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불가능한 (뮤지션의) 꿈과 (비루한) 현실

현실주의자이면서도 불가능한 꿈을 지녀야 한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내 삶에 있어서 음악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음악이라는 것이 그 누가 만들고 어디서 흘러나오는가에 관계없이 그저 때에 따라 즐겁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의 구석구석까지 울림을 주어 그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 방향이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간에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그러한 계기가 있었던 듯하다. 초등학교 시절, 참치 잡이 원양어선을 타고 떠났던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면서 각종 ‘외제’ 물건들(물론 싸구려 물건들이었지만)을 가져왔고, 그 중에는 파나소닉 박스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한 개의 테입 데크와 튜너가 붙어있고, 스테레오 스피커가 있던 그 박스가 방 한구석에 놓여지면서부터 나는 늦은 시간까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가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가 공고에 다니던 시절 방송반에 있었던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아직도 벤처스와 폴 모리아를 죽어라 좋아하신다), 그가 탄광에 다니던 시절 오디오를 구입했다가 사기를 당한 일 이후 오랜만에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시골집 창고를 뜯어고친 작은 나의 방에 틀어박혀 나는 배철수, 전영혁 등이 진행하는 음악방송에 미쳐 살게 되었다. 빌보드 차트를 줄줄 꿰고, 용돈을 모아 시내(지방 소도시)에 나가면 단 하나뿐인 레코드 가게에서 카세트 테잎(아직 CD가 나오지 않았던 시절)을 사 모았다. 그러던 중에 인천에 있는 외갓집에 갔는데, 그동안 전혀 신경 안 썼던 사촌 형의 테잎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 보따리를 싸 들고 왔다.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부터 레드 제플린, 퀸 등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초등학교 후반부 시기는 미국의 쟁쟁한 뮤지션들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과, 카세트 테잎 수집, 에어체킹(Air-checking,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테잎에 녹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그 어느 날, 몽정과 여드름 등 사춘기 시작의 징표를 1-2년 전쯤 벌서 거쳤던 나는 가슴이 온통 두근두근 거리도록 만드는 노래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서태지와 너바나였다. 그리고 나의 단짝친구와 음악에 빠져들면서 또 용돈을 모으고 모았다. 물론 다른 친구들처럼 삥을 뜯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동네 아저씨네 가축 먹일 풀을 해 주거나 개를 대규모로 기르는 집에 가서 개똥을 치워주는 등의 일을 하고 용돈을 받는 일들도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도 찬란한 서울의 종로까지 올라가서 지금 생각하면 왕창 바가지를 쓰고 싸구려 펜더 카피 기타를 사들고 왔다. 우리는 곧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친구 녀석의 집에서 너바나, 오지 오스본 등의 노래를 흉내 내며 즐거워하곤 했다.

 

물론 당시에 우리 지역에는 ‘까까머리(창단 멤버가 모두 깜방에 갔다 와서 이런 이름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저키’ 등의 로컬 밴드(고등학교 ‘형님들’의)가 있었는데, 나와 친구는 메탈리카, 메가데스, 스키드 로, 헬로윈 등의 음악을 카피하면서 노래는 높이 올라가면 잘 부르는 것이고, 기타는 빨리 치면 잘 치는 것이라는 지배적이던 동네 분위기에 그들을 일명 ‘후루꾸’라 부르며 무시하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개뿔 실력도 없으면서 딴에는 스티비 레이 본을 모르는 ‘형님과 똘마니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았던 것이다. 그렇게 **천 다리 밑에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노래 부르면서 중학교 3년 시절이 어느덧 지나갔고, 나는 친구와 헤어져 다른 지역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곳곳에서 모인 각기각색인 놈들을 많이 만났는데, 시골구석에서 올라온 나에게는 별의 별 놈들이 다 있는 것으로 비쳐졌고, 음악을 즐겨 듣는 친구들도 더욱 많이 만났다. 게다가 그 동네는 무지 커서 음반가게도 많았고, 나는 곧 직접 수입을 하는 어떤 아저씨의 음반가게에 단골손님이 되기도 했다. 친구들과 모여서 뮤직비디오도 많이 보고, 스쿨밴드에 들어가 기타도 쳤다. 이건 완전히 내가 아니면 누가 뮤지션이 된단 말인가 하는 불가능한 꿈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이다.

 

제도권 학교의 등급과 학년에 따라 내 삶의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구역질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삶의 변화들을 가져오는 일이라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대학 진학이 그러한 사건이었는데, 대학교에 와서 나는 순진했다고 할까, 정말 자유가 숨쉬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빨리 깨진 것이 나에겐 행운인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꾸준히 그 진리와 자유가 남아 있는 공간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비집고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무너져 가고 있던 이른바 ‘운동권’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해야 할 일(할 수 있는 일보다는)을 던져주고 있었고, 노래가 불어넣어 주는 열정들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노래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이른바 민중가요. 물론 음악 자체는 투박하고 거친 것이 많았지만, 그것이 주는 힘과 노랫말의 신선함은 나를 공장의 불빛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지금의 나의 모습과 가까워진 가운데 정말 멋진 아저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정태춘이다. 이 분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전율이었다. 특히나 <한여름 밤>, <황토강으로> 등의 노래들은 가사의 깊이와 음악적인 매력은 나로 하여금 세계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도 추천해주고 싶은 노래꾼으로 정태춘 아저씨를 손꼽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에 남미의 이른바 ‘새 노래’(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빅토르 하라의 음악은 한국의 정태춘에 비교할 만큼 나에게 큰 감흥을 주었다.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는 유럽의 식민지 경험과 그 이후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몬 볼리바르, 투팍 아마루, 에밀리아노 싸파타에서 카스트로와 게바라, 싸파티스타와 우고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물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의 정태춘보다 더 클 테지만 말이다.

 

하라는 칠레의 가수로서 그 유명한 아옌데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아옌데 집권 이후에 이른바 ‘인민연합 천일’ 이후 피노체트를 비롯한 반군의 쿠데타 이후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영상물로는 <칠레 전투>가 있지만, 나의 경우엔 영화운동가인 레이문도 글레이져의 삶을 다룬 <레이문도>라는 기록 영화를 통해 더욱 실감이 났었다. 네루다의 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 <칠레의 모든 기록>, 역사서로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 까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등을 통해서 그 사회적 배경은 훨씬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비올레따 빠라, 인띠 이이마니, 빅토르 하라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는데, 이들에겐 모두 잉카 문명 등 라틴아메리카의 정서를 전통 악기와 음계 등으로 민중의 삶과 밀착된 노랫말로 노래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나 1960년대 이후 혁명이 라틴아메리카를 휩쓸면서 저항의 노래가 많이 불리워졌다.
 

결국 1950-70년대의 영미 록 음악과 블루스, 재즈가 비록 나의 무의식에 가깝도록 여전히 어떤 진정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문화 산업의 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월드 뮤직’에서 훨씬 더 잘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언제부터인가 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중남미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느끼게 된 것이었다.

 

뮤지션이 되고싶다던 나의 꿈은 비루한 현실로 대체되었지만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