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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6

일상과 몸과 꿈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겠어....

 

1. 일과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었고 덩달아 일과표 변동.

하은은 12시에 끝난다. 데려와서 같이 밥 먹고 3시 학원.

학원에 데려다 준 후 나는 동네 목욕탕에 가서 반신욕을 하고

하은이 끝나는 4시 30분까지 동네 도서관에 앉아있다가 

하은과 함께 병원.

그리고나서 공부방에서 병원으로 걸어온 아이들과 함께 집에 돌아온다.

 

방학 첫날 월요일에는 하은이 학교에서 혼자 병원까지 걸어가고

나도 그 시간에 맞춰서 병원 갔다가 점심을 같이  먹은 후 하은 학원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일을 하다가 하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가고 그리고 다시 한별은별 데려가고....

이건 내가 너무 분주해셔서 안될 것같아

시간표를 다시 짜본 게 저거다.

하루의 시간을 구획하고 분 초 단위까지 아끼며 살아가는 방식이 다시 시작.

어제는 5시까지 미디어위원회에 기획서를 보내야했는데

아이들이 나간 후부터 열심히 글을 써도 진도는 더디기만 했고

중간중간 자잘한 일들을 하면서 글을 쓰다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동료들은 내가 글을 쉽게 쓴다고 오해를 하는데 사실 나도 당신들과 다르지 않아...

그냥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잠을 덜 자거나 밥을 안 먹거나 다른 일상을 패스해서 그런 것뿐.

그래도 아침 10시까지 보내라고 한 걸 그저께 밤에 

"몸이 너무 안 좋으니 시간을 더 달라"라고 요청해서 미뤄진 거였다.

'아픈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좋을 때도 있구나....

 

2. 꿈

두 편의 꿈을 꾸었는데 그동안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대거 등장.

첫번째 꿈. 2014년에 수업을 들었던 S.

학교 행사에 갔다가 차가 끊어져서 집에 못 가게 되었다.

S의 방에 C와 함께 가서 자기로 했다.

S가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 나와 C는 이불에 발을 집어넣고 놀고 있었는데

이불 사이로 바퀴벌레가, 큰 바퀴벌레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완전 <조의 아파트> 캐릭터)

보니 바퀴벌레를 잡기 위한 파리채가 있어서 열심히 바퀴벌레를 잡으려고 하는데

바퀴벌레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게 느껴짐.

S는 음식을 준비하고 C와 나는 바퀴벌레를 몰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일군의 여학생들이 와서 "우리도 이 방에서 자야한다"고 하길래

어떻게 이불을 펼까, 잠자리 배치를 어떻게 할까,  함께 고민함.

 

두번째 꿈. 내 남자후배와의 어긋난 연애 때문에 나와도 멀어진 YH가 조력자로 등장함.

연애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렸는데.

걔는 정말 아니라고 그토록 경고했는데 왜 내 말을 안 들은 거냐....ㅠㅠ

똑똑한 여자애들이 머슴형 남자들한테 끌리는 이유는

쟤는 우직하게 나만 바라보겠지,라는 환상 때문이다.

둔하고 멍청하고 언어까지 부족한 남자가 나한테 싸인을 보내면

사랑이 없을 것같은 저 남자의 인생을 내가 구원하는 것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의외로 그런 남자들이 빛나는 여성들의 그런 착각에 기대어

문어발 행태를 보이는 걸 많이 봐왔거든.

그애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애는 그냥 외로운 것 뿐이야,

라고 말한 내 판단은 슬프게도 맞았다.

그 자식 널 두고 바람피웠잖아.

그 후에 사귄 여자애 두고 또 바람피워서

내가 한동안 사무실 가면 그자식 째려보느라 눈이 다 시렸다.

한달 전 쯤 시나리오 작업때문에 강화오겠다는 YH의 전화를 받아서인가.

암튼 그 애가 꿈에 나왔다.

 

나는 가족들과 홍대앞 소극장에 서있었다.

인기가 많은 연극이라 사람들이 빽빽하게 줄을 서있었는데

나는 초대권을 여덟개나 가지고 있었어.

꿈 속 나의 가족은 네 명. 우리는 두 편을 연달아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같은 극단에서 다른 연극을 연달아 할 리는 없으니까.

한 편을 보고 나와서 다음 프로그램을 확인한 후

HS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연극을 보러 오라고 했다.

곧 HS네가 도착해서 두 가족은 함께 근처의 대형마트에서 구경을 했다.

우리가 함께 있던 곳은 조경, 화훼 구역이었다.

그곳에서 HS와 남편이 새장을 구경하거나 전지가위를 둘러보는 동안

한별은 다른 구역에서 어떤 물건을 고르고 있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부싯돌처럼 생긴거였는데 축구용품이라고 해서 신기해했다.

나는 하은과 칼처럼 생긴 조경가위를 보며 이거 살까, 고민하고.

그러다 극장에 돌아와서 HS네 좌석을 알아봐주는데

내가 미리 예약했던 것을 취소한 게 문제가 되었다.

내 이름 예약분을 취소한 후 HS네 이름으로 다시 표를 끊으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가 없다고 했다.

탤런트 신소율이 연극기획자였다. ^^

암튼 신소율에게 사정을 말하면서  연극을 보게 해달라, 

내 친구 HS는 멀리 부천에서 여기까지 온 거다,라고 했더니

신소율은 약간 뻐기며 내가 YH의 선생이라 특별히 봐주는  거라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원래는 로얄석이었는데 HS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연극을 봐야했다.

나는 미안해하며 떠나왔다.

신소율이 전화를 하며 표를 알아보는 동안

미안한 마음으로 HS의 손을 잡았더니 그가 싱긋 웃었다.

손이 따뜻했다.

 

3. 몸

병원 앞에 '창학이네 호떡'이라는 가게가 생겼다.

아니 생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가게가 문을 열 계획인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하은 말이 오래 전에 문을 열었다고.

그러면서

"우리 교회에서 늘 발구르던 장애인 오빠, 그 오빠네 엄마가 하는 가게"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어제는 집에 가는 길에 그 가게에 들렀다.

2010년 강화에 온 후 한달에 한 번 온수리 교회에 가면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늘 발달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미사를 드린 후 밥을 안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한 번도 그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그 분은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던 것같다.

나는 나중에 온 사람으로서 그 분에게 말을 건다는 게 오버하는 것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1~2년의 시간이 지난 후라면 내가 말을 걸어도 됐었다.

온수리교회는 좀 무서운 곳이다.

나와 상관없는 불특정다수,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듯 말하면서도

정작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하다.

특히 그 사람이 가난하거나 소수자적 지위에 있을 때엔 더.

강화남자와 결혼한 조선족여성한테도 그랬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 교회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곤 했었는데

그녀는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하지만 온수리교회 어머니회의 권력자들은

절대로 끼워주지 않았다.

교회 청소가 끝나고나면 갖는 티타임에 그녀는 한 번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 조선족 여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창학이네 엄마(가게 이름을 통해 비로소 그 애의 이름을 안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 그 가게에 들러서 호떡을 샀다.

세 개 드릴까요?라고 해서 다섯개를 주세요, 라고 했는데

두 개를 더 주셨다.

가게가 너무 썰렁했다.

온수리교회에 다녔었어요,라고 하니

얼굴이 본 얼굴이예요, 하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먹는 호떡을 한 입 먹고 체했다.

조금 걷고 물을 마신 후 따뜻한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3시 10분.

다시 잠을 자려고 노력하다 이렇게 쓰고 있다.

 

체한 건 나아진 것같다.

가슴과 정강이는 가렵지만 참을 만하다.

왼쪽 발목이 삔 것처럼 시큰거리고

허리와 목이 뻣뻣하다.

잠을 자느라 몸이 같은 자세로 오래 있어서 그렇다는 선생님 말씀을 생각하며

그저 담담히 적는다.

몸은 가벼워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하고 지금보다 더 아파지기도 하겠지.

너무 신나하거나 너무 우울해하지 않기로 함.

고요한 상태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지금의 이런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그저 열심히 기록해서 규칙과 주기를 알아내고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당황하지 않으며

변화에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선생님을 만나서 치료를 시작한 후 몸의 변화에 놀라고 기뻐했던 게 11월 초.

너무 아파 자면서도 끙끙 앓았던 게 11월 15일 전후.

11월 15일 그  밤의  상태를 꼭 기억해야할 것같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검암역에서 주차장까지 걸어오는 동안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이러다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아팠다.

그런 고통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듯했다.

그리고 1월 4일. 처음엔 팔과 허리가 아팠다. 

내가 어제 무슨 일을 했지? 많이 걸었나? 팔을 어디에 쓴거지?

기억을 더듬는 동안 시간이 흐르더니

11월 15일의 그 밤같은 상태가 되었다.

처음 아팠던 곳은 진원지였을 뿐, 결국 몸 전체가 삐그덕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아팠고 눈이 뜨거워졌다.

증상은 비슷했지만 11월 15일보다는 참을 만했는데

두번째라서 그런 건지, 강도가 약해서 그런 건지는 내가 알 수가  없다.

 

12월  29일도 기억해야 한다.

12월 25일 부산에 내려가서 12월 26일 밀양에 갔다가 12월  27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28일은 방송과 회의 때문에 병원에 가질 못했다.

처음으로 사흘동안 치료를 받지 못했다.

치료를 받지 못해서인지 일상과는 다른 활동을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리가 많이 아팠고 체했고 배변이 잘 안되었고 속이 쓰렸다.  

생각해보면 11월 15일의 증상도

입시때문에 매일 받던 치료를 이틀동안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났다.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치료받을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그러니까 치료를 받지 않아서인지,

무리한 일정 때문인지

두 요소의 결합때문인지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다.

열심히 적다보면 패턴을 발견할 거라는 희망을 가져봄.

 

궁금한 건 치료가 끝난 후의 상태이다.

치료가 끝나서 병원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선생님 없이 잘 살아가는가?

별빛샘은, J샘은 왜 다시 병원을 찾았나?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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