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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글

 

몇년 전, 컴퓨터가 망가져서 아이들 사진을 다 날렸다.

컴퓨터는 재앙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날린 건 사진만이 아니었나보다.

이런 글을 썼었나보다.

성공회 신문에서 발견했다.

 



                                           통찰력이 빛나는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다

                                                                                    

1년 넘게 집에서 어린 아기만 바라보고 있자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른 채 나이만 먹어간다. 서른 다섯. 지금 내 나이는 언뜻 위험하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기억은 가물거리고 나와 내 아기들을 지킬 울타리 걱정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다 나이테 두꺼운 고목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며 나는 나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나이를 생각했다. 올해 75살. 할리우드에서 그 나이에 현역감독 및 배우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의를 표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공화주의자인 것이다. 나이든 공화주의자가 가족주의와 안락사 논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내보일 것인가? 당연한 답이 빤히 보이는데 영화는 의외의 카드를 내보인다. 그것이 신기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독특한 영화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복서 지망생과 이제는 보잘 것 없는 늙은 트레이너가 함께 힘을 합쳐 톱이 된다는 설정만 들어보면 그저 그런 스포츠영화일 것 같다. 그러나 늦깎이 복서 매기의 경기장면은 마치 코미디처럼 짧게 흘려보내고 정작 카메라가 응시하는 건 매기와 프랭키의 외롭고 고단한 삶이다. 프랭키는 딸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지만 딸은 편지를 읽지도 않고 돌려보낸다. 매일 성당에 들러 삼위일체설이나 무염시태교리에 시비를 걸며 신부를 괴롭히지만 사실 그는 ‘뭔가로부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중이다.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며 복서가 될 꿈을 꾸고 있는 매기 또한 외롭다. 그녀의 가족들은 매기를 이용하는 것으로만 가족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영화는 흔히 현대인들의 마지막 휴식처라고 일컬어지는 가족의 지위를 비웃는다. 피로 맺어진 가족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며 오히려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건 매기와 프랭키, 그리고 스크랩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않은 그들은 권투를 매개로 대안가족을 이룬다. 고전적 가족주의의 해체와 대안가족에의 지지는 프랭키가 매기에게 지어준 이름이자, 사람들이 매기를 환호했던 이름 '모쿠슈라'라는 단어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 절정을 이룬다.

 

안락사 논쟁에 대해서도 영화는 정확히 자기 입장을 밝힌다. 현실은 영화보다 치열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과 로마 교황청까지 나서서 세계적 논란과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일명 시아보 사태는 지난 3월 31일, 15년간 뇌사상태였던 테리 시아보의 급식튜브를 제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시아보가 죽자 부시는 애도를 표하면서 “문명의 본질은 약자 보호... (죽었는지 여부)에 대한 심각한 의심이 있을 경우에는 살아있는 쪽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한 점 의심이 없을 경우에도 전쟁을 벌여 수많은 생명을 빼앗고 의약품 특허를 강화하여 가난한 사람을 죽어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면서 말이다. 

 

같은 공화주의자지만 감독은 다른 태도를 취한다. 권투를 통해서 처음으로 주목받는 삶을 살며 ‘진짜 세상을 본’ 매기는 전신마비장애인으로 살아가기보다 죽을 권리를 요구한다. 자해를 막기 위해 투여한 진정제 때문에 약에 취해 살아가야 하는 매기를 보며 프랭키는 ‘살려두는 게 죽이는 것’이라며 눈물 흘린다. 영화는 죽을 권리와 살 권리에 대해 절대로 멀찍이 떨어져 서서 논평하지 않는다. 바로 내 옆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한 사람, 살아 움직이며 실존하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눈 돌리지 말고 대답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를 다보고 나면 궁금해진다. 이 나이많은 공화주의자가 어쩌면 이렇게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녹슬지 않은, 굳지 않은 정서로 풀어낼 수 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모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다. “당신도 오래 살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오래 살고 싶다. 오래오래 열심히 살아서 먼 훗날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다. 꼭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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