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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은 운이 좋았다.
규민이 어린이집 일정상 아침 9시까지 어린이집에 등원해야해서 곧 세종문화회관으로 뛰어갈 수 있었다. 아침 10시 시작하는 토론회가 두 개, 무얼 고를까, 갈등.
하나는 내 청춘의 히로인, 오정희가 발제자로 나오신다. 그러나, 주제가 또 그만그만한 것, <힘의 질서와 인간 가치:독재, 전쟁 그리고 평화>.
같은 시각 다른 것은 <영구평화의 이상>.
독재, 전쟁, 힘의 시대를 거쳤으니, 이젠 평화도 영구평화를 얘기해야 시원하지, 하고 <영구평화의 이상>을 보기로 했다. 주제 발표는 로버트 하스(시인이라함)와 최장집교수.
그런데 늦었다. 로버트 하스의 발표 앞대가리를 빼먹는 바람에 집중하고 앉아있지 못하고 화장실도 왔다갔다 (그러느라 회의장 밖에 나갔더니, 누가 다가와, 저기 혹시 xxx씨 아니세요? 했다. 순간 나한테 떠오른 생각은 주책맞게, 엇! 난 소설가도 아닌데 어떻게 알지?였다. 내가 전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결과는 시시껍절하게 그냥 대학 1년 후배였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안도감, 그래, 졸업하고 그렇게 팍 변한 건 아닌가보다..) 해서 로버트 하스의 발표는 뭐가 뭔소린지 잘 모르겠다. 내가 깜짝 놀라며 감동을 받은 것은 최장집 교수때문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한반도 평화조건'이란 글을 준비했는데, 그 글 안 몇가지 표현, 예를 들면, 북한을 언급할때 북한/북핵이라고 표시한다든지, 민주주의나 자유, 인권이란 가치 개입없이 평화공존 자체를 목표로한 남북한 관계라든지, 하는 표현들이 주위 토론자와 거기에 있던 몇 원로들(박이문 교수를 포함)의 의심을 샀다. 질문이 이어졌다. '북한 슬래쉬 북핵'이란 표현은 북핵을 인정하는 것이냐, (북한과의 관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놔둘 수 있느냐 등.
최장집 교수의 답변은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 평이한 것들이었는데도, 그토록 평범하고 평이해서 단박에 이해되는 말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이 반복해서 던져졌다. 말하자면, 북핵은 북한의 존립문제와 링크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등을 상대하는 대외적 의미에서) 북한과 북핵을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최장집 교수의 대답, 이러면 다시 질문) 그렇다면 당신은 북핵을 인정하고 있는가. 북핵이 있다/없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북핵은, 북한의 존립을 인정하면 피할 수 있는 문제다. (라고 최장집 교수 다시 대답. 그럼 또 빙딱같은 질문) 북핵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인가. (이런 찐따 질문에도 다시 최장집 답변)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너무도 간단하게 피할 방법(북한의 존립 인정)이 있다. 그런데 이 간단한 방법을 미국은 시도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측보다는 미국이 오히려 북핵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코메디 쇼같은 일련의 이런 우문현답 씨리즈를 보면서, 나는 그 뒤 이어질, 북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 그대로 놔둘 것이냐,란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북의 인권 문제라면, 나도 '빨리 바뀌어야하는데'편 중 하나였다. 그의 대답은, 역시,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 평이한 것, 그것은 초음속으로 날아가 나의 의식의 허영,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의 의식의 허영을 꿰부수고 진리에 꽂혔다; 정치는 매우 다이나믹한 것이다. 인권문제가 있다는 판단(우월의식) 하에 어떠한 개입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그 체재 안에서는 어쨌든 인위적이며, 어떠하든 위험하다.
하하하,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의 진리는 아른아른 머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쪼그리고 잘 보면 알 수 있는 땅바닥에 있음을...
북한이 인권문제 심각하다고 말하는 집단 치고 인권문제 없는 집단 있는가. 뭐 묻은 것들이 뭐 묻은 거 나무란다고. 하물며 북한의 인권문제는 복합적이다. 바로 손가락질하는 그 놈들 때문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씨가 대단한 소설가라는 건 따로 말을 안 들어도 알만하겠는데, 유종호 평론가왈, 오에 겐자부로씨가 20대때 싸르트르와 대담을 했다고. 역시 될 사람은 떡잎부터 다른건지, 세상에 그런 20대가 있어도 되는건가. 나는 서른중반이 되어도 조느라고 '구토'를 다 읽어낼 수 없는데. 그런데 그런 20대와 노벨문학상의 그 사람은 순진하고도 겸손하고도 착한 아이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책이라면, 제목때문에 읽었던 '性的인간'이 전부인 나는 정말 그이 앞에서 다 시들어빠진 시금치쪼가리처럼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발표가 있던 <인간가치와 정치변화>를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것은 아니다. 10시반 시작인데, 규민이 데려다주고 집에 온 시각이 10시15분인것을 세종문화회관까지 15분만에 무슨 수로 가나. 2시 <문학과 보편적 인간가치>를 들으러 갔더니, 박이문교수, 오에 겐자부로씨가 앞줄에 앉아있었었다. 발제문책자를 사서 뒤늦게 오에 겐자부로씨의 발표를 읽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와 함께 발표를 했던 사람은 김우창이란 평론가였는데, 이 사람 무지 쪽팔렸었겠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글은, 짧고도, 읽기 쉽고도, 노작가의 평화에의 절절한 호소가 가슴 찌릿찌릿 하였다. 반해, 김우창씨 글은 뭔 소린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주술이 하여간에 무지하게 길었다.
오에 겐자부로씨는 자신이 쓰고 있는 지금의 소설에서부터 글을 시작하였다. 아마 이것이 자기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일 것이라면서. 자기 생애 마지막 소설일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쓰는 작가의 느낌은 어떠한 걸까. 김윤식씨였나, 다른 사람이었나 아무튼 누가 그러길, 오에 겐자부로씨가 이 짧은 일정에서도 호텔에서 원고지를 놓고 글을 수정하고 있더라고.
박이문교수와 오에 겐자부로선생이 앞줄에 앉고 그 뒷줄에 내가 앉아 들은 토론회는 <문학과 보편적 인간가치>였다. 르 클레지오, 유종호, 루이스 세풀베다, 황석영씨가 주제 발표를, 김인환(평론가라함), 이인성(소설가라함)이 토론자로 나왔다. 사회자는 김화영 교수. 김화영교수는 여전히 한국어를 불어처럼 발음한다. '뒤에' 같은 단어는 특히 그렇다. 입술을 너무 앞으로 내밀어서 그런 거 같다. 생글생글 웃으며 간간히 농담을 하는 모습이 지금 이 토론회가 무척이나 즐거운 듯. 김화영교수는 그럴 양반이다. 소설가들 사이에서 문학을 얘기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평생 소년처럼 행복해하며 문학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했을 그 양반이 순간 가슴 뻐근하게 부러웠다.
보편적 인간가치,라니 뭘 갖다 대도 다 그럴듯할 포괄적인 주제라, 발표문들이 다 예수님 부처님말씀처럼 지루하게 옳은 소리들 뿐이었다. <인간가치와 정치변화>도 포괄적 주제이긴 마찬가지인데, 오에 겐자부로씨는 그토록 감동적인 발표문을 쓰셨건만.
이인성씨는 생긴 것도 꼭 멸치같아 염승주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말투도 염승주랑 비슷하였다. 툭툭 시비조로 던지는 말투, 약간 옆으로 꼬나보면서. 이런 식의 형식위주의, 딱딱한 토론회는 정말 재미없다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자고. (유종호 평론가 빼고) 죄다 유명한 소설가이시니 각자 글 쓰는 얘기 좀 해달라고. 옳거니.
김화영교수는 이인성씨의 이런 지적에도 싱글벙글이다. 자기가 준비모임에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단다.
그 이후로 나온 얘기들이 실제로 재미있었다. 르 클레지오씨는 마르고 키가 크고 눈매가 깊은데다가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라 여자들로부터 인기만방일 타입이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미래소년 코난 친구, 판초처럼 생겼다.
오늘은 여기까지, 규민을 데릴러 가야하므로.
이 글은 내일아침이면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나, 일기장에 들르듯이...
지금은 와인을 삼분의 이 병 마시고 난 후다.(Thanx, koo)
얼음을 잔뜩 쳐넣고 마셨건만, 11.5%의 알콜이 날 알딸딸하게 만들었다.
비웃음을 당할 지 모르는데도 떠들어댈 수 있게.
상대는 35도가 되는 진도 홍주를 마셨다.(이것도 Thank you, koo)
고로 나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생활고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나는 생활고에 덜 시달린다. ?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편견이다.
나는 매일 8시 반쯤 되면 극도로 피곤한 생활인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술을 마시면 다시 에너지를 회복한다.)
내가 먼저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꺼냈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가라타니 고진은 요즘 우리 집 안에 히어로이다.
뭐, 히어로까지야..
내가 가라타니 고진을 처음 읽은 건 녹색평론에서다.
녹색평론에 짧게 실린 그의 글은 선거와 제비뽑기에 관한 것이었다.
요는, 선거는 결국 비민주적이고, 제비뽑기가 대안이다,였다.
나는 제비뽑기니 각종 추첨이니 하는 것들에 죽어라고 운이 없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처음엔 생뚱맞다는 기분으로 그 글을 읽었다가 그의 글에 완전히 넘어가서, 맞어, 선거 다 없애고 이젠 제비뽑기 해야돼,하고 결론을 내렸었다.(430 보선을 보라)
그 글이 나에게 무척 즐거웠기에 당시, 오늘밤 진도 홍주를 마셨던 상대에게 제비뽑기 얘기를 꺼냈다가 본론 얘기도 채 꺼내보기 전에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의 글 얘기만 상대로부터 진탕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가 문학동네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을 재미있게 읽은 후 였다.
얼마 전 나는 그 '근대문학의 종말'을 너무도 흥미있게 읽었다.
요는, 문학이란 살아있(어야한)다,는 거다(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문학은 내적지향을 잃고 타인지향을 사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에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그러나 결국 문학이란 형식을 잃었다. 인도의 떠오르는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 그만두고 댐건설반대운동가가 되었다. 가라나티 고진은 그런 그녀를 두고 '진짜' 문학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글을 이렇게 정리하면 누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그글을 읽어보아야겠다.)
하여간에 나는 제비뽑기에 이어, 근대문학의 종말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윤리21>이란 책이 딱 보였다.
(그 전에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란 책도 보였지만.)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을 읽어보지 그래?하고 말을 건넸다, 오늘밤.
왜?하고 그가 되물었다.
음, 당신이 이야기하는 윤리와 그가 이야기하는 윤리가 어쩐지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내 가방이 어디 있더라...하고 갑자기 그는 가방을 찾았다.
그는 가방을 찾으러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다른 방까지 갔다.
왜, 지금 가방을?
가방을 가지고 돌아온 그가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꺼낸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었다.
이 순간은, 누군가가 키스 자렛의 바하 연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끝내자마자 상대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자렛이 바하를 연주한 씨디를 꺼냈다는 순간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클로즈업, 슬로우모션.
이 감격적 순간 이후로 나는 감정이 과장되어버렸다.
나로서도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여과없이 마구 떠들어대었다.
스스로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란, 자본주의를 씹으면서도 막상 대안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나의 대안은 누가 놀고있네,하고 뱉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를 유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 일상에 촘촘히 뿌리내려진 거미줄과 같은 촉수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가라타니 고진처럼 '칸트'와 '들뢰즈'를 쉴새없이 인용할 수는 없는 것이라도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마음은 일맥상통한다. (그렇지않은가)
음...
7시 반에 눈을 떴지만, 잠결에도 누군가의 배를 찾는 규민(규민은 누군가의 배를 가끔 만지작 거려야 잘 잠) 때문에 꼼짝않고 그냥 누워만 있었다.
한 8시 반 쯤 되었을까. 삼십분 쯤 더 있다가 규민을 깨우자,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규민이 선생님이 규민이 왜 안오냐고 한 전화였다. 시계를 보니 10시20분이었다.
나는 요즘 사실 겁이 난다고 해야할까, 두려워 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귀찮아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하여간에 총체적 슬럼프이다.
벼락을 맞듯 나란 인간을 밑바닥부터 바꾸고 야심차게 나의 새 일을 계획한 것이 불과 한두어달 전이다. 나는 이 새 일에 그야말로 인생을 걸었다. 그만큼 진지하고, 진지하다.
이것이 꺾이면 나는 갈 데가 없다. (정말 산골로 들어가야 할것이다.)
하늘을 채운 의지 뿐만 아니라, 바랐던 바를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 더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나는 늘상 내가 바라는 바는 서너번 째 후의 순서로 돌려놓는 것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이제보니 그건 나의 약은 계산이었던가 보다.
쓰다보니(새 일이 뭔지 이미 다들 알고 있을테니 괜히 돌려말하지 말고 소설 쓰고 있다고 밝히면서, 무지 쪽팔림), 숨이 턱 막히는 데가 나온다. 이 부분은 내가 더 물고 늘어져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게 몹시도 귀찮다. 그냥 거기서 슬쩍 돌아 나가버렸다. 그러고나니 한글 2004를 열기도 꺼려진다. 안 열고 있다. 이게 어디서 생겨난 못된 버릇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원래 그 모양이었다. 무척 집중하고 있다가도 한 순간 몹시 귀찮다고 느낀다. 그러면 그냥 살짝 도망나온다. 아예 손을 놓으면 티가 나니까, 티 나지 않도록 비슷한 모양새를 만들어놓고서는 그 고비언덕을 살짝 돌아나오는 것이다. 공부할때도 그랬다.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다행히 공부나 일은 그런 식이어도 상관없었다. 더 생각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원래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끝까지 가지 않아도 대충 다 돌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같은 논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평소 대충 돌아가는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말을 곧잘 하였다. 옳은 것이 옳은 대로 몫을 찾지 못해도 대충 돌아가는 세상, 원래는 옳은 것은 결국 옳은 몫을 찾고, 나쁜 것은 벌을 받아야하는 건데, 언제까지 기다리며 살고있어도 옳은 거나 나쁜 거나 지지구리 제자리이니... 그냥 제자리이기만 한가, 다양한 방식으로 돌연변이하며 다양한 버전의 제자리이다. 점입가경의 제자리이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상에는, 귀찮은 순간에도 살짝 돌아가버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 몇몇 일들 덕분으로 진짜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가능한한 그 일을 떠맡지 않으려고 도망가지만, 도망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이 할 수 없이 떠맡아 세상을 돌리고 있다. 나머지는 다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기생의 습관을, 이게 꺾이면 갈 데가 없다고 하는 절대절명의 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몰두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없어서 그런가, 생각해봤다.
한겨레가 17주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 동안 매일마다 제2의 창간 어쩌구하는 걸 봐왔었는데, 어제 신문을 들추니 겹겹이 신문이 한사발 들어있고 묵직한 게, 아 오늘 얘네 기념일이구나, 싶었다.
누가 그랬더라, 홍세화씨가 그랬나, 한겨레 보는 사람들은 민감하다고. 조선/동아/중앙일보는 뭐라 지랄을 해도 독자들이 그러려니 하지만, 한겨레 보는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하고 신문을 끊기도 한다고. 그럴 것 같다. 나도 김규항씨 인터뷰 나왔을때, 참다못해 "이런 식이라면 보지 않는 게 낫겠다"라고 한겨레에 전화해서 성질을 부렸었다.
하지만, 한달에 만이천원이 어디냐, 이 돈이라도 아끼기 위해 신문을 끊자, 하는 와중에도 끊지 못했던 건, 한겨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종이로 된 신문에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 책을 들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역시 신문이 최고다. 화장실에 앉아서 보는 신문의 맛은, 어제의 나를 배설하고, 오늘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물리적, 정신적, 최고의 카타르시스 행위인 것이다. 어린 규민도 이미 그것을 알고 화장실에 앉아있으면 옆에 있는 신문부터 허벅지 위에 펼쳐놓는다. (그러면서 만화를 찾는다.)
묵직한 17주년 기념 신문 앞에서 나도 한겨레를 나름 축하해주는 마음을 가졌다. 한겨레가 아니면 사실 볼 신문이 없다. 우리 엄마네서 가끔 보는 동아일보는 매번 제 일면부터 숨을 콱 틀어놓는다. 오늘은 또 뭐래더라, 미국 압박하는 게 무슨 유행인가,라는 게 그 신문 수석논설의 칼럼 제목이었다. 몇달 전, 고등학생 대상의 쉽게 설명하는 시사문제 어쩌구 하는 기사에서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을 이야기하며, 그야말로 농산물 내주는 대신 핸드폰 더 많이 잘 팔아 자유주의 선진국 되는 훌륭한 경제협정,이란 논조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소릴 하고 있길래, 이걸 보는 고등학생들은 정말 어떤 생각을 할까, 잠시 생각했다가 한숨이 땅이 꺼지도록 나오는 바람에 엄마네 구들장이 금 갔던 적이 있었다. 고대생들이 이건희 명예철학박사수여에 반대집회 했다고, 폭력이 어떻고 하는 건 또 어떻고... 아무튼, 한겨레는 17주년을 맞아 대단한 결심을 한 듯 보인다. 인쇄체도 바꾸고, 구성도 바꾸고, 로고도 바꿀 것이란다. 미래에는 우주로 휴가여행을 가고, 설겆이 청소 로봇이 집안일은 도맡고,하는 알 수 없는 기사가 들어있는 경제엔진 업그레이드 섹션 때문에 이런 결연한 한겨레의 의지가 좀 못미덥지만... 그래도 그간 재미있었던 한겨레만의 기사들을 생각해보며...
이런 영화가 나왔다지. 나는 이게 킨제이식 인터뷰 다큐 영화였으면 하고 바랬는데,
그거 비슷한 형식이 들어가있기도 하지만 극영화라고.. (리암니슨과 로라리니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확 보기싫어진 이유는 뭘까.)
그래도 감독의 말 한 마디에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쫌 들었다.(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인간의 성적취향은 너무도 다양해서 그에 대해서는 드물다/보편적이다 라고 해야지 정상/비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최초로 말한 사람이 킨제이였다."라고..)
아무튼간에 하려던 이야기는 딴 게 아니라, 한겨레에서 이 영화 소개기사를 보던 도중 기사 속 한 문장, ....킨제이(리암니슨)는... 헌신적인 아내(로라리니) 덕분에 성적으로 눈을 떴다..
우하하하, 너무 웃기지 않아? (나만 웃긴가.) 이게 웃긴 건 나의 선입견, 고정관념때문일 수 있겠지만, 문장 앞뒤가 너무 안어울리지 않는가?
헌신적 아내 덕분에// 성적으로 눈을 떴다니?? 헌신적으로 무얼 했길래?
헌신적이라고 하지말고, 솔직한 아내 덕분에, 혹은 꾸준한 아내 덕분에, 혹은 노련한 아내 덕분에,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여자가 리드하는 섹스에 대해 공포감이 있는걸까, 기자는.
왜 헌신이라고 했을까. 영화에서는 그런가. 어떻길래 그런가.
결국 영화를 봐야겠군. 흠
규민이 학교에서 이런 걸 만들어왔다. 규민은 뭣도 모른채 마냥 오리고 붙이기에 반짝 재미있어하고 고 틈을 타서 선생은 축어버이날, 엄마사랑해요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규민이 엄마얼굴을 가운데에 그려넣는 것으로 내 인생 첫 어버이로서의 카네이션 화룡점정이 찍혀졌다.
나는 이걸 달고 시장을 보러 갔다.

시장에서 내 엄마아빠께 내가 드릴 꽃바구니를 하나 샀다. 천편일률의 꽃바구니는 요럴때 대목잡겠다는 똑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날이 있어 엄마에게 꽃을 선물한다. 마음같아선 봄에는 매일매일 엄마에게 꽃을 주고싶다. 개나리가 제일 처음 핀 날 개나리 한가지를, 살구꽃이 화사해지기 시작하면 살구꽃 한가지를, 라일락향기가 진할 땐 라일락 한무더기를, 배꽃이 솜덩이같은 날엔 배꽃 한무더기를, 엄마, 이꽃 좀 봐.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마음. 그 사람이 그 꽃을 받고 활짝 웃으면 그걸로 나도 기쁜 마음. 어버이날 행사치례로 숱하게 카네이션을 만들고 살때는 없던 마음이 그래도 몇 십년이 지나 이런 진심이 우러났으니, 자식 키우는 게 헛짓만은 아닌가보군.
꽃바구니는 딱 고만고만한 모양새인것이, 내 마음이 아무리 진심이어도 얼마짜리라는 딱지를 붙히고 있는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이래저래 맞추어 산 티가 뚝뚝 떨어진다.
뭐, 어쨌거나, 내 진심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당신들이 눈에 넣어도 안 아퍼할 손녀딸이 고른 것인데..
정말 엄마는 잠시라도 기분이 좋았을까.
아빠는 손녀딸만 쳐다보다가 테레비만 쳐다보다가 했다.
우리가 언제 다정한 부녀 흉내라도 내봤던가. 뭐, 새삼.
....
가까이지내던 동네양반의 아들 며느리가 애를 낳았다는 소식.
어, 그래?
....
이거 얼마냐, 한 오천원 하냐?..... 문득 날 쳐다보며 아빠가 던진 말....
(물론 돈으로 선물따지겠다는 심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겉치례는 괜히 하지말고 꼼꼼히 절약하고 근검하며 필요할때 잘 쓰라,라는 심오한 경제철학을 담은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딸래미 아끼고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이란 것 알고 있다. 딸래미가 자신들을 사랑해서 하는 짓을 보지 못할 뿐이지.)
저녁을 먹는 도중 아빠에게 꽃바구니가 배달돼왔다. 사무실 직원들이 보낸 거라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벼라별 꽃들이 양팔을 벌려 안아도 모자를 지경으로 흐드러지게 꽂혀있으면서도 교양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척 보기에도 무지하게 비쌀 것 같았다.
아, 초라한 내 꽃바구니...
아니, 어버이날에 자기네들이 왜 꽃을 보내? 고용주의 날도 아니고....
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동네아저씨 한 분이 아들래미를 앞세워 들어왔다.
나는 거기서 순간 주눅이 들었다.
화려한 꽃바구니에 한차례 꺾여있던 기운이, 울고 싶던 차에 뺨맞았다 싶게, 본격적으로 수그러들었다.
그래, 이 장면이구나.
우리 아빠가 원하는 것은.
아들이 앞서있는 것.
그가 칠푼이 팔띡이같은 놈이라도, 그가 앞서 있고 아버지가 뒤에 서있는 것.
칠푼이 팔띡이 같은 놈이 내놓는 게 천원 딱지 붙은 보잘 것 없는 것이래도, 이것이 우리 아들놈이 어버이날이라고 사온 것이라며, 어버이날에 마음껏 어버이됨과 자식됨을 드러내놓은 것.
父子양반이 잠깐 볼일을 마치고 일어났을때, 아빠는 배웅차 뒤를 따르며, 지나가는 말로 덧붙였다. 누구네 며느리 오늘 아들낳았다더라고.
누가 나에게 뭐라했는가.
근데 나는 또다시 모든 전후맥락을 혼자 꿰었다.
그래서 나에게 뭐 낳았는지 말을 안 했었구나. 그게 부러워서, 누구네 집의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든든한 저 끈이 내심 부러워 그 말을 편히 하지 못했었구나.
새로 낳은 아이가 아들이냐,딸이냐가 나에겐 별 관심거리가 아니어서 묻지 않았던 것이 저 양반에겐 가슴에 사묻힌 상처이어서 말을 못한 것이었구나.
엄마아빠 집에서 내 자리가 아리송한 기분은 참 오랜만이다.
동생이 없어지고나서, 유일한 자식으로 우뚝했던 내 자리는 결정적 순간에 여전히 아리까리한 것이었다.
어버이날에 시댁에 가지않고 친정부모님들과 밥먹겠다 했다고 아빠는 마음이 편치 않다는 말을 엄마를 통해 나에게 전했다.
얼씨구, 내 부모가 누군데? 어버이날이 시부모날인가? 여자는 결혼하면 부모가 바뀐다는 것인가?
날 애써 키워준 엄마가 고맙고 그녀를 사랑한다.
어버이날에 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을 선물하고 즐겁게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참 소박한 소망이네.
이것도 딸래미라 하기 어렵다니, 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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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치..르 끌레지오 미남이지.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