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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2/15
    내 안의 금
    참게
  2. 2005/02/15
    프롤로그
    참게
  3. 2005/02/15
    이중성2
    참게
  4. 2005/02/15
    이중성
    참게

내 안의 금

○ 블랙백        (E)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 블랙백                  (자막) 내 안의 금

 

인터뷰 "쁘띠 브르조아들이 갖는 견고한 윤리의식이 있거든...열린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게 안돼....창조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건데 기존의 가치에 너무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게 안되는거야...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나루, 자혜, 영심 회의 모습
-카메라 들고 작업하는 나
-우리 집에 모여서 이야기하는....
-우리 집 스케치

 

(N)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다.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얼마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나는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정직해질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인터뷰 "우리가 진실을 알기 위해서 이 작업을 한다고 그러는데 우리는 이 작업을 하는걸 의식하고 있으면서 얼마나 정직하게 토로할 수 있으며 끄집어낼 수 있을까...청소할까 했는데 안했어....누가 온다는데 청소 안하는건 정직한 걸까...의식한다는걸 의식한다는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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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내가 쓴 소설들 (육필원고 + 타이핑한 원고)  
-신춘문예 당선 기사 + 활자화된 원고

 


 

(N) 나는 서른 여섯 살에 등단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 못했다.
    내가 문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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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2

사람은 누구나 이중성을 갖고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사실일까?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라는게 아주 엄청날 때는 자칫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다.   지극히 이중적인 인간, 위선의 도가 지나친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한 혐오감을 갖는가?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 이중적인 사람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잣대를 가질 수 있을까?

거의 어려운 문제다. 

나는 내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간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정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있는 아무개는?  또 아무개는?   그것은 더 알 수 없는 일이고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이중적인 잣대로 세상을 보는 일, 그것은 오랫동안 습성화되어 굳어버린 습관이라 할 수 있고....

 

투명한 사고란 지성보다는 감성의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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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

어제도 후배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이중성에 대해서 문득문득 의식을 했다.

가끔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쳐 심정이 말할 수 없이 답답해서 호소를 해오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그럴 듯한 태도로 그런 사람들을 위로해 주곤한다.

내가 취하는 태도는 가장 공정한 체하기, 만사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듯 초연한 체하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예언자연하기, 가엾은 중생이여 하며 불쌍해 하기 등등인데 그런 말들을 하면서 내심으로는 끊임없이 '흥,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너 자신도 아직 하나도 극복 못한 것들이잖아...'하면서 나 자신을 비웃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참.....복잡하다.

자기가 왕따를 당하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싫은 소리를 듣는데 왜 그런지를 모르겠다.  그럴 만한 아무 이유도 없는데 그런다는게 그 애의 하소연의 요지였다.

사실 그애의 말이 액면 그대로 다 사실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애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애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만한 근거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애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사람들이 싫어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애한테는 그런 말을 비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애의 하소연을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예의 그 '...연하는' 습성 때문에 잘난 체하면서 그애의 말을 들어주고 충고까지 해주고 있었다.

나는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곤란을 들어주고 충고하기를 즐기는 나의 이중성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즐기는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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