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쌍추 쌈을 먹다가 한 가족의 탄생기를 듣다

몇 주전 논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집은 논에서 먹는 점심은 특히 봄철은 밭에서 나는 여러 종류의 상추와 쑥갓 등의 푸성귀 그리고 된장국이-새끼 손가락만한 멸치가 꼭 두 마리가 들어있다, 이것만 빼면 만족할 만한데- 주된 반찬이다.

 

그날 모자란 일손을 도와주시러 온 나이 많으신 아주머니-우리집과 매우 돈독한, 집은 좀 멀지만 이우지, 일명 형광댁이-께서 쌍추 쌈을 싸시다가 어느 일가족의 탄생기 비슷한 얘기를 들려 주셨다. 아버지께서도 소년시절 때라 알지 못하는 이야기. 나는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엿듣기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 참 재미가 있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본다. 이야기 중 대화가 여럿 오고 갔지만 그것은 빼고 적는다.

 

"예전에도 참 상추 이걸 많이 먹었는데. 왜 그리 많이 먹었는지 몰라. 늘 상추가 없었으면 밥을 못 먹었으니. 많이도 묵었다아이가 한 소쿠리 가득. 아마 밥이 적어 상추나 풀로 배를 채울라고 많이 먹었지 싶어. 그래서 늘 점심 전에 동네 도랑으로 상추를 씻으러 많이 갔다아이가.

 

상추 씻으러 간 도랑에서 칠성이(가명)엄마 아나? 거기서 칠성이아빠랑 그리 된 기다아이가.

봄에 하루는 칠성이엄마가 상추를 씻으러 갔는데, 저짜저 거기. 야가 없어진기라. 그 집에서 찾으러 가 보이끼네. 도랑에 쌍추소쿠리만 덩거리니 있제, 사람이 없더라아이가. 어째 된 것인고 하니, 칠성이엄마가 도랑에 갔는데 칠성이아빠가 옆에 보리밭으로 델고 들어가서 눌맀붔지. 그라고 칠성이아빠는 일하러 갔부리고. 칠성이엄마는 보리밭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 안에 한참 들앉아 있었다아이가. 칠성이엄마는 순진해서 수산-20리 정도 떨어진 읍네-이 뭔지도 몰랐어. 나가보다 못 했고. 나도 참 웃겼었지. 그걸 찾을끼라고 돌아댕기고, 보리밭에서 찾아서 뭐했노 물어 봤시. 나도 그때는 젊었을 때니까.

 

그래가꼬 사람들이 찾아냈는데, 좀 있다가 칠성이아빠가 밤에 칠성이엄마를 델꼬 어디로 내뺐버린기라. 그래 있다가 누가 저짜 삼랑진 다리 밑에서 찾았는데, 칠성이엄마가 새벽에 아침도 안 묵고 조개캐러 가는 거를 찾았는 기라. 칠성이아빠는 없고. 그래가꼬 델꼬 왔는데 그때부터 칠성이엄마를 밤마다 다른 데 재운 기라. 돌아가면서. 와 거기 동네 친척들 집에 돌아가면서 밤에는 불서고 장성들이 대문걸에 지키고 있고. 그때 칠성이아빠가 돌아와서는 밤에 돌아 댕기면서 술묵고 나댔거든. 델꼬 온나고, 다 쥑이뿐다꼬. 낫들고. 그래 돌아가면서 징키고 했지. 밤에 잠도 못 자고.

 

와 그래 식구들이 싫어했냐면 칠성이아빠가 그때 가진 것이 없었다아이가. 넘 머슴 살고. 아무 것도 없었지 그래서 싫어했지. 그래 안 했으면 장개도 못 가지. 그때는... 장가 가 볼라꼬 그랜 거지. 그래가꼬 칠성이엄마가 안 되겠다 싶어. 식구들한테 얘기했다아이가. 그냥 갈끼라고. 그래가꼬 우째 살겠노? 그자?

 

이래이래 가지고 둘이 결혼을 했는데, 그예 칠성이아빠가 바람을 핐으니 될끼가 그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Let it be에 반하는 것, 악의 규정

악이란 무엇일까?

신학에는 전혀 문외한이라 체계적으로 그것도 정당한 방식으로 규정할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선, 악의 양면적 모순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악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본 악이란,

강요를 통한 폭력과 그것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 폭력은 즉 힘의 행사는 신체적 폭력을 포함한다.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폭력에는 긍정적인데, 이렇게 보면 악은 행위자체가 아니라 목적과 관계되는 셈이다.

 

그 악이라고 부를만한 목적은 무엇인가? 악은 강요하고 억압하여 순종하게 만들어 자신의 발 아래 타인을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행사하는 신체적 폭력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

 

개념에 대한 선명한 느낌을 얻기 위해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해 보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선은? 나는 선이 내버려 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Let it be-내비 둬-. 스스로 살게 내비두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존레논의 'let it be'와 'imagine'이란 곡을 사랑한다.

 

오늘자 경향신문 일면에 책소개란에 이런 문구가 있다.

'詩聖은 오늘도 말한다. 서민을 배려하라.'

「두보시선」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의 제목이다.

서민에게 최선은 무엇일까? 그냥 내비두는 것이다. 뭘 배려하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 서민을 위한 것이다. 서민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으며 행복을 영유할 수 있다. 간섭과 수탈만 없으면.

 

우리사회는 그야말로 악 속에서 운행되고 있다. 각종 법률과 세제, 그것을 지탱하는 기구, 학교, 정치, 미디어 그리고 시장. 그것들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계속 머릿속을 울려된다.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나는 현재 내가 당면한 지상최대의 악은 끝판대장으로 '국가'인 셈이다.

그들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국가는 사람을 규정하여 시민으로 만들고, 간섭하고 억압하는 대표적인 기구이다. 국가 속에는 자잘한 기구들도 모두 그러한 작용을 돕는다. (규정, 간섭, 강요, 억압 등이 레이지 어겐인스트 더 머신이 말하는 Machine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밴드도 사랑한다.) 이러한 강요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느니, 복지정책이라느니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마치 국가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인 것 마냥. 나는 여기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가장 못마땅한 것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면 핀란드에서 태어났으면? 그것도 못마땅할 것이다.

 

나는 국가를 전면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데. 어떠한 정치 체제를 갖춘 국가라도, 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면 모두 악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속 대의민주주의 국가도 싫다. 직접민주주의 국가도 싫고, 맑시즘에 기초한 사회주의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도 싫음은 물론이다. 이런 국가를 지지하는 여러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정당정치는 이건 아니다 싶다. 정당은 일단 국가를 긍정하며 권력에서 우위를 독점을 쟁취하기 위한 기구일 뿐이다. 행여 진보정당에서 대통령이 선출되고, 여당이 된다고 하여 국가의 강요와 억압이 없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가들-맑스를 열심히 읽고 신봉하는- 그리고 그러한 단체들 하는 일들이 올바른 점이 있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러한 운동은 근본적으로 불순하다. 왜냐면 모든 노동자들을 해방시켜려고 하는 취지는 좋아보이나 특정한 사상 즉 맑시즘의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하려는 목적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해방이 가능할 지는 모르나 설령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에 선은 그들이 해방하는 순간 해산해버리거나, 그들끼리 그것을 만들고 싫은 사람은 내버려 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 혹은 해방 속에 현재 우리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을 귀속시키길 원한다는 점은 빤하다.

 

나는 간디가 한 주장에 대해서 혹은 그가 쓴 책을 자세히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꼭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기지고 있는데, 언젠가 읽어본 글에서 인용하기를, 간디가 인도는 독립하면 7만의-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는다- 마을공동체로 구성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단다. 이 주장이 참 마음에 든다. 그랬다면 인도는 참 선한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말이 많이 길다. 여러 가지로 뻗치는 생각은 행간사이에서  퍼져나가기만 하니 여기서 그만 두어야 겠다.

 

간추리자면 현재 내 짜른 생각으로는,

 

선은 내버려 두는 것이요, 악은 강요하는-모든 강요에는 부당한 목적이 있으니- 것이다.

나는 선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세상사람 모두가 선하게 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에는 국가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라 마을사람이 될 것이다.

 

 

* 적고나서 보니 이건 완전 이적행위로 규정될 소지가 다분하다. 혹여나 이 글을 읽은 사람은 신고를 말아주길 빈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지만, 인정으로 호소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 형사처벌 검토 중

오늘 경향 신문을 보니

 

울산에서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를 형사처벌하려고 벼러고 있단다.

 

1300여명의 교사가 일제고사 거부 서명을 했다는데-숫자가 많이 부풀려진 느낌이 있다- 이에 대해 공무원법을 적용해 단체행동금지에 관한 조항을 어긴 죄목이다.

 

며칠전 신문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걸 따져서 징계를 할 방침이라고 한다.

 

곧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에게 물을 수 있는 죄는

 

ㄱ.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

ㄴ. 단체행동 금지의 위반

 

이다. 공무원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이 노동 2권만이 보장된다.

 

이제 교사들은 근본적으로

 

ㄷ. 양심에 의해 명령에 불복종할 자유

ㄹ. 단체행동권

ㅁ. 교육과정과 수업에 교사의 온전한 자율권

 

을 국가 혹은 교육청을 상대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요구를 하려면 거부를 위한 거부 즉 단체행동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위 ㄱ, ㄴ을 교사 스스로가 인정하면, 당연히 그들은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지방교육청 즉 직속상관이 일제고사는 무조건적으로 치뤄야 한다고 명령이 하달된 상태에서 거부를 한 것이고, 그들의 일제고사 거부는 단체행동에 준하여 국가의 정상적 상태에 심대한 위기를 끼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제고사는 나쁜 것이야. 그래서 나는 거부해. 나라에서 설마 옳은 일을 하는 자에게 칼을 꽂겠어?' 이렇게 순진하다면-국가에 대항하기에는- 그냥 잘리는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냥 잘라서 TO나 늘려다오. 교정징계는 아니된다. 배제징계를 내려다오. 위대한 국가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도서관의 병폐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매일같이 간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란 곳이 심각한 병폐를 가진 곳이다.

 

정말 대단한 작가들과 그 작가들이 쓴 대단히 좋은 소설들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뿌리칠 수 없이 달콤한 유혹을 한다.

 

날 읽어라고 막 소리친다.

 

딘 R 쿤츠, 히가시노 게이고, 하워드 패스트, 존 스칼지, 빌 S 밸린저, 크리스 보잘리언, 짐 크레이스, 앨런 폴섬 등등... 이들의 목소리이다. 더 문제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3월 달에 헤아려 보니-전공책 빼고- 12권의 책을 읽었는데, 우리나라의 책은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과 권성현 등이 엮은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 이 두 권밖에 없다. 왜 그럴까?

 

나에게 정말 좋아하는 작가와 소설을 꼽아보라면 모두 외국작가와 외국소설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좋아하는 작품은 여럿 되긴 하지만, 작가는 김유정, 성석제 정도 밖에 없다. 왜 그럴까?

 

원작의 아우라에는 못 미칠 수 밖에 없는 번역이라는 약점을 지니면서도 왜 그런 것일까?



내 생각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우리나라 문학은-물론 예외는 있다-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다. 나는 소위 장르문학이라고 하는 스릴러 소설-영화도-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스토리에 있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스릴러 장르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상황이고 또한 그러한 장르 소설이 아닌 소설이더라도 스토리가 빈약하며-내용이 빈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빈약한 부분을 서술자의 의식이 많은 부분 메꾸고 있다. 그래서 극적-드라마-이지 못하다. 스토리 진행은 느려지고 감정이입을 지독하게 요구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싫어한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둘째는 우리나라 문학을 처음 접하는 곳은 중고등학교의 국어시간이다. 그런데 이 국어수업이란 것이 문학을 정말 재미없게 만든다. 주제는 무엇이고 소재는 무엇이다, 기법은 이러한 것이 쓰였다. 문단을 나누고 여기 밑줄을 죽- 그어라. 이런 수업 방식 뿐 아니라 교과서 속 문학작품은 지독하게 재미가 없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다. 그것도 수십년전의. 이런 것들로 문학적 문화의 고양하려고 한단다. 이러한 수업 방식과 교과서 속 문학작품은 분명 우리나라 문학에 대한 일종의 선입관을 갖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선입관을 가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어교육의 기둥 [말에는...]

말에는 힘이 있다.

 

말에는 길이 있다.

 

말에는 법이 있다.

 

 

이 세 가지가 거의 모두 작용하겠지만,

 

말의 힘을 가르치는 데는 문학이 좋고, 말의 길을 가르치는 데는 언어사용이 좋고, 말의 법을 가르치는 데는 문법이 소용이 된다.

 

이 세 개의 기둥은 언제나 국어교육을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좌우명

내게 좌우명이 있었나?

 

있었다면 이걸로 바꾸고-없었다면 이걸로.

 

내가 아무리 옳고 상대가 그르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그르고 상대가 옳다 하더라도.

 

세우지 말기.

 

좌-우라고 하니 하나 더 보태도 말이 어긋나지는 않겠다.

 

자기연민하지 말기.



이젠

 

세상을 좋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신념,

 

민중의 단결, 투쟁,  연대, 해방... 이런 이념적 기치들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 내 얄팍한 머리로는 답-은 물론이거니와 내 행복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 같다.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은 사회라는 이름의-자기파괴의 궤도로 욕망과 억압의 힘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

 

좁은 숲길을 느긋하게 걷는 인생. 거기에 맞잡은 손.

 

이것만이 필요하고 절실하다.

 

빠른 속도로 레일 위를 질주하는 쾌적한 기차 속 졸음 겨운 승객을 깨워

 

기차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희한한 경유역-종착지는 물론 죽음-을 통과해 간다고 일러주어

 

그 짜증 섞인 승객의 '걱정마. 차장이 다 알아서 갈꺼야.'라는 핀잔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기차를 돌릴려고-멈추려고-늦추려고 아웅다웅 해볼까?

 

돌려도, 멈춰도, 늦춰도 기차간은-특등석, 일등석, 이등석, 일반석, 입석으로 나뉜- 기차간이다.

 

뛰어내리자고 설득을 해 볼까? '미쳤냐? 그러다 다리 부러진다.'는 대답.

 

내려 내 삶을 느긋하게 걸어나가는 것이 내 직접행동이 될 수 있다.

 

그 뛰어내림을 위해-자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일등석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나가기 위해 들어 가기.

 

나는 이것을 성공해야만 한다. 서글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ime Goes By

Time goes by.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힘든 시간도 흘러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외면해도 시간을 흘러 버린다.

 

괴로움을 견디면 즐거움이 오기 마련.

그것을 잔인하게 기다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워낭소리>

웬 가리늦가 워낭소리냐 하면,

 

오늘 도서관에 갔다오니 부모님이 조금 더 늦게 들어오셨다.

 

그래서 어딜 다녀오시냐고 여쭈었더니,

 

워낭소리를 보고 오셨단다.

(읍네 새마을금고에서 밀양영화학교 주관으로 무료영화상영을 하고 있다. 거기에 다녀오신 것이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워낭소리 재미있냐?"

 

난 "아뇨. 재미없어요. 보지 마세요."

 

"니는 보고 왔으니 재미없다고 말하지-. 왜 다들 재미있다던데."

 

결국 오늘 보고 오신 것이다.

"우찌. 재미있섭디꺼?"

"우와- 워낭소리 재미없더라."

"거 보세요. 재미없다고 했잖아요."

"재미있는 줄 알았지. 피곤해서 보다 좀 잤다. 놈놈놈은 재밌나?"

"그건 재미있을거라예."

 

좀더 늦게 어머니께서 들어 오셨다.

"워낭소리 재미있섭디꺼?"

"그냥 할배할매 사는데 소 키우고 소꼴 뜯고 그런 얘기데. 그냥 할배할매 나와서 할배가 소꼴 뜯고, 밥 주고 일하고, 그러다 소가 죽더라."

"저도 봤습니더."

"그랬나? 할배들이 보고 한심스럽다 카더라-."

"누가예? 영화가예? 그 할배들이예?"

"그 할배들이."

"영화는 재미있습디꺼?"

"아니. 그저그렇더라. 재미없더라. 집으로는 어떻노?"

"그것도 촌에 할매, 손자 얘깁니더."

"그렇나? 내나 똑같겠네."

 

이상이 부모님가 내가 나눈 대화다. 부모님께서 영화보는 눈이 나빠서 영화가 재미없는 건 아닐테다. 내나 촌에서 옛날에 경험한 얘기인데, 무어 재미있을 것이 있겠는가? 뭐 다른 것이 있겠는가? <워낭소리> 속 할배와 동네 할배의 삶은 유독 소를 사랑했다는 것 빼놓고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과대선전의 피해자가-비록 공짜지만- 된 셈이다. 나 역시 보고 좀 심드렁한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 친구는 보고 금방 눈물이 쏟아지더라던데 나는 별로였다. 그만큼 회자되고 극찬할 만큼의 영화는-다큐로서도- 아니었다. 범작 수준? 아니면 B급 정도?

 

영화는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놓고 보았을 때, 동물농장이나 주주클럽 딱 그정도다. 딸랑거리는 워낭소리가 주구장창 대리선동을 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빠질 정도다. 애써 눈물을 쥐어짜내려는 삼류멜로처럼.

 

<워낭소리>는 '신-구문명의 충돌과 구문명의 패배'의 관점으로 보면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이렇게 보면 위 어머니와의 대화 중 동네 할버지들의 한심스럽다는 말은 중의성을 띤다. 불편하고 좁은 의자에서 애써 시간을 내 저딴 영화를 보는 자신들이 한심스럽다는 것과 구문명의 실질적인 패배자로서의 한심함이 그것이다.)

 

늙은 소와 할배와 고된 노동은 전통-구-문명을 대표하고, 젊은 소와 할배할매의 아들딸들과 석유 때는 농기계는 현대-신-문명을 대표한다. 할매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현대문명을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시종일관 영화는 전통문명을 고된 노동과 골병을 반복해서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인간과 동물을 우정이라는 포장을 통해 긍정적 감성을 자극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에 대해서는 매정함을 보여준다. 늙은 소를 여물통 밖으로 몰아내는 젊은 소, 농삿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여가삼아 내려와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소팔라!'라고 외치는 자식들. 그들은 농삿일을 돕지도 않거니와 병원 한번 모시고 가지 않는다.

 

늙은 소와 할배는 할매의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집스럽게 고수하지만, 추수철 콤바인에게 한 번 도움을 받고, 소팔라는 자식들 소리에 좌절하고, 늙은 소가 노사하면서 할아버지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아파!'라고 외치고, 한편으로는 워낭소리를 딸랑거리며 마침내 패배를 선언한다.

 

이렇게 <워낭소리>는 '전통문명의 마지막 장, 패배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큐란게 원래 그렇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영화는 어떠한 희망이나 대안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자기 목소리라는 것이 없다. 이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희망과 대안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니 우리가 찾아야 한다. <워낭소리>를 본 그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그 희망과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에도 나는 부정적이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남대문 방화사건.

 

난 그 때 뉴스를 보면서, 불타버린 남대문을 보면서, 사람들의 외침, 절규와 그들의 눈물을, 생방송으로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로 빵 터졌다. 어찌나 웃기고 역겹던지.

 

그들은 남대문이 불타버린 것이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크나큰 상처, 손실로 보았는데, 그것이 같잖았다.

 

남대문 물론 국보 1호로 대단한 문화유산이다. 그것도 유형의.

하지만 서구문화를 동경해 한시빠비 전통문화를 내팽겨치고 없애버린 그들이, 소젖보다 Milk를 좋아하는 그들이. 외국에 팔거리-관광상품-가 아니면 돌보지 않는 그들이. 좋은 것을 보러 유럽으로 날아가는 그들이. 동강이 아니라 세느강과 허든슨강을 사랑하는 그들이. 남대문을 빙 둘러싸고 남대문이 탄다고 민족의 자존심이 탄다고 슬퍼하고 있다. 발을 동동굴리며 오열하고 있다. 이 얼마나 쓰디쓴 유머인가? 뉘라손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닥종이, 전통 나룻배, 가산오광대 등-이 밖에도 무진장 많다- 무형문화재는 후계자가 없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들의 죽음에는 조문객이 없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무지개님(http://blog.naver.com/tensiyun)의 그림을 펐다.

 

-패러디 되긴 했지만-그랜져 광고다. 예전부터 보였는데 아직까지도 이걸로 선전되고 있다.

 

만약 내 친구가 저 지랄을 한다면,

 

나는 "넌 이제 내 친구 아냐! 개장간장국간장아!"라고 외쳐 버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광고는 어쩌면 현존 사회 이데올로기의 친숙함과 신선함에 의탁한 유목적적 표현일텐데,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의식을 반영한 산물일텐데, 이 광고를 보면 너무 슬프다.

 

나와 너의 한 모습.

 

'세바퀴'에서 본 건데, 우리나라 20, 30대 여성이 바라는 최고 조건은 "돈"이란다. 그 현실.

바라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우리의 모습이다.

 

어제 본 '얍! 활력천국 시즌2'에서 본 남해군 남면 홍현마을의 한 할아버지의 멘트.

"지금은 돈세상인데. 나는 돈이 없어 활동을 못 한다."



아무래도 그림을 퍼온 무지개님의 멘트가 마음에 걸린다.

 

"아직도 차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는 조금은 유치한...ㅋㅋㅋ"

 

그리고 댓글 중에

 

"아직까지도 차가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을 나타낸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광고죠. ㅎㅎ"

 

내 생각에는 이 광고는 조장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한 것도 아니다.

 

조장하다는 것은 네이버 국어사전에

[명사]도와서 자라게 . 주로 부정적인 의미쓴다.

로 나온다.

 

조장하는 광고는 공익광고이다. "흡연은 죽을 죄입니다!" 이런 식.

 

하지만 상품광고는 다르다.

상품광고는 내밀한 욕망을 집어내어 펼쳐 보여 주면서 상품을 사면 그것이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 내밀한 욕망이 의식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광고는 더욱 참신함을 갖추게 된다. 그 욕망을 꼭 집어내어 상품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인해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에 조장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욕망은 광고를 통해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이 부풀어진 욕망이 지갑을 열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서울우유였던가? 미스유가 나오는 광고가 있다. 두 개가 제작되었는데, 하나는 학생보다 키작은 선생이 나오고, 또 하나는 동창보다 늙어 보이는 아줌마가 나온다. 키 크고 싶다는 열망, 젊고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이 특정한 상표의 우유로 인해 충족되라는 내용이다. 이런 두 가지의 욕망이 여기서 조장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런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고가 욕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내어 상품과 연결하는 것일 뿐이며, 그 내밀한 욕망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것이어야 한다. 몇몇만 특수하게 가진 욕망으로는 당연히 돈벌이가 안 될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 사회의 일반적이고 내밀한 욕망을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위 그랜져 광고에 이러한 확인 작업을 해 보면,

 

친구가 안부를 즉 현재 상태를 물어봤는데 다른 친구는 그랜져로 '삐빅'거린다. 현재 상태가 그랜져라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는 '애가 인제 갓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빠라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고, 아내 생일을 까먹어서 집안이 아직 저기압이고, 이것 때문에 이런 고민이 있고, 저것 때문에 저런 생각이 든다." 따위가 아니라, "삐빅"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상태는 이 그랜져가 말해준다는 선언이다.

 

이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재화의 양과 질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유대하고 하고 다니다가 자기를 소개할 때 그 종이를 척!하고 보여주면 되는 세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차가 사회적지위를 나타내주는 지표에요."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욕망-소유로서의 자기소개-은 돈많은 몇몇, 혹은 특수사회의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적인 욕망이다. 점심먹고 스타벅스 테이크아웃컵을 자랑삼아 들고 다니는 20, 30대의 커리어우먼층, 혹은 그런 모습을 열망하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RAGE AGAINST THE MACHINE RNC

 

지난 9월인가 미국의 미네소타주 한 도시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벌어지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음악 페스티벌 비슷한게 열리고 있었다.

 

거기에 등장한 밴드가 렙 메탈의 전설인 Rage Against The Machine !!

하지만 전투경찰들은 전당대회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무대 전원을 차단시키고 무대를 철수시켜버린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은 그들이 두렵지 않고 다만 그들이 자신들을 두려할뿐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회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는 행동파 밴드의 참모습이 아니던가!!

 

곡 순서

1. Bulls On Parade

2. Killing In The Name

[출처] RATM 거리공연 - Rage Against The RNC|작성자 이동사마

---------------------------------------------------------------------------------------------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재결합 소식에 대한 정확한 기사가 없을까 하여 공식 홈피를 들렀다가,

NEWS에 RNC 영상이 있다길래 네어버에 검색해 관련 블로그의 글을 찾았다.

드라로차의 첫 마디-"Rage aginst the machine is Back!"-에 어찌나 설레이던지. 너무 좋다.

그들은 함께 해야 한다.

영상은 조금 감동적인 면이 있다. 영어라서 당최 모든 멘트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근데 이게 지난 9월 영상이니까. 도대체 최근 소식은 어디에 있을까나?

공식 홈피에서도 이 뉴스가 3월 8일자이니 원.

음반 잡지를 끊은 지 오래되어 이런 저런 소식을 접할 구멍을 찾기 힘들구나.

난 공부를 해얄 텐데 원.

앨범이 기다려진다. 기다려도 되는거지. 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