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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더위를 견디고 견디다 너무 힘들어서 영화관으로 피서를 가기로 했다.
무슨 영화를 볼까 둘러봤는데, ‘암살’과 ‘베테랑’을 놓고 살짝 고민했다.
최근에 본 최동훈과 류승완의 영화로 보면 당연히 최동훈 영화가 재미있겠지만
영화에 대한 평이 ‘암살’은 별로고, ‘베테랑’을 괜찮다고 하니 고민될 수밖에...
두 영화를 놓고 잠깐 고민하다가
최동훈의 영화 중에 가장 평이 좋지 않았던 ‘전우치’와
류승완의 영화 중에 가장 평이 좋았던 ‘부당거래’를 비교해보고는
최동훈의 ‘암살’을 보기로 결정했다.
사회적 문제와 싸움을 벌이는 듯 하다가 옆길로 빠져서 캐릭터끼리만 싸우는 얄팍한 류승완 영화보다는
역사니 사회니 하는 문제와는 담을 쌓고 오직 캐릭터들의 놀이터를 만들어버리는 노골적인 최동훈의 영화가
더위를 잊기 위해 보는 영화로는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도둑들’만큼은 아니어도 ‘전우치’ 정도만 되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론은, 정말 최악이었다.
영화 보는 내내 하품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영시간이 길어서 팡팡한 에어컨 바람을 잘 쐬고 왔다는 점이다.

 

최동훈 영화가 원래 신선하거나 독창적이지 않기에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역시나 어디선가 봤던 듯한 뻔한 이야기 구조에
식민지 시대 항일과 친일이라는 역사의식은 장신구로만 달려있는 노골적 오락영화인데
다른 최동훈 영화보다 한 번쯤 더 캐릭터들의 관계를 꼬아놓은 것이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뻔하고 허술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최동훈의 매력은 톡톡 튀는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이 너무 오버하거나 균형감을 잃지 않게 만드는 조련술에 있었다.
그런데 ‘암살’에서는 어느 캐릭터 하나 살아서 움직이는 게 없었다.
독립군과 일본 경찰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하는 이정재는 ‘신세계’에서 보여줬던 소극적인 역할보다 좀 더 적극적인 역할로 바뀌었을 뿐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직선적인 성격의 명사수 여전사인 전지현은 안젤리나 졸리의 매력도 애니콜의 매력도 전혀 없는 맹숭맹숭 한 모습만 보이주다가 뜬금없이 쌍둥이 연기를 보여주면 관객을 놀라게 했다.
약방의 감초 같은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오달수는 ‘방자전’이나 ‘조선명탐정’ 같은 데서 봤던 캐릭터를 매력 없이 연상시켰다.
가장 압권은 하정우인데, 내가 지금까지 봤던 하정우의 캐릭터 중에 가장 맹숭맹숭한 캐릭터였다.

 

캐릭터들이 이렇게 힘이 없으니 감칠맛 나는 대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힘없는 캐릭터들을 살리느라고 곳곳에서 무리수를 두지만 불발탄만 터지고
힘없는 캐릭터로 힘없는 이야기를 끌어가려다보니 우연이 너무 남발해서 방향감각마저 없어졌다.
막판에 이런 캐릭터들을 어거지로 한 곳에 다 모여들게 만들고 난장판을 벌이지만
10여 년 전에 ‘넘버3’가 보여줬던 난장판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최동훈의 영화는 캐릭터와 팽팽한 조련술의 영화인데
캐릭터들이 생명을 얻지 못하니 조련술을 발휘할 여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암살’을 본 덕분에 ‘부당거래’에서 그 다지 멀리 나가지 못했을 ‘베테랑’에 대한 기대도 팍 줄어버렸다.
이 정도면 ‘암살’이 ‘베테랑’을 이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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