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6/12/09

1.

2주일전, 기차출발 직전에 쓴 글을 마지막으로 블로그에 글을 못 썼다.

기차 안에서 노트북으로 로버드 드 니로가 나오는 <인턴>을 보다가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30분 정도를 못 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궁금해서 보려고 전원선을 찾다가

부산 강의실에 두고 왔다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

그 시간에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내서

굽신굽신 거리며, 사과하며 노트북 전원을 좀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 분이 월요일은 쉬고 화요일에 보내주신다 했다.

그게 어디냐 하며 고마워하며 기다렸는데

(사실 내게 노트북은 아주 중요함. 내 일은 대부분 내 노트북을 통해 이뤄지므로)

화요일 밤에 연락해보니 아직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강의실 말고 다른 곳에 두고 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좀 짜증이 났다.

전화를 끊고 혼자 화를 내다가 남편한테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있는데 이럴 때 마음 다스릴 주문 같은 거 있으면 알려줘" 했더니

남편은 쿨하게 말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해봐.

누가 잘못했는지."

 

내가 잘못한 거지.

그러니 그 담당자한테 화내면 안되는 거지.

그런데 자꾸 화가 났다.

그리고 결국 나는 나한테 화를 냈다.

이런 멍청이.

 

목요일이 되어 아침 일찍 출근을 하는데

도시락 가방, 책가방 등등 짐이 많았다.

인천영상위원회 정산 때문에 신한은행에 들러야 해서

작업실 가기 전에 읍에서 잠깐 차를 세우고 통장을 찾는데 통장이 없었다.

통장만 없는 게 아니라 가방이 없었다.

차 뒷좌석과 트렁크와 모든 곳을 다 뒤진 후에 포기하고 집에 와보니

마당 가운데에 짐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강화읍을 왔다갔다 하는 1시간동안 그렇게 마당 가운데에 짐들은 놓여있었던 거다.

화도 안나고 요즘 내가 왜 이럴까 하며 다시 읍에 가는데

읍에 다 가는 순간 우체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착불 택배가 왔는데 집에 있냐고.

그래서 다시 집 근처 양도우체국에 가서

짐을 찾았다. 노트북 어댑터를 그렇게 받았다.

앤 해서웨이가 남편의 바람을 알고 괴로워하는 데서 전원이 다 끝났는데

뒤에 어떤가 봤더니 궁금증에 비해 좀 시시했다.

정말 시시했어....

어쨌든 그렇게 노트북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전원을 까먹는 일은 그 후로도 자주 일어나서

지금도 전원이 10%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인터넷이 안되어서 수리를 하고 집을 나서야하는데

전원은 작업실에 있다.

만약에 글이 끊겨있다면 그건 전원이 다 떨어져서,

라는 이유 때문이다.

건망증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한의원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저도 그래요"라고 말씀해주셔서

위로가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위로. 

어제밤 꿈에는 한의원선생님이 꿈에 나타나심.

6시 30분에 한의원에 도착했는데(우리 한의원 마감시간)

선생님이 퇴근하고 계셨다.

꿈 속에서 나는

'아 동절기라 마감시간이 빨라졌구나. 그래도 나를 두고 가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가셔요? 제가 너무 늦었죠." 그랬더니

한의원 선생님이 "네 너무 늦으셨네요" 라고 퇴근하심.

꿈은 거기서 끊기고 다른 꿈으로.

 

 

나는 여성학자 S와 비마이너 발행인 K가 탄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S가 내렸는데 짐이 너무 많아 반려고양이 호두를 안을 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호두를 대신 안아주는데 호두가 내게 딱 달라붙으니 S는

"얘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하루를 잘 따라서 다행이다"라고 말했고

S의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하는데 무서워보이는 동네 아주머니가

"그냥 내려놓으면 지가 알아서 가" 한다.

S도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려놓으면서 나는 혼자 생각한다.

'맞아. 호두는 원래 길냥이였으니까 씩씩하게 집에까지 잘 가겠지'

 

그리고 차에 돌아왔더니 털이 하얀 큰 개가 내 앞에 앉아서 반가워했다.

얼굴도 예쁘고 막 웃는다.

나는 막 반기며 "네가 드디어 나를 찾아왔구나" 하면서

만남의 기쁨을 나누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는 고양이는 잃어버렸지만 개는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얘는 누구지??

그리고 살짝 무서웠다. 

 

2.

이번 달 안에 사무실을 비워야한다.

원래는 10월에 비워야했으나 12월까지 쓰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니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측의 공문을 받아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연초 계획은 12월이면 새 집이 지어지니 거기 다락을 작업실로 꾸미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사허가가 11월에야 나게 되었고 겨울에 집을 짓는 건 좋지 않다고 해서 

집짓기는 내년 3월 이후로 미뤄지고 말았다.

작업실을 마련해서 생활해보니 

집이 지어졌어도 그리고 거기에 공간이 있어도 집 안에 작업실이 있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모두 나갈 때 같이 가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매인 곳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남편이 자꾸 집안일을 마저 하고 가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없을 때, 집중할 수 있을 때, 작업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아침을 포함한 일과시간이 황금같다.

만약 집 안에 작업실이 있으면 이런 상황은 더 심해질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엄마가 오시는데

남편 일은 중하고 내 일은 하잘것 없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집에 계시면

일과시간에 집안일 하라고 하는 시도는 더 거세어질 것이다.

그래서 작업실이 꼭 필요하다. 꼭 필요한데......

땅 사느라 돈을 다 썼다.

계좌를 탈탈 털어서 땅값을 지불하니 남편이 "돈 많네" 했다.

그럼. 나는 돈을 잘 안쓰잖아.

내친 김에 엄마에게도 말했다.

남편은 얼마를 벌고 나는 얼마를 버는지.

남편은 월급이 깎였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집은 굴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정규직이 아니라서 너무 다양한 일들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분주하고 내 머리는 늘 복잡하다,

그러니 제발 남편은 떠받들고 나는 무시하는 행동은 그만 좀 해달라.

엄마는 웃으면서 "그래도 나 많이 나아진 거다"라고 하는데

딸들을 희생시키며 아들 편들고

결혼한 후에는 사위 편 들며 딸 욕먹이는 짓을 엄마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예전 대학원 스승이 들려줬던 일화가 늘 떠오른다.

유학가서 결혼을 하며 공부를 계속하고 있던 선생님 집에

선생님네 엄마가 다니러왔다가

잘 정리되어있는 서랍들, 옷들, 집 풍경을 보고서

"너 살림하느라 시간 다 보내는 거 아니냐?"며

큰 일에 마음 쓰고 큰 일에 시간 쓰라고 했다는 말.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선생님이 너무 부러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면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평을 늘어놓는 우리 엄마.

그래도 엄마가 있으니 우리가 먹고 사는 거고 그래서 고맙다,

라고 생각해야하지만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세계관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엄마가 짜증날 때가 많다.

진척없는 작업을 하고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교육을 하면서

가끔 숨이 턱턱 막힌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살림 얘기를 하며 나를 타박할 때에는

울컥한다.

참 사는 게 힘들다라거나 너무 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다른 일로 울컥했다.

그날은 작업실이 있는 고인돌체육관에서 강화 중학생들의 자유학기제 페스티발이 있었다.

우리동네 아이들도 와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했다.

그런데 아는 독립피디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냐 물어보니 ebs프로그램을 외주로 맡았다고 했다.

가을의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피칭무대에 선 그를 보았다.

2010년에 나는 어떤 국제영화제에서 그의 경쟁자로 피칭무대에 서있었다.

그는 승승장구하고 나는 힘들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화요일에 나는 천만원에 대한 정산자료를 준비하면서 돈이 맞지 않아 끙끙대고 있었다.

문 바깥에서는 행복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행사장에서는 이제는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동료라고 할수도 없는 예전의 동료가 촬영을 하고있고

나는 돈이 안맞아 몇시간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슬픔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내 상황이 안좋아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우리동네 중학생들,

내 딸을 포함한 이 아이들의 미래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지나온 날들, 그리고 지금 내가 걷고있는 이 시간들,

나는 그래도 상명하복식 조직에 몸담은 적은 별로 없어서

모멸감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외딴 강화에서 태어나서 특별한 재능 없이 그저그런 부모를 만난 아이들이

어떻게 살지, 어떤 세상을 맞게 될지를 생각하니 슬퍼졌다.

내가 살아온 세상, 슬픔과 외로움과 가끔씩 기쁨이 있었던 그 시간.

나의 딸도, 딸의 친구들도 그 시간을 맞이하겠지.

의연하게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다시 작업실 문제로 돌아와서.

남편네 직장 옆에 영농협동조합이 있던데 거기에 빈 방 없냐고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없다는 대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남편이 자기네 사업장에서 미디어교육을 하고 싶다길래

관련 프로포절을 썼고 그 안을 공유했더니 엄청 좋아하면서

그게 뽑히면 공간을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뭔가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전에 내가 낸 기획서가 뽑혔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꼭 내 작업실이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오는 나의 동료들을 위한 공간은 필요했다.

현재 그 공간을 쓰고 있는 사람과 재판이 진행중이고

12월 말에 재판이 끝나고 나면 어쩌면 그 공간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어제 가봤는데 그 방은 잠겨있었고

그 방이 속해있는 영농조합 사람들과만 인사를 했다.

첫 만남인데 나름대로 내게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이 내 몸매에 대한 얘기. 

 

세상의 모든 방들은 방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지 않으니

방을 마련하게 되면 사람들과 얽히게 된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머물렀던 방은 학자들 바로 옆이었다.

젠틀한 중년의 남성들과 대화하는 일은 내게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지금 쓰고 있는 두번째 방은 시설관리자들 바로 옆이다.

가끔 이상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노동자라고 불릴만한 이 방의 이웃들은

학자들의 손님인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해준다.

 

작업실을 구하려고 알아볼 때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람들과 마주치거나 부대껴야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방이라도 이웃이 있을 것이고 출퇴근 할 땐 만나야할 것이다.

어쩌면 화장실을 같이 써야할 수도 있다.

그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방을 비울 날은 점점 가까워져오고있고

나는 꼭 집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작업실을 마련해야겠는데

돈도 없어지면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가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고 어떤 한 방이 물망에 오르고 있는데

그 방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미리부터 걱정이 되는 거다.

여기까지 주저리다 보니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다는 사실이 대견하다.

이토록 예민하고 소심하고 문제적인 인간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

 

아침에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빌리면서 도서관이 가까운

문화재가 많고 산책로가 아름다운 이 곳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한 달에 15만원에 해당하는 임대료 1년치를 한번에 내야 한다.

하루에 5천원이면 많지 않다,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대출금 이자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저금에 쓰는 게 낫지않겠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그렇게 쪼잔해져가고 있다.

작아지고 있다, 나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