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메모

지나고보면 아무 일이 아닐 터이지만

그래도 마음 상해가며 배운 것이니

잊지 않기 위해 메모.

 

1.

영종도 교육을 시작한 건 어설픈 선의 때문이었다.

프로포절 단계에서 의뢰가 왔고

나는 영종도가 강화도 같은 곳인 줄 알고 승락했다.

강사료가 너무 적어요....라는 말에도

괜찮아요~ 하며 함께 하기로.

 

프로포절이 붙었고 지원을 받게 되어서 교육 첫모임을 했다.

영화와 연극을 같이 하는 교육인데

영화부문에는 주강사가 둘, 보조강사가 둘.

보조강사들이 프로덕션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라

그리고 영화에 강사가 네 명이나 필요는 없어서

보조강사 한 명은 연극 메이킹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이런 교육일수록 과정을 담은 메이킹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홍보비로 책정된 백만원이 있으니 그것도 메이킹 제작비에 쓰자,라고 말했다.

 

애초에 나는 보조강사 인건비로 메이킹 제작비를 쓰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런저런 오해 끝에 보조강사 둘이서

연극+영화 합쳐 30회차 교육인데 15회차를 촬영해서 메이킹을 만들게 되었다.

나는 초대된 입장이라 교육만 진행하면 되는 문제였으나

이건 뭔가 아닌 것같아서 다시 확인을 했고 바로잡았다.

그 과정에서 누구가는 마음이 상했고 나 또한 에너지를 많이 써야했다.

보조강사료는 시급 22,000원이다.

한 차시가 3시간이니 22,000원 곱하기 3 곱하기 15차시=99만원이다.

15회차 촬영의 영상물제작에 99만원을 받는 건 말이 안된다는 걸 나도 안다.

우리도 영상제작비 견적을 낼 때 회당 촬영 최소 15만원, 편집비는 1일당 60만원이니까.

그런데 원래 교육으로 왔던 인력 중 한 사람을 메이킹으로 돌리는 것으로 얘기가 된 것인데

보조강사들은 프로덕션에서 일할 때의 인건비 상정 기준으로 활동을 판단했고

급기야 '봉사' 운운 하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교육 1주일을 앞두고 새로운 강사를 구해야 했다.

보조강사 중 한 명은 나이가 좀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었는데(서로 선후배관계)

대학을 막 졸업한 학생은 나를 차단시켰는지 카톡의 노란1이 안없어진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것같다.

그래서 내가 좀 답답하다.

그는 아마 내 탓을 할 것이다.

그걸 아니 내 마음이 정말 무겁다.

 

미디어교육을 할 때 보통 보조강사는 주강사가 구한다.

전체 교육을 책임지는 주강사가 교육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인력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교육에는 내가 구하지 않은 보조강사가 와있는 건가.

내가 이번에 맡은 교육에서는 영종도라는 장소의 이력을 담는 다큐를 만들어야한다.

중학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교사들에게도 어렵다.

그래서 주강사들을 두 명이나 배치했고

보조강사로는 영상은 잘 몰라도 영종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구해달라고

교육담당자(사서)에게 부탁을 했다.

사서는 그런 사람을 못 구했고

(그럼 우리에게 그 사정을 말해야하는데)

임의로 자기가 아는 영상 관련 보조강사를 구한 거다.

 

그동안의 미디어교육을 할 때에 내 수업의 보조강사들은 나의 학생이거나 나의 조연출이었다.

시급 22,000원이 싸 보이지만

그들의 기준으로는 비싼 거니까.

(내 학생들은 시급 7천원에 까페 알바를 한다)

학생들에게 가능한한 제작과 연관있는 알바를 하라고 권하고

기회가 있으면 내 수업에 참여시켜왔다.

학생이든 조연출이든 배우는 과정이기에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틈틈히 촬영을 해서 메이킹을 만들도록 했다.

미디어교육의 보조강사로 참여하는 것은 이후 주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트레이닝의 의미가 있고

메이킹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실습한다는 의미가 있기에

학생도 조연출도 기꺼이 해왔다.

이것이 착취가 될 수도 있으므로

소액이지만 나는 내 강사비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거나

다른 교육을 소개시켜주는 방식으로 보답을 해왔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조강사로 왔다.

나는 메이킹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면서 제작비가 너무 적으니

촬영회차를 좀 줄일 수도 있다는 말을 했는데

거기서부터 오해가 싹터서

보조강사 두 명이 함께 움직여서 30회차 교육 중

15회차만 촬영해서 메이킹을 만드는 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99만원 곱하기 2명 + 백만원 =298만원으로

스케치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얘기가 되고 만거다.

나는 기획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웬만하면 그냥 교육만 하려고 했는데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강사들이 시급 4만원 받고 진행하는 교육에서

15회차 촬영에 두 명이나, 그것도 스케치영상 만들면서 298만원이라니

이건 주객이 바뀌어버린 상황이었다.

 

내가 바로 잡은 것은

1. 교육이 우선이다. 그러니 한명은 꼭 수업에 참여하고 다른 한 명만 메이킹을 하는 거다.

(그들은 왜 당연히 둘이 같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2. 영화 메이킹 제작비는 99만원, 연극 메이킹 제작비는 홍보비 100만원으로 한다.

3. 전회차 촬영을 해야한다. 예산을 배정한 메이킹 전담인력이 있는데 단순 스케치는 안된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그동안 진행해왔던 교육의 메이킹 영상들을 샘플로 제시했다.

그들은 그 돈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고

나는 그 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을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1. 영종주민으로 보조강사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영상보조강사를 구하는 일을 주강사에게 맡겼어야 했다.

2. 보조강사 둘이서 같이 움직이면서 영상물을 만든다고 했을 때

그것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다.

(이 일을 진행한 것은 사서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기회를 놓친 상황에서 교육을 일주일 남기고

보조강사가 내게 "영화교육 때 언제언제 가면 되냐?"고 물어오면서

나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고

망설이다가 바로잡았다.

세번째 기회는 이 상황을 묵인하고 그냥 교육만 하고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를 이 교육에 끌어들인 이는 시급 4만원에 교육을 맡아준다고 고마워했다.

그래, 고마워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 태도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끝나야한다.

일이 시작하면 동등한 파트너가 되어야한다.

"싸게 모셔와서" 미안해서,라는 태도는 일이 안되게 만든다.

일을 맡기로 한 이상 내 일이니 최선을 다해서 한다.

보조강사들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시세보다 많은 돈을 받게 되었으면서도

봉사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걸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의 교육은 망하게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 15차시라 하더라도 영화를 만드는 교육에 강사가 15번만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촬영과 편집은 늘 많은 시간을 필요로하고

대부분의 강사들은 참여자들이 제대로 과정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돈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다. 그래야 교육이 제대로 된다.

그래서 바로 잡았다. 

그런데 상처입은 어린 보조강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미디어교육에 경험이 없는, 그래서 설레어하던 그 강사에게

나는 여러 번 자료도 보내주고

제작에 뜻이 있다니 이런저런 지원사업을 소개해줬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오해가 산처럼 쌓여있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 나는 쥐꼬리만한 시급에 엄청난 일을 시키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을 거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새로운 보조강사는 나의 조연출이다.

다른 데 강의는 시급이 보통 2만원인데 여기는 22,000원이라며 신나하며 교육을 맡았고

우리는 토요일부터 교육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들 물은 이렇다. 그걸  그 젊은 강사한테 얘기해주고 싶은데.....기회가 없구나.

 

2.

상대방이 사정사정해서 일을 부탁했다.

이 단계에서 나는 갑이다.

그런데 일을 맡았다.

여기서부터 나는 을이 된다.

그건 진리다.

아는데도 피곤했던 지난 몇 주일.

 

작년 장애학회에서 장애인캐릭터상에 대해서 발표를 했고

올해 장애인영화제에서 그걸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제안을 했을 뿐이고 제안을 현실화시키겠다고 나선 이는 영화제다.

2월에 수술을 했고 얼굴이 계속 부어서 외출을 최소화하고 있을 때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11월 나의 제안서에서 더 나아간 것이 있느냐

역할분담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영화제는 어떤 상을 그리고 있느냐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답을 못하면서 그냥 만나자고 하는 거다.

나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자판기가 아닌데....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다고 해서

나는 그때 보냈던 제안서가 다라고 그러니 거기서 더 디벨롭된 안을 가지고 만나자고 말씀드렸다.

4월의 영화제에서 캐릭터상을 추진한다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내게 2016년의 한국영화 속 장애인에 대해서 정리해서 보내라고 해서

"제가 지금 몸이 안좋고..."라고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표명했는데

상대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결국 그것을 정리해서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후 연락이 왔다.

현실적으로 장애인캐릭터상의 실현은 불가능하니

이번 영화제에서 발표만 하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원고를 다음 주 월요일까지 보내라.

단지 5일의 말미를 받았기에 원고의 완성은 계속 미뤄졌고

밤마다 독촉전화를 받다가

어제 겨우 보냈다.

 

일을 맡은 이상 평등한 파트너로서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건 잘 알겠는데

지난 몇 주일은 너무 시달렸다.

어느 날은 장애학회와 영화제와 파트너 언론사에게 

내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냐고.

나는 그저 학회에서 발표를 한 것 뿐인데

왜 내게 이러는 거냐고 메일을 보내고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판을 깨고 싶지 않으면 나서주는 것에 고마워하며

그런 닥달에 대해서 순순히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았다.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그 순간을 넘겼다.

 

3.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쌓인 스트레스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매주 수요일엔 아침 10시부터 수업이라 7시 30분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수요일엔 병원엘 가지못한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영화제 참가로 수업을 대체했기 때문에

11시까지 홍대입구로 가면 되었다.

병원에 들렀다 가면 되겠다 싶었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병원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농로에 누가 차를, 옆에 자리도 많은데 가운데에 세워두었다.

후진을 해서 돌아가려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고

결국 차주인을 불러서 차를 옆으로 옮기게 했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한 후에 병원에 가보니 사람이 세 명이나 와있었다.

간호사 선생님께 소요시간을 여쭤보니 11시까지 홍대 입구에 갈 수가 없을 것같았다.

그래서 진료받는 걸 포기하고 돌아나와 개화역까지 운전해가는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최초에는 농로에 차를 세워놓은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렇게 한 번 화가 나기 시작하자

매일 닥달을 받는 내 처지가 생각이 나고 매일 닥달을 해대는 국장님한테 서운함이 일었다.

내가 "제가 수술을 해서 지금 쉬고있다"라고 말을 해도 안부 한마디 없이 

일정만 말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은 지금 내가 미운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일이 이 지경으로 되어버렸나.

나는 왜 이렇게 몰리면서 살아가야하나.

당신은 나를 정당한 파트너로 대우해주고 있는 건가.

혹시 당신은 당신이 나를 돕고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러고나자 영종교육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다랐다.

영종도가 강화도 같을 줄 알았는데

거기는 국제고가 있는 신도시였다.

지하철도 있었다.

강사료가 싸도

소위 문화소외계층으로 분류될 아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멍청한 나의 착각이었다.

물릴 수도 없어서 이왕 맡기로 한 거라 하기로 했는데

이런저런 오해들로 일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바로잡는 과정에서 내가 마음이 상했다.

보조강사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억울했다.

사서는 왜 임의로 이들을 보조강사로 뽑았는가.

파트너인 기획자 영화교사는 왜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데도 보고만 있는가.

나중에 파트너교사와 통화를 하면서

그도 나와 같은 상황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 안심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은 왜 그럼 가만히 있는 건거'라는 생각에 좀 화가 났다.

 

나는 늘 이렇다.

사람들은 늘 좋은 말만 듣기를 바라는 것같다.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부당함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쓰일 에너지 견적이 나오면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버린다.

사무실에서도 그랬고 작년에 파견사업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나는 그 흐름에 나를 맡길 수가 없어서

해결에 나선다.

해결이 되고나면 사람들은 내게 감사의 말을 하고 찬사를 보내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당했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아직도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한심하다.

 

4.

그런데 또 이런 마음이 쉽게 풀렸다.

어제 진료가 끝나고 간호사선생님한테

몇시에 와야 1등을 할 수 있냐고 물으니

요즘 오는 분들은 8시 10분경에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농로가 차로 막혀있지 않았어도

나는 치료를 받지 못했던 거다.

 

애꿎은 사람들 욕하지 말고

내가 살아가는 태도나 잘 생각해보자.

 

비가 왔고 비만큼 촉촉한 음악으로 4월을 기념함.

내일부터 정신없이 바빠질 4월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B2KG52VyOc

the taxi lights were in your eyes
so warm against st marys spires
the carnival was over in the rain
and arm in arm through vincent street
the evening hanging like a dream
i touched your face and saw the night again

and in your arms i watched the stars
ascend and sweep a loneliness away for a while
your fingers white and locked in mine
i kiss your face i kiss your eyes until
they turn to me and softly smile

and empty hearted i walked on
the river flowing to the song
of the evening in the darkness and the rain
the christmas lights were far down stream
the wind so lonely and unreal
i saw your face and i thought you were a dream

but when i saw your eyes what could i do?
what could i say, my love?
your kisses they will hide away the stars

its sat*rday, the evening’s come
the football crowds have all gone home
but still behind this window i look on
december’s leaves so slowly fall
to cars that break the evening’s pall
and i will wait for you to come tonigh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