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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인권, 해적 잡으러간 사람들, 그리고 찌질한 생각들...

평화, 인권...

우웅 둘 다 아직은 너무 낯선 개념들이다.

우연치 않게 국가 간의 물리적 대치의 현장에 있었던 경험 탓인지 특히 군축을 통한 평화의 달성이란 건 환상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 "짜릿한 " 기억은 최소한 지역 내에서 집단안보체제가 구축되지 않는 한 "내 한몸 가릴 수 있는 능력" 외엔 믿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해줬고 남북한 평화체제 구축이 남한 군사력의 재구성이 아닌 군축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게 해줬다. 주변국의 군축이 전제되지 않은 일방적인 군축은 정말 극렬반대(!)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후 남북한 군축 논리는 어떤 측면에선 "주적론"과 같은 차원의 인식이기도 하다. 북한과의 갈등이 저하되면 군축을 해도 된다는 논리는 북한이 "주된 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는 "주된 적"이나 "피로 맺은 절친" 뭐 이런 건 없고 그냥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이 아닌가... 공동안보나 집단안보체제가 부재한 한국의 상황에선 더욱 더..)

 

어찌됐건 시간이 되는대로 찬찬히 공부해보고 싶은 주제이긴 한데... 뭐 언젠가는 시간이 나겠지...

소말리아로 전투함이 떠난다는 뉴스를 보며 저 비싼 물건들과 저 엄청난 공격력을 고작 해적 잡는 데 사용하는 게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말리아 근해에 모여있는 각 국의 전투함들은 억지를 위해 구축된 군사력이 "놀고 있지는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시위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저강도 전투를 위한 별도의 대형함을 건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

 

무슨 무기체계를 도입할 때마다 가공할, 최첨단, 최신예, 입체 전력이 어쩌고 하는 호들갑스러운 보도를 볼 수 있다. 그 잘난 가공할, 최첨단, 최신예, 입체 전력이 "국가의 존엄"을 지켜줄 것이라고 가슴 뭉클해 하는 사람들도 봤고... 사실 군사력이 강하다고 해서 "국가의 존엄"이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생존은 지킬 수 있는 것 같다. "억지"는 상대방의 존재 가능성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보일 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의 문제이고 억지 전력의 보유는 공포의 균형을 통해 평화 (정확히는 "전쟁이 멈춰진 상태")를 지속시키는 효험이 있다고 할 것이니..

 

문제는 이 짓거리가 정말로 멍청한 짓이라는 거다. 상대방을 "완전히 보내버릴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우리는 통상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을 확보해야 하고 상대방은 그 많은 전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력을 또 확보해야 하는 멍청한 짓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엄청난 돈과 시간과 인력이 투입된다.

 

억지를 위해 구축된 전력은 그 강력한 공격력 때문에 더이상 "국가간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전력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수천억을 호가하며 수십, 수백 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에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전투함들이 "기관총과 대전차로켓으로 무장한 보트"와 싸울 수 있는  "비슷한 무장을 갖춘 보트와 헬기를 운반하기 위해" 대양을 가로지르거나 (이스라엘이 하는 것처럼) 수백억을 호가하는 전투기가 한발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하는 무기를 이용해 민간인이 거주하는 가옥을 파괴하는 일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_-;;;

 

현실적으로 억지 전력을 구축하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장은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을 그만 둘 방법은 별로 없지만 남북한 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그 평화체제 구축의 매개자 구실을 하고 있는(혹은 했었던) 6자회담의 틀을 지역 내 집단안보체제 논의의 장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혹은 러샤와 미국을 제외한 4자만이라도 집단안보체제의 틀을 유지할 수 있다면 당사국들의 군비 지출 총액 자체는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이것도 본질적으로는 "전쟁이 멈춰진 상태"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현실주의 국제정치학만을 공부한 나로서는 집단 안보, 공동 안보 같은 개념밖에 없어서 "평화"란 것이 대관절 무엇인지 어떻게 달성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ㅜ..ㅜ - 헛짓거리에 들어가는 돈이라도 좀 줄여보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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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교사... 일벌백계의 유혹을 넘어서...

작년에 초등생 상해사건으로 해임됐던 교사가 재심을 거쳐 복직되었다고 한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성토하는 댓글이 가득하더만...

판단여지에 속하는 징계처분 등은 재량의 자유도가 높은데다 개별 징계사유 뿐 아니라 그간의 근무성적, 상벌 기록, 뭐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되고 당사자의 소청 심사 시의 비굴모드 전환 효과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감경될 여지가 큰 것이 사실이다. 사실 정직 3개월이 그리 낮은 징계도 아니고 근대적인 징계나 형벌의 목적이 복수나 징벌보다는 교화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소청심사위원회의 감경이 전혀 불합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개인들을 (때로는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배제시켜 나가고 이를 통해 잠재적 위험 인자들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이다. 최근 일고 있는 사형제를 둘러싼 논란이나 "알바"와 "좌빨"이 난무하는 인터넷 게시판, 정치적 공방들이 그러하다. 이처럼 도덕적 비난과 "갈굼을 위한 갈굼"을 통해 상대방이 가진 인격이나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산을 부식시킴으로써 상대방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전술이 난무하는 사회적 균열의 장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떠한 사회적 균열도 적절히 해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이 된 이래로 이른바 "체벌"이라는 것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내가 졸업한 뒤에는 벌점 제도의 도입, 뭐 기타 등등 해서 온갖 제도적 혁신을 시도되어 왔다. 문제는 그 엄청난 논쟁을 거듭한 뒤에도 찬반을 둘러싼 원론적인 이야기들만이 오갔을 뿐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인 피해자를 훈계한다며 목봉 등으로 폭행하여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힌 교사가 상해죄로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이 90년대 초반,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초등학교 교사가 폭력행위 등 처벌법으로 입건되어 구속된 것이 -기소되었는지는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이다. 이처럼 최종적인 권리구제 수단인 사법의 영역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권리구제가 진행되었을 뿐 사회적인 규범이나 교사 등 관계인들이 준용할 만한 규칙이나 제도 혹은 관행이 형성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체벌을 둘러싼 문제는 "자질 없는 교사" 개개인의 문제로 남아 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자질 있는" 교사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그 "자질"의 범주는 서로 상이한데다 서로 대립적이기까지 하니..)

 

우리가 제도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은 인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생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질 없는" 개별 교사들을 걸러내는 작업은 사전적(事前的)으로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언제나 불행이 찾아온 뒤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법과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법과 제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인들의 협상과 "타협"이 필요하다.  "체벌"을 둘러싼 논란은 상당히 첨예하였고 "전면금지"와 "알아서 할테니 믿고 맡기라"는 입장 대립 사이에서 "불행한 일"은 거의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중요한 일은 또다시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사후적으로 "너 너 옷벗고 사과해라", "저 인간을 완전히 보내버려야 된다."는 식의 문제해결은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그 교사의 폭력행위를 그닥 지지하는 마음은 없지만 그 인간을 "완전히 보내버린다"한들 뭐가 어찌 달라지랴... 많이 놀랐을테니 앞으론 안그러겠지.. ㅉㅉ (행위규범이 제도화되지 않은 지금같은 형편에서는 그 인간이 교화되었다고 추정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교사들도 "보고 놀랐겠지"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고.. 그 인간을 파면, 적극적인 수사를 통한 형사처벌, 적극적인 손해배상 청구나 구상 등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완전히 보내버린다"고 한들 별반 효능이 없는 이유가 요거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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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1. 경기도당의 당직자분...

진보신당 경기도당에서 당직자의 근로 고용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구)민주노동당 때부터 간간이 터져 나왔던 진보정당의 부당노동행위와 관련된 문제제기는 아니었음 좋겠다. 만약 그런 문제라면 당 내에서 처리하기 보다는 근로감독관 등을 통해 해결할 것을 권하고 싶고... 법률구조공단의 조력을 받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학생 때 학원 강사를 하다 몇번 체불임금 문제로 다툼을 별어 봤던 내 경험으로는 부당노동행위를 하는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에 타협과 협상이 존재할 만한 여지는 별로 없다. 근원적으로 사용자에 비해 노동자는 약자이고 양자 사이에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개별적인 협상과 타협은 노동자의 일방적인 불이익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2. 근로계약서의 문제

이것 저것 튀어나오는 이야기들로는 "노동부의 전반적인 근로 감독이 필요한 사업장"에 가까워 보인다. -_-;;

(특히 상습적인 근로계약서의 미작성이 그러하다)

이놈의 정당을 계속 지지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스럽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광범위하다면 약간 문제가 있다. "노동관계법 전반에 대한 무지"에 따른 것이라면 그네들의 전문성에 -"노동자의 노동 기본권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는 정강정책을 채택한 진보신당의 주요 당직자들이 노동 기본권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노동관계법에 대해  "신림동 순대타운 식당 주인장"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다면 이건 뭐 병..-, 알고도 그랬다면 진정성에 물음표를 붙여줄 밖에... 아니면 "자본의 악법" 전반을 부정하겠다는 의도였나... ㅎㅎ 다른 어떤 계약관계보다도 근로 계약관계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당사자를 극심하게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진정 모를까...  

 

p.s.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는 건 노동자가 근로 고용관계 자체를 소명할 원천을 없애고 어떠한 부당노동행위도 가능하게 만들고 "사용자 책임"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극히 제한된 권한을 가진 특별사법경찰관인 근로감독관에게 노동자가 행정, 사법적 개입을 요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반이 되는 것이 근로계약서이고 당신네들이 성토해 마지않는 노동 관계법령에서도 사용자에게 보존의무를 과할 만큼 중요한 서류이다. 사용자들이 편의적으로 무슨 은전을 베푸는 것마냥 작성해주고 싶으면 작성해주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진보신당이 세상을 그리 으리으리하게 바꿔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정당과는 달리 "근로계약서"는 작성하는 정당이 되었으면 좋겠을 뿐이다. 당직자의 근로계약서 작성하기,  "세상을 바꾸는" 진보정당들에게 기대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그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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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만들기...

요즘 합참의장이나 국방부 장관의 언급을 보면 "링 만들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그닥 돋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군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발생 가능한 action과 reaction 사이에서 군인들끼리 서로의 행동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서 서로 납득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국면을 조성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육상기지에서 적대행위가 있을 경우 적대행위를 거부하되 응징이나 보복은 하지 않겠다는 요지를 담은 장관의 발언은 "군인들의 상식"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군사적 목표와 수단을 명확히 함으로써 국면의 급격한 전환을 막기 위한 "예방 안보적" 활동이고 매우 필요한 일이다. (육상기지에서 해안포나 미사일을 발사하면 해당 발사지점을 공격하겠다는 것은 사실 일반적인 대응사격이지 응징이나 보복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부디 통상적인 인간세계에서 군인들의 상식과 군인들의 룰이 "유효화"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곡히 바랄 뿐이다.



우리가 정치와 외교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극도로 단순한 논리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물리력을 이용한 의사소통이 매우 비효율적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군령권자에게 "어찌 싸울 것이냐"를 묻는 장면을 보며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제정치의 영역에서 군사력을 이용한 억지(deterrence)와 무력 투사(power projection)가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발생하는 군사적 충돌 자체가 근대적 의미의 정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국제정치학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총성과 함께 국가간의 정치는 사라지며 "배치되는 이해세력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배제를 통한 이익 극대화의 시도"라는 군사적 충돌의 속성상 군사적 충돌은 일시적으로나마 정치의 중단을 의미하고  이후에 다시 정치의 장으로 복귀하기도,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억제하기도 지극히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에서와 같이 군사력이 억지와 무력투사를 목적으로 설계되어 "보복능력의 과잉문제"에 직면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국회의원들은 군령권자에게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묻기에 앞서 남북관계를 "어떻게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복귀시킬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자문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는 것은 어떻든 정치의 영역에서 남북한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은 적어도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납득하기 쉽지 않다. 정치활동의 종료와 군사적 대응을 고민해야 할만큼 북한을 둘러싼 국제관계가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북한은 정치활동과 실제적 군사활동이 병행가능하다는,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정치군사관을 이제는 폐기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북한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중요 행위자들은 물론, 이제는 북한 스스로도 상당한 수준 보복능력의 과잉문제에 직면해 있는 현실에서 더이상 교전행위를 정치의 연장으로 인식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근본적으로 실제적인 군사활동은 그 속성상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상대방의 배제를 추구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행위자들이 보복능력의 과잉문제에 직면한 현대에는 그 배제의 추구가 서로에게 극도로 치명적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인 군사활동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정치활동의 종료를 의미할 뿐 정치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정치적 판단을 통해 상대방이 알아서 군사적 대응을 자제하거나 정치적 급부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기에는 쌍방이 보유한 무력수단이 너무나 치명적인데다 북한이 실제적 군사활동을 통해 획득하려는 정치적 목표마저 불명확한 지금 "정치의 연장"으로서 실제적 군사활동이 기능할 것이라는 북한의 인식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극히 무책임한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은 무력투사와 억지로 대표되는 군사력의 현대적 활용이 가능할 만큼 성숙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지금 북한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은 현대 국제정치에서 볼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의 "세련된 사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인식하길 바랄 뿐이다.

 

P.S. 

중요한 것은 정치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요즘이다. 정치가 기본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 이해 관계의 조정 과정"을 거쳐 권력적으로 배분하는 과정이라고 할 때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없을 때 사실 우리는 실력을 통해 자원배분을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영화 "불을 찾아서"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연출하게 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의 과잉은 정치의 실종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예외적이고 최종적인 문제해결 수단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정치권력의 통제하에 있는 물리력의 동원 -고권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을 띠는 사법부의 법의 해석과 선언을 포함해서- 이 부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 해결 방식은 국내정치에서건 국제정치에서건 지극히 예외적이고 불가피한 최종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수단이 동원된다는 점에서 모든 이해관계를 사활적 이해관계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해관계의 첨예화는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원된 수단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무력화로 이어져 마침내 이해관계의 대립을 해결할 수단 자체가 사라지게 만든다.

 

국내정치에서건 국제정치에서건 너무 쉽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통상적인 정치 과정의 기능이 무력화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삶을 많은 부분 불안정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국방부장관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보며 정치과정을 통한 해결이 필요한 문제를 너무 쉽게, 경찰행정의 영역으로, 사법부의 영역으로, 군사활동의 영역으로 미루는 사이 어쩌면 우리의 정치체제는 스스로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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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실현과 발전전략의 필요성

경제가 어렵다 보니 -철든 이래 경제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긴 하다만- 부쩍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느낌이다. 당장 대통령부터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이야기로 당선되사 그 구체적 방안으로 부동산 경기 부양이라는 "난국 타개의 전략"을 들고 나오셨던 분이 아닌가 말이다.



진보신당에선 200조 중얼중얼이라는 경기 부양책+복지국가를, 장하준은 대타협론 + 복지국가 + 적어도 내가 보기엔 수출주도 전략에 가까운 선별적 산업정책을, 김수행은 복지국가에 기반한 내수 기반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우석훈은 국가와 시장의 중간자적 성격을 갖는 제3섹터의 형성 -半(혹은 안不)자본주의적인 공간으로서의 농촌 공동체나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생 때 겉핥기로 공부한 -대충 한학기 배워서 뭘 알겠으리오..-_-;- 정치경제 -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political economy-의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ISI전략의 잔영과 서비스 산업이 가지는 한계점 때문에 내수기반 경제 체제라는 것에 그닥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우석훈의 제3섹터란 것이 일종의 도피처 내지는 완충재 기능은 할 수 있으되 "모두 잘 먹고 잘 살게+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자본주의체제가 일반화된 경제체제 내에서 우석훈의 제3섹터라는 것은 부가적이고 보조적인 영역에 불과한데 제3섹터의 창이 열린다고 한들 국가와 시장으로 구성된 자본주의 체제 내의 경제가 활성화 되지 않는 한 굶어 죽어가고 있는 2, 30대는 농업과 수공업에 기반한 자급자족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외에 별 도리가 없을 뿐더러 과연 그 제3섹터가 지금 존재하는 이 많은 2, 30대 알바생과 프리터, NEET족을 수용할 능력이 있는지 다소간 의문스럽다.

 

진보신당의 200조 중얼중얼은 도대체 재원 마련을 어찌할 것인지 국채를 찍어 돌린다면 갚기는 어떻게 갚을 것인지 -국고채 발행해서 차기 정부에 부채를 넘겨주고 쌩까는 것 말고 썩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음 -_-;- 약간 난감하다.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사랑하는 진보신당의 선복지 후증세 방안에 대해 몇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적어도 학자들보다는  최소한 정당이 내놓는 정책이란 것이 적어도 그 정당 내에서는 현실화하겠다는 의욕이 충만하여 마침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란 것을 만들기 위해선 복지 국가를 욕망하는 정치세력의 조직화 -영세자영업자와 임노동자 계급의 권력자원 확보-가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더하여서 가용한 자원 자체를 증가시킬 방안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복지정책에 가용한 자원 자체를 증가시키기 위해 매우 낮은 조세부담률과 조세 형평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정책의 효능감을 제고하는 것도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겠지만 국민경제 자체의 자원량 자체를 증가시킬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이 없다면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도 지속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이 부재하다면 조세를 포함한 현재지출에 대한 저항이 극심해질 수밖에 없고 조세를 기반으로 하는 복지 국가의 실현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특히 선복지 후증세 방안의 경우 복지 정책 강화의 결과 사회적으로 가용한 자원이 실제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불과 수년내에 국민경제 전체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 명백하다. 복지 정책의 강화는 개개인이 짊어지고있는 이런 저런 부담을 국가로 전이하는 것이지 이를 통해서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이건 개인이건 변화에는 전환비용이 수반된다. 진보진영에서 추구하고 있는 복지 증진과 증세를 포함하는 많은 정책들은 실제로 많은 전환비용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고 OECD 회원국이자 국민소득이 2만불에 육박했던 한국의 복지제도가 이 모양 이 꼬라지인 요인 중 하나가 복지국가로의 전환 비용에 대한 두려움 -상당부분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추가적인 조세부담이 현재 생활 수준의 저하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신뢰의 확보가 필요하다.

 

진보신당의 계획대로 법인세의 증세와 부유세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특히 "조세부담의 귀착"과 관련된 효과를 고려한다면  계층 전반의 조세 부담률이 높아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 복지제도의 효능감에 상당한 주관적 차이가 존재할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진보진영의 뜬구름 잡는 얘기"라는 비난과 불신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복지 증진을 위한 정책 개발과 함께 어떻게 국민경제 전체의 가용자원을 증가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직관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구체화 해야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뱀발1.

위에서 지극히 허접한 방식으로 까대는 데 여념이 없었던 "난국의 해소책"들이 모두 무용하다는 생각은 아니다. 모두 나름대로 유효하고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하나 하나만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정치적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장하준이 이야기하는 대타협론 + 복지국가 + (제조업 중심의) 선별적 산업정책이 좀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석훈의 제3섹터나 김수행의 내수기반 확충 역시 경제구조의 다층화, 다변화를 통해 안정성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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