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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성의 시대: '현실'로의 도피 - 오사와 마사치

불가능성의 시대: '현실'로의 도피

 

오사와 마사치. 2008, <불가능성의 시대>

 

서문: ‘현실’로의 도피

 


‘전후’라는 시대구분

 

현실(reality)은 언제나 반(反)현실을 참조한다. 우리에게 현실은 의미부여된 사건 또는 사물들의 질서로서 나타난다. 의미의 질서로서의 현실은 항상 그 중심에 현실이 되지 못한 것, 즉 반현실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현실 속의 다양한 ‘의미’는 그것의 반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할당된다. ‘의미’의 집합은 동일한 반현실과 관계맺고 있기에 통일적인 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반현실이란 무엇인가. 미타 무네스케(見田宗介)에 따르면, ‘현실’이라는 말은 ‘(현실과) 이상’, ‘(현실과) 꿈’, ‘(현실과) 허구’라는 세 개의 반대말을 지닌다. 이들 세 가지 반대말은 그 자체가 세 종류의 반현실에 대응한다. 미타에 따르면, 그러므로 반현실은 세 개의 중심적인 양식(mode)을 지닌다.

 

그런데, 일본근대사 전문가인 캐롤 글럭(Carol Gluck)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60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전후(戦後, post war)'라는 시대구분이 살아있는 것은 일본 뿐이다. 예컨대 동일한 패전국이라 하더라도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는 하나의 시대구분이 지속되고 있다는 감각은 사라진 상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아직도 ’전후‘라는 구분이 유효하다. 예를 들면,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수상으로서 ’전후 체제의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때, 그것이 통했던 것은 일본인들의 내면에 아직 ’전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전후’라는 한 시대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적인 반현실의 양식을 기준으로 조망해 보면, 미타가 지적한 대로 그 반현실의 양식은 ‘이상→꿈→허구’로 전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후는 ‘이상의 시대’, ‘꿈의 시대’, ‘허구의 시대’의 세 가지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미타가 이와 같은 테제를 제기한 것은 전후 45년을 맞이한 1990년의 일이다. 그는 전후의 45년을 3등분하여 각각을 ‘이상의 시대(1945-60년)’, ‘꿈의 시대(1960-75년)’, ‘허구의 시대(1975-90년)’에 대응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5년 뒤, 즉 전후 반세기를 경유한 시점에서 필자는 미타의 테제를 계승하는 논의를 제기한 바 있다. 그것은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있었던 해인 1995년의 일이다.

 

우선 유의해야 할 점은 ‘꿈’이라는 양식은 ‘이상’과 ‘허구’의 양자의 분기점을 이루며 양의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예컨대 ‘꿈’이라는 말은 “당신의 장래의 꿈”이라는 표현에서는 ‘이상’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꿈인지 환영인지”와 같은 표현에서는 ‘허구’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단순화해 보면, 시대구분의 핵심을 보다 분명히 강조하고자 한다면, 중간에 놓인 ‘꿈의 시대’는 ‘이상의 시대’와 ‘허구의 시대’ 양측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렇게 크게 보면 전후 시대는 ‘이상의 시대’에서 ‘허구의 시대’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당시 전후 50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1970년이 전환점을 이룬다고 말한 바 있다. 나아가 필자는 그 20년 뒤에 일어난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에서 ‘허구의 시대’의 ‘극한=종언’을 보았다.

 

‘현실’로의 도피

 

각각의 시대의 내용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그에 앞서 기준이 되는 ‘반현실’은 ‘이상→(꿈)→허구’의 순으로 반현실의 정도를 높여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미래에 현실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반현실인 반면, 허구는 그것이 현실화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반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상은 보다 광범위한 현실을 포함하는 반면, 허구는 그야말로 현실의 범주 외부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보다 강한 반현실성을 띤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반현실이 더욱 ‘반(反)’의 정도를 높여 왔다고 하는 방향성을 전제로 한 경우, 이해하기 어려운 역전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현실’로의 도피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실도피’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 즉 현실로부터 이상이나 허구의 세계로의 도피이다(“이상만을 좇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등).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방향의 도피, 즉 ‘현실’로의 도피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물론 이 경우 ‘현실’은 통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현실 이상으로 현실적인 것, 현실 속의 현실, “이것이야말로 현실!”이라 여기고픈 현실이다. 다시 말해 극도로 폭력적이거나 격렬한 현실로의 도피라 볼 수 있는 현상을 다양한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 손목 긋기(wrist-cut)로 대표되는 자해행위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신체로부터 직접 느껴지는 고통은 그 어떤 현실보다 현실적이며, 현실을 현실답게 하는 순수한 결정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최종전쟁(아마겟돈)이나 테러, 혹은 전쟁과 같은 극한의 폭력에의 지향성을 지닌 종교적 내셔널리즘의 열광 또한 '현실'로의 도피의 한 종류다. 혹은 격렬한 사건이나 전쟁의 현장을 찾아가보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충동 역시 동일한 지향성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청년층의 문화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종류의 격렬한 '현실'에의 애착과 정열의 예는 일일이 셀 수가 없다. 한편, 일본보다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긴 하나, '허구'의 드라마에 성이 차지 않는 시청자들은 '리얼리티 드라마'(특정 남녀의 실제 생활을 있는 그대로 '드라마'로서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와 같은, 그야말로 '현실' 그 자체를 쇼나 드라마로서 향유하고 즐기지만, 이 도한 '현실'에의 열광의 하나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이상의 시대에서 허구의 시대로'라는 전후사의 전환에 관한 필자의 논의를 받아들여, 허구의 시대에 뒤이어 '동물의 시대'라 그가 이름붙인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논한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중 하나) 역시 '현실에의 도피'이다. 아즈마에 따르면, 오타쿠들은 대부분이 마약중독자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게임이나 아니메에 빠져든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허구의 의미(이야기)의 이해(理解)를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닌, 신경계를 직접 자극하는 듯한 강렬함이다. 그것은 자해행위 중독과도 닮아 있다. 여기에는 미래에 기술발전에 따라 자해 대신에 뉴런에 직접 강력한 자극을 가하는 것에 빠져드는 중독증이 출현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인간은 신경계를 갖춘 생리적 신체로서, 즉 동물로서만 살아있는 것과도 같다.

 

‘우리들’의 사회의 ‘현실’

 

현실로의 도피를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은 일본의 전후사라는 틀을 넘어선다. 현대사회에 있어 '현실'로의 회귀, 현실에의 지향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형상은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의 일부)에 의한 테러 도는 폭력일 것이다. 9.11 테러로 국제무역센터(WTC)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지향을 상징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무차별 테러를 불사하는 원리주의자들은 주로 ‘뒤쳐진 제3세계’로부터 출현하는 것이지, 선진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들의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현상이라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란 원리주의와는 정반대편에 놓인 다문화주의가 아닌가.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반론을 해두어야겠다. 이슬람제국은 원래 원리주의적이기는커녕 종교적 관용을 핵심으로 한다. 어찌 보면 다문화주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원리주의적인 불관용은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궁극적으로는 그 원인을 서양근대와의 접촉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원리주의는 서구에서 유래한 근대와,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대사회’와 무관하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원리주의로 구체화된 폭력이 우리들의 사회의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명제는 다른 각도에서도 지지될 수 있다. 9.11 테러에 관해, 필자는 일찍이 이것이 어떤 의미로 현대 선진자본주의에 내재된 것이라는 점을 신중히 논한 적이 있다(<문명 속의 충돌>).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른 예를 들어보자.

 

2005년 8월말 ‘카트리나’라는 이름의 초대형 허리케인이 미국 동남부를 덮쳤다. 허리케인 강타 직후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인해 유독 뉴올리언즈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정부가 신속히 대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뉴올리언즈의 참상은 필시 미국인들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충격이 일종의 사고정지상태를 낳았고, 초기 대응에 있어 일시적인 지체를 낳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일까.

 

뉴올리언즈를 궤멸시킨 허리케인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은 '현실', 즉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의 일종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가져온 참상이 미국인들에게 있어 트라우마가 된 것은, 그것이 바로 '여기',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즈의 파멸적인 참상은 예컨대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요컨대 허리케인은 중동과 같은 아득한 저편에서나, 혹은 TV나 영화와 같은 허구의 공간 속에서나 일어날 터인 일이 바로 '여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허리케인 그 자체는 자연재해이지만, 그것이 가져온 파멸적인 재해의 실상을 통해 미국인들이 은밀히 지니고 있던 불안 혹은 예감, 즉 원리주의나 자폭테러와 연결된 폭력적인 '현실'이 이미 '우리들'의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혹은 예감을 직접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야말로 트라우마가 될 만한 점은 뉴올리언즈의 참상이 전혀 예상밖의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면서도 예상해 왔던 일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똑같은 양상을 2005년 10월에서 11월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 즉 파리 교외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있던 북아프리카계 청년 세 명이 변전소에 숨어들어 그 중 두 명이 감전사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 전역으로 번진 청년 이민자들의 폭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폭동을 1968년 5월 혁명의 폭력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5월 혁명에서는 유토피아적인 전망과 더불어 폭력에도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상의 시대'에 내재한 폭력이었다. 그러나 2005년 프랑스 폭동에 그와 같은 전망은 없었다. 불타는 자동차에 이유는 없었다. 그 폭력은 오히려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저자소개: 오사와 마사치(大沢真幸)

 

1958년 나가노현 출생
도쿄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치바대학 문학부 조교수 등을 거쳐,
현재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로 재직, 사회학 박사
전공은 비교사회학, 사회체계론
저서로는 <행위의 대수학>, <성애와 자본주의>, <제국적 내셔널리즘> (세도샤),
<신체의 비교사회학 I․II> (케소쇼보), <전자미디어론> (신요샤)
<허구의 시대의 끝>, <전후의 사상공간> (치쿠마쇼보)
<문명 속의 충돌> (NHK북스), <사상의 케미스트리> (키노쿠니야쇼텐)
<내셔널리즘의 유래> (고단샤, 마이니치출판문화상 수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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