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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뉴스제작단 이지영 이야기

카메라를 들고 다양한 삶을 기록하는 이들이 최근 많이 늘었다. 그만큼 영상문화가 발달했고,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영상문화가 발달하면서 많은 이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영역을 넓혀 가는 속에서 20년 동안 노동자의 투쟁과 호흡하며 영상운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 이지영 동지를 만나 노동자 영상운동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제주 출신인 이지영은 85년 고려대에 입학하면서 격동의 세상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들어간 첫날부터 총장퇴임 요구하면서 수업거부 시험거부 하고 있었는데... 그냥 무슨 이유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거에는 다 동참을 하고... 선생들이 막 말렸지만 그렇게 하고... 또 86년에는 문무대 거부하면서 도서관 검거하고... 그러다가 선배가 무슨 써클 하나 같이 하자고 그랬는데, 거기도 문학비평 한다고 그랬는데 운동써클 이었던 같아요. 그걸 통해서 맑스주의라는 것을 접하게 됐는데, 그때 보고나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는 그건 것이 있었거든요.”

 

꽤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이지영은 학생회에서 나름대로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당시 운동권이 보여줬던 매너리즘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조직활동은 하지 않았다.

 

“언더에 있던 선배가 와서 나 하고 두 세 명만 ‘공부를 좀 더 하지 않겠냐’ 해서 자본론을 배우면서 내용이 괜찮았어요. 그런데 학교 때 그런 걸 배웠다고 해서 뭔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어디에 투신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선배가 뭘 하자고 그래도 ‘나는 공부를 더 해야 하고, 아직은 미래를 결정짓지 못하겠다’ 그런 식으로 학생 때는 계속 그랬던 거 같아요. 책만 읽고, 집회 있으면 같이 나가고, 선배는 쫓아다니고...

나는 조직적으로 하는 활동은 안했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총학생회나 이런 데는 운동을 쑈맨쉽으로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싫었어요. 운동 열심히 하는 애들은 뭔가 우중충하게 다니고...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 가끔 학생회 들어오면 구석에 앉아서 뭔가 심각한 척 있고... 잘 나타나지도 않다가 갑자기 뿅 나타나는 이런 방식들이... ‘저게 뭐냐?’ 막말로 ‘자기 마스터베이션이다’ 이런 식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애들하고 같이 하고 싶었던 생각들은 별로 없었고... 고대 총학은 뭔가 겉멋에 하는 것 같고, 저것들은 권력지향적인 거 같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89년 졸업하면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려 하던 중 연계돼 있던 선배가 수배를 받으면서 연결선이 끊기게 된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곳이 KBS였고, 그곳에서 우연치 않게 90년 KBS파업을 경험하게 된다.

 

90년에 KBS 파업이 일어났어요. 내가 들어간 데가 다큐멘타리 특집부였는데, 나는 거기 계속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가면 그냥 책을 읽었거든요. KBS 파업이 일어났는데 나도 일을 안했어요. 그러니까 부장이 ‘미쳤냐? 니가 왜 파업을 하냐?’ 이러니까 ‘다들 파업을 하는데 내가 왜 파업을 안 합니까?’ 그러니까 ‘너는 여기 직원도 아닌데 왜 파업을 하냐’ 그래요. ‘생방송 하는데 가자’ 그러니까 나는 ‘절대 못 간다’ 그랬어요.

다른 애도 있는데 일부러 나한테만 생방송 하러 가자고 그런 거예요. 맨날 사회과학 책만 읽으니까 찍은 거죠. 파업하기 전에도 사람들하고 논쟁을 한 게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얘기예요. 특집부 사람들이 사회주의권 무너지고 난 다음에 동구권 가서 취재하고 오고 그랬어요. 맨날 갔다 와서 나한테 ‘니가 원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된 줄 아니?’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좋았어요. 그 사람들하고 논쟁하다보니까 진정한 사회주의가 뭐고 소련의 사회주의가 뭔지를 규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됐거든요. 그러는 바람에 거기서 찍힌 거죠.

그때 피디들한테 노래도 가르쳐주고 율동도 가르쳐주고 하면서 했었거든요. KBS 파업 끝나고 얼마 안돼서 ‘여기서 계속 있을 게 아니니까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 해서 나왔어요. 그때 그런 모습을 보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파업 때 구속되고 나서 나온 다음에 같이 술 한 잔 하면서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소개해 줬어요.”

 

영상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지만 해보고 싶어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노뉴단에서는 분명한 답을 주지 않았다. 노뉴단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6개월 동안 기다리면서 거의 집밖을 나가지 못했다.

 

“92년 1월에 들어갔어요. 처음에 들어갔더니 제작비 10만원을 내고 해야 된다고 해서 10만원을 내고,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때 마침 현대자동차에 성과배분투쟁이 일어났어요. 나는 제작이나 그런 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처음으로 거길 갔어요. 1주일 동안 카메라맨이랑 가는데 카메라맨이 가면서 ‘넌 가서 인터뷰를 해야 된다’ 그래요. ‘무슨 인터뷰를 하라는 거냐? 나는 여기 무슨 투쟁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그냥 가서 니가 대충 파악해서 하면 된다’고 그래요.

내려가서 1주일 동안 있는데 기자적인 순발력이나 이런 거는 있었던 거 같아요. 굉장히 인터뷰를 잘 했어요. 경찰대장한테도 인터뷰하고, 공장장 이런 애들, 길거리 지나가다가 현중 사람들 담 넘어 고개 내밀고 있으면 ‘지금 여기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보지 말고 나올 의향은 없느냐’ 이런 식으로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공장 출입이 막히면 단협 때 처음 본 공장장 보고 ‘공장장님 경찰들이랑 막혀서 못 들어가게 해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러기도 하고...

나는 참 재미있더라고요.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힘을 느끼고... 그때 김밥이나 라면 먹으면서 춥고 배고프게 했거든요. 그렇지만 사람들의 눈빛이나 살아있는 현장의 느낌들이 되게 좋았거든요.”

 

울산에서 다시 올라와 찍어온 영상물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면서 재미에 빠져들면서 서서히 영상편집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노뉴단 선배들은 활발한 이지영이 영상운동보다는 현장과 결합된 활동이 좀 더 어울린다는 판단에서 전노협으로의 파견을 주문한다. 그래서 93년부터 95년까지 전노협 문화부장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들어가자마자 전해투 문제가 터졌어요. 문민정부 들어서자 ‘해고자들 부분복직 시킨다’ 그러면서 전해투가 결성됐잖아요. 마포 민주당사 들어가서 농성하고 그랬어요. 전노협에 있으면서 내가 하는 일이 촬영하는 일이니까 촬영하러 들어간 거죠. 그렇게 전해투 작업을 계속 한 거예요. 그걸 97년까지 해서 ‘해고자’라는 작품을 만든 거예요. 굉장히 열심히 찍었고, 촬영 자료도 굉장히 풍부하고...

그다음 94년에는 민주노총 건설을 앞두고 있었잖아요. 전국에서 하는 모든 회의란 회의는 다 쫓아다니면서 계속 찍으러 돌아다닌 거예요. 그게 노뉴단에 있었으면 아무도 못했을 거예요. 그때 자료가 풍부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전노협에 있으면 오직 그 일만 열심히 한 거예요.”

 

95년 이지영은 다시 노뉴단으로 복귀하면서 본격적인 영상활동을 벌이게 된다. 당시 노뉴단도 활동이 정체돼 있던 상황이어서 새롭게 활동을 강화하는 시기였다.

 

“94년 이전에 노뉴단은 비상근 형태였거든요. 아르바이트 할 사람 아르바이트 하면서 작업 있을 때만 하는 그런 시스템이었거든요. 왜냐하면 그때는 돈을 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제작물이 안 되고 다들 각개로 논다 싶어서... ‘차라리 빚을 내는 한이 있어도 얼마를 주고 다 상근을 시킨다’ 그랬어요. 10만원인가 얼마를 준다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상근체제로 돌아섰어요. 사무실도 전노협 사무실 귀퉁이에 어떻게 얻어가지고 하고 된 거죠.”

 

선배들에게 이런 저런 격려성 꾸지람 속에 활동을 하는 가운데 힘겨움이 찾아왔다.

 

“전노협 해산되거나 민주노총 건설되는 과정을 보면서 노동운동이 참 한심하더라고요. 되게 실망을 많이 했어요.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하면 자신들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조합원은 잊어버린 채 개인의 욕심에 굉장히 집착하고... 사람들 배반하는 것도 많이 봤고... 그때는 노동운동을 관두자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 ‘해고자’라는 것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거 만들고 끝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노뉴단 와서 작업을 하다보니까 작업이 좋아서 하고 있죠.”

 

88년 만들어진 노뉴단은 처음부터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하기 위해 대중조직과의 사업들을 활발하게 벌여오던 단체였다.

 

“노뉴단이 만들어지기 전에 서울영화집단이라고 영화운동을 하던 단체가 있었어요. 서울영화집단에 배인정 선배가 대표였어요. 87년 대투쟁부터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잖아요. 그 선배가 ‘이런 것을 영상운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안에서 ‘아니다. 우리는 영화운동 하는 사람들이지 속보나 뉴스 그런걸 뭐 하러 하냐. 우리는 기획되어진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반대가 있었어요.

88년에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것을 찍었던 서울대 영상단체가 있는데 선배언니가 그걸 알게 된 거죠. 그 사람들 하고 얘기를 하면서 서울영화집단을 해소를 하고 88년 3월에 노동자뉴스제작단을 만들었어요.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당시 ‘전국에서 벌어지는 현장의 얘기들을 속보로 담고 그래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높이는 전국적인 소통을 마련하는 것을 영상으로 하자’라는 취지로 ‘노동뉴스 1호’부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이거는 노뉴단 혼자하면 안 돼요. 배급이 중요하잖아요.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대중조직하고 공동으로 사업하려고 한 거죠.”

 

주로 속보와 투쟁역사 기록물을 중심으로 작업을 해오던 노뉴단은 90년대 말 이후 노동자 교육물 제작에 집중하게 된다.

 

“노동운동 상황도 점점 변했잖아요. 활발하고 막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라... 패배하는 투쟁들이 많고... 지는 싸움들을 누가 보겠어요. 그렇게 노동운동 상황도 변하면서 노뉴단도 변한 거죠.

96~97년 노개투를 마지막으로 속보적인 형태는 더 이상 안 나오고 본격적인 교육물 형태로 가요. 교육물이라는 게 굉장히 작업 난이도가 높아요. 대본을 대중조직에서 써줘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나와요. 그래서 노뉴단이 미치는 거죠. 이걸 노뉴단이 써야 하는 지경까지 왔는데... 교육물을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쪼개서 쓰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다보니까 산만하고 백화점식인거 같고 그런 게 있어요. 2003년부터 노뉴단이 혼자 대본을 쓰기 시작해서 완전하게 된 해가 2004년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교육물인 ‘노동자의 단결로 미래를 노래하라’예요. 그거를 통해서 노뉴단에서 교육물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거죠.”

 

제작비와 인건비 등이 만만치 들어가는 영상물을 제작하는 것은 재정문제를 항상 고민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옛날 전노협이 있을 때는 우리가 우리 돈 내고 작품을 만들면 배급을 시켜줘요. 처음에는 보따리 짊어지고 장사하러 돌아다녀야 돼요. 그렇게 제작비를 회수해요. 제작비가 70% 회수되면 많이 회수된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조금 제작비가 회수되면 그걸 갖고 작업을 해요.

전노협은 돈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작비를 받고 일을 해요. 그전까지는 빚이 많았고 현대중공업노조사 하면서 빚 청산을 1차로 했어요. 지금은 사전에 제작비 내역을 보내서 돈을 받고 해요. 정말 돈이 없는 데는 500만원이 들면 100만원도 받고 하는데...

옛날에는 영화진흥위원회 기금을 받아서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요. 그 다음에는 우리가 만든 영상물을 파는 건데 돈이 별로 되지 않아요.”

 

노뉴단은 96년부터 의욕적으로 국제노동영화제를 시작해 10년이 넘게 진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영화제에 대한 성격과 영상운동에 대한 이견이 노뉴단 내부에서 나타나 진통을 겪는 과정이 있었다.

 

“김명준씨가 노뉴단 대표로 있었을 때 외국을 많이 돌아다녔어요.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만나면서 외국 영화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노뉴단이 영상패 조직들을 했었는데 그런 영상패들의 활동의 성과물, 노뉴단 활동의 성과물들을 함께 공유하자는 게 취지였어요. 1회 영화제는 노동미디어 관련 회의하는데 영화제가 끼어서 한 거였고, 2회 때부터는 본격적인 국제노동영화제로 판을 만든 거죠.

그런데 영화제를 한 번 하려면 노뉴단이 전부 달라붙어서 해야 하거든요. 왜냐면 영상패가 작품을 만들려면 한 사람이 완전히 달라붙어서 편집 작업을 다 해야 돼요. 그러면 노뉴단이 꼼짝을 못하는 거예요. 노뉴단이 어느 순간부터 작업이 많아지고 그러면서 노뉴단 인원이 전부 달라붙어서 영화제를 준비하기가 버거워 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영화제 기간 동안에 지원단형태를 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제가 노뉴단 중심에서 지원단으로 간 거예요. 노동자뉴스제작단이 영화제에 아무런 할 일을 못하는 거예요. 3~4년 전부터 ‘노뉴단이 지원단에게 다 맡겨놓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이래도 되는 거냐’ ‘노뉴단이 이 사업을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된다’ 그런 고민이 든 거예요.

그러는 와중에 영화제 사무국을 둬야 된다는 얘기가 나와요. 그건 독자적인 조직이 되는 거죠. 내부에서 사무국 얘기 나왔을 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 와중에 노동영화제를 노동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도 있었거든요. 우리는 ‘왜 그래야 되는 거냐? 무수히 많은 영화제들이 있는데 우리도 대안영화제처럼 할 필요가 있느냐? 우리는 노동문제에 집중하자’ 그러면서 반대했어요.

그러면서 영화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회의를 했죠. 논쟁을 하면서 노동영화제를 계속 하자는 게 사람들의 대부분 의견이었어요. ‘노뉴단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할 거면 노동영화제를 축소할 수밖에 없다. 소규모 작은 영화제여도 우리가 스스로 준비하면서 우리 처음의 의도들을 살리자’라고 결정을 했어요. 그러면서 전 대표는 노뉴단을 나가게 돼요.

노동영화제는 그 다음부터 그런 식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지역영화제도 고민해요. 노동영화제가 너무 서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역 개최도 생각해보고, 인터넷 개최도 생각해보고, 영화제를 통해서 노동운동의 쟁점에 대해 토론도 하고 그런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조직이 쉽게 되지 않더라고요. 앞으로 노동영화제는 지역영화제를 계속 키워나가야 되고, 영화제가 와서 영화만 보는 것들이 아니라 그해에 있었던 노동현안에 대해 토론도 하고 얘기도 하는 자리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영상물 제작과 영화제 외에도 의욕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인터넷 포털 노동자방송국 사업이다.

 

“노뉴단이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인터넷 노동자방송국 만드는 거거든요. 기획안이고 뭐고 다 나왔었어요.

94년에 영상패 수련회를 하는데 그때 ‘노동자방송국을 만들자’라고 그랬어요. 그걸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전국영상활동가 수련회가 끊꼈거든요. 나름대로 영상패들은 조직되고 있지만 그거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잘 안 되고 있어요.

옛날부터 그런 고민을 계속 해왔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인터넷을 고민하게 된 거죠. 그런 시도를 처음 한 게 기아자동차 교육을 하는데 온라인 교육을 시도해 본 거예요. 그리고 현대자동차 프로젝트 하면서 홈페이지에 따로 코너를 만들어서도 해보고... 이런 시도들은 계속 있는 거죠.

이런 시도들을 하면서, 다른 쪽에서 하는 것들도 보면서 ‘그럼 포털 방송국을 만들어보자’ 그랬어요. 그러면서 기획안까지 다 만들고, 프로그램도 다 만들고, 외국에 가서 발표까지 다 했어요. 그걸 막 진행 시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없어서 당분간 작업 중단이 돼 버렸어요. 이거는 노뉴단이 벌여놓은 일들이 정리되면 다시 시작할 거예요.”

 

다큐멘타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왔던 노뉴단은 최근 극영화를 도전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다.

 

“현장에 갔을 때 ‘파업전야 같은 노동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근데 영화를 만든다는 게 만만치가 않잖아요.

우리가 RTV 노동프로그램을 하는데, 다음 시즌 기획을 하면서 ‘드라마 같은 형태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미니시리즈 형태로 30분씩 나가는 거를 해보자’라고 RTV 제작팀에 얘기했더니 되게 좋아하죠. 그래서 기획안 만들고 영화 만들었던 사람 데려다놓고 해보려고 했었는데 그게 안 굴러갔어요. 200만원 갖고 30분짜리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으니...

1회 대본을 쓰고 그랬는데 드라마 만드는 게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영진위에 지원서를 넣었는데 안 된 거예요. ‘대본은 좋은데 당신들이 이걸 만들어 낼 수 없다. 노뉴단이 영화작업을 간단하게 생각하나 본데 영화작업이 간단한 게 아니다’ 이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그게 캔슬되면서 작업동력은 안생기고 계속 물고 있다가 현대자동차에서 노동방송국에 대한 의뢰가 왔어요. ‘그러면 영화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하게 된 거예요.

우리가 영화를 처음 작업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말 들으면서 하다 보니까 돈이 많이 들었어요. 모르니까... 그렇게 하다보니까 댓가를 많이 치뤘죠. 앞으로 그렇게 큰 돈 들여서 하는 영화는 안 만들 거예요. 드라마 형태든 영화 형태든 계속 만들 생각은 있어요. 제일 좋은 거는 드라마 형태로 계속 나오는 거를 하고 싶은데...

다큐멘타리로는 우리가 해 볼 거는 거의 다 해봤어요. 이걸 중단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에서 새로운 장들을 열어줘야 하잖아요. 그 장에 드라마 형태 극영화 형태를 넣어보자 하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또 노뉴단이 갖고 있는 노하우들을 자꾸 높여내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요. 그거를 드라마라는 형태로 펼쳐보는 거예요.”

 

그동안의 활동 결과로 많은 영상패들이 만들어졌지만 영상패들의 활동을 한 발 진전시켜야 하는 것이 고민으로 다가오고 있다.

 

“영상패는 모아서 수련회 한 번 하는 걸로 조직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 사람들은 일거리를 주고 일을 하게 만들어야 돼요. 노동영화제가 그랬단 말이에요. 영상패들에게 ‘1년 동안 작품 하나 내놔라. 그러면 풀어주는 공간을 만들어주겠다’ 그러면서 작업을 하게 만든 거거든요. 초기에 기금 나오면 영상패들에게 돈 주면서 작업하게 했거든요.

영상활동가들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영상활동가가 될 수가 없어요. 말로 푸는 영상활동가는 절대 안 되기 때문에 작업을 해야 돼요.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부여해줘야 되는데... 중소단위 사업장은 조직적인 역량이 없고, 대기업은 너무나 큰 거를 부여해서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아요. 기계만 엄청 쌓아놓고는... 프로그램도 개발해서 발전해야 되는데 정체돼서 딱 그 수준만 만들어내고 끝나잖아요. 영상 강사를 둬서 일을 시키려고만 하지 스스로 발전하려고 안 해요.

노동방송국 같은 경우도 영상패들에게 작업을 주는 의미였어요. 끊임없이 영상패들이 작업을 해서 올릴 수 있도록...”

 

현재 노뉴단은 4명이 상근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주어지는 일들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인원이다.

 

“노뉴단은 팀으로 움직이는 거기 때문에 팀워크가 굉장히 잘 돼야 돼요. 팀워크가 잘되려면 서로의 감성이 맞으면서도 쿨하기도 하고 그래야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한 사람이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팀워크가 무너져 버려요.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팀워크는 최상이에요.

그런데 지금 벌여나가는 사업으로 봐서는 사람이 굉장히 부족하죠. 2년 전부터 일상적인 촬영은 거의 못해요. 일상촬영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업 의뢰 들어오는 것조차 다 할 수 없는 거예요.

신입은 요즘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요. 들어오려고 해서 해봤더니 안 맞아요. 요즘 애들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요.

그래서 시스템을 변화시킨 게 외부에 있는 인력을 프로젝트 형식으로 가끔씩 데려다 써요. 예를 들면 노뉴단이 기획을 하고 대본을 쓰고 편집만 맞긴다든지, 아니면 기획하고 진행 봐주면서 나머지 대본 쓰고 연출하는 거를 맞긴다든지... 그런 식으로 변하지 않으면 노뉴단이 일을 다 못해요.”

 

이지영은 노동자 교육의 수단으로서 영상물의 활용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고, 그를 위해 노뉴단도 더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에 드는 생각은 ‘지금처럼 있어서는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던지 자꾸 뒷북친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노동운동은 점점 우경화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단단하지 못하면 앞으로 5년~10년을 내다보기 힘들다고 봐요. 옛날에는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라고 그랬는데, 요즘은 파업이 쉽지가 않아요. 그리고 파업을 하더라도 힘들기만 하지 학교가 되질 않는다고요.

그렇게 봤을 때, 일상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갖춰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언제 무슨 일이 터졌을 때 싸울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거는 교육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교육을 일상적으로 정기적으로 해줘야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런 무기들을 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영상이고... 교육방법 중에 하나가 영화를 보고. 강사가 얘기를 하고, 노동자들이 실천을 하는 게 가장 남는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 식의 교육방식을 노뉴단에서 많이 셋팅을 해요. 그것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영상이 굉장히 중요해졌다고 봐요.

기획해서 교육용 다큐멘타리를 제대로 만들 수 있고, 교육방법들을 ‘다큐멘타리에서 드라마로, 드라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여러 가지로 옮겨 다니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을 테스트 해보는 거죠. 그런 무기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현재 노동운동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해요.”

 

나름대로 국제연대 활동도 벌이고 있지만, 국제연대라는 것이 당위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국제연대는 가능성은 열려있지만 가능성을 현실화시켜내는 게 정말 만만치 않아요. 국제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활동의 방식이나 역량은 천차만별이에요. 노뉴단 같은 경우는 영상쪽은 굉장히 발달해 있어요. 다른 쪽으로는 거의 없어요. 노뉴단이 지금까지 200편 넘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걸로 노동자들을 조직적으로 교육시켰다고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는 깜짝 놀라요. 그런데 아프리카나 이런데 보면 라디오방송 쪽으로는 되게 발달돼 있어요. 이런 식으로 천차만별이에요.

이런 경험들을 서로 나누고 어쩌고 저쩌고 하자고 그러는데 ‘세계적으로 어떻게 나누냐’ 이거예요. 우리 비디오를 영어로 제작해서 나누면 되는데, 그걸 하려면 재정과 인력이 빵빵해야 되거든요. 그것만 하는 전문적인 사람이 있어서 전세계적인 교류를 해야 되는 건데... 지금은 의사소통만 하고, 회의 한번 하고, 공유하고 이런 정도인데...

조직이라는 게 공동의 사업을 통해서 묶여야 되는데... 공동의 사업이라는 게 너무 애매한 거예요. 전세계의 단결과 네트워킹을 위해 굉장히 노력들은 많이 하고 있는데, 그게 현실화되기에는 구체적이지도 않고... 현실화시켜내려면 전문적으로 그거를 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되요. 다른 일 하면서 메일로 이렇게 하는 것으로 안 될 거 같아요.”

 

쉼 없이 20년에 이르는 세월을 달려온 이지영에게 신념과 열정과 조직에의 애정은 활동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2002년쯤에 너무 지친 거예요. 당시에는 노동운동도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할 때였거든요. 운동의 객관적인 조건도 그렇고 내 상태도 그러니까 다 때려 치고 싶은 그런 상태였어요. ‘이걸 계속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그렇긴 하는데 그때 잡아준 게 노뉴단이죠.

나를 움직이는 세 가지가 있다면 신념하고, 열정하고, 노뉴단이라는 조직에 대한 애정이에요. 신념과 열정이 흔들렸을 때 노뉴단이라는 조직이 나를 잡아줬거든요. 신념과 열정도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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