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헤비메탈과 뽕짝의 창법

(동네 아저씨들이 된 섹스 피스톨즈)

 

 

김종광의 소설을 두고 평론가 김사인이 "헤비메탈을 뽕짝의 창법으로 부른다"고 한 것을 보니, 이 표현의 원조가 떠오르면서 갖은 생각이 다 든다. 유하의 "세상의 모든 저녁3"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 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유하의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이 1993년에 나왔으니, 필시 1991년 트로트 뽕짝 음반을 낸 유현상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백두산의 유현상은 한때 전설이었다고 한다. 김종서도 어디선가 그에 대한 회상을 끄집어낸 적이 있는데, "마샬앰프에 걸터앉아 펜더 기타를 들고 지미 헨드릭스의 '퍼플 헤이즈를' 연주하며 부르던 모습이 정말 비범했다"고 하더라.

 

사실 창법 논란이라는 게 참 진부하기 짝이 없다. 기타 수련(?)을 위해 절간에 100일 동안 틀어박혀 피크 100개를 다 닳아 없애고 돌아와 신기에 가까운 속주를 뿜었다던 김도균 역시 1990년대 후반에는 "천사가 된 너에게"라는 락 발라드곡을 들고 나왔다가 쫄딱 망했더랬다. 시나위의 임재범, 손성훈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특히나 신대철의 제왕적 통치에 반기를 들고 팀을 박차고 나왔던 손성훈의 경우에는 좀더 잘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처럼 헤비메탈-발라드-뽕짝 간에는 묘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대중문화 코드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영미권에서 LA메탈, 팝 메탈이 뜨기 시작하면서, 메탈 밴드들이 발라드를 비롯한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 대한 거부감이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보컬리스트가 초 고음의 샤우트 창법을 구사하면 그에 대한 거부감이 없긴 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의 이러한 징후들 중 비범한 것으로 1994년 멍키헤드라는 밴드의 등장을 꼽고 싶다. 노래 제목부터 "부채도사와 목포의 눈물"이라든지 ... 이들은 "헤비메탈을 뽕짝의 창법으로" 부른 게 아니라 뽕짝을 헤비메탈의 창법과 연주로 들려주었다.

 

헤비메탈(주로 Thrash Metal을 지칭)은 "White Boys Blues"라고도 일컬어진다. 그 이름부터 매우 산업적(industrial)인 메탈 음악은 백인 노동계급 청년들의 저항적 하위문화이면서 반기성세대 정신+근육질 남성성+출세욕망의 산물이자 연주와 노래실력(특정 코드 내에서의)을 강조하는 묘한 엘리트주의도 띠는 등 아주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때 헤비메탈은 나름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시효가 다 된 진정성을 내세우는 문화(혹은 정치)라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백두산의 재결성과 그것을 "안티 에이징"으로 포장하는 미디어는 솔직하지도 못한데다가, 그들이 원한 것처럼 그리 장사가 잘 될 것 같지도 않다.

 

헤비메탈과는 달리 룸펜들의 (마찬가지로 백인들의) 음악인 펑크는 근육질 남성성을 내세우지도 않고 그리 권위주의적이지도 않은 편이다. 다만 좀 대책없이 회의주의적이어서 그렇지 ... 암튼 이들의 대명사였던 영국의 섹스 피스톨즈도 1996년 재결성 공연을 한 바 있다. 공연 제목이 무려 "부정수입 라이브(Filthy Lucre Live)"였는데, 먹고살 돈이 없어 딱 한 번만 공연 하자고들 모였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헤비메탈과 뽕짝을 가로지르는 (자본주의) 정신이다.

 

결국 또 씁쓸해지지만 이제껏 새로운 흐름들을 만들어왔던 것은 끊임없는 "재발견"과 대안적 생산-유통체계 구축이었던 것 같다. 골방에서 녹슨 기타줄을 갈아끼우는 이들이여, 주눅들지 말기를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