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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곳에 있던 작은 ‘희망’ : 1985년 부산 공단지역 노동자 투쟁

이미 그곳에 있던 작은 ‘희망’ : 1985년 부산 공단지역 노동자 투쟁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52호
2013년 4월 <이 달의 역사> 기고글

 


최근 들어 1985년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그 기억의 중심에는 대우자동차 투쟁과 구로동맹파업이 놓여져 있다.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학생운동과 노동법 개정투쟁은 1984년 들어 이른바 '유화 국면'을 맞이하였고, 이에 따라 민주노조운동은 신규노조 결성 및 노동쟁의의 급증이라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듬해 4월에는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공개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곧이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뒤이어 6월에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구로동맹파업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 시기의 민주노조운동은 기업 단위를 넘어서 지역 수준에서의 연대 투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최근 들어 노동조합운동이 현장은 물론 전국 수준에서도 구심점의 '공동화' 현상을 보이는 가운데 다시금 많은 이들이 '지역'에 주목하고 있는 만큼, 1985년의 경험은 재발견되어야 할 전통으로서 여전히 중요하다. 이 시기의 민주노조운동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야 할 것은 그 내용뿐만이 아니라, 이 시기의 투쟁들이 구로공단이나 인천지역에 국한된 특수한 경험이 아닌,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5년 4월 부산 지역의 노조결성 및 노조민주화 투쟁, 같은해 8월 성남과 안양의 공단지역 연대투쟁 등이다.

 

이들 중 부산 지역은 식민지 시기 공업화를 거치며 해방 이후로도 수도권 지역과 더불어 핵심 공업지역이었다. 1985년 당시 약350만명의 인구 가운데 제조업 노동자가 35만여명에 달하여 동남권 공업지역의 중심을 이룩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35만여명 가운데 약3분의 1이 사상공단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또한 간헐적으로나마 계속되었다. 1980년 4월 동국제강 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1983년에는 금성알프스와 대우정밀 등에서 노조결성 시도가 있었다. 1984년 6월에는 직전에 일어났던 대구지역 택시 파업을 뒤이어 택시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1985년 봄, 노동자 투쟁의 물결은 부산 곳곳의 공단지역으로 이어졌다. 물론 부산 지역 노동자 투쟁은 서노련이나 인노련과 같은 조직을 남기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1987년과 이후의 민주노조운동으로 그 성과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 투쟁은 지역적 차원에서 노동자들의 집합적 경험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이후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부산 지역의 노동조합 결성 및 노조민주화 투쟁의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 특히 부산 지역 민주노조운동이 미약하나마 기업수준을 넘어선 연대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1985년 4월 세화상사와 삼도물산의 해고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신민당사 농성을 들 수 있다. 세화상사 해고자 7명과 삼도물산 해고자 3명은 1985년 4월 9일부터 14일까지  신민당 박찬종 의원 사무실을 점거하여 해고자 복직과 최저임금 월13만원 보장, 민주노조 인정, 노동부 장관의 사과, 노동부 장관 및 부산시장 면담 등의 요구와 더불어 상급단체인 화학연맹과 섬유연맹에 대한 규탄 메시지를 제기하였다. 세화상사와 삼도물산의 해고노동자들은 당시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던 신민당의 지구당 당사에서 진행된 이 농성을 통해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였고, 학생운동 및 지역 사회운동과의 연대투쟁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이 투쟁은 성공을 거두지도, 광범위한 대중투쟁으로 확산되지도 못하였으나, 이후 지역 내 곳곳의 사업장에서 여론을 환기하고 일상적 투쟁을 자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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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부산 지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전설의 여공>(박지선 감독, 2011)의 주인공들.
      출처: http://meditory.tistory.com/

 

세화상사의 경우 1985년 초 사측의 강제저축에 따른 임금수령액 감소를 계기로,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과 부당해고 철회 요구를 중심으로 2월에 노동조합을 설립하였으나 나흘 뒤 설립신고서가 반려되고 사측의 탄압이 계속되며 핵심 간부들이 해고되었다. 이후 신민당사 농성 등을 통해 일부 간부들은 복직되었으나, 민주노조 결성은 성공에 이르지 못하였다. 삼도물산 영도공장의 경우 1970년대 공장새마을운동을 배경으로 설립되어 가부장적 통제를 발전시킨 업체이다. 1984년 9월, 몇몇 노동자들이 인근 사업장의 노동조합 간부들과 만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모색한 결과, 노동조합 결성이 시도되었다. 이에 사측은 조합원들의 개별면담과 방문을 통해 노조탈퇴를 종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 가운데 삼도물산 부설 영도 남여상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는 제적 처분의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지역사회 수준으로 문제가 확산되자 10월에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노조인정 직후부터 노조활동에 대한 사측의 탄압은 본격화되었다. 1985년에 접어들면서 주요 간부들에 대한 일방적 부서이동, 3월에는 간부 3명에 대해 해고통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세화상사와 삼도물산 노동자들은 공동투쟁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노동조건을 둘러싼 투쟁이 빈발하였다. 1985년 3월부터 4월 초에 걸쳐 사상공단 내 최대 섬유업체인 국보직물에서는 체불임금 확보 투쟁이 이루어졌고, 5월 중순에는 나이키 신발을 주문생산하던 풍영에서 '30분 임금 확보 투쟁'이 일어났다. 풍영 노동자들은 "우리의 30분을 돌려달라"는 구호 아래 하루 30분간의 초과수당 미지급분에 대한 지급과 더불어 충분한 점심시간 확보를 요구하며 투쟁하였다.

 

이 시기 투쟁의 요구조건들은 비슷한 시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투쟁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부산의 공단지역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특히 신발 산업과 섬유산업에 집중되어 있었고, 여성노동자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노동자 평균임금 수준도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작업장에서의 일상적 투쟁의 초점은 종종 부산 지역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셰파드'(개)로 통했던 중간관리자들에 의해 ‘안전관리’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욕설, 구타, 폭행, 몸수색 등 인격적 모욕에 대한 반대였다. 노동시간 또한 주당 60시간을 넘어서며 부산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긴 평균 노동시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최소한의 식사 및 휴식시간의 확보에 대한 요구가 많았으며, 임금인상 요구와 더불어 "최소한 명절 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의" 상여금에 대한 요구도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여타 지역에 비해 높았음에도 임금수준은 낮았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부산지역의 노동조합은 친기업적 한국노총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항운노조와 화학노조가 그 중심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민주노조운동 사례가 삼도물산과 세화상사였다. 두 사례 모두 한국노총 부산시협의회의 지원 아래 노조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어용화를 겪었던 사례들이다. 삼도물산은 1983년 8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나, 사측의 개입 아래 어용화되었고, 이후 노조민주화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세화상사의 경우 1985년 2월 노조결성을 시도하였으나 신고필증을 교부받지 못한 채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 투쟁들이 미약하나마 기업수준의 경제적 요구 중심의 투쟁을 넘어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배경 또한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 사례들과 유사성을 지닌다. 학출 노동자들의 활동과 종교단체의 지원, 당시 부산 지역에 10여곳 존재했던 노동야학의 역할, 여성노동자가 제조업 노동자들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여성평우회 등 여성운동의 역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다수의 사례에서 농성 노동자들이 <부산일보>를 방문하여 호소하였던 점 등을 통해 볼 때, 많은 노동자들이 지역 수준의 여론 형성에 민감하였음 또한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집중적으로 발생한 신발산업 등 경공업 부문의 노동자 투쟁은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신발산업은 산업공동화가 진행된 국내의 대표적인 산업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의 신발산업은 OEM 생산을 중심으로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하여 발전을 이루어 왔으나, 1990년대 들어 중국 및 동남아 지역으로 생산이 이전되면서 공동화가 발생한 것이다. 신발산업이 주문하청생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쇠퇴하는 가운데 많은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라는 희생이 강요되었다.

 

이와 같은 산업구조조정의 여파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부산과 더불어 나이키 신발이나 조선소를 떠올리기보다는 말끔히 새단장을 한 해운대를 떠올린다. 그러나 부산 곳곳의 공단과 거리들은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2011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희망버스가 노동운동에, 나아가 한국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면, 그것은 전국 곳곳에서 버스를 타고 온 희망들뿐만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있던 희망이 되살아나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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