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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이틀간의 엿보기

2003년 10월 08일

 

8회째를 맞고 있는, 그러나 필자는 처음 가보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 뭐 얘기할 것이 있겠는가?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만 6년 만에 다시 밟아 보는 부산의 느낌과, 영화제를 핑계삼아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발품 팔며 곁눈질 해본 풍경들이나 풀어놓아 볼 참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 부산국제영화제에‘나’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스울 수도 있지만 무섭고도 결정적인 이유였다. 부산이라는 곳에 하룻밤이나마 묵을 곳이 있다는 것. 전역한 지 사흘만에, 부산에 거주하는 군대 동기녀석을 꼬득여 예매해 둔 딸랑 세 편의 영화표를 대기시켜 놓은 터였다. 9월 24일부터 시작된 상영작 예매는 90년대까지 익숙하던 단어인 대입 수헙생들의 “눈치작전”이 떠오를 만큼 당황스러웠다. 부산은행 모 지점에 친구를 대기시켜놓고 영화 주간지를 사면 부록으로 주는 티켓 카달로그의 미리 점찍어둔 상영작 코드번호를 불러대는 족족, “야, 매진이래”라는 한마디만 무수히 들었던 터.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나?

 

처음 접하는 국제영화제를 관람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내심 이 영화제가 아니면 보기 힘들고 그러면서도 꼭 보고싶은 영화를 봐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아시아 단편 영화/다큐멘터리, 월드 다큐멘터리들을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 부문의 영화들은 특히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김선 감독의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 지난 제5회 인권영화제에서의 <평행선>으로 뇌리에 깊숙히 박혀 있는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의 작품인 <소금: 철도 여성 노동자 이야기>, 마흐말바프(Makhmalbaf )자매의(그녀들의 부친은 잠시 제껴 두고) 여동생인 하나(Hana)의 <광기의 즐거움>, 그리고 언제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유려한 아크로바틱 액션의 뒷편 흔적을 보여주는 성룡! 그의 가족사(를 통해 본 중국, 대만, 홍콩의 현대사라나 뭐라나)에 관한 다큐멘터리라는 <용의 흔적: 성룡과 그의 잊혀진 가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용납지 않고 내게 남겨진 표는 야외상영관과 남포동에서의 3편뿐이었다.

 

부산, 돌아오다

 

6년 전 나는 건방지게도 말하자면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어느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몹시도 원했었”고, 부산이라는 그 낯선 도시에 왔었고, 또 그르니에의 말을 빌리면, 한달 여 나마 “비밀스러운 삶”을 가져 보았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뒷골을 계속 박박 긁어대는 한편으로 경부선 열차에 올라 책을 읽다 깜박 잠이 들고, 눈을 뜨니 호포-화명동을 지나쳐 저물어 가는 낙동강 하구를 따라 부산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웬지 어색한 아파트단지들을 지나쳐 중심지(?)로 들어서자, 역시나 낮고도 가파른 야산 중턱까지 땅벌집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압도적인 풍경의 주택가를 비롯한 전형적인 항구 도시의 풍경이 내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그리 깊지 않은 수심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만들어 낸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접해본 서해와 남해의 항구들인 인천과 여수, 마산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부산진의 부두로부터 눈에 들어오는 부근에의 평지는 사이사이 뚫린 도로와, 저 반대편의 비교적 조그만 어선들이 드나드는 자갈치로부터 남포동 일대 뿐이었다. 화물 부두 쪽으로 들어서서 골목골목을 겁없이 쏘다니다 보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센 억양을 주고받는 선원들 서넛이 모여 앉아 지폐 뭉치를 던져놓고 포커를 하고 있다.

 

<굿바이, 레닌>, 10월 3일 저녁, 해운대 야외상영관

 

적어도 내가 겪은 부산 "아"들 사이에선 해운대는 ‘부자 동네’로 통한다. 물론 눈으로 확인한 바로도 수도권의 이른바 신도시 풍경과 비슷했고 뭔가 공사중인 아직 황량하고도 넓은 벌판들도 어찌 변모할 지 눈에 훤한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길 찾기도 쉽지 않았고 부산 토박이인 친구녀석도 헤매인 통에 조금 늦게 수영만요트경기장 내에 마련된 야외상영관에 도달하였다. 초등학교 때 단체관람갔던 대전 엑스포 이후로 처음 보는 굉장한 인파의 장정이 끝을 보일 즈음 상영관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으나, 맨 앞의 두어 줄은 사람이 드물어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필름은 조금도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친근하기 그지없는 짭짤한 내음이 섞인 바람이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조금은 당황스러운 제목의, 그 덕인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굿바이, SPD!>도 아닌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볼프강 베커 감독은 오지 않았다. 뭐 바쁘다느니 어쩌니 해서 각본을 쓴 작가만이 무대에서 잠시 인사를 하고,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European Film Promotion의 사업가라는 이들과 함께 얼굴을 비추고 웅웅거리는 이름들을 들려주고 돌아갔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서사구조를 갖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에피소드와 1990년에의 독일인의 추억을 불러내는 키취들이다. 그야말로 쇼킹한 장면인, 베를린 한복판을 와이어스트링에 매달린 채 군용 치누크 헬기에 인양되어가는 거대한 레닌의 동상 역시 이 야심만만한 감독의 연출에 있어서는 별 의미 없는 맥거핀인 것이다. 1989년과 1990년 사이, 코마 상태에 빠져 공연을 보지 못한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일련의 ‘달콤한 거짓말’ 프로젝트를 완수한다는 설정은 지금의 독일을 보기에 참신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독일이란 어떠한가. 이 영화는 지금 독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이것은 동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독일 사회의 가려운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독일? 잘은 모르지만 내게는 히틀러와 나치와 아우토반과 칸트, 마르크스, 베버,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의 거의 절반을 채우는 지성인들과 친환경적인 삶 뭐 이런 것들로 연상되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폐허가 되어가는 동독 지역과 일자리도 없는 데에다 콤플렉스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뭐 이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앞서 말했지만, 설정 빼면 시체인 각본에 기민한 감각적 연출이 만들어 낸 것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독일인의 유머감각에 대한 재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떠들어대도록 만든 풍부한 볼거리들이며, 그 사이사이에서 영화는 진정한 볼거리들을 제시해 준다. 조금 식상하지만 통일 후 위성TV 회사에 취직한 주인공 알렉스와 버거킹의 점원이 된 그의 누이, 교환기간을 초과하여 종잇장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동독 마르크 화폐,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소년단으로 변신하여 혁명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돈을 요구하는 꼬마아이들, 어디 볼 만 하지 않은가?

 

알렉스는 독일 통일 기념식에 맟추어 어머니를 위한 ‘동독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에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의 새로운 독일식 유머는 자꾸만 “음, 그럴 듯 하군”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정말인지 그가 꾸며낸 동독의 승리가 너무나도 그럴 듯 하기 때문이다. 위성TV회사에서 일을 하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비슷한 장면에 열광하는 그의 친구에 힘입어 거짓이 탄로난 위기를 넘긴다고 하여 단순히 미디어의 위력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트릭은 언제나 미디어에 의해 그녀의 어머니가 노출되었을 때 사용되어질 뿐이다. 여기엔 분명 공통적인 정서가 존재한다. 다시 말 해 우리는 독일의 통일을 동독의 승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묵묵히 자신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초국적 자본일 뿐이다. 알렉스의 아버지가 망명한, 아니 ‘월서’한 뒤 어머니에게 찾아들었던 비밀 경찰? 우리 역시 집집마다 네모난 비밀경찰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어머니가 서랍 밑에 쌓아 둔 돈이 휴짓조각이 되는 과정에서도 화폐적 관계라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은가. 국가주의는 세계화의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자본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것이다. 90년대의 동구권 붕괴, 세계무역기구(WTO), 그리고 전쟁까지도, 우리는 별로 당황해 할 것 없는 것들을 당황해 해 왔으며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세계적 자본의 기획이자 국가주의의 단면이다.
 

다른 한 편으로, 알렉스의 누이는 서독 남자와 결혼하여 눈 앞에 막 펼쳐지는 이른바 물질적 풍요로움을 채 맛보기도 전에 자신의 둘째 아이가 골칫거리가 되고 마는 여성의 현실에 부딫히고, 공산당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어머니 역시 임산부의 옷 색상이 문제가 있다는 건의나 올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한편으로 그녀의 활동 ‘전적’과 더불어 교사라는 사회적 위치는 그녀가 아무리 통일된 독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통일 후 지금까지도 동독에서 사회적 지위를 어느 정도 누렸던 이들과 지식인들은 동독의 체제유지에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비밀 경찰에 대한 협조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려워 집밖에조차 나서기 힘든 까닭이다. 그런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은 무리였을까. 영화는 베를린을 수놓는 통일 기념 불꽃으로 막을 내리고 어머니는 ‘뒤끝 없이’ 생을 마감한다. 그야말로 해피엔딩이다.

 

이 웬지모르게 불편한 코미디를 보고 난 뒤 언제인가부터 생겨난 습관대로 엔딩 크레딧까지 모두 본 뒤에, 절반 이상이 빠져나간 관람석에 대고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European Film Promotion의 밤이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오니 참석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상영장 입구에 대기중인 셔틀버스를 이용해 주시가 바랍니다.” 나와 동행인은 무섭게 달려갔다. 물론 그 한 대의 셔틀버스를 지나쳐 시내버스 막차를 타러.

 

남포동 그리고 극장

 

대규모의 공단을 뒤로 하고 바다를 가득 품은 다대포에서 아침을 맞은 친구와 나는, 두 편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 남포동으로 향했다. 영화제 상영작의 상영장소는 크게 세 군데, 어제의 해운대 수영만 야외상영장과, 역시 해운대의 스펀지라는 복합상가에 위치한 메가박스, 그리고 남포동이다. 남포동은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컨셉의 그런 동네인 듯 하다. 어울리지 않게도 바다쪽으로는 바로 짠내가 밀려드는 자갈치 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육지(바닷가나 섬 지역에선 이런 용어를 쓴다)쪽으로는 번화가인 광복동과 한 블록 더 위로는 국제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 두 편의 영화 상영장소는 부산극장, 대영시네마와 함께 각각 6관씩의 멀티플렉스로 변모하여 아직까지 남포동을 지키고 있는 극장이다.

 

다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적당히 쓰레기가 뒹구는 도시의 거리란 보기 좋은 법이다. 국내외의 영화인들로부터의 몇 개의 핸드프린팅 위로 덮여 있는 쓰레기들을 치워 내고 자신의 손을 갖다 대고는 좋아하며 연신 사진을 찍는 소녀들, PIFF광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뒤집어 쓴 거리의 한복판을 가득 메운 각종 홍보 부스들과 인파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나와 친구녀석의 귀를 붙든, 아무래도 부산에서 오래 살았던 이들로 추정되는 한 패거리의 대화가 있었으니 ... "야, 아카데미 아직 하나보다?" "임마, 간판 잘 봐 봐, 모텔 됐네." 국제영화제라는 간판을 건 거리의 중심부에 모텔로 둔갑한 단관 개봉관이 있었던 것이다.
 

단관 개봉관 시절, 지금의 대영시네마와 부산극장 외에도, 현재 정말 모텔이 되어버린 아카데미 극장과, 지금은 나이트 클럽이 자리잡은 곳에 국도극장이 있었다. 고교시절 '경제' 수업을 들었던 내 또래들은 알 것이다. 그야말로 IMF시대의 한 복판에 있던 시절, 수능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생소한 경제용어들을 외웠던 일들을 말이다.

 

나는 영화 산업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영화 시장이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의 양대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길 지인으로부터 듣고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재주의, 히트작의 아류작 찍어내기, 이른바 '한국형' 코미디물 ... 이런 단어가 쉽게 들려온다. 영화관이라고 다를까. 이제 영화관이라든지 극장이란 단어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옮겨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주먹만해진 스크린과 조악한 음향'에 돈을 들이느니 "집에서 DVD로 보겠다"고 말한다. 이제 영화라는 건 돈을 지불하고 집에서 혼자 보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화관들의 추세를 만들어낸 시스템은 상영 편수를 떠나 그리 '다양한' 영화를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고향 동네에는 두 개의 단관 영화관과 한 개의 성인전용관이 있었다. 하지만 **극장을 제외하고는 앞서 말한 90년대 말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린 시절, 면소재지인 우리 마을에도 꼬박꼬박 영화 포스터가 나붙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간혹 어머니를 따라 시내로 장 보러 나가면 눈길을 끌었던 거대한 간판그림도 있었다. 하지만 홀로 남아, 닫지 못해 열었던 명보극장도 군대에 다녀온 사이 상영관 가운데를 합판으로 나누고 그야말로 2개 관의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것이다. 실내도 그나마 그럴 듯 하게 재단장을 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젠, 영사기를 돌리는 두 분의 할아버지들이 필름이 다 돌아가면 극장 안의 쓰레기를 치우고, 아침에는 포스터도 시내의 몇 군데 지정게시판 등에 직접 붙이고 다니신다. 지방 소도시라서가 아니라,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다양함'이라는 것의 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2∼30여 명의 조직폭력배들이 영화관을 그야말로 '접수'하고 담배를 빡빡 피워대고 친구들과 한 귀퉁이에서 불안에 떨며 영화를 보기도 했던, 하지만 슬픈 장면이라도 나오면 그 떡대들 중 열 댓 명은 어깨를 들썩이며 흑흑대던 진풍경도 볼 수 있었던 그 극장은 사라졌다.

 

<미국의 광채>, 4일 오전, 부산극장 1관

 

World Cinema 부문의 이 작품은 아리송한 제목으로 눈길을 끌었다. 동명의 만화로부터 아이디어를 끌어와 그 만화를 둘러싼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며 실제 인물인 Harvey Pekar는 '미국에서의, 미국적인, 미국인의 호사스런 삶이란 병원에서 서류 정리나 하며, 재즈 레코드를 모아대고, 이웃과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허접한 살림을 하다가, 골머리아픈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인 어조로, 그리고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욕구불만 톤의 목소리로 징징거리는 듯 하다.
 

Robert Pulcini와 Shari Springer Berman 감독은 만화 의 장면들과 실제 인물 Harvey Pekar와의 인터뷰, 그리고 너무나도 기막힌 캐스팅으로 입이 쫙쫙 벌어지는 젊은 시절의 피카와 주변 인물들에 대한 픽션 아닌 픽션을 생명력 있는 O.S.T.를 통해 묶어내며 신선한 구성방식과 재미로 한 편의 영화를 묶어내었다. 하비 피카가 정말 데이빗 레터맨 쇼에 출연했는지 뭐 그런 건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다른 제목을 붙여주자면 은 어떨까. 영화가 지닌 최대의 미덕이자 그 한계점은 바로 하비 피카의 입을 통해 뿜어져나오는 일상사란 정말 복잡한 것이라는 불평 아닌 불평 속에 담겨 있다.
 

<자줏빛 나비>, 4일 오후, 부산극장 1관

 

좌석이 2층으로 옮겨졌을 뿐인 같은 상영관에서 128분이라는 영화의 진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러닝타임은 딱히 한 일도 없었던 나로 하여금 저 내면에 잠재된 피로를 끌어올려 잠시 눈을 붙이게 만들었다. "중국의 레지스탕스 조직 '자줏빛 나비'"라는 티켓 카달로그북의 간단한 소개 문구의 일부조차 없었다면 영화를 함께 본 대부분의 관객, 혹은 모든 이가 '자줏빛 나비'가 무언지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1929∼31년의 중국 아나키스트 레지스땅스 조직에 대해서도,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에 대해서도, 총격전의 역동적인 액션에 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수준 낮은 나같은 관객을 위해 자상하게 설명을 해달라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라, 한 컷에 거의 몇 분은 됨직한 시간동안 집요하게 잡고 있는 배우들의 클로즈업은 제아무리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라 해도, 그 장면들을 충분히 소화해 낸다 해도,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쯔이와 한국 영화에도 출연했던, 유명한 듯한 일본 남자배우의 연기에서도 로우 예 감독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또 다른 출품작인 「주말연인Weekend Lover」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끝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필름은 계속 돌아가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나는, 그의 말에 따르면 '온갖 밀수품의 천국'이라는 국제시장을 지나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을 들렀다. 예전만큼 헌책들이 많이 오고 가지 않는다는 그 골목의 모퉁이 책방에서 이십 년 쯤 된 낡은 책 한권을 사들고 걷기 시작한 우리들은 러시아 여성들이 우글거리고, 가로등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총각 놀다가"를 소근거리는 아주머니들을 대면하는 초량동 골목을 지나 부산역에 이르렀다. 2003부산국제영화제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라는 필름 프로모션이라든가, 영화제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다는 PIFF센터 등의 분위기 같은 것은 '감히' 내가 들여다 볼 수 없었기에, 수도권의 여느 굵직한 이름의 역사(驛舍)가 그러하듯 웅장한 유리벽 건물의 민자역사가 들어서고 있는 부산역 안으로 조용히 발을 들여 놓고 떠날 채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 영화제가 끝나는 날까지 17개 영화제 상영관에서도, 그리고 살아남았든 집어삼켰든 영사기를 갗춘 수많은 상영관들에서 또한 필름은 계속 돌아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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