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1994년 8월 무더운 여름을 '쇳물처럼' 달군 한 노동자의 단식투쟁

1994년 8월 무더운 여름을 '쇳물처럼' 달군 한 노동자의 단식투쟁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56호

2013년 8월 <이 달의 역사> 기고글

 

 

올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과 더불어 삼성전자 서비스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은 이토록 무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제왕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재벌그룹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투쟁과 노조결성을 지켜보고 있자니 난공불락의 또 하나의 왕국인 포스코를 생각하게 된다. 삼성왕국에 삼성일반노조라는 게릴라가 있다면, 포스코에는 노정추(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가 있다. 1991년 포항제철 사측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민주노조가 자취를 감춘 이후 최근의 노정추까지 이어져 온 포스코 노조민주화 운동의 과거를 거슬러오르다 보면 남규원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20여년 전 해고자의 신분으로 한철 여름을 목숨 건 단식투쟁으로 보내고 아직까지도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잡부’로 살아가고 있다.

 

1994년 남규원의 단식투쟁

 

포항제철 해고노동자 남규원은 1994년 8월 13일 새벽 형산강 로터리에서 유령노조 해산 및 노조 정상화를 위한 노상 아사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는 쇠사슬로 온 몸을 결박한 채 29일간 단식투쟁을 계속했다. 단식농성 기간 동안에 남규원은 포항제철 서울사무소 앞에서 진행된 해고자 노상 철야농성에 결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를 포함한 해고노동자 4명이 강제연행되었고, 결국 남규원은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단식을 계속하였다. ‘포철 유령노조 해산 및 올바른 노사관계 정립을 위한 시민-노동단체 연석회의’가 결성되면서 단식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자, 그는 9월 9일에야 단식투쟁을 마무리하였다.
 

단식투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휴면노조 상태의 유령노조인 포항제철노조의 총회 개최 시도였다. 조합원 14명에 불과한 유령노조는 7월 29일 총회 소집권자 지명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노조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남규원은 총회 저지를 위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포항제철소 측문을 돌파하여 노조 사무실 앞까지 질주하였으나 사무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경비원들에 의해 끌려나왔고 이후 사측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포항제철 사측은 유령노조의 총회 개최에 앞서 “구국전위 조직원 포철침투, 노사분규 조정기도”와 같은 내용으로 여론공작까지 시도한 터였다. 이윽고 8월 4일부터 포철해협(포항제철해고노동자협의회)은 형산강 로터리에서 유령노조 해산과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를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시작하였고, 일주일 뒤에는 포항시청에서 천막을 철거해 갔음에도 농성은 남규원의 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농성이 이루어진 형산강 로터리는 1년여 전인 1993년 3월 전해투(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창립 직후 지역조직인 경주-포항지역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회의 35일간 천막농성이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이러한 투쟁의 배경에는 구조조정의 위협, 노동강도 강화, 퇴직금 누진제 시행 등 신경영전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포철해협과 노건추(포항제철노동조합재건추진위윈회)의 활동 등이 있었다. 1993년 3천억원의 흑자를 내었음에도 1994년 1월 포항제철 사측은 1998년까지 6,200여명의 추가 감원계획을 발표하였다. 당시 2만 3천여명의 포항제철 노동자들 가운데 약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주된 감원대상 또한 상대적 고임금층의 주임 및 반장급으로 적시되었다. 1991년 민주노조 탄압 이후 3,500여명 규모의 감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온 데에다 추가 감원계획이 발표된 것이었다. 나아가 비교적 저항 없이 도입된 4조 3교대 근무 또한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고 있었고, 사측이 퇴직금 누진제를 입사년도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하자 현장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에 걸쳐 일부 해고노동자들의 해고무효 소송이 경주지법에서 승소를 거두며 사측이 노조재건 활동을 방해하고 협박하다 사유를 조작하여 부당하게 해고한 것이 밝혀지면서 포철해협과 노건추의 활동이 힘을 얻었다. 그럼에도 1994년의 투쟁은 무노조 성역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남규원의 단식투쟁이 마무리된 이후로도 해고노동자들의 포항제철 서울사무소 앞 노상 천막농성은 계속되었으나, 노동부가 유령노조에 대해 소집권자 지명을 함에 따라 결국 9월 29일 포항제철의 유령노조는 임시총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현재까지도 유령의 모습으로 현장을 배회하고 있다.

 

‘잡부’ 남규원이 말하는 포항제철

 

남규원은 누구인가? 단식투쟁 당시 31세였던 남규원은 포철공고 졸업 후 1984년 9월 포항제철에 입사하여 1990년 7월 민주노조 설립 시기 민주파인 ‘민족포철’ 그룹의 선봉대장을 맡은바 있고, 같은 해 포항제철 독신자기숙사 자치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인 1991년에도 독신자기숙사 자치회 선거에서 포철자치회민주세력통합추진위원회 측의 후보로 나서 당선되었으나, 당시 선거운동에 함께하였던 일부 노동자들이 해경 공안분실로 강제연행되어 협박을 당하는 등 사측과 공안기관의 탄압에 따라 1991년 2월 해고당하였다. 해고된 이후 남규원은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전해투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항제철 복직투쟁 과정에서 받게 된 벌금형을 감당할 수 없어 건설현장 일을 시작하여 2002년 이후 현재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건설일용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KBS. 2006년 포항건설노조 포스코투쟁 당시 남규원의 인터뷰 모습.

 

한편, 노무현 정권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 의해 2008년 광양제철소의 전장복 등 5명을 시작으로 2010년 3명, 2013년 3월에 3명 등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노조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해고노동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남규원은 아직까지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그저 꾸준히 자칭 ‘잡부’로서 살아가며 노동현장의 경험들을 기록하고 시를 썼다. 포항제철에서 해고된 지 19년을 맞는 2008년, 그는 시집 <개 잡부 해부학>을 출간했다. 그가 써내려간 시들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라기보다는 밑바닥 인생과 노동운동을 주제로 한 처절한 절규에 가깝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포항제철 35년사>. 포항제철소 준공식 당시 모습.

 

그의 시들 가운데 “포항제철과 나”라는 한 편의 서사시에는 무노조의 성역에 도전하며 현장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과 느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는 불길을 뿜어내는 거대한 제철소의 굴뚝과, 반복적 노동 속에 왜소해진 노동자의 모습을 대비시킨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박태준과 고준식의 라이타는 여전한데, 우린 그리스 건에 묻혀 인생이 피스톤질 하며 간다.” 강도 높은 병영적 통제와 그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양상들도 드러난다. 경영진이 공장을 방문한다고 하면 청소는 물론 공장운영의 효율성을 보여주기 위해 여분의 작업도구, 부속, 자재 등을 태우거나 처분하는 등을 빗대어 “하늘로 10억, 땅으로 10억 날린다”는 표현이 돌고 도는 실태를 고발하기도 하며, ‘대빵’이라 불리는 나이 든 주임들에게 부동자세로 ‘안전’을 외쳐 인사를 하고 ‘제일’로 화답받으며 따라다니는 군사주의적 작업장 문화에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는 관리자에 대한 불만을 비공식적으로밖에 표출하지 못하는 작업장 분위기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이 공장장의 새 자동차를 긁어놓고 통쾌해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를 회상하며 ‘잡부’ 시인 남규원은 “누런 황소가 노란 병아리가 되어간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유독 선명한 노란 줄이 들어간 포항제철 작업복을 빗대어 사측에 길들여져 가는 노동자들이 자조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이 바로 ‘노란 병아리’였다. 또한 민주노조 파괴 당시 주임 및 반장급 노동자들이 사측의 사주에 의해 조합원들에게 노조탈퇴를 강요하던 과정에서 자신이 받아 보게 된 한 노동자의 노조탈퇴서의 탈퇴사유란에 적혀 있던 “짐승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되뇌이며 “가슴을 후빈다”고 비통해한다. 그에겐 민주노조를 사수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다. 다음은 그의 시 “포항제철과 나”의 한 구절이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폐(포)철의 소리 없는 노동자
시키는 대로 조련되어 짖지 못하고
달 보면 설움만 토해낸다

 

...

 

포철에 민주노조가 재건되고
민주노조가 강화 발전되어
노조에서 복직 명령이 떨어지면
난 그냥은 못 간다

 

감옥에 있을 때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를 들르고
고향에서부터 카 퍼레이드를 시작해서
포항시내 아홉 바퀴 돌고
보고 싶고, 한없이 가고 싶었던 내 현장

 

...

 

노조를 지켜내지 못한 오명을 벗고
우리 투쟁가인 “철의 노동자”함께 부르며
동지들의 무등을 타고 들어가련다

 

그땐 계장, 과장이
매일 나이 드신 주임에게 인사를 하는
인간다운 현장을 위해
다시 한 번 단련된 투사가 되어
죽으면 죽었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현장’을 너희들에게 내 주지 않으마

 

포항제철의 노조탄압 발자취

 

1987년 대투쟁을 계기로 포항지역 내 철강산업 부문에 6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연관단지에서도 32개 업체의 파업투쟁이 벌어졌으나 포항제철에는 민주노조가 들어서지 못했다. 물론 대투쟁 이후 포항제철에도 민추위(민주노조건설추진위)가 결성되나 사측의 개입으로 곧 해체되었다. 1년여 뒤인 1988년 6월에야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나, 간접선거를 통해 임원이 선출된 데에다 여전히 친기업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민주노조의 설립은 1990년 7월에야 이루어진다. 조합원 직접선거로 이루어진 3대 집행부 선거에서 민족포철 그룹의 박군기 후보가 53.1%라는 높은 지지율로 위원장에 당선된 것이다. 물론 이조차도 같은 시기 민주노조들과 비교할 때에는 온건한 성향을 띠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해 12월 포항제철 노조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16개 대기업 노조들이 연합하여 구성한 대기업 연대회의에 결합하자, 이후 공안기관과 포철의 노동탄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991년 1월부터 포항제철 사측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포철공고 출신 노동자들의 병역특례 취소, 주택융자금 혜택 제외, 포항제철소 조합원들의 광양제철소 전출 등 협박을 가했고, 주임 및 반장급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측 충성파 노동자들을 사주하여 조합원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1985년경부터 가동된 광양제철소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1년 1월 포항제철 민주노조의 한 간부가 사기혐의로 구속되면서 터진 비리사건은 노조의 도덕성에도 타격을 가했다. 물론 이 사건은 후일 공안기관과 포항제철 사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남규원이 독신자기숙사 자치회장에 당선되고 사측의 탄압에 의해 해고된 것은 비리사건이 발발한 바로 며칠 뒤였다. 이른바 ‘공안파 노무팀’에 의한 탄압 속에서 결국 1991년 1-2월의 약2개월에 걸쳐 약16,000명의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하였고, 2월 20일에는 박군기 위원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8월에 이르자 포항제철 민주노조의 조합원은 20여명만 남게 되고, 곧이어 친기업적 유령노조로 전환되었다. 이후로도 노건추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재건이 수차례 시도되었으나, 계속 실패를 겪었고 사측의 강도 높은 관리와 통제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은 노건추의 활동조차도 접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유령노조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포항제철 사측은 임의단체인 직장협의회를 구성하였고, 1993년에 들어서자 ‘노무2부’로 불리던 직장협의회가 임금 및 성과금 배분 협상주체가 됨으로써 무노조 체제가 고착되어 갔다. 이처럼 포항제철에서 민주노조가 와해되고 무노조 체제가 고착된 원인으로 많은 이들은 사측의 강도 높은 노무관리와 더불어 ‘분할지배’를 꼽는다. 안타깝게도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노조탄압에 따른 패배의식의 이면에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장 밖인 지역사회에 대한 포항제철의 장악력 또한 대안적 전망을 어둡게 했다.

 

노동자 분할지배와 사내하청 노조운동

 

잘 알려져 있듯이 포항제철은 박정희 정권 시기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설립되었고, 설립 당시 일본의 철강 설비를 도입하면서 일본 철강업계의 경영기법과 관행들도 동시에 수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철강업계의 체계적인 사외공 관리제도 또한 수입되었고, 따라서 포항제철에는 이른 시기부터 사내하청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사내하청 규모는 꾸준히 확대되어 최근에 이르러서는 정규직 노동자 규모가 1만 6천여명인데 비해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는 2만여명에 이른다. 이처럼 폭넓은 사내하청의 존재는 동일 사업장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분할을 통한 포스코의 지배의 확대재생산 기반이 되고 있다.
 

한편, 1987년 이후 철강산업의 초기 민주노조운동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8년 6월 포항제철의 27개 하청업체 중 4개 업체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1개 업체에서는 사측에 의한 조합원 납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나머지 3개 업체를 중심으로 협력업체 노동조합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포항제철의 자회사였던 또 다른 업체에서는 사측이 복수노조 불허 상황 하에서 유령노조를 설립하자 이에 대응하여 하청노동자들이 6월 28일 평민당 지구당사 점거농성을 벌였다. 이튿날인 6월 29일에는 하청노동자 2,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포항제철 사내하청 노조가 사업장내 점거농성에 돌입하자 즉각 6월 28일자로 작성된 박태준 회장 명의의 노조인정 담화가 발표되었다.
 

사내하청 노동조합들은 1988년 말에 이르면 20여개 이상의 업체에서 7천여명 이상 규모로 전체 사내하청 노동자의 약50%를 포괄하며 포항제철협력업체노조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항제철 측의 하청업체 분할, 노조활동가 고용승계 거부 등 탄압 속에서 다수의 사내하청 노동조합들이 사라지거나 한국노총 산하 노조로 전환하였다. 포스코 사내하청업체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은 2000년대 들어 일부 사내하청 업체들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민주노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되살아났다. 2001년부터 2005년 사이 삼화산업, 덕산 등의 노동조합이 민주노조로 전환하며 장기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도 포스코는 계약해지를 무기로 탄압을 가했으나, 2006년 몇몇 사내하청업체 노조들이 금속노조 광양지역지회(현 포스코사내하청지회)로 통합 전환하였다. 이후로도 포스코는 사내하청업체 재계약시 노사관계 평가가 포함된 핵심성과지표 평가를 반영하면서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 노조로 하여금 한국노총 기업별노조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등 지속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2008년에는 사내하청 업체 해고노동자들이 포스코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원하청복직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포스코사내하청지회는 집요한 탄압 속에서 조직 약화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현장을 지켜오고 있다.

 

계속되는 포스코의 노조탄압

 

국영기업이었던 포항제철이 2000년 10월로 민영화를 완료하고 2002년에는 포스코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과거와 같은 ‘제철보국’ 이데올로기는 약화되었지만, 새롭게 내건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슬로건에 걸맞는 소리없는 무노조 경영과 노조탄압은 지속되었다. 2000년 7월 노정추가 건설된 후 2003년 4월에는 포항제철소에서 노정추 소속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건설 추진과정에서 징계 등 탄압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광양제철소에서도 노정추에 의해 민주노조 건설이 추진되나, 사측 간부들의 협박과 강요 끝에 전원이 노동조합을 탈퇴하였다. 2006년에는 광양제철소 노정추가 재건되어 10월에는 직장협의회의 후신인 노경협의회 선거에 노정추 소속 노동자들이 출마하여 민주노조 재건을 위한 현장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포스코의 자회사인 포철기연 노동자들의 금속노조 가입을 계기로 광양제철소 노정추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금속노조 포스코지회를 출범시켰으나 다시금 포스코 측의 탄압이 가해지며 해체되었다.
 

그밖에도 포스코의 강도 높은 노조탄압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으로 2006년 플랜트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다. 2006년 6월 하순부터 부분적으로 파업을 벌였던 포항지역건설노조는 7월 들어 주5일 근무, 시공참여자제도 폐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청의 지위에 놓인 전문건설업체를 상대로 한 투쟁에 한계를 느낀 포항지역건설노조는 포스코 측의 대체인력 투입을 계기로 포스코 점거투쟁을 감행하였고, 이에 대해 경찰력을 투입한 진압 과정에서 8월 1일 하중근 열사가 운명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특히 포항지역건설노조의 파업투쟁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스코의 지역사회 장악이었다. 포스코는 지역언론에 개입하여 특정 내용을 기사화하도록 하였고, 파업 진행 중 당시 포항시 박승호 시장을 만나 입장을 전달하자 이튿날 박승호 시장이 지역 언론사 간부 및 포항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노사분규에 따른 지역안정대책회의'를 주관하는 일도 있었다.

 

삼성왕국과 포스코왕국에 대한 도전

 

삼성과 포스코는 한국사회 내에 각자의 ‘왕국’을 지니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제왕적 통치’와 일가 족벌경영 방식이 삼성‘왕’국을 특징짓는다면, 지역사회를 물샐 틈 없이 장악하는 방식은 포스코왕‘국’을 특징짓는다. 포스코의 제철소가 위치한 포항과 광양은 1960년대까지 소도시 내지는 촌락이었으나 1990년대에 이르면 이미 대규모 산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지역사회 전반이 포스코에 강하게 의존하는 가운데, 포스코 또한 일관제철 생산의 특성상 조업중단시 발생할 막대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노동자 및 지역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관리로 일관해 왔다. 동시에 포스코 내부노동시장의 경계를 따라 지역사회 내 불평등 또한 심화되어 왔다.
 

이들 두 왕국은 각각 두 유령의 무노조 경영원리를 신조로 삼고 있다. 삼성왕국을 떠도는 유령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던 고 이병철 회장이라면, 포스코왕국을 떠도는 유령은 1960년대 대한중석 사장 시절 노조 문제로 골치 아팠다던 고 박태준 회장이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의 발자취는 무노조 경영에 바탕한 기업 ‘왕국’에 대한 도전이 끊이지 않아 왔고, 따라서 언젠가 성역은 무너질 것임을 시사한다. 지난 7월에도 삼성전자 서비스 하청노동자 400여명이 금속노조 삼성서비스지회를 창립하고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무너져야 할 성역은 삼성만이 아니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에 기업도시를 건설하고 지역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노조의 성역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민주노조, 남규원의 단식투쟁을 비롯한 포철해협의 복직투쟁, 노정추와 포스코사내하청지회의 활동 등은 포스코 노조민주화 운동의 발자취는 새로운 도전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전노협백서>
<매일노동뉴스>
포항제철해고노동자협의회. 1994, <철의 노동자> 1-8호
인권운동사랑방. 1994, <인권하루소식> 제239호. 1994.9.1
광양제철소 노무부. 1994, <직원관심사항 종합해설>
포스코. 2004, <포스코35년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2007, <포스코와 포항시 지역경제>
금속노조 포스코 현장위원회. 2008, <쇳물처럼> 1-6호
정희태. 1988, “노동조합의 발생을 통해 본 한국철강산업의 노동과정과 노동통제”
손정순. 2011, “후발 산업화와 금속부문 대공장내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