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네 번째 영화. 10년동안 쓴 육아일기

1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5/06/22
    소원(2)
    하루

소원

* 드디어 오늘!!
6월 22일 월요일 저녁 7시 <아이들> + 대담회 (류미례, 안정숙)
인디스페이스(종로3가 전철역 14번 출구 서울극장 6층)
시즌2를 고민하는 류미례의 꿈에 대한 대화에 함께 해주세요!

 

<소원>

지난 주에 어떤 신문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오늘 기획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만남.
기자가 <작은책>독자라서 연락을 하셨길래
나 또한 <직은책>필자로서 감사하며 진행한 인터뷰)
마지막으로 꿈이 뭐냐고 물었다
역시, 작은책 독자다운 질문이었음.

2001년에 만든 <친구-나는 행복하다 두번째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경수는 내게 꿈이 뭐냐고 물었고 
그 때 나는 '좋은 영화 만드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2015년 6월 15일의 나는 같은 질문에 대해
엄앵란, 전원주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대답했다.

맞다. 나는 엄앵란, 전원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지난 주에 바빠서 뜯지 못한 '씨네21'을 뜯었다가
잠이 확 깼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 기획전 시즌2>를 전하는
20줄 정도 짧은 기사의 제목이 
'엄마는 위대하다'였다.

<아이들>의 엄마는 결코 위대하지 않은데.
<아이들>을 만든 류미례는
30~40대 전업여성들에게서는 공감을 얻지만
성별과 연령이 달라지면 욕을 더 많이 먹는다.

"아이를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냐"는 비난, "남편한테 감사하게 생각해라. 이 영화는 남편이 만든 거나 다름없다"라는 조언, 이불 좀 개고 촬영을 하지, 아이들 밥상에 아이들 반찬이 없다, 이러니 맞벌이 부부들 아이가 비행청소년이 된다,는 책망. 암튼 <아이들>로 전국을 순회하며 들었던 다양한 이야기들로 책을 써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

그 구체적인 대화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있을 때
한 번 이야기마당을 펼쳐보면 좋긴 하겠지만
내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크게 발견한 것은
내 영화가 위로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건 <엄마...>의, 
가족과 기억의 상처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위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한 젊은 엄마가 말했다.
"영화를 보는데 자꾸 내가 자꾸 우리 시어머니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저기 저 탁자위의 먼지, 
저 싱크대의 닦아내지 않은 물기....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다가 어느 순간 쾌감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위로가 됐어요. 
아, 나 잘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 때 생각했다.
'나도 엄앵란이나 전원주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엄앵란은 바람개비같은 신성일을 평생 견디고 살아서인지
아침마당 고정 출연자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한 여성에게 "그러니 맞고 살지"라는
어이없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는데 
어쨌거나 참고 살아야하고 모든 것을 이해해야하고...
하는 말을 하는 역할로 자주 초대되었다.

전원주가 며느리 흉을 보면서 
어떻게 지 속옷을 남편 속옷 위에 놓냐,라는 발언을 해서 
전국의 며느리들이 분개해마지 않았던 일도 있다.

그 와중에 송도순이 괜찮은 사람으로 자리잡는 거다.
송도순은 "며느리도 사람이다"와 같은 류의 말을 할 뿐인데
그 송도순이 깨인 사람으로 각광을 받는 거다!

상식 이하의 사람들로 줄을 세우고 나면
상식적인 사람이 평균 이상인 것처럼 각인되고
그 상식이 노력해서 얻어야할 것들로 위치지워진다.

갓난아기를 업고 온 젊은 여성이 내 영화를 보고
"아, 나는 잘하고 있구나"라는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할 때
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엄앵란 전원주의 반대편 끝에서 더 막나가야겠구나...

나는 결혼제도 안에 있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서 가장 멀리 나가는 게 내 꿈이다.
그래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세상이 설정해놓은 특정 어머니 상에 위배된다는 비난을 받을 때
저런 여자보다는 낫지 않아?라고
나를 가리킬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내가 불행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

<인생은 아름다워>의 게이커플에 
보수세력이 특별히 화가난 이유는
그들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불행에 치어 눈물을 찔찔 흘려야하는데
감히 동성애자가 행복해? 
그래서 자신들의 아이가 '전염된다'고 걱정했던 거다.
오랫동안 어렵게 어렵게 이성애중심주의로 무장시켜왔는데
그래서 동성애=지옥, 동성애=고통
이렇게 되어야하는데
너무 행복하니까 샘이 난 거였던 거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엄마 아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도 절대로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애 셋 있는 여성감독이
이불도 잘 안개고
밥상엔 아이 반찬이 따로 없고
집안 꼴은 말이 아닌데도
그런데도 잘 살아가더라

그러면 육아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내가 잘못해서 아이가 잘못될까봐 겁을 먹는 엄마들에게
(36개월 인성형성론은 얼마나 공포인지)

상상을 초월할만큼 전력질주를 해도
'좋은 엄마'라는 표딱지는 늘 저 편에 있어서
쉼없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엄마들에게

이런 여자도 잘 살고 있어요!
라고 조금이라도 숨통을 트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엄앵란이나 전원주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거다.

은별을 업고 하은 한별의 양손을 잡고 다닐 때
나는 참 많은 찬사를 받았다.
특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표창장을 받아야한다,
애국자다,
그런 말들을 입에 침이 마르게 하시면서
그러면서 생전 처음 보는 내게
며느리 흉을 보기도 했다.

"우리 며느리가 애기엄마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 낳고 그만 낳는대."

나에게 보낸 찬사는 다른 이들에게는 비난의 화살이 될 것이다.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않는 며느리에게
아이 없이 살아가는 부부들에게
비혼들에게
이기적이라고 욕하고
더 나아가서는 독신세를 부과해야한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혼을 할까 말까, 애를 낳을가 말까의 문제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착각이 여전히 세상에 횡행하고 있다.

나는 결혼 제도 안에 있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서
할머니 할아버지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엄마'이다.
그런 존재로 나는 지금보다 더 막 나갈 것이다.

긴 시간동안 푸른영상 동료들 말고는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지냈는데
최근 몇년간 만나는 사람들이 다양해지면서
그분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그건 그동안 사람들에게 인식된 나의 이미지.

예를 들어 회의하러 갔다가 아직 안온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손톱 좀 깎을께요"
라고 말을 했더니 어떤 분이 
의외로 털털한 면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깜놀.
(우리 엄마가 들으면 흥! 하고 비웃음을 날리실 듯)

<매드맥스>에 열광하는 내게
의외였다고 말하던 한 언니.
(혼자 상상해본 바로는 아기 키우고 
아기 키우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15년 동안 이혼 안하고 살림하고 있는
뭐랄까 규범적인 여성으로 이해하신 듯)

세월호 가족들의 19박 20일 도보행진에
하루 참여했었는데
그 때 함께 걷던 동료 여성 감독이 그런 말을 해주었다.
내가 밀양에 다니는 걸 보고
나도 가야겠다,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런 반응들을 접하고 들으면
내 머리 속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리스트들이 쫘르륵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 남편도 자유로워졌다.
김동원감독님은 자주 내게
"어떻게 이혼 안하고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냐?"고 
놀라움 반 놀림 반 물음을 한다. 
결혼 전의 나를 아는 선배들이
내가 사제의 아내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던 이유를 
나 또한 모르는 바 아니니까.

남편은 이제 교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우리가 이혼을 한다 하더라도
남편 신변에 변동이 생길 위험은 없는 거고
(여기서 잠깐!!
남편은 여전히 사제입니다.
사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여된 것이지
주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현직 주교는 3년 후면 사라지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영원할테니까)

그리고 남편이 더이상 교구의 조직에
속해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내게 큰 자유를 주었다.
성공회신자가 아닌 나와
주교의 특별관면을 받으면서까지
결혼을 하려 했던 남편에게
곤란함을 주고 싶지않아
나는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의 자유와 나의 활동영역에 
넘지말아야할 선을 긋는 거였다.

이제 나는 자유다.
12년 동안의 육아경험을 몸에 쌓은 채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나는 어떤 발언을 할 것인가
나는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
에 대해 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를 얻었다.

45살의 나,
내 인생의 시즌2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일단 지금의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는, 
결혼 제도 안에 거하며
아이 셋을 키우는
중년 여성이 되는 것이 꿈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