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강철의 연금술사와 자율적 기술

  

 

 

이른바 판타지물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특히 중세적 배경에 매우 현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 예컨대 <웰베르> 같은 포스트모던한 애니들은 인내심을 시험하곤 한다. 그럼에도 리메이크되어 TBS에서 방영중인 <강철의 연금술사>만큼은 다시 보게 된다.


제목은 좀 오타쿠스럽지만,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강철"은 주인공이 자유자재로 다루는 소재를 일컫는다. 물, 불, 돌 ... 등등의 연금술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방송 첫머리에 거창하게 설명이 제시된다. 연금술은 어쩌고 저쩌고 ... 어쨌든 무언가를 만들거나 "알게 되면"(이것도 특이하다) 반대급부가 따른다는 '등가교환의 원칙'과 사람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인체연성의 금기'. 이게 핵심이다.
 

주인공 소년들인 에드와 알은 어린 시절부터 연금술이라는 과학에 끌려 학구열(?)을 불태우는데, 그 와중에 어머니를 잃게 된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연금술로 만들어내려 시도함으로서 인체연성의 금기를 범하게 되어 에드는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잃고, 알은 몸 전체를 잃게 되지만, 다행히도 텅 빈 갑옷 안에 알의 영혼만은 붙잡아 둘 수 있게 된다. 이 형제들이 "몸"을 되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 장장 51화에 걸쳐 펼쳐지는데 ... (이 점이 리메이크판을 다시 끝까지 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에드는 몸을 되찾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 '군대의 개'로 불리는 "국가 연금술사"가 되어 국가에 의해 자행된 학살, 폭력, 추문, 부패, 음모의 실상들을 보게 되면서도 묵묵히 자신과 동생의 몸을 되돌려줄 '현자의 돌'을 찾아 여행을 계속한다.

 

사실 제목부터가 좀 끌린다. 연금술이라 ... 연금술이라는 명칭부터가 솔직담백하지 않은가. 모든 물질은 다섯 가지 기초원소 ... 땅-불-바람-물-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이 원소들을 잘 배합하면 금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명실상부한 과학. 무엇보다 과학임을 내세우면서 솔직하게 '금'을 원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게 맘에 든다.

 

<강철의 연금술사> 또한 알 수 없는 판타스틱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극장판에서는 이것이 나치스 독일의 평행우주 세계임을 암시한 바 있다. 어쨋든 나를 끌었던 것은 '자율적 기술'이라는 전공투스러운 테마였다. 물론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키라>, <스팀 보이> 등을 만들어낸 오토모 카츠히로 님이시다.

 

이런 종류의 '기술사회' 디스토피아물에서 전형적인 등장인물은 미친 과학자와 괴물이다. 기술사회 비판 또는 자율적 기술론은 하이데거, 오르테가 이 가셋부터 자끄 엘륄에서 마르쿠제까지 수많은 철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에게 주요 테마였지만, 그중에서도 자율적 기술의 문제를 "프랑켄슈타인의 문제"라 부른 랭던 위너의 통찰이 돋보인다.
 

원래 소설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부제가 중요하다!)는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셸리의 작품이다.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 메리 월스톤크래프트의 딸이기도 한 메리 셸리는 열혈 계몽주의자인 남편 셸리의 열정에 대한 걱정과 의구심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위너에 따르면 닥터 프랑켄슈타인은 근대적 과학자를 표상하며, 그가 '과학적으로' 만들어낸 이름없는 생명체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율적 기술'(내지는 도구적 합리성)을 표상한다. 근대성의 이면에는 그것을 추구해 온 인류를 되려 위협하는 괴물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여기서도 걸리는 것은 '괴물'이다. 다행히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이성의 소유자이며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그 '괴물'은 여전히 이름없는 존재이다. 메리 셸리도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나타난 괴물에 감히 이름을 부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적 기술은 통제 불가능한 괴물만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압축적 근대를 살아냈던 한국사회의 수많은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창조자들에게 위협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통제의 대상이었고, 이름은커녕 목소리조차 빼앗긴 이들이었다.
 

공돌이, 공순이, 병신, 계집 ... 그밖에 수많은 ... '못 배운' 천한 언어로 웅얼대는 쬐그만 것들 ... 이들이 자신의 창조자들에 대해 진정 위협적인 존재로 나서고, '배운 말'을 구사하게 될 때, 지배적인 기술은 다른 선택지를 향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배적인 기술'이다. 이들에게는 나름의 과학과 나름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기술은 그것이 자체적인 논리를 가지든,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든 정치적 인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장황하게 과학기술에 대해 늘어놓은 까닭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애니인 <강철의 연금술사>가 갖는 부조리한 정치적 함의 때문이다. 주인공 에드가 인체연성의 금기를 범한 것은 아직 뭣모르는 어린 시절이었다. 사실 이 점은 에드로부터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빌미가 된다.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에서 '스스로 성장을 멈춰버린' 주인공 오스카를 내세우면서 독일의 특수성이라는 명목 뒤에 숨어 나치스에 동의했던 책임을 회피하는 소시민성을 비판한 바 있다. (이 소시민들이 독일 일상사에서 말하는 "작은 사람들"이다) 반면, <강철의 연금술사>의 에드는 그러한 소시민성을 부정하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체화한 인물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시민'인데, 바로 이 점이 문제다. 그의 존재론적 각성이 학살의 전력을 지니고도 여전히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군부에의 동참(국가 연금술사가 됨)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에드가 연금술의 금기를 범함으로써 '등가교환'의 원리에 따라 잃게 된 것은 자신의 팔과 다리 하나씩에 혈육인 동생의 몸이었다. 위험 앞에 자기 자신을 내걸었던 것이다. 더구나 금단의 연금술에 휘말려 몸을 잃고 깡통 갑옷이 된 동생 알에 대한 죄책감은 에드의 고통의 일부를 이룬다. (주인공은 일부나마 육신을 ... 특히 잘 생긴 얼굴을 지녀야 시청률이 나오지 않겠는가) 오만한 과학기술의 피해자이자 피조물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현자의 돌'(원자력이든 생명공학이든 암튼 궁극의 기술)을 찾아 자신과 동생의 몸을 되찾겠다는 변명을 통해 군부에의 동참 또한 정당화된다. 게다가 군부는 에드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다. 여기서 군부 또한 과거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착한 군부'의 모습을 띠는데, 과거에 자신들이 이민족들을 학살한 것도 '음모세력'의 탓이라는 핑계를 끊임없이 댄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자기 자신들이며, 따라서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논리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아아 ... 이런 불편함을 다시금 즐겨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신작들은 좀처럼 맘에 드는 게 없고 ... 언제까지나 샤아 아즈나블과 아무로 레이의 망령에 사로잡혀 살 수는 없잖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