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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방위는 이제 기업이 맡는다

 

 

 

 

얼마 전 오랜 오타쿠 친구들과 만나 이곳저곳 순례(?)를 한 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노래방에 갔다. 나오는 레퍼토리들이래야 가오가이거, 울프스 레인 같은 애니 주제곡들이니 뭐 분위기가 영 ... 그 와중에 나는 두터운 난수표를 뒤적이며 애니 주제곡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의 주제곡이었다.

 

사실 이 애니는 "뒷골목의 우주소년"이라는 오프닝 곡을 빼면 별 끌리는 데가 없다. 메카물과 용자물의 외양을 띤 이 기묘한 애니는 일본에서도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외면당했다고 한다. 다이가드는 메카 면에서는 철인28호의 맥을 잇는 깡통에다가 용자라기엔 느릿느릿한데다 날렵한 맛이라고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메카물이 그러하듯이 다이가드 역시 메카를 매개로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그럼에도 일단은 전투의 지형이 중요하다. 메카물에서 주인공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는 핵심적인 형식 요소이다. 예컨대 <패트레이버>의 주인공들은 아나키스트들('바다의 집') 또는 경찰조직 내부의 관료주의자들과 싸우고 건담 시리즈의 경우에는 지들끼리 싸우며(그래서인지 건담 팬들은 연합 지지자들과 지온 지지자들로 갈린다. 스타워즈 팬들이 다쓰 베이더와 제다이를 두고 갈리듯이) 에반게리온이나 라제폰의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존재와 싸운다.

 

그러나 에바와 라제폰에서는 적의 본질을 밝히고 싶어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드러나며, 어느 정도는 실마리도 제시된다. 반면에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는 적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적을 섬멸하기 (그래야 이야기가 계속되니 ...) 위해 적의 신진대사 메커니즘에만 관심을 둔다.

 

일단 제목이 좀 무시무시하다. 지구방위는 이제 기업이 맡는다. 일본에서 나타나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에 본부를 둔 거대 경비회사가 다이(大)가드를 동원하지만, 지구를 지키느니 하는 식의 거대담론은 일절 피하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 아카기는 "긍정의 힘"을 체화한 인물이다. 아카기를 중심으로 한 21세기 경비보장 회사의 일부 세력들은 기업 내 관료주의자들과 군부 관료, 그리고 정체불명의 괴물이라는 3중의 적과 싸운다. 이들은 다만 열정적일 뿐 결코 고뇌하지 않는다.
 

다수의 되먹지 않은 애니들과 마찬가지로 이 주인공들 또한 관료주의를 거부하는 유연적 인간들이면서도 묘하게 권위주의적이다. 시로타라는 군부 내의 "착한" 인물과 선을 대고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초반에는 군대는 글러먹었으니 이제 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도 후반에 가면 기업이 앞서서 나가고 군대가 따라온다는 식으로 바뀐다.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는 "방위력"의 "폭력"으로서의 측면은 전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한다. 요즘 같은 테러리즘 시대에 "폭력의 사유화"를 우려하는 지식인들이 보면 놀래자빠질 애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교해 볼 때 <에바>나 <라제폰> 같은 애니들은 그나마 존재에 대한 성찰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듯하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어두운 측면의 포스를 제대로 보여주는 애니다.

 

그런데 요즘 애니들 답지 않은 선 굵고 단순명쾌한 작화와 오프닝 테마 노래는 와이리 좋은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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