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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69회


1


모처럼 매서운 추위와 함께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던 날
집안에 가만히 있는 게 너무 갑갑하게 느껴져서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무작정 탔습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버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1시간쯤 달리다가 빗줄기가 잦아든 것 같아 그냥 내렸습니다.
주위에 별다른 것 없이 밭들만 이어진 길을 무작정 걸었습니다.


한참을 걸었더니 춥더군요.
버스정류장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더 걸었습니다.
버스정류장은 보이지 않고 빗줄기가 또 굵어졌습니다.
우산으로 몰아치는 빗줄기를 겨우 가리고 더 걸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걷다보니 눈 앞에 조그만 카페가 하나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카페로 달려갔지요.
온기가 가득한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래간만에 커피를 마시고 싶어져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습니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면 카페 내부를 살펴보는데
조그만 메모판에 손글씨로 쓰여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A: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거냐?
B : 딱 하나만 포기하면 돼. ‘인생’
(하완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해서’ 중에서)

 


그 사이 주문한 에스프로소가 나와서
한모금 입에 물고 살살 굴리며
그 진한 맛을 느끼고 있는데
몸이 살며시 녹아들더니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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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더니
이곳에 와있더군요.
제가 와본 적이 없는 곳인데
시 외곽의 조금 허름한 동네같아 보였습니다.
그나마 눈앞에 보이는 3층짜리 학원 건물이 비교적 크고 번듯한 건물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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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네를 둘러보다가
이곳을 발견하고는 ‘아~’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여기는 제가 어렸을 때 뛰놀던 골목이었습니다.
골목 뒤로 보이는 아파트를 빼면 어릴 적 뛰놀던 골목 그대로였습니다.
40년쯤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에 서있는 거였지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저 골목에서 수협이형이랑 경철이랑 상범이형이랑 길현이형이 뛰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수협이형네 집도 그대로고, 성웅이형네집도 그대로였습니다.
골목만 조금 좁아진듯한 느낌이었죠.


감회에 젖어 사진을 찍고 있는 어떤 아이들이 다가오더군요.
“아저씨, 뭐하세요?”
“아... 여기 사진 좀 찍고 있는데.”
“왜요?”
“어... 여기 내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거든.”
“어디 살았는데요?”
“음... 지금은 그 집이 없어진 것 같은데. 너희들 여기 사니?”
“예.”
“어디 사는데?”
“저기요.”
아이들이 가르킨 곳은 제가 처음 봤던 학원 건물이었습니다.
“아... 그래. 나도 어릴 때 거기 살았던 것 같은데.”
“우리 엄마 아빠 알아요?”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어렸을 때는 거기 다른 집이 있었거든.”
“그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알아요?”
“아니 그렇진 않은데... 이 동네 좋아?”
“몰라요, 헤헤헤.”
“친구들 하고는 뭐하면서 놀아?”
“그냥요.”
“그렇구나.”
“아저씨, 우리 사진 찍어줄 수 있어요?”
“어, 그럼. 이 앞에 서봐.”


아이들은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포즈를 잡았습니다.
그 모습에 살며시 웃음이 나오더군요.
사진을 찍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다가섰더니
아이들이 “고맙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제가 어릴 적 살았던 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학원 건물로 말이죠.
그리고 사진에 찍힌 아이들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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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들 사진을 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카페로 돌아와있더군요.
묘한 기분으로 나머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밖으로 나왔더니 비바람은 여전했습니다.
우산을 펴들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죠.


그렇게 10여 분 쯤 갔을 때
저 앞에서 어떤 여성분이 짐을 들고 걸아가고 있었습니다.
양손에 하나씩 가방을 들고있었고
우산은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운 채 불편하게 걸어가고 있더라고요.
가방은 무거워보이지 않았는데
비바람 속에 그런 자세로 걸어가는 게 조금 안쓰러웠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20대로 보이는 그분의 외모에도 눈길이 갔던 건 사실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죠.
“안녕하세요, 제가 하나 들어드릴까요?”
그분은 저를 힐긋쳐다보더니 매정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그분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얘기했죠.
“아니, 그... 비도 오는데 불편한 자세로 가시는게...”
그분은 제 말허리를 자르고 다시 매정하게 대답했습니다.
“괜찮다고요.”
그때 그분의 목에 끼여있던 우산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얼른 그 우산을 주워서 그분에게 씌워드렸죠.
“우산이라도 들어드릴께요.”
그랬더니 그분이 걸음을 멈추고 저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이~씨, 필요없다고, 씨발놈아!”
뻘쭘해진 저는 우산을 그분에게 건내드리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습니다.

 

4


집으로 돌아왔더니 사랑이가 저를 반갑게 맞아주더군요.
저를 맞아주는 사랑이가 고마워서 사랑이 옆에 앉았습니다.
사랑이도 제 옆으로 와서 앉더니 고개를 제 손쪽으로 들이밀었습니다.
쓰다듬어달라는거죠.
가만히 사랑이를 쓰다듬어줬습니다.


“사랑아, 니가 있어서 내가 외롭지 않네. 고마워.”
“야, 니가 밖에서 쏘다니고 있을 때 나는 혼자 집에서 너를 기다려야했어. 나도 고맙다.”
“어... 그건 미안한데... 사랑이 너 오늘 좀 까칠하다.”
“아휴, 아니다. 이렇게 기분좋게 쓰다듬어주는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아니, 기분 나쁜 건 아니고...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가 해서.”
“개팔자가 별거 있냐. 그냥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가는 거지, 뭐.”
“음... 그런가? 하긴 너나 나나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가기는 매한가지지다.”
“그렇지? 이렇게 별일없이 살아가자고.”
“그래. 나는 너만 있으면 외롭지않게 잘 살 수 있어.”
“성민이 너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개로 태어날거야.”
“어... 왜 개로 태어날까?”
“너는 개로 태어나서 아주 착하고 친절한 주인을 만날거야.”
“뭐,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네, 하하.”
“그래서 매일 줄에 묶여서 지내다가 하루에 한두 번만 잠시 외출을 하고, 매일 혼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주 가끔 주인이 정성스럽게 쓰다듬어주면 좋아서 꼬리를 흔들고, 배 고프지않게 주인이 주는 지긋지긋한 사료를 매일 먹게 될거야. 아, 물론 여자친구나 가족 같은 건 꿈도 꿀수 없을 거고.”
“야, 니 말 들으니까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어쩔수 없는 건 이해해주면 안될까? 사실 나도 너를 위해서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그래서 하는 말 아냐? 너는 다음 생에 너처럼 착하고 친절한 주인을 만날거라고.”
“...”
“왜 아무 말 없어?”
“...”
“삐졌어?”
“사랑아, 노래 하나 불러줄까?”
“야, 이 상황에서 갑자기 왠 노래?”
“아니, 그냥.”
“그래, 하나 뽑아봐라. 노래나 들으면서 마음을 달래보자.”


저는 사랑이를 더욱 정성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와의 ‘랄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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