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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학교에서 맞은 빈곤한 오후

주말에 오랜만에 학교에 들렀다. 채 졸업하지 못한 그 학교. 언제나처럼 혼자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예전에 학교에서 함께 밥 해먹었던 후배 두 친구를 마주쳤다. 한 친구는 런던에, 다른 한 친구는 호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더랬다. 한국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 ... 거기 좋지" 하며 대충 맞장구쳐 주는 게 전부인 그런 대화를 시작하다 보니 별 수 없이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들 지방학생이던 탓에 자취방 이야기가 나오더니, 한켠에서 5성급 호텔같이 올라가고 있는 대학 건물 이야기로 흘러갔다.

 

한 학기 기숙사비가 350만원이라니 ... 등록금을 합하면 한 학기에 7-800만원은 된 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거기에 포함된 하루 두 끼 식사는 필수사항이란다. 이젠 정말 노골적이구나 싶다. 이건 멀리서 공부하기 위해 온 학생들에게 먹고 잘 곳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쫓아내는 거나 다름없다.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평택의 공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듯이 이젠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밀어낸다. 뭐 오래 된 이야기지만, 이젠 그런 식의 배제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최근 들어서 맨날 오가는 길만 정신없이 오가다 보니 주면에 오벨리스크가 올라가는지 피라미드가 세워지는지 신경도 못 쓰다가 요즈음에 그런 낯선 느낌들을 많이 받는다. 얼마 전 몇 년만에 가 보게 되었던 이화여대에서도 깜짝 놀랐더랬다. 낡은 공간을 밀어내고 들어서는 건축물들은 용적률을 고려해서 땅 위로 높게, 땅 밑으로 깊이 들어가 지나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공기가 달라진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예전과는 달리 높아진 천장으로 인해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과 주눅들어 있는 이들을 분류해 보면 사회경제적 지위도 확연이 차이 날 것 같다.

 

논리정연하게 분석과 비판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사회자본에 관한 논의, 특히 불평등과 사회자본을 관련지어 하는 이야기들에 거부감이 크다. 김소진의 소설에 나오는 도시빈민 공동체를 보면 이런 걸 사회자본이라고 부르나보다 하는 게 느껴지긴 한다. 그러나 구룡마을 주민들의 사회자본 축적수준이 타워팰리스 입주자들의 그것보다 높지는 않을 것 같다.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은 한편으로 불평등 재생산 기제로 작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 완화 혹은 사회이동의 자원이 된다. 예컨대 노동계급 출신 청년은 이런 저런 교육을 통해 축적한 문화자본을 경제자본으로 태환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하지만 문화자본이든 사회자본이든 경제자본 자체 없이 그것을 축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문화자본 논의는 자본주의의 체계재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사회자본 논의와는 맥락이 다른 것 같다. 문화자본 논의의 경우에는 체화된 문화자본과 제도화된 문화자본을 구분하고 있고, 장을 둘러싼 투쟁의 영역을 고려하고 있어 체계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자본 관련 논의들은 실재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며, 바람직한지 어떨지도 모를 물화된 공동체 개념을 내세우고 공동체 회복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축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어쨌든 실제로 문화자본, 인적자본, 사회자본을 축적하는 것과 축적의 주체가 구성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드는 생각이라고는 학생들이 학교 잔디밭에 모여들어 텐트촌을 이루고 사는 건 어떨까 라든지, 학생회가 결식 대학생 무료급식을 해야 하나 라든지 ... 주머니가 빈곤하니 마음도 빈곤해지고 결국엔 머리속까지 빈곤해지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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