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편집 프로세스 문제

 

1) 기존 그린비의 노동 과정

 

그린비는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와 삶에 의미 있는 책을 내는 출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이런 좋은 책을 큰 오류 없이, 나름의 품질을 갖추고 내는 출판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린비 노동자들은 이렇게 좋은 책들을 실수 없이 만들기 위해 그간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물론 이것이 그린비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출판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많은 양의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야근도 해야 하고, 마감 때는 주말에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그린비는 편집, 디자인, 마케팅 등 기본적인 업무 외에 여타 일도 많다는 평을 듣는 출판사 중 하나입니다. 그린비 노동자들은 정기적으로 서평을 써야 했고, 그린비 블로그에 올라갈 글도 써야 했으며, 각종 강의를 준비하고 참석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여러 역량을 쌓은 것도, 많은 경우 즐거움을 느끼며 이런 일들을 해온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 모든 업무를 해내는 것이 힘겨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일들은, ‘부수적’이기는 했지만 하나의 업무였고, 당연히 강제성을 띠었으며, 회사의 평가 체계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지난 몇 년간 그린비에서는 편집자 1인당 ‘1년에 300쪽짜리 책 5권’을 출간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이 글은 ‘편집 프로세스 변경’을 설명하려는 글이기 때문에 주로 편집 업무에 한정해 사례를 제시할 것입니다). 편집자들은 이런 기본 업무와 방금 언급한 여러 업무들을 병행했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를 주어진 시간 내에 해내는 편집자는 많지 않았고, 몇몇 편집자는 작업 일정 맞추는 것을 버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대표이사께서는 가끔씩 ‘꼭 그 목표에 맞출 필요는 없다. 사람이 기준을 못 맞추면 그 기준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간략하게 제시한, 그동안 그린비 노동자들이 해온 업무입니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 일들을 문제없이 소화하기 위해 잦은 초과 근무를 강행해야 했습니다.

 

 

2) 편집 프로세스 변경?


노동 조건 변화의 계기

작은 노동 조건 하나부터 바꾸어 나가자는 뜻을 모아, 작년인 2012년 7월 그린비 노동조합(전국언론노조 그린비출판사분회)이 출범했습니다. 출범 전부터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사측이 <호소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요 필자가 계약 해지를 하는 일도 생겼고, 그 필자는 현재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분회가 할 수 있는 말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앞선 글들에서 이야기한 이유들 때문에 분회는 이 글에서 ‘편집 프로세스 변경’에 주안점을 둘 것이며, 지금 언급한 과정에 대해서는 이후 필요할 경우 분회 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

 

노동 조건 변화에 대한 사측의 근거

노조가 결성되기 얼마 전, 노동자들과 회사 사이에 ‘노동 시간’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이에 사측은 “노동자들이 야근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야근을 없애겠다”고 통보하면서 야근을 없앴습니다. 이것이 그 자체로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사측은 노동자들의 의견을 물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통보’ 식으로 ‘야근 금지’ 결정을 내렸습니다(앞선 글에서도 밝혔듯 사측은 노동 조건 문제들에 관해 통보로 일관하고 있고, 분회가 수차례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후 그린비 분회가 결성되었고, 얼마 뒤 사측은 편집 프로세스를 변경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회사가 변경된 편집 프로세스를 제시하면서 내놓은 사유는, 원고가 많이 쌓여 있고 수익 모델(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할 경우 다시 설명하겠습니다)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프로세스를 ‘합리화’해 책을 더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 편집 프로세스의 내용

사측이 처음 제시한 안은 ‘초교 하루 50쪽, 재교 하루 100쪽, 최종 OK교 없음’이었습니다. 이 과정으로 진행하면 ‘350쪽짜리 책을 3주에’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출판사 작업 과정의 특성이나 책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권의 책, 특히 주로 번역서이며 인문사회과학 서적인 그린비 책의 편집을 한 달이 못 되는 기간 안에 마치는 것은, 편집 작업을 오탈자 확인 정도로 한정해야만 ‘겨우’ 가능한 일입니다. 분회는 당연히 사측이 제시한 프로세스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측도 이 프로세스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이후 수정된 ‘편집 프로세스 변경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초교 하루 50쪽, 재교 하루 70쪽, 최종 OK교 하루 100쪽’입니다. 300쪽짜리 책이면 초교를 6일 만에, 재교를 4.5일 만에, OK교는 3일 만에 보는 일정입니다(그 외 세부적인 지침들이 있지만, 역시 분량 관계상 상세히 쓸 수는 없을 듯합니다). 처음 변경안보다 더 조건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여하튼 사측이 제시한 프로세스 변경안은 시간당 교정 보는 분량을 늘려서, 책 만드는 속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분회는 사측이 제시한 수정안이 여전히 실현하기 어려우며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고 판단했고, 수차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사측의 의지가 확고했고, 또 사측에서 계속해서 출판 시장 불황과 경영난을 주장했기 때문에, 2012년 말 분회도 사측의 안을 받아들이고 ‘시범적으로’ 변경된 프로세스 안을 따라 작업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적용을 해본 뒤 점검 회의를 갖기로 했습니다.

 

 

3) 변경된 프로세스와 높아지는 사고 가능성

 

바로 위에서 설명했듯, 사측이 제시한 ‘편집 프로세스 변경안’의 골자는 시간당 교정 보는 분량을 늘리는 것입니다. 하루치 분량이 많아지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집중도를 떨어뜨리거나 하루에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회사는 야근을 금지했습니다(분회는 야근을 없애는 것에 찬성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자와 함께 고민하는 대신 일방적인 통보로 일관하는 사측의 방식에는 반대합니다). 남은 선택지는 덜 꼼꼼히 작업하거나 집에 가져가서 하는 것, 혹은 둘 다 하는 것입니다. 분회는 사측이 변경된 편집 프로세스를 처음 제시했을 때부터 사고의 위험과 편집 퀄리티 저하의 위험을 강조습니다. 이에 사측은 “어느 정도는 감수하고 가는 것이다. 책임은 회사가 지겠다”고 답했습니다(이 과정에서 사측이 던졌던 무책임한 언사들을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책임을 회사가 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사측은 앞으로 내는 책들의 판권면에 노동자들 이름을 넣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책을 만들었을 때 누가 그린비에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한 분회원이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지시며, (기존처럼) 그린비 노동자 모두의 이름이 판권면에 들어가 있으면 회사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닌 게 되는지 문의했습니다. 이 문의에 편집장은 개인적으로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 분회원은 아직까지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분회가 <성명서>에서 ‘편집 프로세스 변경’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징계 관련 글에서도 강조했듯, 분회는 분회원들이 범한 과실이 전적으로 편집 프로세스 탓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해당 분회원은 자신의 과실에 대해서는 징계를 받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변경된 편집 프로세스가 책의 퀄리티를 떨어뜨리거나 사고를 발생시킬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 이번 사고 역시 큰 틀에서는 변경된 편집 프로세스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편집장 역시도 최근 작업한 책에서 치명적인 과실을 범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에 관해서는 아무런 공유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분회는 다른 기회에 이 사고를 알게 되었습니다).

 

 

4) 편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

 

사측은 자신들이 제시한 분량을 편집자들이 채울 수 있도록 ‘편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각종 글쓰기 업무를 없앴고, 조판 등의 업무(출판사마다 차이가 있는데, 디자이너가 조판을 하거나 담당자를 두어 조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린비에서는 ‘편집자가 모든 과정에 숙달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조판을 편집자가 진행했습니다)를 디자이너가 맡게 되었고(따라서 디자이너 업무가 늘었습니다), 그 외에 출간 후에 해왔던 후속 작업들도 관리부에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사측은 노동자와 상의하기보다는 통보를 하거나, ‘일단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린비는 ‘총서’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총서 개념이 강한 출판사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몇몇 편집자는 하나 혹은 여러 총서의 담당자를 맡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편집자들은 기획자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 (예비) 필자 선생님들께 청탁을 드리는 일, 출간 일정이나 원고 입수 일정을 조정하는 일 등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편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이유로 모든 총서를 편집장이 담당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그 이후 사측은 총서 기획자 선생님 및 대부분 저역자 선생님과 편집자들을 최대한 분리하려 해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겠지만, 필요할 경우 이와 관련된 내용도 알릴 생각입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 회사가 내놓은 ‘편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은 사실상 분업을 한층 세분화하는 것이며, 편집자를 ‘기계적으로 교정만 보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노동 강도가 강화되고 사고 위험이 커질 뿐 아니라, 노동자가 느끼는 성취감, 업무상 성숙도 저하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회는 이런 결정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늘 ‘이것은 경영권 문제다’, ‘회사가 어렵다’,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나중에 조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답변뿐이었습니다.

 

 

5) 사측 호소문의 왜곡

 

일정이 촉박하지 않았다는 주장

다시 사측의 <호소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측은 <호소문>에서 “2월 22일부터 초교를 시작하여, 4월 9일에 인쇄소에 파일을 넘겼습니다. 272쪽짜리 책을 한 달 반, 근무일 기준으로 33일 동안 만든 것이, 출판계의 상례로 볼 때 촉박한 작업 기일이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272쪽짜리 책을 한 달 반에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예전 그린비의 기준이 ‘1년에 300쪽짜리 책 5권’이었음을 상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를 단순히 나누면 한 권당 2.4개월이 나옵니다. 물론 예전에는 부수적인 업무가 많았다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야근도 잦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 달 반 동안 270여 쪽 책 1권을 만드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더불어 해당 조합원이 만든 책은 여러 명의 저역자가 참여한 책으로, 이런 책은 단일 저역자의 책보다 신경 쓸 일이 훨씬 많으며 작업 시 손도 더 많이 갑니다). 그리고 사실 사측은 처음에 휴일 포함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번 작업을 마무리할 것을 요구한 바 있으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당사자가 문제제기한 이후에야 이 일정의 불가능함을 인지하기도 했습니다.

사측은 이런 작업 기간을 두고 “출판계의 상례로 볼 때 촉박한 작업 기일이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과거 그린비는 얼마나 상례를 벗어난 출판사였던 것일까요? 또한 과거 그린비의 편집 과정을 고려할 때, 270여 쪽의 책을 한 달 반에 거뜬히 만들어 내는 편집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또 얼마나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요? 사측은 그린비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체 출판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극적인 수치 제시

사측은 <호소문>에서 “작년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1년간 노조원인 편집부 직원들 6명이 만든 책은 총 17권에 불과합니다. 1년에 1인당 3권도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라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굉장히 적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측은 각 분회원이 만든 책들의 분량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회는 지난 1년간 편집자 분회원들이 만든 책들의 쪽수를 합쳐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총 8,920쪽이 나왔습니다. 이를 분회원 6명으로 나누면 1인당 1,486.6쪽을 작업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300쪽짜리 책을 기준으로 삼으면 1인당 4.95권이 나옵니다.
물론 이 정도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1) 지난 1년간 분회는 사측과 업무 환경과 관련해 여러 논쟁과 공방을 벌여 왔습니다. 사측은 이런 공방이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이라 주장해 왔지만, 분회는 장기적인 노동 조건의 측면에서 볼 때 노동조합의 지속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특히 현재 그린비처럼 사측이 노동 조건을 점점 더 후퇴시키려 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산성이 저하될 수도 있지만, 분회는 (단기적) 생산성 상승이 다른 모든 문제보다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 나아가 분회원 중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편집자도 있으며(이 분회원에 대한 사측의 처우도 필요한 경우 공개하겠습니다), (3) 또 갓 1년을 넘긴 신입 편집자도 있습니다. 사측은 이런 고려사항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자극적인 수치만을 제시하면서 분회의 무능력을 부각시키고 탓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배울 의지가 없는 분회원들?

사측은 기존의 그린비가 “업무능력이 부족해도 계속 가르치면서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공간, “그린비를 자유롭고 배울 수 있고 함께하고 싶은” 공간이었다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분회원들이 “더 이상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걸 ‘억압’으로 느끼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사측은 억압적인 노동 구조와 ‘배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린비 분회원들은 배우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그리고 기존 그린비 구조에서 배운 것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배움을 통해 더 성숙한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되길 바라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린비는 어느 회사에나 있는 문제뿐 아니라 (사측이 “공동체”라고 말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특유의 문화에서 기인하는 문제들도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습니다. 그런데 사측은 분회의 문제제기와 항의를 진심으로 고민하려는 노력 없이 분회원들을 “과거의 그린비를 부정하는 이들”로 싸잡아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필요한 경우 상세한 내용을 밝히겠습니다.

‘편집 프로세스 변경’과 관련해 중요한 점은, 사측의 이러한 ‘노동자 인식’이 편집 프로세스 변경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사측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배우고 싶어 하지 않”으니, 책을 더 대충 만드는 방식으로 프로세스를 변경해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아니 노동자들이 그걸 원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배우는 일을 거부하고, 나의 성숙을 가로막는 노동 과정 변화를 환영하는 노동자가 있을까요? 그린비 분회는 과거의 그린비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며, 현재 회사가 경영난을 겪고 있다면 이를 타개할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분회가 반대하는 것은 노동조합을 결성한 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저 인식, 그러한 인식을 빌미로 노동자가 일에서 느끼는 기쁨과 성숙할 기회를 앗아가는 노동 구조 및 과정 도입입니다.

 

 

6) 회사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입니다.

 

사측은 계속해서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며, 프로세스의 ‘합리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분회원들도 우리 일터의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우리 힘으로 더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측이 제시한 변경안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에 맞춰 작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측은 책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계량, 더 합리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대신 하루 편집 쪽수를 늘리는 해결책 제시, 노동자와의 상의가 아닌 통보를 통한 강행, 중간 점검에 대한 요구 무시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점점 더 자신이 ‘기계화’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사측의 말처럼 노동조합은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노동자 권익 보호를 명분으로 회사 경영을 어렵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노동조합이 과연 있을까요? 거꾸로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만 노동자 권익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상적 운영’이라는 것이 더 많은 매출과 이윤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더 민주적인 작업 구조 역시도 뜻한다면 말입니다. 그린비 분회는 그린비출판사의 책들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하는 일의 주체가 되고 싶으며 일 그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그린비출판사와 그린비 분회 사이에서 벌어진 공방의 핵심인 ‘징계’ 문제와 ‘편집 프로세스 변경’ 문제는 여러 면에서 겹쳐 있습니다. 편집상 과실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편집 프로세스 변경이라는 넓은 문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사측이 ‘편집 프로세스 변경’과 ‘징계’ 모두에서 노동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관철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린비 분회는 출판업계 불황과 자사 경영난을 근거로 사측이 제시한 ‘편집 프로세스 변경안’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노동자가 범한 과실에 대해 합당한 범위 내에서 징계를 받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린비 분회는 무조건 회사에 반대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회사는 우리가 일하는 공간이며 분회는 그린비를 더 나은 출판사로 만들기 위한 모색에 기꺼이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억압적인 노동 조건, 보복성 징계, 의사소통 거부 및 일방적인 명령 등에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맞서 싸울 것입니다.

그린비출판사의 모토는 ‘나를 바꾸는 책, 세상을 바꾸는 책’입니다. 지난 1년간 그린비출판사의 ‘나’들이 바뀌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분회는 그린비출판사가 노동자들에게 명령하는 변화가 좋지 않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린비 분회원들은 여느 출판 노동자만큼이나 책 만드는 일을 사랑합니다. 더 나은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되기를 원하며, 그만큼 그린비의 책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 더 즐겁고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은 욕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린비 분회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이며, 분회는 더 합리적인 노사 관계, 더 나은 노동 조건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출판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조합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되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지지와 응원이, 비판과 질책이 필요합니다. 부디 앞으로 그린비 분회가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켜봐 주시는 그만큼 그린비 분회도 더욱 나아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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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16:33 2013/04/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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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편집자1 2013/04/30 19: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학술서 편집에 ‘초교 하루 50쪽, 재교 하루 70쪽, 최종 OK교 하루 100쪽’이라는 기준은 과하네요. 사측이 제안했다고 하는데 편집 과정을 아는 사람의 아이디어입니까. 사장님이 직접 제안하신 것인지 궁금하군요.

  2. mjs 2013/05/02 10: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초교 하루 50쪽, 재교 하루 70쪽, 최종 OK교 하루 100쪽’이라는 기준 자체가 너무 기계적이고 편집자를 교정교열자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그린비를 응원했던 한사람으로 사측에 실망스럽고, 분회원들의 힘든 싸움을 응원합니다.

  3. 편집자2 2013/05/02 17: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린비의 투쟁을 응원합니다! 똘똘 뭉쳐서 꼭 승리하시길... 출판계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책 만드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4. 펹집자3 2013/05/02 17: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충격과 분노를 넘어 허탈한 감정에 싸여 있습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린비 노조의 투쟁을 응원합니다.

  5. 그린비 분회 2013/05/03 09:2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무리한 업무를 강제하는 것이 그린비 편집부만의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린비뿐 아니라 많은 출판사의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도 격무와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린비 분회도 이런 관행들과 구조들을 개선해 나가려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6. 일산에서 2013/05/03 21: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사측과 노조측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모두 계약과 교섭으로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한국의 인문 출판사 대부분은 다 문 닫아야 된다.
    편집자들은 어디에서 함께 모여 일할 것인가.
    하긴 다들 흩어져 저마다 1인회사 만들면 되겠네.
    세상 일이 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거다. 에혀~

    • 나도 편집자 2013/05/06 01:46 고유주소 고치기

      한국의 인문 출판사가 이런 식으로 일해서 얻으려고 하는 게 무엇일까요.
      편집자들이 모여서 일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착취당하면서 개처럼 일하는 게 뭐가 좋다는 건지......

    • 그린비 분회 2013/05/16 09:08 고유주소 고치기

      말씀하신 일이 없도록 저희도 신경쓰겠습니다.^^

  7. 여느녘 2013/05/05 11: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저 먼 발치로 떨어져 있는(?) 그린비 출판사를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사측의 주장과 노조의 주장, 양 쪽을 쭉 읽어보니, 몇 가지 혼란스러웠던 점들이 조금은 정리가 되네요.

    징계의 이유가 노조측 말씀대로 첫 번쨰(편집상 오류)이유를 빼고는 너무 주관적입니다. 노조의 보복성을 띈다는 강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사측은 징계위원회가 아니라 일단은 한 숨 고르고 노조의 얘기를 들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사측의 행동에 안타까운점이 있네요. 비록 노동자들을 위한(? 아니면 원래 상태로 이제야 돌아간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네요.) 야근금지를 시작했어도, 분명히 노조와 공식적 이야기를 통한 과정을 거쳐어야 했습니다..노동자를 위한 일이든 무엇이든 회사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안은 비록 사소해 보일지라도 '통보'여서는 안되는 데 말이죠.


    책에서 강도높은 노동이란 것이 무얼까요? 위 글에 나온대로 '1년에 책 5권'일까요? 1권에 책을 내놓아도, 질이 좋은 책 1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비록 저의 개인경험으로 한정하는 듯 하지만, 그린비출판사를 좋아하는 '먼 발치 독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측의 행동입니다. 1년 책이 몇 권 나왔느냐가 그 출판사의 가치를 정한다고 생각 안 합니다. 적지만, 좋은 책 우리나라에서 번역 안 된 책이지만, 성심을 다한 책들. 이러한 것이 있었기에 저는 그린비 출판사를 좋아하고 항상 고마웠습니다.

    사측과 노조측이 서로 더 이상 다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측의 글과 노조측의 글을 둘 다 본 독자로서는 어찌보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즉, 서로 치고박고 싸우고 피 흘리고 평생 '적'으로 만들만한 일이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미디어스'에 올라온 '이용석'노동자님의 글처럼 사측이 먼저 손을 내밀면 금방 끝날 문제인 듯 합니다. 누구의 승리?라는 거창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패배라는 비참한 것도 아닙니다. 노동자의 편이고 좋아하는 출판사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독자로서 못난 글 하나 남기고 갑니다.

    • 그린비 분회 2013/05/16 09:12 고유주소 고치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측에서 여느녘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8. 김모 2013/06/16 23: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노조원이 무리한 일정에 불만을 가지고 일부러 수정 내용을 누락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측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고요. 그렇다고 이것을 증명은 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한 사유(지각 및 고성 등)를 들어 징계를 내리려 한 것으로 보이네요. 일단 근태 및 고성에 관해서 사원은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를 하려면 자기가 지킬 것은 더욱 철저하게 지켰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 했으니 할 말은 없겠죠. 이 건은 노조와 회사의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있는데 이를 일반 대중에게 일방적 억압이라는 식으로 광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 그린비 분회 2013/06/17 09:59 고유주소 고치기

      정확하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노조원이 무리한 일정에 불만을 가지고 일부러 수정 내용을 누락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말씀이 편집 과정에서 해당 분회원이 수정해야 할 사항을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뜻이라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