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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71회


1


올해로 귀농 5년차를 맞이합니다.
그동안 제게 참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들은 많은 부분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10년 동안 허우적거렸던 삶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변화죠.
농사를 하게 되면서 자연과 호흡하고, 내 자신의 호흡을 지켜볼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입니다.
처음으로 제가 직접 개를 기르게 되면서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도 좋은 변화입니다.
세상과 싸우지 않고 한발 물러나서 관조할 수 있게 되기는 했는데 이게 긍정적인 변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조그만 것이라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농사지으며 나오는 것들을 주위에 나누는 재미가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눌 게 없을 때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현실이 지독히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세상에서 자꾸 뒤로 물러서는 게 편하더라고요.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의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리는 제 모습을 간혹 목격하게 됩니다.


지난 날의 흙탕물을 흘려보냈더니
맑고 잔잔한 마음이 보였는데
그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더니
찡그린 제 얼굴이 보이고 있습니다.
음...
찡그린 얼굴을 펴든가
마음에서 제 얼굴을 지우든가 하면 될텐데...


찡그린 얼굴을 억지로 펴려고 하면 더 괴상한 표정이 나오니
마음에서 제 얼굴을 지우는 게 방법일텐데
이게 부처님 정도의 수행이 필요한 일인지라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방법을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을 나를 보지 않고 남을 보는 거지요.
남을 보고 있으면 내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는 보이지 않고
그저 상대의 얼굴과 행동이 보입니다.
그걸 거울로 삼아서 다시 나를 보려고 하는 것만 제어하면 되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기는 매한가지라 고민이기는 한데...


에고~ 얘기가 좀 거시기하게 흘러버렸나요? 헤헤헤.
그냥 쉽게 말하면, 올해는 사람들과 만나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해보겠다는 겁니다.
내 자신만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좀 부대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과의 접촉면이 워낙 없어서 어떻게 사람과 만나야하는 지가 고민이기는 합니다.
여러분, 성민이 좀 도와주세요~

 


<광고입니다>
개발과 투기의 광풍 속에서 문들어져가고 있는 제주의 속살을 들춰보는 일을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곳 제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듣고 기록하려는 겁니다.
인터뷰 또는 르포의 형식이 될테인데 아직 구상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혹시 이런 것에 관심이 계신 분이 있다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


가게에서 라면을 사고 오는데 저를 발견한 우정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 우정아.”
“어디 다녀오세요? 이건 뭐예요? 먹을 건가?”
“미안, 우정아. 네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우정이 얼굴에 상처가 깊게 나있는 게 보였습니다.


“우정아, 잠시만. 앉아!”
“앉았어요. 쓰다듬어주세요. 아니다, 냄새 맡고싶어요.”
“어, 그래, 잠시만, 우정이 상처난 거 좀 살펴보자.”
“아, 아파요. 거긴 만지지 말아요.”
“아이고, 상처가 크게 났네. 많이 아파?”
“아니 뭐, 그냥 견딜만은 한데, 만지면 아파요.”
“그래? 우정이 상처난 거 보니까 내가 속상하네.”
“고마워요. 상처 없는 곳으로 쓰다듬어주세요.”
“그래, 우정아.”


우정이 얼굴에 난 상처는 며칠 전에 사랑이와 싸워서 생긴 상처입니다.
사랑이랑 산책을 하다 둘이 마주쳤는데 아주 격렬하게 싸웠거든요.


“그런데 우정아, 이제는 말 놔. 우리 이제 편하게 지내도 되잖아.”
“어... 그래도 아저씬데...”
“야, 너도 사람 나이로 치면 나이 먹을만큼 먹었어. 그리고 너랑 나랑 나이 따지면서 서열 정할 거야? 나 그런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어...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랑이도 나랑 편하게 말 놓고 지내는데.”
“그래요?”
“응.”
“알았어, 성민아. 크흐흐흐”
“야, 그게 그렇게 재밌냐?”
“뭐, 재밌다기보다는 좋아서. 아, 그런데 사랑이는 많이 안다쳤어?”
“어, 다리에 상처가 조금 있기는한데, 아휴~ 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때 너 피도 많이 흘리고 해서 걱정 많이 했다고.”
“아이씨, 그때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때 너도 봤지? 내가 너를 보고 좋아서 꼬리 흔들면서 달려갔잖아. 그런데 사랑이가 막 으르렁거리면서 시비를 걸어던 거잖아. 난 다시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건데, 걔는 속에 뭐가 들어앉았길래 그러냐?”
“휴~ 나도 속상해. 예전처럼 둘이 다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사랑이 입장도 이해 좀 해줘라. 예전에 너한테 공격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거잖아.”
“아이씨! 그때는 내가...”
“잠깐만, 우정아. 너를 탓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아이씨, 나도 알아. 그래서 자존심 다 버리고 다시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거라고.”
“그래 그래. 뭐, 어쩌겠냐, 앞으로 서로 조심하며 지내는 수밖에... 야, 그때 사랑이랑 싸울 때 내가 너한테 발길질 했던 거 마음에 두고 있어? 그랬다면 정말 미안해. 그 상황에서 둘을 말려야하는데...”
“아니야 아냐, 괜찮아. 그건 이해해. 싸움 말리려고 하다보니까 그랬던거잖아.”
“이해해주니까 고맙다. 니 얼굴에 난 상처도 걱정이었지만, 니 마음에 또 상처가 생길까봐서 그게 더 걱정이었거든. 너랑 어렵게 다시 친해졌는데...”
“마음의 상처? 음... 솔직히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우리 둘이 싸우고나서 너랑 사랑이랑 집으로 가는 모습 봤거든. 나는 상처가 나서 피 흘리는데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때 정말 서러웠어. 나도 누군가가 ‘아이고, 피가 나네. 아프지?’하면서 쓰다듬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우정이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우정아, 고개 돌려봐. 내가 쓰다듬어줄게.”


우정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고 저는 우정이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줬습니다.


“아이고, 우리 우정이 상처가 많이 났네, 많이 아프지?”


우정이는 제 손길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고 꼬리를 살며시 흔들었습니다.

 



(트램폴린의 ‘Boxer's w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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