)와 '레디앙'(진보신당의 선전대'), 그리고 '통일뉴스'(남북 관계 전담), '레프트21'(극좌파의 요람), 등이다. 물론 이런 곳의 기사들의 시각은 말하지 않아도 어떨지 잘 알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작살', '뒤태', '꿀벅지', '대박', '매력발산' 등의 단어를 보지 않는 것만해도 천만다행이다.

 

나중에 정말로 독일어 공부 열심히 하면 차라리 국내 뉴스 끊고, 독일 슈피겔 지를 볼것도 희망하고 있다. 나이 들면서 이거 참 싫어하는 것만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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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겔 동맹

아겔 동맹이라 함은, 아리스토텔레스 - 헤겔 동맹을 일컫는 말이다. 왜이런 혈맹관계가 형성되어 있냐면은 후대인인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 빠였기 때문이다. 저서 곳곳에 다른 철학자는 많이 욕하지만 아리씨를 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칭찬 일색일 뿐이다. 그리고 사상의 지향점도 비슷하다. 둘 다 모두 플라톤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상사적으로 플라톤의 영향력을 지울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저작의 어려움도 둘은 닮아 있다. 정말 제대로 동맹 맺었구나 생각이 된다. 헤겔의 논리학과 아리씨의 분석론, 범주론, 논리학을 보면 알 수 없는 설명들로 가득하다. 헤겔 논리학의 경우, 열심히 읽었지만 하루가 지나면 머리속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만큼 고레벨의 추상성을 보여주고, 아리의 경우는 알 수 없는 말들, 특히 빌어먹을 고대 희랍어가 사람을 참 환장하게 만든다. 영어 번역본을 보아도 희랍어가 하도 이상해서 번역을 해놓으면 더이상 영어라고 할 수 없는 영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리씨 발제가 있었는데 영어 번역본을 아무리 봐도 이해가 불가능하고, (대명사, 중명사, 유개념, 학적 연역, 부적절한 예시들) 그래서 다른 판본의 영어 번역서를 뒤져 보면 각기 다 다른 번역어를 선택하여 다른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철학 전공 서생에게 며칠에 걸쳐서 과외 아닌 과외를 받아야 했다. 정말 힘든 경험이었다.

 

헤겔은 이상하게 공부를 하긴 하는데 며칠만 지나면 머리속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대체 뭘 공부한 것인지..나조차도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너희들은 뭘 공부하냐?'라고 물으면 '그러게...'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 진짜로 10년 동안 봐야 이해가 가능할 지...

 

그래서 철학에 대한 글을 쓸래야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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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

절간에서 수업을 하는 와중에 IMF경제 위기를 다루는 부분이 있었다. 왜 이걸 다루냐고? 이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현대사 아닌가? 사실 최근현대사이긴 하지만 말이다. 교과서에는 의외로 최신 내용들이 적혀있다. 지금의 교과서에는 무현이 형아가 깐깐한 정일씨 만나는 모습까지 사진으로 나와 있다. 내년 교과서에는 아마 메가왕이 뭔가 먹고 있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거두절미 하고, IMF경제 환란이 있었던 게 벌써 10년 넘게 지나 버렸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시간이 정말 빠르긴 하다. 그 당시 경제환란이 97년 말에 있었으니까, 사실상 고2때 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중생들은 당시 4~5살 이었다고 한다. (오우..)

 

중생들이야 당연히 기억이 안 나겠지만, 그 시절 기억은 나에게는 남아있다. 경제가 어렵다, 위험하다는 말이 언론을 통해서 줄기차게 제기되었고 결국 환율이 900원대 까지 오르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정부에서는 한사코 이러한 전망을 부정하였고, 결국 전격적으로 경제 부총리가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환란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80년대 부터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던 우리나라는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교과서에는 경제환란의 원인을 1.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 2. YS정부의 성급한 국제화(특히 금융시장 개방), 3. 외국 자본의 갑작스러운 이탈, 4. 정경 유착 등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 때는 아직 역사적 평가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다.

 

경제 환란 이후에 한국 사회의 성격은 많이 변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 약속이나 하듯이 더이상 대학 졸업장만을 가지고 하는 취업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며, 주식 투자 외에 각종 재테크 상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경제 환란 이후였다. 영어, 토익, 토플의 열기도 이때에 시작되었고, 자유와 민영화, 경쟁 등의 용어가 경제계 전반과 사회로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언론에는 잘 노출되지 않았던 노동계의 투쟁도 알려져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의 이익단체 중 하나로 인식되게 되었다.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시작된 것도 환란을 계기로 해서였다.

 

80년대의 성실한 노동자가 주도하는 가부장적 핵가족 중산층 사회는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다. 국가적으로도 이제 아버지같은 군사정부가 주도하던 경제 정책은 이제 더이상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이제 모든 인민들이 '각자 알아서' 자유 경쟁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그로 인한 변화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가 확산되어 개인의 창의력과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고, 기존의 나쁜 관행들을 철폐하자는 목소리가 제기되었으며 관행에 기댄 비합리적인 여러 낡은 제도와 장치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때맞추어 여성들의 경제 진출도 활발해 졌다. 한국 사회가 국가 이익이라는 하나의 가치관으로 뭉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익단체들의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것도 인민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지나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럭저럭 환란의 여파는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지 않은가. 경제회복을 했다지만 우리가 80년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들어 서서히 복지 정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경제 성장은 이제 옛 말이 된 것 같다.  아시아적 가치라 함은 정리하자면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과 기업의 연공서열제(이른바 평생 직장), 가족 안에서의 복지, 유교적 관료 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이제 옛말이 되어 우리는 아마도 경제 체제의 성격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홍콩과 싱가폴을 제외하고 가장 서구에 가까워 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서구라고 한다면 미국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는 환란 이후에 일본식 경제 성장 전략을 버리고 미국식 경제 성장으로 전환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말이다.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의 경제 성장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환란 이후에 아시아의 전 국가가 이러한 미국식 경제로의 전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이른바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유럽의 사민주의적 정책을 환란 이후의 정권에서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메가왕 정권도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경제적으로만 본다면 이러한 양립적인 경제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정치적 '수사'는 다르지만 현 정권은 꾸준하게 복지 정책을 강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적 상위 계층에 대해서는 대기업에 친화적이고 각종 규제와 제한을 철폐해 나가면서도 하위 계층에 대해서는 느림보식이긴 하지만 복지 정책을 통해서 20:80의 사회에 대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정책은 지난 정권과는 달리 친화적인 것이 현 정권의 성격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녹색 성장'이라는 메가 정권의 슬로건은 직간접적으로 대기업에게 압박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곧 눈앞에 닥칠 이산화탄소 배출량 규제부터가 정권에 사활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를 보완하는 사민주의적 복지 정책이라는 정부의 전략과 함께 필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대응이다. 두가지 경제 정책의 줄다리기 속에서 시민사회는 복지의 강화라는 슬로건을 표방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대안이다.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 아니면 일본식 경제 정책이냐라는 이론적인 고민과 함께 어떠한 사회여야 하는지를 걱정해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 한창 환란의 위기로 나라가 떠들썩 하던 시기에 당시 영어 선생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마도 너희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환란이 극복되어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은 물론 개뻥이었다. 환란은 극복되었지만 사회의 성격은 변해버려 사실상 우리는 환란의 위기가 일상화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직업을 가졌지만 그걸로는 살 수가 없기에 각종 금융 상품에 투자해야 하고 이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한다. 영어를 비롯한 어학실력과 직업에서의 실력을 꾸준히 계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열심히 일하고 꽉찬 월급봉투에 흡족해 하며 조금씩 저축하는 재미에 살던 부모님의 시대는 이제 가버렸다. 이제 돈을 벌고 이를 또 재투자 하며 맘에 드는 물건을 사고 쓰고 버리는 것이 일상화 된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을 보는 마음은 씁쓸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내 처지는 이러한 변화와는 확실한 선을 그어버린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삶을 중생들에게 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면서 이런 삶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흡족하게 물려줄 수 있는가? 하고 끝없이 물어봐야 한다. 이 결과는 사민주의도 아닐 것이고, 연공서열제도 아닐 것이고, '성교, 그리고 도시'에 나오는 삶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철학 공부 하세요~인가?ㅋㅋ 이런 고민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나 같은 놈하나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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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 보고2

 

퀘스트 실패...ㅜㅜ

 

큐피드의 저주(지력 -2, 체력 -3, 마나 -30%, 지속시간 2일)

비참한 인생(지력 -3, 민첩성 -5, 수업시간 말빨 사용 불가, 지속시간 1일)

 

가면 방패(플레이어의 상황을 가식으로 숨길 수 있게 해줍니다. 2레벨) 레벨 업

정신 집중(플레이어의 연애 생각을 집어치우고 하던 공부나 하게 합니다, 집중력 +5, 지속시간 3일)

연애경험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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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와야 하는데 낮은 아직도 여름인 것만 같다. 아침과 저녁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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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그 7개월을 맞아...

이곳에 안착한 지 어느덧 7개월 째이다. 적막한 블로그를 찾는 와중에 이곳에 '임시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인데, 과연 만족스러웠느냐? 아마도 점수를 준다면, B+ 정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대학 평균학점 보다 높은 점수이다. 이정도면 괜찮지 싶다.

 

이곳의 마이너리티하고 비주류스럽고, 조용한 분위기는 참 좋다. 물론 단점도 있을 것이다. 우선 비밀 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글루스 때와 다를 바가 없다. 글을 쓸 때 검색 엔진의 검색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선택항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매번 선택하는데도 불구하고, 네이버에 내글이 검색된다....씨발...네이버...좆니버....

 

그리고 소소한 일상보다는 주로 사회비판적인 글이 올라와서 나도 왠지 그런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보불로그의 이름만큼,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들어오지 않으면 안되는 진지한 분위기가 이곳에선 흐르고 있다.

 

해서 마음 속에서 yahoo쪽으로 옮길 까 하는 생각이 매번 뇌 속의 임시국회에서 자꾸 상정된다. yahoo쪽은 나를 링크한 인민이 몇 명인지 알 수 있고, 내 블로그를 즐겨찾기로 설정한 포유류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끊어버릴 수도 있어 보안유지에 탁월한 장점이 있다.

 

그럼 씨발 그렇게 폐쇄적으로 할라면 집에서 일기를 쓰지 왜 월드와이드웹에 와서 난리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렇다. 이곳이 일기 쓰기 편하자나 씨발 새꺄. 톡톡 자판치면 일기 써지자나 돼지고양이새꺄. 아예 그냥 우리집 형님의 도움을 받아 독립 블로그나 사이트를 하나 차릴까 하는 생각도 있긴 한데, 그것은 너무 신경쓰일 것 같긴 하다.

 

그래서 어쨌든 관성의 힘에 의해 이대로 쭈욱 갈 것 같다. 보안상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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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수

가을이 오면서 이제 20대의 마지막을 절감하고 있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에는 10대의 연장선 같았고, 그래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는 좀 다르다. 30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 없다. 뭐하나 이룬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해야 할 숙제는 많은데 이렇게 망연히 있게 된다.

 

예전 뉴스를 뒤적이며 보다가 진중권씨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미 이쪽 사이트에서는 많이 이야기가 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가 속 편하게 이야기하듯이 한신대라든가 성공회대 같은 나름대로 진보적인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다시 교편을 잡는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굳이 대학이 아니더라도 이곳저곳에서 그의 강연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뭐 내가 듣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진중권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소시쩍 생일 선물로 '아웃사이더'라는 일종의 잡지(계간지인지 뭔지는 모르것다만)를 받았을 때였다. 물론 그 잡지에는 여러명의 진보논객들이 쓴 글이 있었는데 진중권의 글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때는 그저 좀 진보적인 지식인 중의 하나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독설적인 사람인지도 몰랐고, 어떠한 말을 하고 다녔는지도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한 여러가지 언설들이 언뜻언뜻 귀에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을 사거나 빌려서 본 적도 한번도 없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꾸준하게 이른바 진보진영의 다수파인 자주파를 비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한 진보진영 내부에 대한 독설적인 비판의 글을 때때로 접하면서 이를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녔던 기억도 난다.

 

그가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은 몇 번 있는데, 역시나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재주가 매우 부러웠고, 그러한 그의 능력을 뒷받침하는 폭넓은 지식도 너무나 부러웠다.

 

진중권의 토론과 글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풍자와 비아냥이다. 그의 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로 인해 매우 통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상대방에 대해서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심한 모욕감을 줄 여지가 매우 크다. 그래서 그는 많은 적들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변희재씨 같은 경우가 그의 대표적인 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중권은 그를 괜히 건드려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적을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변희재는 진중권과는 뗄래야 뗄 수 없다. 그의 견해는 보수적인 시각을 대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느정도는 필요한 다양성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진중권과의 논쟁 속에서 더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나는 진중권이 독설로 흥해서 바로 그 독설로 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노무현 정권시절 대우건설의 남모 사장이 자살을 하고, 정몽준 회장이 자살을 하였을 때, 진중권의 독설은 정말 가관이었다. 이른바 '잘못한게 있으면 왜 자살을 해요? 감옥에 가야지.', '아무래도 자살세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아요.'라는 발언은 최근의 노무현의 자살에 대한 그의 태도와 더불어서 그의 발목을 강하게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예전 발언들을 물고 늘어진 사람이 바로 변희재였다.

 

진중권이 드디어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심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진보의 개'였다. 그리고 더 좋은 말로 말하자면 그는 진보의 선봉대장, 진보세력의 한 자루의 '칼'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가끔씩은 진보세력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상처주기를 또 즐긴다.

 

진보신당으로 분당을 할때의 진중권의 말, 그리고 진보신당 내부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세력들을 비난하는 말은 그들을 이론적으로 납득을 시키기를 떠나서 인간적인 모욕까지 병행하고 있다. 덕분에 진보세력 내부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고, 이것은 진보세력의 창조적인 경쟁과 협력을 방해하고 이들을 분열시키는데까지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초등학생에게 1+ 1 =2 라고 가르칠 때, 말끝마다 '병신아'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 초딩은 과연 아, 그래요 하고 납득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진중권은 일종의 '짜증'을 글에서 발언에서 곳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것도 몰라, 병신아.'라는 말을 말이다.

 

그럴 경우 마음 약한 상대방은 아, 그렇습니다. 진사마. 하고 항복선언을 하고 진중권의 빠가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납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누구라도 모욕을 받으면 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나는 도올 김용옥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의 학문적 역량은 강단에 흡수되지 못하였고, 같은 이유로 진중권은 어디까지나 지식인이 아니라, 학자가 아니라, '논객'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강단과 도올, 진씨와 사회 모두에게 손해이다. 물론 그가 '학'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면 괜찮겠지만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그에게 큰 아킬레스 건이다.

 

그의 정치적 목적의식도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그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것일까? 그 누구 아는 사람은 있는 것일까? 물론 그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견해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논객이라면 어떠한 사회가 되어야하는지 구체적인 틀을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반대로 일관하는 중이다. 민족주의적 통일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한다. 그러면 그는 사민주의를 원하는 것일까? 하지만 예전 촛불시위에서 칼라TV를 이끌었을 때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혁명을 꿈꾼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그 혁명이란 과연 어떤 혁명을 말하는 것일까?

 

뭐 이건 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나는 진중권이 이제 보다 더 건강한 비판을 하였으면 좋겠다. 수많은 논적들을 칼로 베면서 상처를 입히지 말고, 그들을 자신의 부하로 삼을 만큼의 아량을 베풀었으면 좋겠다. 그보다 멍청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쌔고 쌨지만 그런 점을 인정하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중권같은 천재는 한 번 들으면 적어도 그 하나라도 잘 이해하겠지만 대한민국에는 그렇지 않는 멍청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아량있게 감안하고 보다 친절한 비판과 설명을 해주길 기대한다.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매우 친절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그 품격대로 세상은 그렇게 생각대로 급격하게 변하지 않고, 진중권보다 못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시면서 글에서 말에서 나타나는 그 '짜증'을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분에게 바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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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허리아허리랑 쓰어리쓰어리랑....

아직 덥기는 하지만 곧 가을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지나가는 나방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편하다. 빨리 찬바람이 쌩하고 몰아쳐서 머리를 식혀주었으면 좋겠다.

 

세상돌아가는 일에 이미 관심 뗀지 오래다. 북한의 일도 이제는 신경쓸 경황이 없다. 사실 문제가 문제로서 드러나는 것은 문제가 발생한 그 시점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후가 아니겠는가.  물 방류 같은 사건은 남북 커뮤니케이션의 붕괴가 낳은 불행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걸 가지고 정부가 또 어떤 콩을 볶아 먹을지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정운찬씨의 총리 지명 때문에 진보진영에서는 말들이 많다. 어쩌고 저쩌고~~쫑알쫑알쫑알쫑알, 너무나 말들이 많다. 나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그리고 커다란 도덕적 결함이 없다면 정운찬 총리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카드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민주당이지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현 정권이 무난히, 메가왕이 5년 간 정치를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조그마한 꼬투리 하나 잡아서 인터넷에 뿌리고 이것을 가지고 정권의 누구를 욕하고 비판하고 냉소하는 짓은 노무현 정권때로 끝나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준엄한 비판과 감시가 더더욱 요구되는 시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운찬에 대한 여러저러 말들은 아직 시기상조인 감이 없지 않다. 그의 성향이 나의 상식으로도 현정부와 맞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정운찬씨하면 기억나는 게, 예전 서울대가 한총련을 탈퇴한다고 했을 때, 당시 총장인 정씨는 '그래도 대학생은 나라걱정은 해야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걸 듣고 당시, 별별 사람 다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현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혹은 정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대안은 다양하다. 진보정당을 창설하고 그래서 정권을 외부에서 마음껏 욕하는 것도 물론 하나의 길일 수도 있지만, 그 맘에 안드는 정부에 들어가서 '내가 한번 바꿔보겠다.'라며 일하는 것도 또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성을 함락시키는 것과 성문을 스스로 여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정운찬씨가 일종의 현정권에 대한 균형추로서 역할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일단 그 어떤 평가도 유보한 채로 일단 지켜보자는 것이다. 가혹한 청문회를 돌파한다면 그렇다면 일단 그의 총리 수행을 지켜보고 그러고나서, 이거 완죤 사쿠라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때 존나 욕하면 된다.

 

벌써 부터 변절자! 개새끼! 니가 그럴수가! 하고 욕하는 것, 혹은 장미네~장미~하고 냉소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우리로서는 우리와 말이나 통할 정도밖에 안되는 운찬이형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너무 신경쓰지 말자. 내 상황이 이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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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이뽀이폴로르 행성에서..

이번에 듣는 수업 중에 다루는 한 분은 N(Nietzsche)선생님이시다. 이분은 청년시절에(이미 나는 청년이 아니므로...씨댕..) 큰 감명을 주었던 분이시긴 한데,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이분의 글들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이분의 비판이 너무나 근본적이면서도 대책이 또한 없는 것인지라, 요즘은 하나의 투덜이로 다가오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은 H선생님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H선생도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다가왔다가 이 분의 생각이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하게 된 경우이고, N선생은 처음에는 혹했다가 이제는 아무래도 나의 생각과는 대척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사람이다.

 

물론 내가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 방면에서 대가를 이룬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취향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나 N사마는 예술, 미학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방면에서는 완죤 백치라는 것이 매우 주요했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개 연극과 같은 예술적인 공연, 음악(그것도 매우 고상한 음악, 일명 딴따라가 아님), 문학(시, 소설), 조각, 회화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방면의 취향을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이런 것들을 싫어하고 배격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도 예술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영화마저도 나에게는 매우 멀고 먼 세계이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영화로 본 게, 2007년의 슈렉3였으니 할 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그런 것들은 내가 즐기기에는 너무나 '비싸다.' 씨부럴. 그리고 연극, 뮤지컬 등을 보면 거기에서 연기를 펼치는 사람들이 왜이리 기만적이고 가증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인간 감정의 과도한 표현, 극대화, 감정의 분출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이지가 않는다. 뮤지컬의 경우,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노래를 불러? 이거 좀 미친놈아냐? 되게 웃기다. 그리고 노래 부르면 옆사람은 코러스를 해주거나 율동을 해줘요, 이거 너무 가공적인 세상아니에요?

 

음악은 그냥 들으면 좋은 것이긴 한데 그냥 좋으면 좋은거지 거기에서 이 음악이 어떻고 저떻고, 인간의 어떠저떠한 점을 어떻게 그리고 있네 마네 하면 그냥 gg치고 돌아서 버린다. 또한 조각, 회화 등은 도무지 봐도 이게 뭔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이런 걸 왜 보고 즐기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물론 연애를 한다면 자주 보러 갈 것 같다.(ㅡㅡ;;;)

 

어떠한 철학자들은 이른바 예술로부터 세상과 진리의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한두명이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던 하나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오우, 도대체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개 이런 부류의 철학을 비판하는 방식이 엘리트적이다, 문제의식을 더 파헤치지 않고 적당히 미학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등이다. N선생 같은 경우도 진리는 없다, 혹은 다 거짓이다,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묻는 다면 N사마의 대답은 '예술적인 삶'이 되어버린다. 그래 말은 좋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러한 예술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인민들에게 한달에 한번씩 국가에서 뉴에이지 음악 CD한장 씩 배급을 해야 하나? 아니면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필수 과목으로 개설하면 되나? 전국민 밴드화? 아니면 전국민 배우화? 이거 뭐 조선민주주의예술공화국이 되것네? 아니면 씨부럴 뭐 어쩌라고? 아니면 영화관 관람료나 낮추던가 말이다.

 

나는 예술이 그들이 말하는 예술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 예술은 그냥 돈 있는 놈들이 취향으로 즐기는 스포츠와 같은 것이다.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 직접 민중과 맞닿아 있는 것이 오히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야 한다. 나조차도 즐기고 접하고 있는 만화책이라든가, 대중적인 영화(탕탕 꽝꽝 사랑해요로 끝나는), 대중적인 가요(아몰래 몰래몰래~),인터넷 웹툰 등이 그러하다.

 

사실상 그런 부류의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그리스의 희비극들, 그리고 셰익스피어 등의 연극 등은 당시의 민중들이 값싸게 보고 즐기는 오락거리였다. 당시의 그러한 대중적인 예술들을 마치 고상한 예술, 삶의 의미를 언어를 뛰어넘어 사유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삼는 것을 보고 좀 어이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니깐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욕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상한 클래식 음악, 어려운 예술적 연극들, 의미를 알 수 없는 회화와 조각들을 주제로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예술이 대안이다는 것을 외치면서 그 논거로서 만화, 애니매이션, 헐리우드 우당탕 영화, 대중적인 가요, 민요들을 분석하고 이야기한다면 한번 귀를 귀울여 보겠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중적인 저급한 예술들은 그저 천박한 유머나 감정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너무나 어렵다. 그저 보고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스포츠와 같이 말이다. 예술은 말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는 결국 스포츠다, 스포츠...물론 고상한 예술이 어떠한 중요한 문제들을 어떠한 행위로서 다루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예술이 지닌 난해함과 비대중적인 성격은 예술만이 대안이라는 대답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N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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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쓰벌...나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중요한 개념이긴 하고, 똑 다루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을 주제로 뭔가를 이야기하기에는 내 머리에 뭔가 개념 탑재가 부족하다는 거....

 

본격적인 탐구를 하기 전에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정말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개 '시간'이라고 말하면 누구든지 '시계'를 떠올릴 것 같다. 하지만 시계는 인간이 만든 창조물로서 시간의 흐름을 재기 위한 객관적인 척도로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시계를 만들게 된 이유, 즉 시간을 인식하고 그것이 흐른다는 것을 파악한 계기는 무엇일까.

 

시간에 대한 인식의 시초는 뭔가가 변한다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서 부터 인간은 낮이 밤이 되고, 유기체가 자라나서 결국 노회하여 죽는 다는 것, 계절이 바뀐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변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변화는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낮이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이 되며, 과일이 자라서 떨어지고 또 얼마가 지나면 또 과일이 자라고 열린다. 봄에 싹튼 새싹은 여름에 절정으로 이루다가 가을과 겨울을 지나 사라지고, 또 봄이 되면 다시 또 새싹이 열린다.

 

즉, 외부 환경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변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직선 상의 시간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까지나 원환 과정으로서 변화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부터 직선 상의 시간관념을 가지게 되었을까?

 

시간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역사'를 인식하면서 부터 싹트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내가 있고, 내가 이제 늙고 아들과 손자를 두며 이제 내가 죽으면 그렇게 인간 유기체의 운명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 더 나아가 한 나라가 세워지고 왕들이 이어받으며 여러가지 사건과 전쟁을 거쳐 곧 나라가 멸망하기도 한다는 것, 이러한 사건과 사고를 인식하면서 이를 시간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이해하였고, 그것은 변한다는 것, 그리고 예전의 사건은 오늘날 다시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시간이 직선 상으로 흐른다는 것은 근대 이후부터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돌고 도는 원환과정으로 시간을 인식하기도 하였고, 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철의 시대를 거쳐서 점점 타락하게 된다고 시간을 인식하기도 하였다. 중세의 시간 개념은 신의 구원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막혀있는 제한 시간의 세상이었다.

 

직선 상의 시간 흐름, 즉 발전적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계몽주의자, 그리고 헤겔, 맑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발전하며 미래에는 더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것, 즉 진보사관은 이러한 직선적 시간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시간은 이렇듯, 뭔가가 변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에 자리잡게 된 하나의 형이상학적 전제이며 이 시간에 대한 성격 규정은 원환론, 발전론, 타락론, 종말론, 예정론 등 다양하고 우리 시대 인식에 중요한 기반을 이루어왔다.

 

시간에 대한 관념은 인과관계와 연관되어 철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이론적 논란 거리가 되었다. 시간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변한다는 것이 정말로 변하는 것인가? 뉴튼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시대 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재적인 관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내가 잘 모르겠고, 칸트를 언급하자면 칸트의 시간 관념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외부의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적용하게 되는 인간의 인식에 불과하다. 칸트에게 있어서 절대적 시간이 존재하느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그저 인간이 외부의 사물들을 파악함에 있어서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인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을 정말 무엇인가? 과거, 현재, 미래는 무엇인가? 어느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내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순간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버린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도 흐르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시간이라고 하는 관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닐까? 그저 우리가 사건의 전후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적용한 관념이 아닐까?

 

현대 과학의 성과로 인하여 우리는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물체의 운동에 따라서 시간은 왜곡된다. 더 빨리 가거나 느리게 가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사라지면서 현재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는 다양한 신기한 현상들이 이론적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우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은 지구의 인간들보다 나이가 덜 들어보인다 어쩐다 하는 이론적 가정을 생각해 보면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리적 법칙으로도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불러일으킨다. 중력의 법칙, 관성의 법칙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나름의 고유한 시공간을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도 도출될 수 있다.

 

시간이 절대적, 상대적이냐를 떠나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논란은 아직도 그 답을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주변 사물을 파악하고 인간의 역사와 우주의 변화를 인식하는데에 이미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흘러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에서 흘러들어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들어가는 것일까? 전자의 견해라면 미래는 예정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며 후자의 견해를 따르면 미래는 언제든 우리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기제가 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수는 있는가? 시간 여행이 가능하여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가볼 수는 없는 것일까? 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현재의 상식은 과거는 바뀔 수 없고, 다만 미래가 불확정적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과거는 주로 반성의 수단으로서 상기될 뿐이다.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거를 변화시킨다면 우리의 현재는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리는 것인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서 과거를 바꾼다면 현재로 돌아왔을 때, 마치 영화처럼 모든 것이 바뀐 현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또는 이러한 상상은 공간과도 연관되어 우리의 과거는 불변인 채로 있고 과거를 변화시켰을 때에는 다른 현재라는 새로운 공간이 우리의 기존 현재와 병행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될수도 있을까? 그럼 시간 여행을 떠난 자는 자신이 돌아올 현재는 기존의 현재가 될까? 바뀌어버린 새로운 공간 상의 현재가 될까? 혹은 우리가 아무리 과거를 변화시킨다 해도 미래는 하나의 법칙처럼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게 될까? 즉 미래는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시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상상은 모두다 무용지물일 뿐이다. 우리가 사실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때 그때의 변화일 뿐이며 그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어떤 연속체로 수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때 그때의 변화는 거대한 불변함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유일한 하나의 공간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다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시간에 대한 판단 여부에 따라서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도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파악은 자연과학의 연구와 철학적인 탐구를 통해서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났으며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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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뻘글이 되었다. 아, 씨발 그냥 잊자.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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