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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네 번째 영화. 10년동안 쓴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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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06
    2006 육아일기(10)
    하루

2006 육아일기

(출산을 앞둔 친구를 위해 2011년 6월 12일에 썼던 글을 앞으로 옮김)

 

하루님의 [같은 무늬를 가진 당신에게] 에 관련된 글.

두 아이 엄마일 때 썼던 글.

국정브리핑이라는 정부홍보사이트가 있었던 것같은데

청탁을 받고서 쓸까말까 무지 망설이다가 정말 엄청나게 고민하며 썼었다.

"아이를 낳으면 행복해요~"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그렇게 정부의 저출산대책에 대한 나팔수가 될까봐.

그런데 왜 글을 썼을까... 그냥....친구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좀 힘들었다고나 할까.

 

보건복지부 공무원이 된 대학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애는 오래오래 운동 언저리에서 맴돌다 소설을 쓴다고 또 몇 년을 헤매다

아마도 행정고시나 그런 거 비슷한 걸 합격하고서 내게 연락을 했던 것같은데

메일이 이랬다.

"류미례, 나 000다. 핸드폰 번호 알려줘 내 번호는 1234-000~야.."

그래서 내가 메일로

"000, 안녕? 나 류미례다. 내가 전화할께"

그랬더니 다시 메일이 와서

"너 시집간 거 아니까 걱정말고 핸드폰 번호 알려줘"

그래서 내가 내 번호는 안알려주고 그냥 걔한테 전화를 했다.

 

왜 그랬지? 아무튼 메일이 너무 이상했다. 

우리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아닌데 괜히 전화번호를 안 가르쳐줘서

지금 그애 전화번호를 모르네.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처음에 그냥 장난으로 썼던 답장에

"너 시집간 거 아니까..."라고 대꾸하니까 그냥 반발심 같은 게 생겨서(ㅋㅋ) 그랬던 것같다.

그애는 참 글을 잘 쓰는데도

일상적인 말투나 글은 저런 식이었다.

 

우리는 다른 애들이 다들 운동 정리하고 취직할 때,

가장 늦게까지 헤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영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니까 20대 중반을 넘어설 때

3년 정도 바닥을 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애를 만났었다.

그 때도 나는 학교 안에는 못 들어가고 학교 앞에서 그 애랑 밥을 먹었는데

그애도 나도 참 상태가 안좋았다.

떠나간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 스스로의 길은 찾지 못하는 절망감.

누구누구는 뭐 했다더라, 누구누구는 뭐 했다더라.

뭐? 걔가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뭐 그런 얘기하면서 다른 애들 흉보고 욕하느라 잠깐 친밀감을 느꼈었다.

 

그 애는 너무 많이 나이를 먹은 후에야 군대에 갔다.

내가 대학을 1년 일찍 들어가고 걔가 삼수를 했으니까 

나보다 나이가 4살이 많았을 거다. 

암튼 늦게간 군대에서 전투경찰이 되어서 국회 앞 지킨 얘기를 해주면서

조직이 통째로 신한국당으로 들어가서

매일 아침 자기네 조직의 선배와 동료들을 만났다고 한다.

"건물도 똑같이 석탑으로 된 거라 여기가 고댄가, 착각할 정도였어"

라고 말하며 웃기도.

 

몇 년 후 내가 조연출로 참여했던 <동강은 흐른다> 포스터를 붙이려고

고대 앞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학교는 축제중이었고 나는 또 학교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학교 앞 서점에다가 포스터를 맡기고 있었는데

걔가 아는 척을 하며 반갑게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너무 아파서

왜 이래? 나 빨리 가야해! 하고서 그 손을 뿌리치고 와버렸다.

그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왜 그랬을까?

 

그냥 몇년 전처럼 그애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으며

누구누구는 어떻고....하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던 것같다.

너 지금도 이러고 있는 거야? 너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거야?

이제 그만해!라는 말을 했을지도.

그리고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나중에 후배가 전해주길 그 애가 아주 이상하게 변했다고.

냉소적으로 변해서 말을 하다보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얘길 전해주었다.

좀더 따뜻해도 되었을텐데

막 그 터널을 지나온 나로서는

그리고 터널을 빠져나왔다 해도 여전히 불안한 현재를 살고있었던 나로서는

그 터널 안에 있는 그애를,

내가 방금 막 지나온 바닥을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도 그 때 그 애 손을 뿌리치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고 노무현이 싫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애 때문에 썼다.

지금 그 글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복사해서 붙여두었으니 앞으로 잃어버릴 일은 없겠지.

고마워요 파란꼬리님~~

 

아참, 연재가 끝난 후에 국정브리핑의 편집장님이 만나고싶어한다고해서

정부종합청사 근처에 갔었다.

편집장이 글을 써달라고, 그냥 자유롭게 아무 글이나 쓰라고 했다.

그러면서 편당 30만원을 주겠다고 했고 분량은 자유지만 보통 A4 한장 정도면 된다고 했다.

그 태도는 참 이상했다.

수많은 원고청탁을 받았지만 원고료를 그렇게 당당하게(?) 밝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때의 그 느낌은 "많죠?" 하면서 약간 자랑스러워하는 것같은....

 

그 때 나는 참세상에 연재글을 쓰다가 댓글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혼자서 맘대로 연재를 중단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국정브리핑에 연재를 해도 될까? 하고 혼자 생각하다가

사무실 사람들한테 "거기다 글을 써도 될까?"하고 물어보다가

(사람들은, 그럼~글 열심히 써서 그 돈으로 술 사먹자~! 하고 좋아했다)

나름 정한 원칙이 참세상에 연재글을 쓰는 만큼 국정브리핑에도 쓰자, 였는데....

그 후로 지금까지 참세상에 원고를 한 번도 안 보내고 있고

그래서 국정브리핑에도 한 번도 글을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국정브리핑은 없어져버렸다.... ^^;

  

참세상에는 아직까지도 글을 못 보내고 있다.

미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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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일기 : 류미례편 ①]함께 걷고 싶은 아름다운 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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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 감독.
며칠 전 사무실로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이 찾아왔다. 그녀는 최근 임신을 했고 그 일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었다. 마침 점심 때라 사무실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제가 지금요 임신하고서도 작업 잘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중이예요” 라고 말했더니 다들 웃었다. 남성들이거나 독신여성들 뿐인 사무실에서 아기엄마는 나 혼자 뿐이다. 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던 2000년에는 세 명의 임산부가 더 있었다. 사람들은 축하의 말과 함께 “너네 좀 이상하다”며 웃음을 보냈지만 우리들은 함께 행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푸른영상 사무실에 아기 엄마는 나 혼자 뿐이다. 함께 했던 그들은 현재 모두 전업주부가 되어있다. 내가 서있는 이 길을 지금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걷고 있다.

나는 독립영화인이다. 비디오로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하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결혼이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이 직업인 여자가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정신지체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 때의 나를 가끔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 생각이 없었거나 정신이 없었거나…. 아니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용기백배해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번째 영화 만드는 중에 한 임신

결혼을 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나 내 친구들의 엄마에게 우리의 존재는 남편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학창시절엔 대학을 보내기 위해 공부만 시켰고 대학 졸업 이후에는 학교가 직장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들은 엄마의 정성을 먹고 자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차려진 밥상이 있었고 옷장을 열면 세탁된 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내게 생애 최초의 좌절을 느끼게 했다. 나와 똑같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왔을 남편은 결혼을 하자 내게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했다.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지탱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할 정도로 남편은 무뎠다. 아니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가 말이 통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결혼생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임신을 했다. 내 나이 서른의 일이다. 나는 그 때 내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은이와 한별이. 한별이는 하루 종일 잘 자다가 하은이가 놀이방에서 올 시간이면 깨어난다.

스물여덟에 시작한 다큐멘터리. 늦깎이로 들어선 그 길에서 나는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임신은 기쁨만큼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푸른영상의 다큐멘터리들은 1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획, 구성, 촬영, 편집의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야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막 기획을 끝낸 내 영화를 접을 수가 없었다. 계획대로 진행했고 영화의 완성과 아기의 탄생은 아슬아슬하게 일치했다. 작업 막바지, 부른 배를 안고 촬영을 하고 있으면 내 영화의 주인공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뱃속의 아이가 보낸 신호 "엄마 너무 불편해…"

정신지체인으로 분류되는 그들. 그러나 내게는 그저 조금 다른 친구일 뿐인 그들은 봉천동 비탈길을 함께 걸으며 내가 넘어질까 봐 걱정을 해주었다. 촬영보다 힘든 건 편집이었다. 만삭의 임산부에게 운동은 필수적이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예정일을 걱정하며 나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전자파 차단 앞치마와 동전으로 무장을 하고서도 나는 아기한테 미안했다. 틈틈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편집 작업에 몰두하느라 운동할 시간을 놓치면 아기는 배속에서 꽁꽁 뭉치는 것으로 내게 신호를 보내왔다. ‘엄마, 너무 불편해. 몸 좀 펴주세요’

2001년 7월 5일. 첫 아이 하은이가 태어나던 날이다. 그 즈음의 스트레스를 잊을 수가 없다. 랜더링(편집명령어를 컴퓨터가 실행하는 과정)을 걸어놓고 집에서 잠깐 눈을 부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다운되어있는 컴퓨터. 출산 전에 마치지 못하면 영화는 엎어지는 것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와의 씨름으로 지쳐가면서 나의 스트레스는 아기한테까지 영향을 미쳤다. 7월 5일 새벽 6시. 양수가 터져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아기가 태변을 보았다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기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변을 보기도 하는데 아기가 태변을 먹게 되면 정신지체장애를 갖게 될 확률이 크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두말없이 수술에 동의했다.

 
"아가야 내게 와 줘서 너무 고마워"

내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것이 나는 두고두고 미안하다. 마취과 의사를 따라 수를 세다가 정신을 잃었다. 걱정스러운 엄마의 얼굴이 마취에서 깨어난 내가 처음 만난 모습이다. 그리고… 아기를 만났다. 사랑스러운 내 아기.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자주 내 아기를 상상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서도 기대감이 컸던 그 시간들. 그런데 처음 본 아기 얼굴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아기처럼 친숙했다.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머물러있던 꽃 한송이가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전의 나는 막내였던 탓인지 아기들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그 연약함이 두려웠다. 안기조차 겁이 나던 그 연약한 생명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열 달을 한 몸에 머물면서 아기는 문득 나와 함께 있었고 가끔씩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내게 와 줘서 고맙다. 고맙다, 아가야”

 
2001년 7월 5일 태어난 하은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자주 내 아기를 상상했다. 그런데 처음 본 아기 얼굴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아기처럼 친숙했다.

나의 아기는 장미꽃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배냇짓을 했고 가끔 웃기도 했으며 재채기도 했다. 그 작고 연약한 생명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충만감을 주었다.

조그마한 입으로 젖을 빨려고 낑낑대는 그 어린 생명은 살아가는 게 유일한 할 일이었고 나는 그 애를 책임져야하는… ‘엄마’였다. 마취가 풀리자 그 아픔은 엄청났지만 나는 내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했다. 탄생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무기력하게 몸을 열어야했던 나. 갑자기 엄마의 몸이 열려서 내 아기는 얼마나 놀랬을까? 나는 그 미안함 때문에라도 젖을 꼭 먹여야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젖을 빨고 힘을 꿍꿍 주며 응가를 하는 아기는 정말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나도 열심히 살고 싶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움직여야했다. 며칠 동안 누워만 있다가 내 힘으로 침대에서 내려와야 했을 때 그 첫 발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럽다고. 이 고통을 다 겪어내면서도 따뜻하게 웃고 넉넉하게 즐거울 수 있었던 선배 엄마들이 위대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엄마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육아일기 : 류미례편 ②] 내가 숨쉬는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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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 감독
하은이는 4kg이라는 큰 몸으로 태어났다. 몸을 좀 추스르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신생아실에 있는 하은이를 자주 보러 다녔다. 3층 신생아실에서 하은이를 받아 5층 입원실에 데려가곤 했는데 어느 날, 방문객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물었다.

“얘는 몇 개월 이예요?”
어제 태어났다는 말에 방문객은 크게 놀랐다. 내가 보기에도 하은이는 막 태어난 게 아니라 어디 있다가 온 것 같았다. 입원실에서 젖을 먹이고 다시 신생아실로 아기를 보내고 나면 방금 돌아섰는데도 눈앞에서 아기 얼굴이 아른거렸다. 내가 아기를 보고 싶어 하면 엄마는 “좀만 있어봐라. 이제 지겹게 볼 것이다” 하며 웃곤 하셨다.

엄마 말대로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정말 나는 아기와는 한 시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신생아실과 입원실을 왔다 갔다 하던 병원생활과는 달리 이제 나는 24시간동안 아기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한테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애를 키우면서 느낀 엄마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

아들 형제를 바랐던 아버지 때문에 12년 동안 여덟 명의 아기를 낳아야했던 우리 엄마. 나는 아들 바라던 집안의 넷째 딸이었다.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남으로써 엄마는 고난의 행군을 마칠 수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해 오신 엄마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나보다 남동생을 더 예뻐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실 엄마한테 은근하게 서운함을 느껴왔던 것이다.

하지만 하은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내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마의 끝없는 돌봄 덕분이었다는 것을. 막 태어난 아기는 자주 먹고 자주 쌌으며 7월의 열대야 속에서 나와 엄마는 아기가 편안한지 쉬지 않고 살펴야했다. 아기는 몸과 마음과… 꿈까지 지배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기를 돌보면서, 그리고 어린 나에게도 그런 세심한 마음을 베풀었을 30년 전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바라본 엄마는 정말 나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의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고마운 사람.

 
일과 육아를 동시에 잘 할 수 있을까? 당시 나는 하은이를 업고 다니며 일을 했다.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도 늘어났다. 출산 전까지 우리는 평등부부를 지향해왔다. 그러나 오직 여성만이 출산과 수유를 담당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조건은 육아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라는 오해로 변모해갔다. 처음에 우리 부부는 똑같이 아기를 안지 못했다. 엄마는 우리들이 아기를 안으면 “목만 들고 다닌다”며 떨어뜨릴까봐 불안해했다. 그 불안도 잠시,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나는 점점 아기돌보기에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남편은 몇 달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샐러리맨인 남편보다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내가 더 자유로웠기 때문에 출산 후 아기 돌보기는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나와, 퇴근 후 저녁시간만을 함께 하는 남편이 아기와의 애착관계 형성에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런 조건이 일상까지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함께 있을 때에도 남편은 전적으로 나를 의지했다. 그는 그저 조력자일 뿐이었다! 아기가 방긋방긋 잘 웃을 때만 예뻐할 뿐 아기가 울거나 보채면 얼른 아기를 내주었다.

“배고픈가 봐. 빨리 젖 줘.”
우는 것이 유일한 표현수단인 아기는 배고픔 말고도 다양한 이유로 칭얼거린다. 기저귀가 젖었을 수도 있고 덥거나 추울 수도 있다. 나는 남편에게 ‘능동적으로, 생각 좀 하며’ 아기 돌보기를 요구했지만 아기에 관한한 그는 마치 무뇌아 같았다. 그때를 돌아보면 남편 또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류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차이로 작용한다. 산후 조리 때문에 집에 오셨던 엄마는 남편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하셨다. 가끔 육아와 가사 분담 문제로 남편과 내가 언쟁이라도 하고 나면 엄마는 질린 듯한 얼굴로 내게 말하곤 하셨다.

“야야, 나는 너같은 세상 하루만 살다 죽어도 한이 없겠다”
아버지는 엄마가 6남매를 키우는 동안 기저귀 한 번을 안 갈았다. 농사일로 바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농사일을 안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애처로운 우리 엄마. 그러나 그런 엄마가 오히려 내게는 가장 큰 벽이 되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나보고 ‘호강에 초친다’며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셨지만 나는 엄마가 아니었다. 당신을 희생하시며 나를 키워주신 덕분에 나는 차별보다는 평등을, 인내보다는 공정함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내딸의 미래를 위해서도 순종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딸을 키우는 엄마였던 것이다. 가정의 평온함을 위해 두 눈 질끈 감고 세상이 부여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수도 있었지만 내 딸이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참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서라도 공정하고 평등해야 했다. 엄마들은 딸들에게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지만 딸들은 엄마의 모습에서 미래를 본다. 내 딸의 당당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는 순종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은이는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었지만 육아와 관련한 역할 분담 문제로 우리 부부는 참 많이도 싸웠다.

 
"바다소리나?" "응". 하은이는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었지만 육아와 관련한 역할 분담 문제로 우리 부부는 참 많이도 싸웠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도 결혼 전과 다름없이, 오히려 날개가 달린 듯 훨훨 날아다니며 맹렬하게 활동하는 남편의 모습은 내게 심한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한편으로는 갈팡질팡한 내 마음도 문제였다. 애초의 계획은 12개월 동안만 아기를 키우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2개월은 아기와 떨어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언니들은 낯을 가리지 않는 5, 6개월 때 미리 맡기지 않은 상황이라면 36개월까지는 양육자의 변동이 없어야 한다고 타일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선배언니를 찾아가기도 했다. 애가 셋인 선배언니는 나보고 오래오래 애를 키우라고 했다.

 
일하고 싶은 나는 외로웠다

“애 키우면서 작업계획을 세워라. 골목풍경, 이런 것도 좋지 않니? 난 일찍부터 일 시작한 거 너무너무 후회 된다”

선배언니에게서 뭘 기대했던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난 이제 첫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그저 영화 두 편 만들었을 뿐인데, 내가 일터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기는 사랑스러웠지만 일하고 싶은 나는… 외로웠다.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하은이를 보면 한없이 애처로웠다. 난 모성이 부족한가봐. 불쌍한 내 아기. 왜 나 같은 엄마를 만났니? 일하고 싶은 ‘나’와 하은이의 ‘엄마’라는 존재 사이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글썽였다.

 

[육아일기 : 류미례편 ③]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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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 감독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한다. 나는 특히 더 그렇다. 그리고 드디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역운동이 활발한 관악구. 어느 지역모임의 일일주점에 갔다가 씩씩이 어린이집 이모(씩씩이 어린이집은 ‘교사’ 대신 ‘이모’라는 호칭을 쓴다)를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내 고민을 들은 이모가 귀가 반짝 뜨일 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하루라도 더 오래 엄마가 키우면 좋긴 하겠지만 당위 때문에 억지로 그러는 건 좋지 못하다. 행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36개월을 함께 하는 것보다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18개월부터 하은이를 씩씩이 어린이집에 맡기기 시작했다. 푸른영상의 다른 동료들에게 그 말을 전하니 한 남자선배가 겁을 주었다.

“너 말야, 아기랑 떨어질 때 아기가 막 울거든. 그거 장난 아니다. 마음 아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그래서 자꾸 미적거리고 있으면 놀이방 이모가 빨리 가라고 그래.”

 
울먹울먹하면서도 울지 않는 아이

2003년 1월 6일. 하은이는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서 씩씩이 어린이집의 어린이가 됐다. 하은이가 씩씩한 어린이가 되길 바랐으나 하은이는 아주 독특한 행동을 보였다. 매일 아침 헤어질 때마다 하은이는 울먹울먹 하면서도 울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모들은 오히려 크게 우는 아이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하은이는 일명 ‘착한아이 콤플렉스’같은 것이 있어서 자기감정을 안으로 누르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몇 번이고 그만 둘 생각을 했다. 악몽을 꾸는지 밤마다 울다 깨는 하은이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짓을 하는 건가 한탄하기도 했다. 보통 한 달이면 적응이 끝난다는데 하은이는 6개월을 넘어서도 힘들어했다. 급기야는 매일 얼굴에 손톱자국이나 멍을 달고 들어와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은이와 같은 반의 한 아이가 당시 집안에 불화가 많아 그 스트레스를 어린이집에 와서 푼다고 했다.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하은이는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당한다고 했다. 그 아이의 집안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만이라도 하은이를 집에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씩씩이 이모와 상담을 하던 날, 나는 또 한 번 내 인생의 지표가 될만한 말을 들었다.

 
나는 18개월부터 하은이를 씩씩이 어린이집에 맡기기 시작했다. 하은이는 일명 '착한아이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어서 매일 아침 헤어질때면 울먹이기만 할뿐 울지 않았다.
“다 같은 우리 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될까요? 그 애도 많이 안아주고 많이 다독여주니까 점점 변해가요. 그리고 하은이가 언젠가는 겪어야할 일을 지금 겪고 있다고 생각해주세요. 어렵게 어렵게 적응하고 있는데 지금 쉬는 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잖아요?”
 
아이 통해 확인한 문제 아이와 함께 풀어

나는 그렇게 하은이와 함께 자라왔다. 문제가 생기면 견디기보다 도망가고 싶어 했던 그 마음들을 하은이를 통해서 확인했고 하은이와 함께 풀어갔다. 나의 세 번째 영화 <엄마…>는 바로 그 시간을 담은 것이었다.

처음 하은이를 낳았을 때엔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지만 갈수록 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다른 집 엄마들은 손주 보는 게 낙이라던데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걸까? 나는 내 문제를 애꿎은 엄마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엄마가 새 인생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마지막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밀린 일거리로 허덕이며 1시간만, 아니 10분만 누가 아기를 봐줬으면 하는 간절함에 빠져들 때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렸고 이내 서운해 했다. 가끔은 맹렬히 미워하기도 하면서 나의 이기심에 괴로워했다. 그렇게 이성과 감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문득 하은이를 보았다. 나는 우리 엄마랑 뭐가 다른가? 말로 표현하진 않겠지만 하은이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품을 것이다.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나 키우는 것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저렇게 일을 하려고 할까?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이기적일까…….

 
엄마이자 평범한 욕망을 가진 한 사람

‘하은아. 나는 말이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란다. 난 네 엄마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이란다.’

내 카메라는 엄마를 찍고 있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하은이에게 향해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엄마의 새 인생을 지지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대고 싶어 하고 서운해 하는 내 마음을 나는 영화를 통해서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날, 나는 내 딸에게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만드는 시간은 내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동안의 나는 국가보안법이나 환경, 장애를 중심으로 다뤄왔고 아기엄마가 된 후로는 더 이상 연출자로서는 활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은이를 놀이방에 맡기기는 했지만 오후 여섯시만 되면 사무실을 나서야했고 그렇게 낮의 일을 끝내면 밤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가정을 안식처라고 하는가? 그곳은 또 다른 일터였다. 내가 찍을 인물이나 사건들이 여섯시가 되면 ‘그럼 이만’하고 내일을 기약해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의 어느 지점에서 영화를 만들어야하는 내게 ‘여섯시면 땡!’인 운명은 더 이상 연출자로서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구성을 하거나 나레이션을 쓰는 작가 일을 하면서, 그렇게 국한되어버린 내 자리를 깨달으며 ‘괜찮아. 괜찮아. 연출만이 의미 있는 건 아니야’ 열심히 다독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쓸쓸해졌다.

 
둘째아이 임신…기쁘기보다 당황, 반갑기보다 혼란

그러다 발견한 새로운 길! 어느 순간 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평범한 나. 아기 엄마인 나. 영화를 만드는 나. 일과 육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 그리고… 연애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한 우리 엄마와 그것을 바라보는 복잡한 마음의 나! 모녀 3대의 이야기인 <엄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더 이상 하은이는 내 일의 반대편에 서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내 카메라와 함께 있어도 되는 내 영화의 등장인물이었다. 하은이를 업고 다니며 촬영을 했고 엄마와 나는 자주 하은이를 매개로 연결되었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마지막 촬영지인 러시아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내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할 러시아!

그런데 여권과 비자를 만들며 들떠있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둘째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자꾸 태몽을 꾼다는 엄마의 걱정(?)을 한 귀로 흘렸는데 남편마저도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는 꿈을 꿨다는 어느 날 아침, 별 생각 없이 임신테스터기를 확인하는 순간, 선명한 두 줄을 발견하며 아득해졌다. “어떡하니?” 함께 있던 사무실 언니의 걱정. 언니는 순간 실수를 한 듯, “앗 미안해. 축하해”라고 얼른 말을 바꿨지만 나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반갑기보다는 혼란스러운 그 마음 한 가운데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놀랄 따름이었다.

 

 

 

[육아일기 : 류미례편 ④]내 사랑 못난이

 
     
   
     
 
류미례 감독.
임신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해석은 아기의 영혼이 자신이 깃들 가정을 고른다는 것이다. 아기 천사들은 자신을 품어줄 엄마와 아빠를, 그리고 자신이 깃들 세상의 집들을 요모조모 따져보다가 고른다고 한다. 갑작스런 임신이었지만 내 몸에 자리잡은 작은 아기씨는 나를 선택한 영혼이었다. 어쩌자고 하고 많은 엄마들 중에서 나를 골랐니,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아기가 내게로 왔다. 지금은 자그마한 아기씨지만 그 자그마한 존재는 점점 커져가고 내 몸을 거쳐 나온 후에는 하은이같은 아기가 되고 자라나는 것이다. 그 신비로운 경험을 겪고 난 후라서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아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임신 초기의 비행은 위험하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작업도 작업이었지만 몇 년 만에 러시아의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한껏 부풀어있는 엄마의 그 밝은 얼굴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산부인과를 찾아서 의사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의사는 “권장하지는 않지만 꼭 가야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해주었다. 역시 또 나는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것이다.
 
유산의 불안에 떨면서도 멈출수 없던 작업

하지만 유산이 걱정됐다. 유산에 관한 가장 슬픈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작은 아기씨는 입덧으로 엄마한테 신호를 보낸다. 너무 작고 여려서 그 존재를 모를까 봐 아기는 "엄마, 내가 왔어요. 작지만 나 여기 있거든요" 하면서 자꾸 엄마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엄마가 아기를 위해 잘 쉬고 잘 먹고 잘 자지 않으면 아기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 우리 엄마는 아직 날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 나중에 우리 엄마가 준비가 되면 다시 와야지" 나는 내 아기가 그렇게 떠날까 봐 걱정됐다.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고 비행을 하면서 나는 몇 번이고 아기한테 타일렀다.

"아가야. 네가 찾아와서 무척 기쁘단다. 엄마가 바쁜 건 준비가 안 된 게 아니야. 엄마가 원래 이런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꼭 붙어있어야 해"
 
     
   
     
 
다큐멘터리 영화 '엄마‥'를 제작하는 동안 알게된 둘째 임신 사실. 영화 제작에 큰 힘이 됐던 것은 바로 내 영화를 좋아해 줬던 첫째 하은이였다.
타국은 냄새로 다가온다. 지금도 기억나는 러시아의 그 독특한 냄새. 나는 밤마다 풋고추 먹는 꿈을 꾸며 괴로운 입덧을 했다. 현기증과 구토를 반복하며 누워있노라면 엄마가 애달파하며 말을 걸어왔다.

“힘들지? 아래로 갈수록 더 힘들더라. 너를 낳을 땐 힘이 없어서 주사 맞고 낳았단다.”

둘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어떻게 여섯을 낳았을까? 엄마의 몸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을 뽑아서 아기의 몸을 만든다는데 엄마의 몸에는 지금 뭐가 남아있을까? 위로를 건네는 그 순간, 엄마는 내게 같은 여자였고 동료였다. 여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 그래서 엄마와  딸은 친구가 될 수 있나보다. 러시아 촬영은 비틀거리는 화면들만 남겨주었다. 화면은 형편없었지만 그 여행 동안 나는 나와 엄마와 그리고 또 다른 엄마이면서 동료인 우리 셋째언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많은 촬영 테이프들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하은이를 임신하고서 작업을 한 경험 때문에 편집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큰 착각이었다. 하은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아기가 뱃속에만 있었지만 이번에는 뱃속 아기 말고도 돌봐야할 아기가 또 있었던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은 편집을 시작하자마자 커다란 벽으로 다가왔다. 저녁 6시만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뱃속의 아기와 돌봐야 할 아이 그리고 일

저녁 6시면 편집이 한창 리듬을 탈 즈음이다. 머리 속에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놓칠 새라 메모를 하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흩어져가는 편집 리듬을 붙잡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날 편집한 분량을 집에 돌아와서 보는 것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매일 늦었고 그 때 내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바로 내 딸 하은이였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이모, 삼촌들이 나오는 <엄마…> 가편집본을 하은이는 열심히 보았다. 편집이 끝날 즈음, 하은은 음악과 대사를 다 외울 정도가 되었다. 가족의 이야기라서인지 하은이는 정말 내 영화를 좋아해줬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내 영화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반도 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부실하더라도 완성하지 않으면 이 영화 또한 영영 없어진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번에는 욕심을 줄이기로 했다. 아니, 욕심은 낼지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전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의 세 번째 영화에서야 비로소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배운 것이다. 사무실 동료들이 큰 힘이 됐다. 하루를 마감하는 10분 동안 나는 매일매일 다음 날 할 일을 적었다. 비록 내가 내일 나오지 못한다더라도 사무실의 다른 동료가 작업을 이어서 할 수 있도록 또박또박 메모를 적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의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V-BAC이라는,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엄마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자연분만을 꼭 하고 싶었다. 출산과정을 아기와 함께 겪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는 죽을지도 모른다며 그 위험한 일을 맡지 않겠다고 했다. 병원을 찾는 데만도 많은 발품을 팔아야했다. 여의도 성모병원의 고위험 분만 주치의를 만남으로써 가능성은 마련됐다. 그리고 예정일보다 일찍 진통이 시작됐던 2월 25일 새벽, 남편은 힘 내야한다고 양푼에 밥을 한가득 비벼왔지만 나는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2004년 2월 26일 새벽 세시, 갑자기 아기를 낳았다. 아기가 내 몸을 쑥 빠져 나오는 순간, 몸은 날아갈듯 했고 아기를 품에 안으며 나는 끝없는 성취감과 기쁨을 느꼈다.
 
외로운 출산과 다소 엉뚱하게 시작된 둘째와의 첫 만남


보호자와 함께 하지 못하는 종합병원의 출산은 외롭다. 옆자리의 산모들이 몇 번 바뀌는 동안 간호사에게 “저는 분만 몇 기예요?” 하고 물으면 바쁜 의사와 간호사들은 “아직 가진통도 시작 안했거든요”하고 대답했고 “너무 배가 고픈데 집에 가면 안 될까요?” 그러면 “글쎄요, 아기가 나올 것 같진 않은데 V-BAC이라서……”하고 말끝을 흐렸다.

의사들은 아기가 내일 나올지 모레 나올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아픈데도 ‘이건 가진통이라지’하며 참았다. 그러다 2월 26일 새벽 3시, 갑자기 아기를 낳았다. 고위험 분만이라서 진찰 때마다 특진을 받았는데 출산하는 순간 주치의는 옆에 있지도 않았다. 학생 같아 보이는 수련의가 내 아기를 받았고 나는 맨 정신으로 그 순간을 경험했다. 아기가 내 몸을 쑥 빠져 나오는 순간, 몸은 날아갈듯 했고 아기를 품에 안으며 나는 끝없는 성취감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 감격을 막 헤아리려는데 간호사가 말했다. “떨어뜨리지 마세요.”

나는 너무나 걱정돼서 “아기를 떨어뜨리는 엄마도 있나요?” 하고 물었다. 아기와의 첫 만남을 고작 “아기를 떨어뜨리는 엄마도 있나요?”라는 말로 시작하다니. 2004년 2월 26일 새벽 세시의 여의도 성모병원. 그 날 그 병원에는 산모가 너무 많아 나는 입원실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대기실의 빽빽한 침대 어느 한 편에서 내 아기와의 첫 만남을 곱씹었다. 참 못난이야. 머리는 왜 그렇게 삐뚤어졌담? 나는 방금 헤어진 내 못난이를 그리워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출산과 육아, 함께 걸어야 할 아름다운 길 [기획연재 '육아일기-아이가 희망이다'] 영화감독 류미례편 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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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문득 눈을 뜨면 아이들을 먼저 살피게 된다.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자고 있는 내 아기들이 혹시 오줌은 싸지 않았나, 이불을 걷어차서 배앓이를 하지는 않을까 살피는 것이다. 새근새근 강아지처럼 뒹굴거리며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뿌듯하다. 삶의 한 굽이를 넘어섰다는 느낌. 계획 없이 정신 없이 달려온 길이었지만 그렇게 시간은 갔고 내 옆에는 사랑스러운 못난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연재를 시작했을 때, 나는 두려웠다. 선의가 어떻게 오해로 귀착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아기와 함께 하면서 느꼈던 나의 기쁨, 슬픔, 아쉬움들이 결국 ‘고난을 무릅쓰더라도 아이 낳는 건 좋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질까 봐 겁이 났다.

저출산이 화제가 되고 수많은 보육정책들이 쏟아지지만 출산과 육아는 여전히 가정, 그 중에서도 여성의 책임으로만 남겨져 있다. 애 낳았다고 일 줄이는 아빠는 없지만 애 낳고서 일 그만두는 엄마는 주변에 널려있다. 저출산을 걱정하며 ‘셋째 낳으면 500만 원’ 운운하는 출산장려정책을 보다보면 기가 막힌다.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분명히 애가 없거나, 아기를 맡길 데가 있었거나, 아니면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아내를 둔 사람일 거다. 어쩌면 저렇게 문제의 본질을 피해갈 수가 있담?

 
셋째 낳으면 500만원? 기가 막히는 출산정책

출산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권리이다.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으로는 출산을 장려하는 듯 하지만 조금만 더 속내를 들여다보라.

‘일 좀 가르쳐놓으면 결혼, 출산,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 둔다’며 고용을 꺼리는 대상이 남성인 경우도 있었나? 아기 엄마에 대한 무시와 냉대는 또 얼마나 대단한지. 아이를 데리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이 도시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아기엄마는 버스 운전사의 불평 대상이 된다. 비가 오거나 짐이 많아서 택시라도 탈라치면 빈 택시들은 쌩쌩 잘도 지나간다. 모처럼의 외식으로 밥을 먹을 때, 칭얼거리는 내 아기를 보며 옆자리 아주머니가 내뱉던 말, “우리 때엔 다른 사람 피해줄까 봐 외출도 안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단해!” 영화도, 연극도, 아기엄마에겐 다 사치다.

심지어 나는 내 영화가 초청되었던 국제영화제에서도 입장을 차단당했다. 나는 그 때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5세 이하의 아기는 입장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먹이며 입장불가를 외치던 출입구 직원에게 나는 ‘다른 관람객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할 수 있다’는, 보편적인 아기엄마로서의 주장만을 했던 것이 아니라 같잖게도 ID카드를 내보이며 ‘나는 초청받은 게스트다’라는 말까지 했었다. 결국 자원봉사자를 대동하고 어렵게 입장하는 순간, 나는 내 아기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을 느꼈다. 자원봉사자는 아기를 대신 돌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내 아기가 떠들면(?) 우리들을 내쫓기 위해, 즉 우리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함께 했던 것이다.

 
곳곳에서 무시받고 냉대받는 수많은 아기 엄마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발걸음을 돌려 극장 밖으로 나왔다. 극장 문을 나섰을 때 햇살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나는 그 빛 가운데 서서 그냥 울었다. 게스트임을 주장했던 내 같잖은 자존심이 초라해서, 그리고… 무시 받고 냉대 받는 이 땅의 수많은 아기 엄마들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신들에게 우리들은 상식도 없는 인간이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뻔뻔스럽고 자기 잇속밖에 차리지 않는 인간들로 규정한다. 내 등에 아기가 업혀있는 순간, 당신들은 내가 다른 관객들을 고려하지 않을 뻔뻔한 아줌마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있으라니까 애 데리고 어디를 가냐?”
 
새근새근 강아지처럼 뒹굴거리며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뿌듯하다. 삶의 한 굽이를 넘어섰다는 느낌. 계획 없이 정신없이 달려온 길이었지만 그렇게 시간은 갔고 내 옆에는 사랑스러운 못난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출산과 함께 전업주부가 되었고 조카들을 다 키운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한 언니들은 말한다. 물론 출산 후의 일은 출산 전에 했던 일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말하자면 커리어가 절대 보장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다. “애를 키우는 동안 ‘나는 없다’, ‘나는 없다’라고 생각해야 해!” 경험 속에서 얻은 현명한 결론이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한창 나이에 삶의 이력을 쌓고 싶은 내가, 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없다고 생각하며 살 수가 있냔 말이다.

좀더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가 볼까? 우리 남편의 월 평균 수입은 118만 원 정도 된다. 내가 일하는 푸른영상의 활동비는 월 50만 원이다. 2005년에 50만 원을 다 받은 달은 두 번 뿐이기는 하지만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은 절약하며 사는 일에 익숙하다. 하은과 한별의 한 달 보육료는 54만8000원이다. 매월 1일, 남편의 월급이 통장에 입금되면 나는 얼른 보육료를 낸다. 곧이어 전달 썼던 카드대금이 결제되고 나면 그 달치 쓸 수 있는 돈이 가늠된다. 아끼고 아껴서 한 달을 보내지만 월말에는 거의 돈이 없다. 그러면 또 카드를 쓰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촬영이나 편집, 글쓰기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요즘은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 언니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엄마는 한 달치 보육료도 못 버는 일은 당장 때려치우라고, 애 키우는 일이 돈 버는 일이라고 타이르지만 나는, 돈벌이는 안되는 일이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서 내 일이 좋다.

보육료 때문에 정말 화가 났던 것은 보육료가 한 달 수입의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이상한 보육정책 때문이다. 작년부터 여성부는 아동별 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인건비 등 보육시설에 지원하는 비용을 축소하였다. 쉽게 말하면 하은, 한별이 다니는 씩씩이 어린이집에 주었던 지원금을 줄이는 대신 우리 집에 지원금을 주는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우리 살림살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서류를 발급받고, 또 작성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보육료 감면을 신청했다. 꼬박 두 달을 기다린 끝에 결과를 통보받았는데 2층이 될 거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4층이 되었다. 4층은 월 평균 수입이 170만 원~204만 원사이의 가구로 보육료의 30% 정도를 감면받을 수 있다.

 
공무원 당신들이 우리 집 살림살이를 알아?

어찌된 일인가를 담당 공무원에게 물었더니 내가 수입이 있는데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모 대학에서의 수입을 예로 들었는데 그 대학에서는 내 영화를 2년 동안 두 번 틀었다. 1년에 한 번 영화상영과 대화를 하고 나서 받았던 5만 원의 수입,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나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야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하더라도, 작년에 내가 했던 일들을 올해 다시 할 확률이 0%인데도 그렇게 수입을 산출했어야 했다. 졸지에 나는 탈세자가 되고 말았다. 그 모멸감이란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들의 서류를 심사하는 두 달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내 사정이 어떤지, 우리 집 살림살이가 어떤지 아마 그들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감면 받으려고 수입을 숨긴 엉큼한 욕심쟁이였겠지.

보육료를 감면받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면서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동의 유연화 전략 속에서 소사장제의 사업주가 되어있는 아빠 때문에, 빚이 산더미인데도 자기 소유의 집이 있기 때문에 등등 실제 살림살이는 어렵지만 그 상황을 수치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감면혜택을 받지 못하는 집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었다. 화는 이럴 때 난다. 관료적인 국가기관한테 대들고 싶었다. 당신들이 우리 집 살림살이를 알아? 국·공립 보육시설을 확대하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네들은 당신네들 편한 정책을 만들어내면서 우리들을 쥐고 흔든다. 물론 나는 30%의 감면혜택, 그것마저도 못 받게 될까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30%가 어디냐고 고마워하며.

 
여성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세상, 자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저출산 문제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기 엄마로 산다는 건 말이다, 수도 없는 이런 종류의 모멸감을 감수하게 만든다. 그렇게 세상과 타협한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절대로 나의 동료들에게 아기 낳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절대로 권장하고 싶지 않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고귀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세상은 절대로 그렇게 대접하지 않는다. 아기를 등에 업는 순간 나의 사회적 지위는 추락했다. 경제적 지위야 원체 없는 살림이라 더 추락할 데도 없었지만 아기와 함께 하는 기쁨 대신 가끔 누리던 휴식의 즐거움을 포기해야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길, 국가가 먼저 그 길에 서길…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통쾌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아기를 낳지 않고 있는 내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파업은 최후의 선택이다. 출산과 육아에 따르는 책임을 여성에게만 맡겨두었던 당신들에게 나의 동료들은 육아의 기쁨을 포기하면서까지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당한 세상에 눈을 감은 채 내 아기들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나는, 그래서 미안하다. 한편으로는 아기를 낳지 않는 여성들을 이기적이라고 욕하는 누리꾼들의 글을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난다. 나는 오히려 내가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들 같은 개인을 들먹이며 말을 하겠지. ‘보라고.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왜 아기를 낳지 않느냐?’고. 이 부당한 시스템은 그런 식으로 작동된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해왔다. 그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넓어졌던 과정이었고 만인의 평등을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해왔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유지되는 체제는 언젠가는 종말을 고한다.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만 유지되는 이 재생산 체제는 바뀌어야 한다. 아이는 희망이며 미래를 위한 인류의 자산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보육은 당연히 국가의 책임이어야 한다. 그 인식이 변하지 않을 때 출산의 권리를 포기하는 여성들은 늘어날 것이고 이 사회의 재생산구조는 위태로워질 것이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 참 행복하다. 하지만 그건 임신과 출산을 겪어낸 내게 내 몫으로 주어진 행복일 뿐이다. 거기에만 묻어가려는 국가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여성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세상, 자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저출산 문제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아기와 함께 하는 길, 그 길은 아름답다. 함께 가고 싶다. 내 동료들과 함께 갈 수 있도록 국가가 먼저 그 길에 함께 서기를 바란다.



 

◎ 류미례 감독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98년 '22일간의 고백' 조연출로 다큐작업을 시작했으며 2002년 '친구-나는 행복하다2'로 제27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중편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3년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 2004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다.하은이와 한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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