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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조각들

**매일매일 2천자 쓰기

1. 2016년 12월 24일

교회영상 상영.

겨우 시간에 맞췄다.

사실은 겨우도 아니다.

내가 늦게 도착하자 1년 전 크리스마스때의 영상들을 보고 계셨다.

허겁지겁 달려와서 숨돌리고 있는데 다른 교회에 다니는 막내가 전화해서

"엄마, 나 순서가 두번째니까 빨리 와" 라고 했다.

남편에게 나 못간다는 말을 전하라 했는데 안 전한 것임.

내가 못간다고 하자 "그럼 아무도 안와?"실망에 가득찬 막내의 목소리.

하지만 막내는 얼른 목소리를 바꿔서 엄마 괜찮아, 하고 끊었다.

짠한 마음으로 상해여행영상 상영.

반응은 좋았다.

당연하다. 소규모 커뮤니티에서는 완성도와 무관하게

스크린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 자체로 감격스러운 법이니까.

좋아하는 교우들을 보면서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데, 싶었다.

작업한다고 파고앉아 몇년씩 스트레스받으며 머리 싸매는 것보다는

함께 살며 가볍게 터치하는 기분으로 찍고 편집하고 나누는 것.

이렇게 사는 것도 사실 괜찮은데....

말이지.

<따뜻한 손길>을 끝내고 나면 이렇게 짧은 호흡으로 시한을 정해서 하고 싶은 작업들이 많다.

시한은 한 3개월 정도?

희망일터의 정신장애인들의 일상, 

마니산영농조합법인의 4계,

집에 밥먹으러 오는 무명고양이,

세월호 브랜드 엄마,

기타 등등.

일이 밀리면 늘 이렇다.

하고 싶은 일이 엄청 많아진다.

그러니까 밀리지 말자구.

 

2. 12월 26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짐을 옮겼다.

하루에 조금씩 조금씩 짐을 옮겼고

마지막 큰 짐들은 남편의 차로 옮겼다.

짐을 옮기기 전에 해결했어야 한 일은

방 구하기.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26일, 27일은 고인돌체육관 작업실에서 교회영상의 세세한 수정을 했다.

그리고 계속 방을 구했다.

방을 구했다고 해서 돌아다닌 건 아니다.

인터넷으로 부동산의 사무실들을 검색했고(큰 사무실들 밖에 없었다)

친환경 영농조합법인의 빈 방과 관련해서 변화되는 상황을 계속 문의했다.

친환경 영농조합법인이라고 부르면 너무 기니까 이름을 붙여야겠다. 

경계방이라고 해야지. 별 뜻은 없다. Moon의 2016년 개봉작 이름이 <경계>다.

<경계>의 헤드카피는 '떠나야하는 사람들의 종착지'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은 경계에 서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종착지에 서기를 꿈꾸니까.

경계방과 관련한 상황은 이렇다.

공동으로 있는 법인 대표 사이에 분쟁이 있는데

현 대표는 옛날 대표가 나가면 그 방을 내게 주겠다 했다.

계약서도 작성해주셨다.

그 재판이 12월 23일이었다.

12월 23일을 기점으로 나는 고인돌체육관에 방을 하나 임대하거나

아니면 경계방에 들어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재판은 기대했던 것만큼 명쾌하지 않았고 기약없이 연기되었다.

나는 고인돌 체육관에 방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1~2월 즈음에 경계방이 비워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내가 경계방에 들어와야하는 이유는

2017년 희망일터 프로젝트 '정신장애인의 영상만들기'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인의 영상만들기'는 영화교육 뿐 아니라 메이킹필름도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경계방에 상주해야 했다.

분쟁은 지지부진하고 고인돌방은 비워야한다.

경계방이 날 때까지만 고인돌방을 쓰면 좋겠지만

고인돌방은 2년 단위로 계약해야 하고 연세로 임대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런 저런 일로 고민하고 있는데 러시아언니가 임대료를 내주겠다고 고인돌 방을 빌리라고 했다.

언니는 말했다.

"하느님은 늘 짖궂으셔.

니가 고인돌 방을 빌리면 그토록 간절하게 방이 필요하다는 니 마음을 알고서

경계방도 비워주실거야.

하지만 니가 경계방만 바라보고 있으면 너는 그냥 계속 기다려야할 거야.

세상 일이 그렇더라"

 

그래서 나는 고인돌방을 떠나왔다.

이 로직은 참으로 이상해보이겠지만

나는 희망일터의 책임자이자 남편에게 강력하게 말했다.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희망일터와 가까운 곳에 방이 필요해.

방을 마련하도록 해."

 

친환경법인의 현 대표가 자신의 방을 쓰라고 내주었다.

그가 쓰고있는 방에 내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냥 이 방은 비어있었다.

비가 새고 빛이 들지 않고 곰팡이가 피어있는 이 방.

쌀 무더기 때문에 빛이 들지 않는 이 방.

남편은

구 대표가 점유하고 있는 방, 통유리가 있고, 빛이 잘 드는,

그 방을 나와 내 동료들에게 주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개인작업 뿐 아니라

영상교육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햇빛방에 들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일단 비어있는 이 방에 들어왔다.  

 

이 곳에 와보니 빈 방은 정말 많았다.

희망일터의 직원들은 왜 희망일터가 아닌 거기를 쓰느냐고,

비가 새는 그 방에 있냐고 물었다.

희망일터와 푸른영상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내가

희망일터의 빈 방에 들어가는 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강화에 살고 있고 희망일터의 책임자는 나의 남편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오해나 소문이 무섭냐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장도 담그고 구더기도 피하고 싶어서 희망일터가 아닌 다른 사업장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 곳에는 중년의 싱글 남자 두 명이 있다.

한 사람은 예의가 바르지만 다른 한 사람은 뭐랄까..... 정이 많다.

.............

방이 마련되고 고인돌체육관의 학자들, 노동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이 곳으로 짐을 옮겨서 정리를 하는 동안

몇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정리하던 짐을 다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햇빛방이 나는 동안 그냥 컨테이너에 작업실을 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여러 사람의 중재로 다시 이 방에 돌아왔고 

그런 시간을 거치면서 여기서도 결국 '이상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나 이상한 여자 맞아...

 

예전에 D선배는 가난한 사람들의 미덕? 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처음엔 성가셨다'라는 말을 했다.

지난 1년과 경계방에서의 몇일을 생각하면 그 말은 너무나도 확실히 이해된다.

고인돌방의 학자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췄고

그 결과는 같은 건물에 있지만 완벽한 타인이 되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같았지만

우리는 예의를 차리느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느라,

할 말을 서로 아꼈다.

근대적 인간관계의 원형을 경험했던 것같다.

 

그 다음, 노동자들의 이웃으로 살아갈 때에는

D선배가 말했던 것이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시설관리, 방제, 청소, 세 영역의 사람들이 있었다.

24시간 운영체제라 방제 관련 업무를 보는 분들은 2교대로 건물을 지켰다.

교육 때문에 며칠을 못가면 그 분들은 왜 안왔는지 궁금해했다.

밥은 먹었는지 안부를 물었고 가끔 간식을 나눠주시기도 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과는 거의 얼굴 볼 일이 없었다.

내가 그 방에 들어가자마자 대표격인 아주머니는 두루마리휴지와 휴지통을 주시면서

화장실 휴지통에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첫 날 한 번 대화를 해보고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곧 이해했다.

청소는.....이라고 물어보셔서(사실은 원하는 답을 갖고 계셔서)

제 방 청소는 제가 할테니 걱정마셔요,라고 말씀드렸다.

방제와 시설관리를 담당하는 분들과는 매일 얼굴을 봤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었다.

나의 생계와 당신들의 자식 이야기, 읽고있는 책 이야기.....

개인차는 있었지만 대부분 젠틀했다.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하니 남편이 말했다.

"그 거리를 유지해야 해. 더 친해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어쨌든 잘 지냈다.

그리고 경계방으로 건너오니

D선배의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한 남자분과의 관계가 문제였다.

나는 이런 남자들을 몇 명 안다.

하지만 이 분이 가장 노골적이고 가장 지나쳤다.

내 방을 여러 번 두드리셨고 그 지나친 호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시일이 더 가기 전에, 짐 정리를 더 진행하기 전에

방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런 저런 중재를 거치며 나는 섬처럼 이 곳에 남게 되었다.

D선배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할 때

'처음엔 성가셨지만 그게 사람 사는 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했었다.

D의 일대기를 책으로 정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D의 집안과 D의 논문과 D의 전도유망했던 청년기를 알게 된 나는

소위 중상류층으로 구분되는 D의 관계관이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실향민 부모 덕분에 끈끈한 관계망을 가져본 적 없는 D는

철거지역에서의 다큐작업을 하면서 인간관계라는 것을 해본 것같았다.

 

반면 나는 전근대적인 시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14살부터 서울에 살았다.

나에게는 도시의 익명성과 무관심이 편하다.

강화이주를 하면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건

이웃집 사람들이 불쑥불쑥 집에 들어온다는 소문이었다.

사제를 남편으로 둔 나는

그래서 티팟을 포함한 티타임 세트를 마련했다.

다행히 사택은 깊은 산 속 외딴 곳에 있어서 그 세트는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나의 고향을 전근대적인 시공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내가 그 시간에 대해서 예의를 차리고자 하는 노력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야만의 공간이었고, 약육강식의 세계였고, 정글이었다.

2010년 강화이주가 확정되었을 때 나는 <이끼>를 떠올렸다.

나는 <이끼>의 세계에서 살다가 14살에 도시인이 되었고

40살에 다시 <이끼>의 세계를 살게 되었다.

<이끼>의 세계에서는 강함과 냉정함이 필요하다.

 

세상은 선의로 가득차있다는 것을 믿는다. 믿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믿음에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선의가 선의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힘을 가져야만 한다.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에게는 절제없는 날것의 감정들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그것이 호의라 하더라도 나는 불편하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거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음의 부대낌없이 지낼 수 있는 시공간을 구해야 하는 거다.

그렇게 이 방에 머물고 있다.

 

3. 1월 2일부터 1월 7일까지

막내의 꿈을 위해 왕복 4시간을 길에 쏟으며 서울을 다녔다.

2시간을 가고 2시간 교육동안 기다리고 다시 2시간을 왔다.

정확히 말하면 1시간 30분이었지만 밥먹는 시간 등등을 고려하면 이게 맞다.

2시간을 하릴없이 기다리는 동안

하루는 취업에 성공한 졸업생이,

하루는 장애학회 분과 위원장님이 찾아왔다.

졸업생이 새로 취직한 직장에는 대학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이런 저런 조언들을 전해주었고

위원장님은....

성공한 디자이너지만 지금 있는 자리가 섬같다고 하셔서

"제가 옆에 있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생각도 했음

 

4. 1월 9일부터 1월 13일까지

짐 정리가 끝났고 교회영상을 마무리했고 그것을 담을 DVD를 주문했다.

DVD에 담은 후 교우들에게 발송하면 그 일은 끝.

그리고 두 개의 원고를 써야한다.

밀린 일지를 쓰는 이유는

이렇게 말들을 털어내야

거품처럼 마음을 덮고있는 말들을 걷어내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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