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몽롱함에 대하여

다시금 환멸을 마주하는 현실주의(냉소주의)와 신비주의의 틀로 이야기하자면, 몽롱함이 과도할 경우 신비주의가 되고, 몽롱함이 과소할 경우 현실주의가 되는 듯하다. 사람이 몽롱해지면 안 보이던 것도 보이게 되고, 보이던 것도 안 보이게 되는데, 그런 식의 시차 경험을 할 수 없다면 환멸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몽롱함을 사람들은 환각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환각이라는 용어에는 중독이라는 용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환각을 둘러싼 이 중독의 한편에는 노동중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약물중독이 있다. 환각이라는 표현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환멸을 환각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낸다. 또한 그 매개체를 마약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을 악마화한다.

 

사실 몽롱함의 매개물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우선 사람의 신체에 작용하는 생화학적 매개물로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추출된 것들이 있다.

 

사실 옛날 시골 어른들은 이걸 그냥 약이라고 부른다. 육신이 노회하면서 찾아오는 고통,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을 자연의 산물의 힘을 빌어 견뎌내는 동시에 길고 긴 시간동안 축적된 기억으로 인해 자주 찾아오는 환멸을 마주하게 해 주는 매개물이었다.

 

이것이 악마화 된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윤리를 침식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노동윤리의 두 측면에 모두 타격을 가한다. 노동력을 쥐어짜내고자 하는 측면과 노동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측면. 그래서인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종종 약쟁이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한편으로는 부자연스럽게 대규모 농장에서 길러진 자연추출물들과 각종 염산화합물들과 같이 인위적으로 조제된 화학약품들이 하나의 산업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노동중독의 반대편에 있는 약물중독을 창출하기 위한 산업이다.
 

 

약물중독을 통한 잉여인간들의 신경계 관리는 노동중독을 강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요컨대 그들은 노동중독자들의 의욕을 강화하는 반면교사들의 존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의 중독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그러한 산업에 대한 반대 캠페인마저 전유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셀 수 없이 쏟아져나오는 헐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들에는 마약에 맞서 싸우는 남성 영웅들이 그토록 많이도 등장한다. 오죽하면 DEA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겠는가.
 

 

사실 이것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총을 든 경찰이다. 경찰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도 아니면 어딘가 약간 모자란 노동중독자들을 보여주거나 일을 너무도 잘 해서(?) 소득도 넉넉하고 여유도 좀 있는 한량들의 이미지가 범람한다. 사실 내게 가장 무서운 건 마지막 이미지이다. 일을 너무 잘 해서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모든 것을 잘 하는 자기관리의 달인들 이미지 말이다. 미국의 경우에 멕시코 이민자들만 없었다면 마약과의 전쟁 같은 담론도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중독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를 손상시키지도 않으며, 육체적 피로나 스트레스도 훨씬 덜한 중독이다. 이 자기관리 중독은 더 이상 노동중독이 아닌 것 같다.


 

노동중독이라면 노동시간 단축을 향한 집합적 운동으로 도전할 수 있을 것이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마당이나 화분에 적절한 식물도 좀 기르고 그러면 될 것이다. 일 자체보다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갖가지 시도들과 정신상태 ... 이건 뭐 현실주의와 냉소주의의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닌 중독이다. 환멸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중독이라기보다 환멸을 정복하려는 중독이다. 이러한 중독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환멸을 논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알고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