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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현실이 꿈에 스미고 꿈이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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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27
    W
    하루

2005년 10월 10일

1. 꿈

아주 선명한 꿈을 꾸었다.

생활에 지친 40대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의 남편은 쫓기고 있으며(아마도 경제사범)

여자는 경찰(?)로부터 제안 하나를 받는다.

남편을 잡게해주면 남편의 죄를 감해준다는.

여자는 경찰의 계획에 따르고 그 과정에서 남편에게 살해당한다.

남편은 감옥에서 목을 매고 죽는다.

 

장면이 바뀌면 여자와 남자의 20대인 듯.

노조를 만드려는 여자와 남자. 그들은 이미 연인이지만 비밀이다.

시흥역 앞 풍경같은, 얕은 천변 가의 포장마차.

거기서 술잔을 기울이는 회사 동료들에게 며칠 후에 있을 체육대회 얘기를 한다.

돌아오는 길.

어스름 저녁빛. 산들바람이 불고 꽃잎이 날리는 아름다운 저녁풍경.

행복해하는 여자와 남자의 얼굴.

환히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목소리가 끼어든다.

"여보, 우리 벌써 죽은 거 알지? 그것도 처참하게 죽은 거...알지?

이 생을 떠나기 전에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에 잠깐 머물러 있는 거라는 거...

여보, 그거 알지?"

남자가 통곡을 한다. 애끓는 통곡.

 

2. 빙의

남자와 같이 통곡을 하다가 잠에서 깨었다.

그 뒤로 며칠동안 무서워하며 지내고 있다.

유령. 떠도는 령.

아사다지로의 <활동사진의 여자>라는 소설에는

영화촬영소에 남아있는 여배우 유령 이야기가 있다.

결국 그 여배우는 대사를 받은 다음, 떠나간다.

부유령이나 지박령, 그리고 수많은 영들...

<퇴마록>을 읽고 난 후 며칠동안 밤길을 걷기가 무서웠다.

귀신 중에는 자기가 죽은줄 모르는 귀신이 있다던데

기가 허한 사람에게 달라붙는다고 한다.

나는 귀신이 나한테 붙을까봐 무척 걱정을 많이 했었다.

 

최근에 빙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또다시 그런 두려움을 느끼고있다.

겨자씨만한 생각이 바오밥나무처럼 커져서 내 일상을 지배한다.

꿈 속에서 40대의 그들이 20대의 자신들에게 잠깐 들어가듯이

지금도 이 생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

그리고 <식스센스>의 그 아이처럼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또 찾아헤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자주 무서웠고 새벽에 잠이라도 깰라치면 문 밖에 나가기가 무서웠다.

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느껴져서 무서웠다.

꿈은 잠재의식의 일각일 수도 있고 신의 계시일 수도 있다, 라고 꿈해설가가 말해준다.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그들 부부의 강렬한 등장은 며칠동안이나 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빙의를 생각하는 또다른 이유.

사무실에 복귀하고나서 몇 번 남편이 미워진 적이 있었다.

문득 몰아쳐오는 그 감정의 회오리는 그 시간을 빙의의 시간으로 느낄 정도로 갑작스럽다.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 바쁜 일상에 지쳐있는 그가 안쓰럽다.

그런데 요즘 몇 번 남편이 미웠다. 특별한 이유없이 그냥 미워졌다.

꿈속의 부부 또한 평등한 관계로 빛나던 시간을 거쳐왔을 것이다.

지금은 달라진 말들, 행동들, 관계들.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어긋나기만 했던 관계들.

진심은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달아가던 때.

남자를 기다리며 여자는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꿈꾸지 않았을까?

 

3. 희생

사실 빙의라는 상황을 가져오지 않아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장난이다.

잊고 살지만 가끔 저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누구의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되는 상황이 있다.

 

나는 한 번도 조연출과 함께 작업을 해본적이 없다.

요즘 조연출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조연출과 함께 작업하는 일은 없을 것같다.

조연출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에는 따로이 영역이 없다.

98년도에 처음 조연출을 했을 때 나는 아침이면 물을 끓였고 담배를 사러다녔다.

선배는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자진해서 했다.

내가 생각하는 조연출은 '연출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막바지 편집 작업에 몰두해있는 연출을 위해 나는 '나레이션 쓰기', '촬영'처럼

말해질 수 있는 일들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많은 일들을 했다.

 

나는 한 번도 그 시간을 희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떤 시간을 '희생'이라고 부른다면 그 시간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레이션을 몇 번을 고쳐쓰면서도 그리고 잘 모르는 현장에 대신 촬영을 가면서도

나는 이 모든 시간이 나에게 준비의 시간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이라면 지금 이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나와 같은 조연출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때때로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무작정 그 일을 맡길만큼 강심장이 아닌 나는

그 일의 의미와 전체 공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든지

또는 그 일이 내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당신한테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그런 설명을 나는 할 것같다. 그러다보면 정작 도움보다도 도움을 받기 위한 준비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퍼부어야할 것같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조연출과 함께 작업을 하지 못한다.

일분 일초라도 "저 인간이 나를 착취하고 있어"라든지

"배울 게 없는 인간이야. 도대체 이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어?"와 같은 느낌을

내 일을 부탁받은 사람이 갖는다면

도대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정은 결과만큼 소중한 것이다.

관계는 의미만큼 소중한 것이다.

어떤 선의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그 성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 가끔 희생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느낌이 들면 무기력해진다.

남편이 날 희생시킨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결혼 초에 그 문제로 많이 싸웠지만 남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평등하게 만나서 평등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했지만

결혼이 주는 자리는 전혀 평등하지가 않았다.

나는 의무와 욕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며

판단력은 점점 흐려지고 시간이 갈수록 비겁해져갔다.

하루의 안정을 위해 말을 아꼈고 그것은 일생이 되어갔다.

 

아기를 키우는 문제, 아기를 놀이방에 맡길까 말 것인가의 문제,

아기가 아파서 놀이방에 가지 못할 때의 대응의 문제,

밤 7시 이후에 회의가 잡혔을 때의 문제,

누군가 영화 상영이있다고 초청할 때 남편에게 먼저 상의를 해야하는 문제....

똑같이 일을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자리. 태생이 다르다는 느낌.

이제 편안해졌지만 상황이 바뀌어서 편해진 것은 아니다.

내가 서서히 눈을 감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롭게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가끔 그 마음이 요동을 친다.

 

사소한 일로도 크게 싸우게 되고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때에는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불평등의 벽에 화가 난다.

그러다가 결국 남편을 미워하는 식으로 마음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감정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고 나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 왜 생각이 그렇게 멀리 나가는지 잠깐 이해가 안된다.

잠재되어있는 피해의식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인가?

그러다 문득 빙의를 생각하는 것같다. 좀 황당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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