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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과 또 다른 그녀들

 

 

도리스 레싱, 서숙 옮김. 2003, <런던 스케치>, 민음사.

 

 

 

무척이나 런던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려 내는 스테파니 거리, 세인트 존스 우드, 트라팔가 광장은 물론이거니와 런던의 지하철 역, 거리의 카페와 공원, 병원의 응급실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어떤 공간일지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행자의 눈에 비친 풍경과 삶의 터전으로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는 점도 되새겨 보았다. 바로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런던 스케치>을 읽다 보면 공간이 이야기를 압도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녀의 단편집은 '이야기'와 '스케치들'이라는 부제에 맞게 “데비와 줄리”, “흙구덩이”와 같은 이야기 중심의 단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매우 짧은 스케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려지는 공간들은 특별한 공간들이 아닌 ‘일상’적인 삶의 공간들이다.


레싱이 이러한 삶의 공간들을 그려내는 데에서는 어렴풋이나마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여성들에 대해서는 “품안에 꼭 안아주고 싶은 존재들”이라고 말하면서 ‘네 탓이 아니란다’라고 다독여 주는듯한 느낌이다. 바꿔 말하면, 여성 억압에 대해 레싱이 대응하는 무기는 페이소스(나는 이것을 ‘연민을 자아내는 힘’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이다. 특히 “데비와 줄리”같은 단편에서 대조적인 두 여성을 등장시키고, 줄리의 “난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독백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이중적인 의미라 생각된다. 현실과의 모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고는 비루한 현실뿐인 주인공의 생각을 내비치면서 마무리하는 방식은 이 단편집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반대로 “장애아의 어머니”와 같은 단편에서는 사회복지사(자주 등장하는 인물설정)가 자신이 보고 느낀 현실에 대응함에 있어 제도적 한계 내에 머무는 모습으로 끝맺고 있기도 하다.


레싱은 이 단편집의 곳곳에서 계급적인 문제는 물론, 그것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른바 ‘차이’의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단편집을 처음 접한 것은 군대 생활의 막바지였는데, 그 때에는 페미니즘, 사회주의 등을 다루고 있는 작가라는 소개에 끌려서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느낌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현실사회의 모순을 극명히 대비시켜 일정한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는 ‘교훈적인’ 서사가 아니어서 그랬던지 싶다. 얼마 전 다시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 여기저기 뒤적거리며 내가 찾아보았던 사항은 이 책이 언제 씌어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단편집이 영국에서 초판 발행되었던 시기는 1987년이다. 분명 대처 이후의 영국 정책방향 선회가 가져온 여파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 파고들었음직한 시기에 씌어지고 읽혀진 이야기들이라 생각된다. 경험적 혹은 경험주의적이라는 말을 영국적인 것으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겠지만, 레싱은 분명 이렇게 변화한 삶의 궤적들을 영국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 것 같다.


사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랐던 현대 영국 작가가 한 명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현대 영국 작가’라기보다는 ‘최근’ 떠오른 작가이며, ‘인도’ 작가일 테지만 말이다. 바로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아룬다티 로이가 그녀이다. 몇 년 전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이, 레싱의 소설을 읽으며 받았던 것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보다 작가로서 ‘쓴다는 것’에 대한 그녀들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참 이상하게도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작가를, 그것도 주로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아룬다티 로이는 작가에게 있어서의 두 가지 규칙을 이야기한다. “첫째, 규칙은 없다. 둘째, 나쁜 예술에 대해서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위대한 작가는 힘들게 얻은 자유를 오용하면 그 유일한 결과는 나쁜 예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인다. 한편으로 흔히 명망 있는 작가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경우에 대해서도 그녀는 언급한다. “작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드시 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신중함과 분별 있는 태도라는 것이 기실 비열함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었음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보았던 일이다. 조심성이 실제 비겁함이 되고, 용의주도함이 기실은 일종의 아첨이 될 때 말이다.”


내가 레싱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흐뭇했던 것은 젊은 인도 출신 작가 아룬다티 로이에게서 당당한 어조로 나타났던 이러한 문제의식이 레싱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레싱의 소설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예컨대 “그 여자”라는 단편의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던 집이 실은 살롱이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작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운동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녀가 ‘사회 속의 작가’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수많은 다른 그녀들(레싱과 아룬다티 로이 같은)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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