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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현실이 꿈에 스미고 꿈이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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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16
    우리 앞의 생
    하루

우리 앞의 생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를 알았다.

입원기간 내내 외면하고싶었던 한 사람.

2인실에 있을 때 함께 있던 아주머니가 말해준 사연.

43세 남자. 시한부 5개월 판정받고 지금 2개월 경과.

아줌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니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이제 아네요"라고 했다던 남자.

나는 그 사람하고만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나란히 로비소파에 앉아있을 때

"보고 싶은 거 보세요"

라고 리모콘을 건네주었을 때에도

"괜찮아요" 사양하고 일어났던 건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에 나오던 사연을

현실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타인에게 감정이입을을 잘하는 내가

그 사람을 내 세계에 들이면

휘청거릴 것같아 외면해오던 사람.

 

병원을 떠나오던 날, 간호사실 앞에 앉아있길래 그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 날은 내가 지냈던 7층에 공사가 있어서

모두 그렇게 다른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퇴원하는 게 좋아서 마음이 가벼워진 탓에 그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저 오늘 퇴원해요. 빨리 나으세요.

느릿느릿 돌아오는 대답. 그렇게 주고받은 이야기.

 

"저는 언제 퇴원할지 몰라요.

치료도 안되고 수술도 안되거든요.

몸 전체에 암이 퍼졌대요.

그래도 병원에 있어야해요.

입원해있으면 하루에 27만원씩 보상이 나오거든요.

하루라도 더 입원해서

한푼이라도 더 받아야

애들한테 남겨줄 수 있거든요."

 

 

마지막 말 끝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잠깐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 서있는 남편을 가리키며

"저기 아저씨 있네요" 해서 얼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퇴원수속이 다 끝나고

떠나오며 인사를 했다.

 

여기는 길어야 2주일이라 얼굴들이 빨리빨리 바뀌지요.

다음에 다시 올지 모르는데 그때 봐요.

그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었다.

다시 오지 마요.

다시 보지 마요.

나도 웃으며 또 만나요 하고 돌아나왔다.

 

그 남자가 꿈에 나타났다.

사실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강화집짓기 정기모임 때 만난 SH에게(SH는 그 병원 원장이다)

그 남자에 대해 물으니 누군지 몰랐다.

시한부....라고 말하니니

"우리 병원 입원환자 중에 시한부가 여러 명 있어서"라고 해서

근황은 잘 모르겠는데.

 

꿈 속의 나는 또 병원에 입원 중이다.

아니다.. 처음엔 병원이 아니었다.

섬머스쿨이 열렸던 인도의 벵갈룰루 같은 지역에서

나는 합숙중이었다.

함께 합숙중인 사람들은 다 낯익은 사람들(면면은 기억나지않는데 영화인들이었던 듯)

행사가 다 끝나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갔는데 나는 몇몇 사람들과 남아서 파티를 준비중이다.

남아있는 몇명은 아주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는

아니 오히려 호감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먹을 걸 사오고 더 함께 있자고 해서 즐거워하는 중.

 

그런데 한 명씩 한 명씩 떠난다.

나도 가야겠다고 인사하고 떠나왔는데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며 검색을 해보니 1시간 전에 차는 이미 끊겨있었다.

버스를 갈아타는 곳은 공사가 한창이라 무척 복잡하다.

늦은 밤인데도 사람이 많은 건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 덕분이다.

평소라면 인적이 끊겨서 무척 무서웠을 것같은데.

어쨌거나 버스가 끊겨 나는 다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온 곳이 병원.

3인실인데 시트도 깨끗하고 입원환자가 나 뿐이라서

나는 기분이 좋아서 화장실에서 씻는다.

화장실에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린다.

웬일인지 화장실 문이 잠기지 않아서

문이 열리지 않게 힘껏 밀면서, "저 여기 있어요" 소리친다.

밖으로 나와보니 둘째이모와 사촌 D가 서있다.

두 사람 모두 환한 표정으로 얼굴 보니 잘 지내고 있는 것같다며

밖에 잔치가 벌어졌다고 나가보자고 한다.

 

입원해있던 병원은 복잡한 도심에 있어서 쉴 곳 조차 마땅치 않았는데

꿈 속 병원엔 고향의 할머니집같은 넓은 정원이 있었다.

거기 정원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고

그 남자가 즉석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파트너는 선생님이라 불리는 병원의 아름다운 간호사인데 수줍은 듯 행복했다.

눈물의 결혼식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의 모두는 기쁜 축하로 들떠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또 카메라를 차에 두고 왔네' 아쉬워하며 폰카로라도 찍으려 하는데

이미 BN감독이 찍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니 안심을 한다.

꿈 밖에서의 내게는 그 남자의 마지막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야하는 건 아닐까

그런 미안함같은 게 있었기 때문일 거다.

누군가를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고

세상 속에서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된다는 것을 그동안 알아왔으니까.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있는동안 내내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하는데,

저 사람을 카메라에 담아야하는데,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밀린 영화 때문에 조급한 상태였고 몸이 좋지 않았다.

그 때엔 통증의 원인도 몰랐고

주치의는 물리치료 받으라는 말만 자동응답기처럼 반복했다.

촬영을 해도 되는지, 혹시라도 다 낫지도 않았는데 촬영을 하면

남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갈까봐

촬영은 엄두도 못내고 아까워만 하고 지냈을 뿐.

그래서인지 꿈 속 나는 BN감독의 카메라를 너무나 반가워한다.

결혼식 분위기는 좋았다.

BN감독은 독립PD이니 또 이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만들겠구나.

아깝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주된 정서는 반가움. 다행스러움.

그렇게 편안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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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엄마가 고향에 가셨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밀린 일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의 집에선 멀리 바다가 보였고

그 뒤에 뒤엣집엔 동백이 쏟아지게 많이 피어서

겨울엔 늘 동백꽃을 보러 갔었다.

할머니 집에서 동백꽃까지 가는 길을

나는 늘 헤맸는데

그게 신비로웠다.

오빠나 언니를 따라가면 동백꽃까지 순조롭게 갈 수 있었지만

혼자 길을 나서면 이상하게 저 앞에 동백나무를 두고서도

길이 막혀 있어서 나는 멀리서 꽃을 가득 단 동백나무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었다.

 

꿈 속에서 나의 목적지는 지금 엄마가 가있는 할머니의 집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는 할머니의 집과 동백꽃과 그 바다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내가 26살 때 돌아가셨다.

그 때 나는 예술단체의 편집실 기자로 일을 하고 있었고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먼 남도길을 찾아간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떠도는 중이었으니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었겠지.

 

그 며칠 전에 나는 <축제>를 보았고

<축제>를 같이 봤던 사람과는 정말 이상하게 헤어져버려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축제>에서 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의례 중간중간에 <축제>와 그 남자와의 일들이 불쑥불쑥 생각나서 쓸쓸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의 동생이었다.

할아버지의 직계 손녀인 J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약혼자는 J를 무척 귀여워해서 좀 의아했었다.

J는 대학 초년생이었고 J의 약혼자는 박사과정 국문학도였으니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거다.

최근에 들은 소식에서 J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남편이 된 그 약혼자는 J를 무시할 뿐 아니라 자주 폭력을 행사해서

J는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했다.

20년전 그 때에 그 남자는 논문대필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이 잘 안풀렸는지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데 그 때엔 친척들의 결혼은 언제 하냐는 반복적인 질문에 지쳐있어서

아무 남자나하고 결혼이나 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음.

결국 아무 남자나하고 한 결혼을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으니 참 신기.

그 밤에 사야할 게 있어서 동생과 옛날에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들렀다.

무서웠지만 꿈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이 생각나 뭔가 서러웠던 기억.

이틀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야하나 하다 말았던 것은

몸과 영혼이 자유로웠던 20년 전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

병원도 다녀야하고(^^)

내 아이들을 챙겨야했고

무엇보다 이번 주는 졸업주간.

집 밖에서 돌보는 나의 아이들(정확히 말하자면 학생들)의 최종관문이 금요일이다.

 

이번 주는 지나치게 분주하다.

그리고 지금 꿈에서 깬 후 두통 때문에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아픈 일주일에 접어든 듯.

써야할 글이 네 개나 되어버렸다.

집중력은 떨어지고 몸은 늘어진다.

저번 주부터 계속 글을 쓰려고 시도했지만

산만한 머리, 축 처진 몸.

그나마 토요일의 외출 덕분에 잠깐 생기를 얻었지만

월요일에 벌어진 일이

몸도 마음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다시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깨지기 쉬운 평화.

깨져버린 신뢰.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 아이들이 사랑하는 아빠.

남편도 아마 비슷한 느낌일 거다.

나는 아이들한테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엄마.

남편이 내 곁에 머무는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같은 이유로 남편과 산다.

아이들의 공동책임자로서 우리의 동지애는 굳건하다.

오로지 그 뿐.

우리 앞에 남은 생은 참 길기도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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