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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와 환멸에 대해 논하기

 

 

 

자끄 동즐로, 주형일 옮김. 2005,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사회적인 것의 발명>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사회보장’이라 옮긴 데에서 옮긴이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사회보장이라는 번역어가 주는 어색함이나 거부감이 거의 없이 읽혀진다. 물론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해야겠다.

 

동즐로는 첫머리에서 68혁명 이후 사람들이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상황을 ‘환멸’로 표현한다. 이들은 지독한 냉소주의로 돌아서거나 완강한 현실주의로 나아갔다. 이러한 ‘정치적 열정의 쇠퇴’에 대해 논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사회적인 것, 즉 ‘사회적 관계 및 제도들의 총체’(옮긴이의 설명을 빌리자면)는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사회적인 것은 공화국의 수립과 더불어 ‘사회계약’의 형식을 띠고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시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점에서 나타나 그 둘을 소멸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공화주의자들이 발명해 낸 것이 연대성 개념인데, 동즐로는 “바로 이 연대성 개념을 통해 주권에의 요구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 연대성 개념은 피억압자들의 연대,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와 같이 무엇에 맞선 연대가 아니라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연대, 한 마디로 국민의 연대를 말한다.

 

이렇게 출현한 사회적인 것은 어떻게 확대되었는가? 이 확대는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분리에 크게 힘입었다. 동즐로가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분리 메커니즘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사회법이다.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법은 기업들의 온정주의라는 기존 관행에 타격을 입혔고, 이를 통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대립으로 전환”(p.141)하였다. 그렇게 사회적인 것이 비대해지고 정치적인 것이 축소된 사회가 유럽의 복지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지국가도 1960년대 후반에 위기를 맞는다. 이에 대한 동즐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인 것, 즉 사회 전체의 연대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은 책임감 개념을 제쳐 놓았다. … 개인의 삶에서 책임을 제거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국가의 차원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 따라서 복지국가 위기의 중심에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유명한 사회적인 것의 부재가 있다.”(p.202)

 

이 부분을 읽으면서 ‘복지병’에 대한 비판들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다. 사회적인 것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그 외부에서 사유하는 방식보다 익숙한 까닭인 듯하다. 그러나 동즐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국가에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고,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것도 아니며, 모두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같다. 사실 ‘복지병’에 대한 공격을 중심으로 한 도덕주의 담론은 국가를 중심으로 사회적인 것을 남김없이 파괴하여 개개인들 모두를 기업적 주체로 재편성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 세력들의 선제공격 무기가 아니었는가.

 

이처럼 “진보와 더불어 결국 실현되는 것은 주권이 아니었다. 주권의 요구 자체가 개인들의 자율성을 교활하게 부정하는 새로운 지배 형태를 위해 사라졌다.”(p.220) 이 ‘새로운 지배 형태’에 대응하여 나타난 운동으로 동즐로는 ‘개혁주의’ 운동과 68혁명 세력의 ‘극좌파’ 운동을 든다. 먼저 개혁주의 운동은 “복지국가에 의해 도입된 위험한 관습들”을 타파할 것을 내세운다. 이들은 “국가의 혜택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을 통해 모인 개인들의 추상적 집합”이나 “고립된 개인들과 관계하면서 시민적-도덕적 재무장에 호소”한다.

 

내 생각에 영국의 경우 대처리즘은 ‘복지병’을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사회적인 것에 미련이 남은 사람들의 표심으로 집권한 신노동당은 개인들이 기업이 된 상황에서 전국민의 컨설턴트가 된 국가를 물려받고서는 별 수 없음을 절감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노동당의 행보는 완숙한 신자유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68혁명의 극좌파 운동이 논의된다. 동즐로는 이 운동의 핵심으로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을 꼽는다. 소비사회의 불안정에 대한 이들의 주장은 “개인들이 국가에게 모든 것을 기대도록 만들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은 채 국가에게 자신들의 욕구를 말하도록 만드는 거의 주권적이지 않은 행동을 없애기 위해 우선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의 요구를 자율성의 명령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의 억압 등을 강조하였던 비판이론이 도마에 오른다. 이들은 “국가개입의 확대와 거부의 양자택일”밖에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 양자 사이에서 체계이론이 부상했다고 지적한다. 이 체계이론의 세련된 형태는 요즘 범람하고 있는 ‘사회자본’ 논의가 아닐까 싶다.

 

이상의 두 가지 정치담론들은 모두 변화에의 요구를 내세웠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인 것이 자율화되면서 정치적 열정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변화에의 요구는 끊임없이 정치의 위기를 발생시킨다. 여기서 동즐로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이 다시 한 번 필요하다고 한다. 정치적 열정의 쇠퇴는 정치적 사안들의 재형식화가 필요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정치가 위기를 맞으면서 정치적인 것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다시 한 번 촛불에 대해 생각해본다. 촛불이 꺼진 상황, 이것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라기보다는 환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것에 대해 논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환멸이 복지 없는 복지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사회보장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인 것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촛불시위를 중간계급의 열망의 표현이라든지, 소비자의 욕망의 정치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지적들이 냉소주의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동즐로의 논의에 기대어 볼 때,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변화에의 요구’는 사회적인 것의 자율화보다는 사회적인 것의 확대 내지는 재편에의 요구가 아니었는지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다시 촛불이 등장할 때 그것을 ‘정치적 사안들의 재형식화’ 계기로 삼기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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