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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30
    공공성 실현이 시민운동 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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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9/30
    알랑고아, 곱디 곱던 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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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8년, 원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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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스칸의 조강지처 납치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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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마와 용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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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9/30
    자다(Jada), 날씨를 내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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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9/30
    코릴타 혹은 쿠릴타이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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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9/30
    칸(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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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9/30
    현직경찰 과반수가 경찰대 폐지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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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실현이 시민운동 갈 길

“한국은 ‘민주적 계급사회’로 가고 있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리’는 시민운동의 비운동화와 체제내화를 의미한다. 계급사회라는 현실에 맞서지 않고 투명성과 민주성에 매달리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지난 9월 29일 참여연대 시민강연회에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시민운동의 딜레마’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개념어를 많이 쓰고 새로운 용어를 많이 만들어내는” 그의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다. 대신 조 교수는 ‘21세기 시민운동과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수많은 화두를 던져 주었다. 바로 “정치적민주화에서 사회적민주화로 시민사회운동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공공성 의제 강화”가 놓여 있다.

53년체제-61년체제-87년체제로 한국사회 변화를 구분한 조희연 교수는 “민주개혁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87년체제는 이제 전환적 위기의 양상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가 보기에 87년체제는 양면적 성격이 있다. 그것은 6월항쟁과 6.29선언으로 상징되는 양면성이다. 시민운동은 87년체제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민주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주체로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시민운동의 정점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였다. “정점에 올랐다는 것은 다시 말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민주개혁 자체가 갖는 내재적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면서 민주화와 지구화가 결합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진단이다. 조 교수는 이를 “투명하게 민주적인 계급사회”라는 다소 모순돼 보이는 용어로 설명했다.

조 교수는 “개혁의 진전과 민주개혁의 내재적 한계에서 오는 병목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민주개혁은 정치개혁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투명성과 민주성만으로는 진보가 실현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보기에는 정치개혁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별다른 고민이 없다”며 “시민운동 스스로 진보성을 거세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조 교수는 민주개혁 담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정치적 민주주의 운동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가 보기에 과거 ‘독재 대 반독재 대립구도’는 ‘시장사회 실현 대 공공성 실현’ 대립구도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시기 ‘보수 대 진보’의 핵심구도를 이룬다. 가령 평준화 논쟁은 “공공성 확장을 통해서 교육이 계급적 불평등 재생산의 기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운동과 계급적 불평등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교육체제를 재편하도록 요구하는 운동 사이에 벌어지는 각축”이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조 교수는 먼저 “정치경제적 의제에 집중하는 운동에서 문화적·생활세계적·지역풀뿌리 의제로 확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나 스스로 죽을 때 내 재산을 우리가 비판했던 독재세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자.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내 친구 가운데 5.18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사원 수십명을 거느린 사장이다. 가끔 우리가 비판했던 기업주의 모습과 내 친구가 얼마나 다른지 의문이 든다.”

그러면서도 조 교수는 “최후의 반개혁적 영역에서의 민주개혁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재 대 반독재’ 전선의 경계를 허물어 반독재세력의 폐쇄적 연대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전선’을 창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령 조선일보는 친일이나 독재적 유산과 유착된 신문에서 점차 ‘민주적 계급사회’의 상층계급, 자본가 일반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적 신문’으로 성격을 전환했다. 친일이나 독재 문제로만 조선일보를 보면 일면만 보는 것이다. 조선일보 반대운동조차 새로운 대립전선을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대연정 구상은 헛다리 짚었다"
조희연 교수 주장

조희연 교수는 최근 논란이 된 대연정 구상에 대해 “핵심을 잘못 짚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조 교수는 “지역구도는 1987년에 모습을 드러냈다”며 “한마디로 말해서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한나라당은 호남에서 표를 얻지 못하는 정치구도가 바로 지역주의”라고 정리했다. 문제는 양자가 표를 얻지 못하는 원인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조 교수는 “호남은 5.18 이후 집단적 정치의식이 높아졌다”며 “그것 때문에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배척받는다”고 진단했다. 반면 영남에서는 “수구세력의 ‘낙동강 방어선’에 민주세력이 투항하면서 가속화된 현상”이다. 다시 말해 “민주세력의 도덕적 오류”에 따른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왜 영남에서 표를 못 얻나. 문제는 중간층이 보수적 투표를 하도록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독재를 주도했던 세력이나 반독재운동을 했던 세력이 모두 똑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이 이런 현상을 가속화한다. 대연정 제안은 여기에 새로운 경험 하나를 추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조 교수는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같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를 하는 것이 지역구도를 깨는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나마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이전보다 더 많은 표를 영남에서 얻은 것은 새로운 도덕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양김 분열로 상처받아 표류하는 민중들이 그나마 개혁적 투표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문해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9월 30일 오후 17시 1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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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랑고아, 곱디 곱던 그 여인

"저기서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 가운데
한 마차에 앉아 있는 한 아가씨가 아름답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인이 아니라면
아우 너에게 주겠다."

형인 도와-소코르는 아우 도본-메르겐과 함께 보르칸칼돈 위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그들은 퉁겔리크 강을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기들 쪽으로 오는 것을 발견했다. 도와-소코르는 이마 가운데 눈이 하나 더 있어서 남들보다 몇 배나 멀리 볼 수 있었다. 무리 가운데 마차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 도와-소코르는 그 여인이 미혼이라면 아우의 배필로 맞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는 도본-메르겐을 산 아래로 내려 보냈다. 형 도와-소코르는 과연 천리안이다. 마차 위, 엘지게라고 하는 아녀자들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 그 여인은 곱디 곱기로 소문난 시집 안 간 아가씨, 알랑-고아였다.

그 여인의 아버지는 코리-투메트 부족의 귀족인 코릴라르타이-메르겐, 어머니는 바르코진-고아였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 가족이 살던 곳은 사냥감이 많은 축복받은 땅. 그러던 어느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못하게 만든 코리-투메트 부족과 사이가 아주 나빠졌다. 결국 그는 그들과 결별하고는 코릴라르라는 새로운 씨족을 만들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란 코릴라르의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메르겐이란 말은 보통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미 코리-투메트 부족과는 결별했지 않은가. 이제 그들은 남이다. 보르칸칼돈이란 산에는 큰 사냥감이 아주 많다. 보르칸칼돈의 주인이자 보르칸이란 신당(神堂)을 열은 오리양카이 씨족의 신치-바얀이 있는 곳.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보르칸칼돈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도본-메르겐이 알랑-고아를 만났다.

알랑-고아는 도본-메르겐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얻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도본-메르겐은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렀고 알랑-고아는 아들 셋을 더 낳았다. 집에는 알랑-고아와 아들 오형제 밖에 없다. 다섯 형제를 제외하고 남자라고는 오직 도본-메르겐이 주워 온 노예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장남과 차남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저 노예 놈의 후레자식이다!"

알랑-고아는 오형제를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장남과 차남에게 세 아우가 아비 없이 태어난 출생의 비밀에 관해 설명했다.

"날마다 밝은 금빛색을 띤 사람이
겔의 천장에 난 창문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
내 배를 비볐다.
빛이 나의 배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해가 뜨고 달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금빛 사람은 노란 개처럼 서둘러 나갔다.
아버지 없이 낳았다는 이 아들들은
하늘의 아들들
너희들은 어떻게
이 세 아이를 평민들과 비교하는가.
나중에 이들 가운데 칸(Khan)이 나오면
그 때야 너희들은 이들의 내력을 알게 되리라."

알랑-고아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가 보돈차르-몽카크이다. 그의 후손 가운데 칸 중의 칸 테무진, 곧 칭기스칸이 나왔다. 그리하여 칭기스카간은 위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몽골인들이 어디로 가든지 그들은 알랑-고아를 잊지 않았고 알랑-고아는 몽골인들의 시왕모(始王母)가 되었다.

Last Updated: 20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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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년, 원나라는 멸망했다?

1368년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이 해에 "원·명 교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동양사"를 가장한 많은 중국사 개설서는 이 사건을 "명은 원을 멸하고 건국하였다"고 적고 있다.

1368년은 역사 해석 주체의 역사관에 따라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동전의 뒷면처럼 모습을 달리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외양을 달리하는 셈이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기억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생겨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1368년, 주원장은 남경(南京)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대명(大明),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즉위와 함께 '북벌'을 시작했다. 원나라 중앙정부는 이미 싸울 힘이 없었다. 카간의 권위와 위엄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 각지의 지방군은 카간을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카간이었던 토곤테무르는 응창(應昌)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명군은 별 어려움 없이 칸발릭[大都: 지금의 북경에 있던 몽골제국의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어진 약탈, 방화, 살육...

원나라는 망했나?

토곤테무르 카간은 응창에서 1370년 5월에 죽었다. 명나라에서는 "천명에 따라서(順) 퇴각했다"고 해서 순제(順帝)라고 묘호를 정했다. 몽골존호는 오카가토 카간이다. 토곤테무르 카간의 아들인 아요르시리다라가 새로운 카간이 되었다.(그의 몽골 존호는 빌릭투 카간이다) 아요르시리다라는 토곤테무르 카간과 고려출신의 기황후(寄皇后)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아요르시리다라 카간은 몽골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카라코롬으로 서울을 옮겼다. 당시 원나라는 만주·감숙·티베트·운남·중앙아시아의 여러 몽골 세력을 직접·간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원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 원나라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명나라는 말 그대로 "신흥독립국"이었다. 스기야마 마사아끼가 말했듯이 "일종의 남북조 형태"가 펼쳐졌다.

아요르시리다라 카간은 1378년에 죽었다. 그의 동생인 터구스테무르가 새로운 카간이 되었다. 1387년, 터구스테무르 카간은 나가초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동지역에서 20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나가초는 식량부족 때문에 명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원나라에겐 치명타였고, 명나라에겐 빛이 되었다. 터구스테무르 카간은 보이르호수 근처에서 명나라 군의 습격을 받아 궤멸되었다. 다음해, 터구스테무르 카간은 톨강 부근에서 아리크버케(코빌라이카간의 막내동생)의 후예인 예수데르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코빌라이 왕조는 멸망했다. 1388년, 칸발릭을 버리고 몽골고원으로 후퇴한지 20년.

원나라를 사실상 코빌라이 제국으로 단정하고 '왕조사관'을 충실히 따른다면 원나라는 1388년 멸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예수데르는 1392년 카간이 되었다. 그 후 잦은 내전을 겪으면서도 칭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한 여러 명의 '카간'이 등장했다. 그들 모두 "대원 카간"을 칭했다. 몽골어로 "다얀카간"이다. 물론 실상은 코빌라이가 세운 원나라, 즉 대원 올로스와는 차이가 많다. 어쨌든 칭기스칸과 코빌라이카간을 계승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드러난다. 학자들은 아요르시리다라 카간 이후 릭단칸(Ligdan Khan, 1604-1634)에 이르는 250여년을 북원(北元)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하여간 중요한 건 원나라가 1368년에 망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칸발릭을 점령하고 나서 명나라는 바로 원나라의 정식 역사를 편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완성하는데 1년여밖에 안 걸려 완성된 《원사(元史)》는 조잡한 '베끼기'와 부실한 사료조사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편찬자들은 몽골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명나라로서는 그렇게 라도 급하게 "부실공사"를 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원나라는 망한 나라가 되어야만 했다. 《원사》편찬은 원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정치작업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북쪽에 있던 '몽골'을 '몽골'이라고 부르지 않고 타타르라고 불렀다. 몽골이라고 인정할 경우 정통성 시비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왕조사관'에 따라 명나라는 원나라를 계승한 국가가 되어야만 했다. 북쪽에 있는 '원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은 잊어버려야 할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없애버리거나.

시대를 가로질러 왕조사관이라든가 정통성 시비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다룰 만한 능력은 없다. 단지 여기서는 우리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을 문제삼고 싶다. 한국사 속의 사대주의를 그리 비판하는 사람도, 세계사라면 유럽과 미국만, 동양사라면 중국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화 수준이 높은 중국"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명나라에 쫓겨 몽고고원의 사막지대로 후퇴하자," "이전의 부족사회로 퇴보해 버렸다"고, 그냥 단순히, 정확하게는 무책임하게 생각해 버리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 때문에 일본학자가 한 다음의 얘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왠지 화이사상에 기초한 문명주의나 서구 근대 이후의 민족주의 내지는 '민족국가', '국민국가(이른바 "Nation State")의 개념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가져, 그 전제 위에 연구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 때로는 '만리장성'(물론 몽골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의 바깥은 '황야'와 '사막' 뿐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미지가 아직 어딘가에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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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 "몽골시대사연구의 현상과 과제", 《중국사연구》 4, 1998.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1993).
Waldron, Arther N. The Great Wall of China: From History to Myth, (Cambridge Univ. Press, 1990).



Last Updated: 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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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시대-유라시아를 넘나든 사람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치는 시기의 세계사는 말 그대로 "몽골시대"였다. 몽골고원에서 시작해 동심원으로 확장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의 거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그리고 이 동안에 세계는 몽골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 시기 유럽에서 정치, 경제, 종교상의 이유로 많은 이들이 몽골을 방문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여행기도 썼는데, <동방견문록>이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는 이 시대 동방과 서방을 여행한 사람들 중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토(Batu)※를 우두머리로 하는 몽골군이 처음 동유럽에 나타났을 때 유럽인들은 이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무슨 언어를 쓰고 어떤 종교를 믿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최강이라고 하던 헝가리 군을 전멸시키자 유럽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유럽인들은 몽골인들을 지옥의 사자라는 뜻으로 '타르타르(Tartar)'라 불렀다. 그런 몽골군이 어느 날 갑자기 유럽에서 물러났다. 유럽은 이유도 모른 채 구원받았다. 이 충격은 꽤 오랫동안 유럽을 짓눌렀다.

교황 이노센트 4세는 1245년에 머나먼 동방으로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정보수집도 겸한 사절이었다. 서아시아방면으로는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동유럽과 러시아 방면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사절을 파견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페르시아 지역까지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당시 60세를 넘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카르피니(John of Plano Carpini)는 1245년 4월 6일 프랑스의 리옹을 출발해 조치 올로스(일명 킵착칸국)의 칸이었던 바토(Batu)를 만났고, 1246년에 구유크카간의 즉위식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고려에서 온 사신들도 보았다. 그가 리옹에 돌아온 것은 1247년 가을이었다. 카르피니는 몽골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몽골인의 역사(Historiae Mongalorum)>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1253년에는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이라는 수도사가 몽골제국의 서울인 카라코롬을 방문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친서를 갖고 러시아 지역을 거쳐 1254년에 몽골제국의 서울인 카라코롬에 도착해 멍케카간과 회견을 했다.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사들과 신학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루브룩은 루이 9세에게 전하는 멍케카간의 친서를 갖고 1255년에 유럽에 도착했다. 그는 <여행기(Itinerarium)>라는 보고서를 썼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당시 루브룩은 멍케카간의 오르도(Ordo)에서 많은 유럽사람들을 만났다. 헝가리 여자, 그녀와 결혼한 러시아 건축가, 파리 출신 금세공인, 헝가리 태생의 영국인 아들 …

루브룩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했다. "거리낌없고 독선적이었으며 사태를 지나치게 자신의 입장에서 평가·표현하는 성향이 있었던" 카리피니와는 달랐다. 루브룩의 {여행기}는 날카로운 관찰이 돋보이는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사료적 가치도 높다.

카르피니가 몽골인들의 '야만성'과 잔인 무도함을 강조해 위기를 부채질했다면, 루브룩은 훨씬 객관적이었다. 그런데도, 카리피니는 유럽에 돌아와 일약 '스타'가 된 반면에 루브룩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카르피니가 얘기하는 몽골의 '이미지'가 당시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은 아닐까.

몽골을 방문한 유럽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일 것이다. 그가 썼다는 <일 밀리오네(Il Milione)>, 즉 <백만의 서(書)>(<동방견문록>은 그 속칭)는 수백년 동안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동방의 대제국으로 일생을 건 항해에 나서면서 콜롬부스가 갖고 있던 책도 <동방견문록>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가 과연 실존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폴로라는 성을 가진 집안이 여럿 있었고 마르코란 이름도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동방견문록>이 엉터리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동방견문록>에는 당시 몽골제국과 코빌라이카간을 둘러싼 일급기밀이 거리낌없이 등장한다. 코빌라이카간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동방견문록>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것은 당시의 실제견문을 담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는 바다길을 통해 오늘날 이란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그 일행이던 정사(正使) 한 명과 부사(副使) 두 명의 이름은 14세기 페르시아어로 쓰인 <왓사프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의 역사기록에 그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쨌든 <동방견문록>의 근본이 되는 견문이나 경험을 가진 인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일 수도 있다.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코빌라이카간이 죽기 1년 전인 1293년에 교황 니콜라스 4세는 카톨릭 전도를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이탈리아인인 지오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를 칸발릭[大都, 지금의 북경]으로 파견했다. 그는 칸발릭에 도착해 코빌라이카간의 계승자인 테무르카간[元 成宗]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는 칸발릭에 머무는 기간동안, 1만명 이상의 몽골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코빌라이카간의 사위였던 게오르게스[闊里吉思]도 있었다. 게오르게스는 원래 네스토리우스교도였다.

몬테코르비노는 칸발릭에 교회 두 곳을 세웠다. 그 중 하나는 1291년에 칸발릭에 정착한 이탈리아 상인 페트루스 다 루칼롱고가 기부해준 땅이었다. 1307년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몬테코르비노를 칸발릭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후 교황들은 여러 차례 수도사를 파견하여 카톨릭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몽골제국에서도 이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들 전도사들이 교황청에 보낸 편지들 가운데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행가인 14세기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는 성지순례를 위해 처음 고향을 떠난 이후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오늘날의 이란, 러시아, 터키,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지중해, 사하라사막 이남, 스페인 등 무려 10만Km가 넘는 거리를 30년(1325-1354)에 걸쳐 여행했다. 그의 발자취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곳곳에 걸쳐 있다. 특히 그는 대원 올로스, 조치 올로스, 차카타이 올로스, 훌레구 올로스 등 몽골제국의 주요 정권을 두루 여행했고, 훌레구 올로스와 조치 올로스의 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가 여행한 길은 당시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교통로였고,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주요한 일부분이었다.

몽골시대에는 서방에서 동방을 여행한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동방에서도 많은 이들이 서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가운데 몽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던 두 사람의 몽골인이 있다. 한 명은 네스토리우스교[景敎]의 총대주교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유럽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로마와 프랑스까지 방문하기도 했다. 시리아어로 쓰여진 그들의 전기가 전해진다.

예수의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이들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탄핵받자, 지금의 이란을 본거지로 해서 동방전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네스토리우스교가 등장했다. 한문기록에는 경교(景敎)로 적혀있다. 중국에 한때 많은 네스토리우스교 지역 공동체가 번성하기도 했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국할 당시에도 유목민 가운데 많은 네스토리우스교 신자가 있었다. 톨로이(칭기스칸의 막내아들)의 아내로 멍케카간과 코빌라이카간의 어머니였던 소르카크타니, 훌레구의 카톤(몽골어로 황후)인 터구스 등도 독실한 신도였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몽골제국 초기부터 칸발릭에 대주교를 갖고 있었고, 몽골 지배귀족 가운데 많은 교인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몽골인 중에는 시몬, 게오르게스, 바오로, 요한, 야곱, 누가, 예수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지금의 내몽골에서 태어난 랍반 사우마(?-1294)와 마르코스(1245-1317)는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사였다. 독실한 신자였고, 고행과 명상에 열심이던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굳은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그들은 바그다드에 도착해 네스토리우스교의 총대주교인 마르 덴하를 만났다. 1281년 마르 덴하가 죽고, 바그다드 부근에서 열린 네스토리우스교 평의회에서 마르코스는 마르 야흐발라하 3세라는 이름으로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마르코스는 그 후 죽을 때까지 네스토리우스교의 우두머리로 활동했다.

훌레구 올로스(속칭 일칸국)의 칸이었던 아르곤은 1287년 당시 네스토리우스교의 고위 성직자였던 랍반 사우마가 이끄는 사절을 유럽에 파견했다. 당시 조치 올로스와 이집트에 있던 맘룩왕조가 동맹을 맺어 훌레구 올로스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훌레구 올로스는 유럽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랍반 사우마는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해 비잔틴제국의 황제를 만난 후 배를 타고 나폴리에 도착했다. 로마에 도착하기 직전에 교황이 죽었기 때문에 추기경들의 영접을 받았다. 당시 랍반 사우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많은 교부들-즉 7세기와 8세기의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이 투르크, 몽골, 중국인들의 땅으로 가서 그들을 가르쳤음을 아십시오. 오늘날 많은 몽골인들이 그리스도교도이고 그 중에는 왕과 왕비의 자녀들이 있으며, 그들은 세례를 받고 크리스트교 신앙교백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거영지에 교회를 갖고 있습니다. 아르곤칸은 나의 주인이신 총대주교와 우정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리아를 갖기를 원하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여러분의 도움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랍반 사우마는 1287년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해 국왕의 영접을 받았다. 로마로 돌아온 랍반 사우마는 새로 선출된 교황 니콜라스 4세를 만났다. 그는 교황, 프랑스왕, 영국왕이 아르곤칸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1288년 무렵에 훌레구 올로스로 되돌아왔다.


수많은 사절단, 상인, 여행자, 순례자들이 몽골시대에 유라시아를 넘나들었다. 위에서 다룬 사람들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들의 발자국 하나 하나가 모두 동서교류사의 흔적들이다. 오랜 옛날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사람들이 움직였다. 문화와 종교와 신기술들이 전파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는 결코 단절된 별개의 역사세계가 아니었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몽골시대를 거치면서 유럽까지 전해진 것도 이 시대 동서교류사가 남긴 한 업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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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그루쎄, 김호동 외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사계절, 1998.
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1998.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옮김, <몽골세계제국>, 서울: 신서원, 1999.
이븐 바투타, 정수일 옮김, <이븐 바투타 여행기>,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1.
Dawson, Christpher. ed & tr. The Mongol Mission, London and New York: Sheed and Ward, 1955.



Last Updated: 200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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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조강지처 납치당하다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있던 테무진과 가족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한 두 명이 아니다.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도피할 말을 찾았다. 몽골에서는 보통 승용마로 쓰는 말만 겔(Ger) 옆에 매어 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목한다.『몽골비사』에는 여덟마리의 말이 겔 옆에 매여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말에 올랐지만,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가 탈 말이 모자랐다. 그녀는 급한대로 양털을 쌓아둔 마차 안에 몸을 숨겼다.

테무진은 숲 근처까지 도주한 이후에야, 기습자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바아토르와 생긴 해묵은 원한을 풀러 온 메르키트 부족이었다. 테무진 일행은 재빨리 몸을 피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 안으로 피신했던 버르테는 생포되어, 인질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테무진의 어머니 허엘룬-우진은 원래 정혼자가 있었다. 칠레두라는 이름의 메르키트 부족 사람이었다. 허엘룬은 시댁으로 가던 도중에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그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납치범이 예수게이-바아토르였다. 당시 허엘룬은 칠레두에게 자신의 속옷을 벗어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몽골 역사서인 『몽골비사』에는 위의 사건을 예수게이-바아토르가 허엘룬을 우연히 만나면서 벌어진 "우발적인 납치극"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몽골비사>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기록이 '서사시' 형태를 띠고 있는 데다, 내용이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몽골비사>를 근거로 당시 몽골에서 약탈혼이 유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허엘룬과 버르테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유사한 기록이 전무하다. 버르테 사건은 허엘룬 납치에 대한 일종의 보복극의 성격을 지닌다. 그럼 '허엘룬'은?

허엘룬은 몽골부족 가운데 옹기라트씨족 출신이다. 딸 아이를 단장시켜 유력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난세의 처세술을 삼는 전통을 가진 씨족이었다. 옹기라트씨족이 몽골족과 불화가 끊이지 않던 메르키트 부족에 딸을 시집보낸 것도 그런 처세의 일환이었음이라. 이런 씨족의 딸이 어디로 시집가느냐를 보면 누가 패권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예수게이-바아토르에겐 정치적인 속셈이 있었다. 그는 허엘룬을 납치해 아내로 삼음으로써 몽골 부족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큰 정치 세력인 옹기라트 씨족을 처가로 만들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이익을 얻었다. 혼란스런 시대에 정치적 동맹자를 확보하는 것은 야심가의 으뜸가는 덕목이다.

당시 테무진은 신혼의 아내를 납치당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안다(Anda: 의형제)를 맺었던 옹칸에게 달려갔다. 물론 그 이전에 테무진과 옹칸 사이에는 일종의 밀약이 있었지만. 어떻든, 테무진은 위기를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옹칸은 테무진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도 하듯이 또다른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자모카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자모카는 어린 시절 테무진과 안다를 맺은 사이였다. 자모카도 테무진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그들은 연합해서 메르키트를 기습 공격하기로 약조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아프가니스탄과 벌이는 전쟁의 앞 모습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면 뒷모습은 뭘까. "석유를 위한 전쟁"? 아니면 "전세계를 내 품안에?" 그럼 옹칸은? 메르키트는 부유한 족속이었다. 명분도 좋다. 악의 무리를 응징하러 가잔다. 물론 승리하면 많은 전리품을 사이 좋게 분배할 수 있다.

옹칸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잠재적인 적국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 좋은 기회를 자모카도 놓칠수 없었다. 테무진도 마찬가지. 작전은 어쨋든 테무진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기습공격은 성공했다. 테무진, 자모카, 옹칸, 이 모두가 원하던 것들을 손에 넣은 듯이 보인다. 테무진은 아내를 되찾았고, 옹칸 및 자모카와 돈독한 관계도 다져놨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자모카와 테무진은 공동유목을 시작했다. 이것은 최고의 '동맹' 결성의 방식이었다. 더 나아가 테무진은 이번 사건을 야망 실현의 계기로 만들어 나갔다. 그럼 버르테는?

테무진이 버르테를 구했을 때,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얼마 후 버르테는 첫아들을 낳았다. 모두들 뭔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다. 공식적으로는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다. 샤만이 특유의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다. 신생아의 부정을 제거하는 의식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갓난아이는 순결한 몸과 영혼으로 거듭났다. 아기 이름은 '조치(Jochi)'라고 지었다. 몽골어로 손님이란 뜻이다. 손님처럼 찾아온 아기라는 뜻일까? 아니면 손님처럼 대접하겠다는 뜻?(몽골은 손님대접에선 지금도 세계최고수준이다)

앞에서 언급한 조치의 출생문제를 거론한 유일한 인물은 테무진의 둘째 아들이자 조치의 바로 밑 아우인 '차카타이'였다. 칭기스칸이 콰레즘제국과 한참 전쟁을 할 무렵, 작전회의 도중에 차카타이가 칭기스칸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왜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조치와 상의해라, 조치와 의논해라'라고 하십니까? 조치는 저 망할 놈의 메르키트의 후레자식인데." 그 자리에 있던 조치는 이성을 잃었다. 칭기스칸과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조치와 차카타이는 멱살을 잡고 싸웠다. 그들이 그렇게 싸우는 동안, 칭기스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로 한 사람이 둘의 싸움을 뜯어 말리고는, 뼈에 사무치는 훈계를 했다. 이 사건은 훗날 몽골제국은 물론 세계사의 운명을 뒤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치의 뒤를 이은 몽골제국의 지방정권 '조치 올로스(올로스는 나라라는 뜻)'는 성립 초기부터 몽골제국의 '아웃사이더'였다. 어거데이카간이 죽고나서, 가장 유력한 카간 후보 가운데 하나였던 조치의 둘째아들 바토(Batu)는 몽골 본토로 돌아오지도 않고 볼가강 근처에 눌러앉아 버렸다. 조치올로스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몽골제국 절반에 가까운 영토와 카간에 대적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일인지 조치올로스는 제국 전체의 정국 운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킹메이커가 된적은 있었지만 킹이 될려고 한적은 없었다.

콰레즘 원정이 끝나갈 무렵, 작전을 끝내고 칭기스칸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날이 지났는데도 조치는 오지 않았다. 조치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치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걸까?. 조치 쪽 연락병이 도착했다. 조치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약속 시간에 늦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칭기스칸이 제국 유지를 위해 조치를 암살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테무진이 칭기스칸이 되고 수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버르테는 항상 예케 카톤(Yeke Khatun)이었다. 드라마 "태조 왕건" 식으로 말하면 '박상아'의 역할이라고 할까. 테무진은 조강지처에게 최선의 대우를 했다. 그는 허엘룬이 낳은 네 아들(조치, 차카타이, 어거데이, 톨로이)과 이들의 직계후손만이 제국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카간의 입후보 자격을 한정시킨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허엘룬을 우습게 볼까?

그럼 칭기스칸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을까?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테무진은 평생동안 조치를 큰아들로 대했다. 맏아들의 권위를 언제나 누렸고,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는 언제나 대규모 군단을 이끌며 중요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어찌되었던 조치는 의심할 수 없는 칭기스칸의 장자였다.

칭기스칸은 몽골 통일 과정에서 조치에게 메르키트 정복 임무를 맡겼다. 조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메르키트 정복 전쟁에서 조치는 포로가 된 한 적장에게 마음이 끌렸다. 조치는 적장의 마음을 돌려 휘하 장수로 삼고 싶었다. 조지는 칭기스칸에게 허락을 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때 칭기스칸은 조치에게 메르키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칭기스칸이 복수심에만 사로잡혔던 것 같지는 않다. 허엘룬이 훗날 메르키트 부족 아이를 양자로 들였는데 칭기스칸도 그 아이를 친자식과 다름없이 대했다고 하니 말이다.

"봉황의 높은 뜻을 잡새가 어찌 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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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길, <몽골비사역주>1, 두솔, 1997.
Morgan, David, The Mong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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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와 용사의 이야기

그는 도망치고 있다. 잡히면 죽는다. 다행히 명마를 훔친 덕분에 겨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 투멘[頭曼]은 돌아온 아들이 별로 반갑지 않은 눈치다. 원래 죽었어야 할 아들이다. 그러라고 인질로 보냈다. 약소국의 비애라고 해야하나, 작은 부인에게 정신이 나가 맏아들도 귀찮아진 걸까? 나라를 위해 아들조차 희생시키는 '구국의 결단'? 아버지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놓고는 바로 그 나라를 공격했었다. 월씨(月氏)라는 나라다. 흔히 월지국이라고 한다. '천리마'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선진국에 군사강국이다. 인질로 가있는 동안 아들은 그 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래도 살아 돌아온 아들이다. 아들에게 1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만인대장(萬人大將), 보통 만호장(萬戶長)이라고 하는 자리다. 그의 이름은 묵특(冒頓). 뜻이 뭔지는 잘 모른다. 바아타르(Baatar)라고도 하고 '복트(Bogdo)'라고 한다. 바아타르는 용사란 뜻이다.

아들은 신기한 걸 만들었다. 명적(鳴鏑)이라는 화살이다. 끝이 둥글게 되어 있어서 그걸 쏘면 새 울음 소리가 난다. 소리화살이다. 일종의 신호탄 구실을 한다. 그는 1만 명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내가 무슨 표적에 소리화살을 쏘든지 모두가 그 쪽으로 화살을 날려야 한다. 안쏘면 죽인다."

처음에는 들짐승이나 날짐승에게 소리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때마다 닥치는 대로 죽였다. 명령불복종은 죽음이다. 자기가 아끼는 말에 소리화살이 날아갔다. 주저하는 자들은 죽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소리화살을 쐈다. 이번에도 머뭇거린 자들은 어김없이 죽였다. 아버지와 사냥에 나간 아들이 소리화살을 아버지가 아끼는 말에 날렸다. 1만개의 화살이 그 말에 박혔다. 이만하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아들의 소리화살이 아버지를 향했다. 그는 계모와 이복 동생, 그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자들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單于)가 되었다. 선우는 그 나라에서 하늘의 아들을 가리킨다. 이름하여 천자(天子).

그가 훈련시킨 1만 병력은 이제 절대 복종과 충성을 생명으로 하는 최정예부대로 거듭태어났다. 1만 개의 화살이 투멘선우를 죽였으니 모두가 공범이고 한배를 탄 셈이다.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한번이면 1만 명이 언제라도 불속이라도 뛰어든다.

아직 그의 나라는 약소국이다. 서쪽엔 그가 도망쳐왔던 월지국이란 강대국이 있다. 동쪽은 더 문제다. 동호(東胡)라고만 알려져 있는 그 나라의 왕이 사신을 보냈다. 아버지가 아끼던 천리마를 요구한다. 아무리 그래도 천리마는 나라의 보배다.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줘 버렸다. 다음에 온 사신은 아내를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내주었다. 세 번째는 두나라 사이에 있는 천 여리에 이르는 땅을 내놓으란다. 신하들 중에서도 그냥 주자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던 땅이다. 묵특은 땅을 주자는 신하들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전쟁이다. 그는 동호로 내달렸다. 그간 천리마며 아내까지 군소리없이 주길래 자기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한 동호의 왕이 제대로 대비를 했을 리가 없다. 묵특은 동호를 정복했다. 내친김에 쉬지 않고 서쪽으로 말을 달려 월지국도 차지해 버렸다. 수십년전에 진시황에게 빼앗겼던 땅도 되찾았다. 이제 묵특은 최강대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그 힘으로 중국의 한(漢)나라를 공격했다. 유라시아 역사에서 절대 잊혀질 수 없는 이름, 훈나(Hun-na). 그 흉노(匈奴)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긴 혼란기를 끝내고 한나라가 막 통일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초창기. 기틀이 제대로 잡혔을리 없다. 지방 곳곳에 강대한 세력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 황제 '유방'의 동지들이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언제 칼을 빼들지 모른다. 하나씩 하나씩 토사구팽이 진행되었고, 심심찮게 반란도 일어났다. 그 중에는 묵특에게 투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방도 능력있는 사람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릴 만한 식견이 없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다. 기원전 201년 드디어 묵특은 중국을 공격했다. 유방은 직접 32만의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다. 자신감이 생긴 유방은 계속해서 전진을 거듭했다.

평성(平城)이라는 군사 요충지가 있다. 지금의 대동(大同)으로, 북경 서쪽에 있는 공업중심지이다. 평성을 빼앗기면 황하의 북쪽 땅이 모조리 위험해진다. 평성까지 진격한 유방은 근처 백등산(白登山)에서 묵특에게 포위당했다. 그간에 유방이 전투에 이긴 것은 모두가 묵특의 계략이었다. 거기에 속아 유방은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주력부대가 도착하려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유방은 백등산에서 이레를 포위당한 채 꼼짝못하고 있었다. 유방은 묵특의 상대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묵특의 군대는 40만이었다고 전한다. 물론 모두가 기병이다. 묵특은 모든 군대를 말색깔에 따라 다섯으로 나누었다. 동쪽은 얼룩말(검은 털과 흰 털이 섞인 말), 서쪽은 흰 말, 남쪽은 절따말(붉은 말), 북쪽은 가라말(검은 말)이다. 그와 함께 화살을 날렸던 1만의 용사들이 지금은 40만으로 늘어나 있다.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위기에서 벗어나 장안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록에는 유방이 알씨(閼氏; 선우의 아내, 곧 황후를 가리키는 말)에게 뇌물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다. 전투도 없이 다잡은 적장을 풀어준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그것도 전투한번 하지 않고. 40만의 대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뇌물을 갖고 알씨를 만난다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묵특 몰래 그 일이 가능할까? 소리화살 하나에 묵특이 아끼는 여자까지 주저없이 죽이는 군사들을 뚫고? 백등산 전투 후에도 묵특은 여러번 한나라를 공격했고, 결국 한나라는 묵특과 화친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화친이 목적이라면 백등산에서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가지 더, 백등산 전투는 결코 전면전이 아니었다. 일종의 맛뵈기일 뿐. 전면전은 그 후로 70여년 후에 벌어진다.

흉노와 한 사이에 맺은 조약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한나라에서 종실(宗室)의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해마다 흉노에게 솜, 비단, 술, 쌀과 여타의 물자를 제공하며, 흉노와 한은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분명한 건 흉노가 한나라를 압도했고, 한나라에서 해마다 흉노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한의 공주를 흉노에 시집 보내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고대인의 눈으로 보면 여자는 일종의 전리품일 뿐이다. 그 여자가 공주라면, 체면때문에라도 막대한 혼수품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많은 조공품을 모두 어디에 사용했을까? 흉노가 야만인이나 오랑캐라는 편견을 지녔다면 대답은 뻔하다. 한나라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주가 흉노로 시집을 가서 그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다음 선우가 되고, 한나라의 좋은 물건들을 쓰게 되면 저 북쪽의 야만족들이 중화의 높은 문화를 동경하게 될 거고, 그러다보면 오랑캐의 힘도 미약해져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될 거라고. 그러나 그런 일은 미몽에 지나지 않았다. 비단을 예로 들어보자. 흉노가 한창 잘나갈 때도 비단은 생활필수품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당시 흉노로 망명했던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흉노의 선우조차 비단옷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에 20-30%정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장건이란 사람이 서역에서 수십년간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와 한무제에게 서역의 상황을 보고했고, 그 때부터 동서교류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인 최초로 장건이 서역을 여행하기 전에 이미, 흉노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왕래를 하고 있었다. 흉노가 동서교역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던 것이다. 한나라에서 받은 조공품이 큰 교역품 구실을 했다. 한나라의 조공품이 흉노를 통해 서역으로 수출되는 구조였다. 훗날 한무제가 서역을 공격하여 그 연결로를 차단하자 흉노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묵특은 인질로 가 있으면서 월지국에서 무었을 보았을까? 혹시 동서교역과 문화교류의 현장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20세기 중반 어느 날, 몽골 수도 울란바아타르의 북쪽 노욘올이란 곳에서 흉노의 '떼무덤'이 발견되었다. 흉노 귀족의 묘에서 수 많은 중국 비단과 서역 물품이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는 흉노인의 초상화도 있었는데, 흉노하면 사람의 탈을 쓴 짐승같은 놈들(人面獸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그림을 권해주고 싶다. 악몽 같은 번역이 유일한 흠인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유목민이 본 세계사}에 삽화로 나와있는 그림이다.

 

Last Updated: 20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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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Jada), 날씨를 내맘대로

1232년 1월 당시 금나라의 서울인 개봉의 서남쪽 삼봉산(三峰山). 이 곳에서 몽골군과 15만의 금나라군이 나라의 운명을 걸고 맞붙었다. 몽골군 총사령관은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톨로이(Tolui). 금나라는 완안합달(完顔哈達)이었다. 당시 몽골군의 병력은 1만 3천이라고도 하고, 4만이라고도 한다.
몽골군은 참호를 파고 말과 몸을 숨겼다. 계속된 폭설로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금나라 군대는 사력을 다해 공격을 거듭했지만 큰 타격을 입히지도 못한 채 추위와 허기로 급격히 전력이 약해져 버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몽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금나라의 최정예 부대는 전멸했다. 금나라는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렸다.

왜 톨로이는 참호를 파고 말과 몸을 숨기는 작전을 썼을까? 기병전은 참호전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폭설이 내릴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럼 완안합달은? 흔히 일칸국이나 일한국으로 알려진 훌레구 올로스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알-딘이 14세기 초에 완성한 <집사>라는 책에는 당시 톨로이가 인위적으로 폭설이 내리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다석(石)을 물 속에 집어넣고 비비면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렸다. 한여름에도 곧 바람이 일어나 날씨가 추워지면서 눈이 내린다. 몽골군 가운데에 이 술법에 정통한 한 '캉리' 사람이 명령을 받들어 주술을 시행했다." 그래서였을까? "키타이(금나라)군대는 들판에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노출된 채로 있었"고 승패는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뭄이 들 때 비를 부르는 의식인 기우제는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지역에 따라 무척이나 다양하다. 몽골에서는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비슷한 구실을 하는 오보에 경건하게 기도를 드린다. 지금은 맥이 끊어져 버린 기우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1232년 금나라의 15만 대군을 전멸시켰다는 '자다(Jada)'이다.

물·바람·구름 같은 것들을 '무조건' 농경민족의 상징인 것처럼 보통 얘기하지만 솔직히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물·바람·구름은 유목민이든, 뱃사람이건 모두에게 죽고 사는 걸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다. 몽골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날씨에 굉장히 민감하다. 초원지대인 몽골의 기후는 한마디로 변화무쌍 그 자체다.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때에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면 가축들이 먹이를 구할 수 없어 폐사하는 경우가 생긴다. 몽골에선 이런 경우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돌발적인 기상이변으로 유목제국이 멸망직전의 위기에 내몰린 적도 많았다.

전쟁을 할 때도 날씨는 중요한 변수이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공격할 때는 대개 가을과 겨울이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봄에 북방민족을 공격하기 시작해 가을에 귀환한다. 겨울이 되면 강이 얼어붙어서 북방민족의 기병부대가 기동력을 살릴 수 있다. 침입을 받았을 때에는 적을 후방으로 유인하면서 매복과 기습을 거듭하며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날씨는 큰 변수가 된다. 차강조드(Chagan jud)라고 부르는 겨울철의 폭설이나, 폭우와 강풍은 전투의 승패를 한순간에 바꿔버릴 정도로 무서운 재앙이다. 날씨는 우세한 전력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고,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다. 날씨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비법이 히트를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다는 비바람을 부르는 주술법이고, 거기에 쓰이는 것이 자다석이다. 자다석은 동물의 결석(結石)으로 만드는 데 특히 콩팥에서 얻은 자다석이 가장 효험이 크다. 돌궐계 민족에서 시작된 걸로 보이는 이 비법은 초원의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비바람, 서늘한 기운, 눈, 안개, 우박, 서리 따위를 부르거나 구름을 쫓아버리는 데 애용되었다.

자다를 부리는 절차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다석에 주문을 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다석에 피와 주문을 결합시킨 절차이다. 자다석과 주문이 결합한 방식이 더 일반적이라고 한다.

주문은 매우 다양하다. 현지의 지배적인 종교와 결합한다. 지배적인 종교의 신이 가장 힘이 센 신이라고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글쓴이도 어린 시절 "지금 세상엔 예수귀신이 가장 힘이 세다"는 말을 마을 할머니들한테 들은 적이 많다. 불교가 강한 지역에서는 다라니경같은 불경을, 이슬람교 지역에선 꾸란의 한 구절을 외운다.

가장 기본적인 용도인 비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할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자다석을 물 속이나 물 단지에 넣고 주문을 외우기, 자다석을 버드나무 가지에 맨 다음 물단지에 담그거나 물단지 위에 드리워 놓고 주문을 외우기, 자다석을 자루에 넣은 뒤 말 고리에 매달아 주문을 외우기, 마지막으로 자다석에 동물의 피를 칠한 뒤 주문을 외우기.

물을 돈 쓰듯 하는 우리나라에서 올해는 가뭄 때문에 유난히도 고생을 많이 했다. 해서 이 글에서는 비를 부르는 비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1801년에 채록된 내용이다.

"비를 부르려 할 때는 기도가 끝난 뒤 물 한컵 정도 들어가 있는 단지에 자다석을 집어 넣고 비를 비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다석과 물을 동시에 끼얹는다. … 자다석을 물에 집어넣으면 소용돌이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 단지에 들어있는 물은 모두 끓어오르는 모습처럼 움직인다. 이 때 적합한 다라니경을 외우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 경건하게 필요한 주문을 오백번 외우면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바람을 부를 때도 위의 세 번째와 같은 방법을 쓴다. 한여름에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자다석을 자신의 허리띠에 매단다. 비나 바람을 부르는 방법을 겨울에 쓰면 눈을 부를 수 있다. 특히 겨울에 눈을 부르는 건 군사적으로 아주 유용하다. 구름을 쫓아버리는 방법도 있다. <동방견문록>에는 "칸이 대나무 궁전에 머물 때 악천후의 날이 있으면 칸을 섬기는 현명한 점성사나 요술사가 구름이나 악천후를 쫓아 버린다. 그 결과 궁전의 날씨만 금방 좋아지고 악천후는 모조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린다. 이런 요술에 능한 자들을 '박시'라고 부른다."라고 적고 있다. (박시는 오늘날 몽골어에서 선생이란 뜻인데, 샤만 즉 무당을 뜻하는 베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자다를 하는 사람을 자다치(Jadachi)라고 부른다. 자다치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전통적인 샤만(Shaman)이다. 둘째로 나중에 다른 종교가 전파되고 샤만의 지위를 대신하게 된 이슬람교나 라마교 등의 사제들. 마지막으로 비법을 전수 받은 일반인들이다. 일반인들 중에는 아요르-시리다라(Ayur Shiridara)같은 왕자도 있다. 몽골의 역사서인 <알탄 톡치(황금사)>에는 그가 어느 전투에서 자다를 이용해 명나라의 군대를 전멸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요르-시리다라는 토곤테무르카간[順帝]과 고려출신 기황후(奇皇后)사이에 태어나 1370년 카라코롬에서 대원(大元)의 카간이 되었던 인물이다.

자다는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무척 애용되었던 비법이다. 뭐든 마찬가지지만 이것도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돌팔이 자다치가 없으란 법도 없다. 일단 구름이나 바람 등을 유심히 관찰해서 언제쯤 비가 올지 감을 잡으면 '쇼'를 부릴 수도 있다. 실패하면 "날씨가 너무 더워 비의 힘이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고 핑계를 대기도 한다. 하지만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그런 실수나 실패는 그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재앙이다.
1202년 테무진과 쿠이텐이란 곳에서 맞붙은 적군의 우두머리들이 자다를 쓴 적이 있었다. 비바람을 불러냈다. 태풍 '도라지'가 울고 갈 정도로 힘도 좋다. 근데 자기들 쪽으로 휘몰아쳤다. 전진도 못하고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질 지경이었다.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대열은 붕괴되었다. 승부는 판가름났다. 우두머리 둘은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곤 도망쳤다.
상황 종료...

끝으로 실크로드의 한 중심지였던 중앙아시아의 어느 도시유적에서 시를 한편 소개하고자 한다. 그 시에는 술고래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여인의 슬픔이 잘 나타난다.

"피가 자다에 닿으면 비가 내리듯이
술이 당신의 붉은 입술을 적실 때
나의 눈물은 비처럼 흘러내린다"



※이 글은 박원길 선생님의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민속박물관, 1998)에 실린 [자다(Jada)제]라는 글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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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릴타 혹은 쿠릴타이의 기원

흔히 쿠릴타이로 알려져 있는 몽골제국의 코릴타는 흉노이래 북방민족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보인다. 그 최초의 예는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이다. 오환은 "마땅히 용감하고 건장하며, 판결을 다투거나 서로 침범하는 문제를 이치에 맞게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추대하여 대인(yeke hun)으로 세우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선비제국을 건설했던 단석괴도 "온 부락이 두려워 복종"하고 "법을 엄하게 시행하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바로 했는데,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위치를 가진 후에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오환과 선비에서 칸을 선출하는 회의를 했다는 것과 부족간의 분쟁을 공평하게 해결하고 전쟁을 잘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을 칸으로 선출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라시아 동반부에서 최초로 건설된 유목제국인 흉노의 경우 코릴타를 통해 선우를 선출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간접적이나마 '농성의 대제(大祭)'가 선우를 선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허려권거선우((B.C.E.68∼B.C.E.60) 때 우현왕이 농성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우현왕과 간통한 사이였던 카톤(Khatun, 황후) 전거알씨가 선우의 병이 심하다며 멀리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농성의 대제' 혹은 '용성의 대제(龍城大祭)'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도 "흉노의 풍속은 해마다 세 군데 용사(龍祠)가 있다. 항상 정월, 오월, 구월의 5일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남[흉노의] 선우가 귀순한 다음부터는 한나라 황제도 같이 제사지낸다. 모든 부족이 모이기 때문에 나랏일을 의논하고 말달리기와 낙타[싸움]을 즐긴다."라든가 "안국(安國) 선우(C.E.93-C.E.94)가 용성에서 대회를 열어 나랏일을 의논할 때마다 안국선우의 정적이었던 좌현왕 '사자(師子)'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흉노의 속국인 오손(烏孫)의 왕이 농성의 대제에 참석하지 않자 흉노에서 군대를 보내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5월에 열리는 집회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를 보여준다. 히라토리(白鳥庫吉)나 內田吟風은 5월에 열리는 농성의 회의가 이성제후(異姓諸侯)와 속부(屬部)의 부족장이 모두 참가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닌다고 단정한다. 그 이유는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최고 지배자인 선우에게 충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는 몽골제국의 코릴타와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위의 기록을 통해 흉노에서 매년 봄에 있었던 '농성의 대제'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선우를 선출하거나 계승을 공식적으로 인준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였다. 국가의 최고 재판정이기도 했다. 몽골제국의 경우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농성의 대제'를 일종의 코릴타로 간주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코릴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학자인 箭內亘은 더 나아가 "두만 선우" 이전의 흉노와 동호(東胡)의 경우에도 코릴타와 같은 전통이 있었다고 보고 있는데 글쓴이도 이에 동감한다.

능력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는 그 부족이나 국가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코릴타에서 후보자의 능력을 검증하고 모두가 그 후보자를 승인하는 절차는 흉노 이래의 '제한된 공채'를 통한 '적임자 계승제도'를 체계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대카한은 제실들의 호선방식으로 선발되었다. 몽골이라는 공동체와 국가의 행복을 가장 잘 지도할 것이라고 인정받은 사람이 선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게 택해진 대카한은 그의 직분을 수행하는 한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었다. 결코 태어나면서 절대전제군주였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몽골대카한 개인이 개인적으로 발휘하는 권한은 극히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 어디까지나 성원의 여망과 당사자의 능력 본위로 선출되고, 선출된 한 전체를 무조건적으로 통솔한다. 그러나 그 권력은 카한 일대에 제한된다. 다른 카한이 즉위하면 중앙정부를 비롯하여, 모든 기구의 면모는 변화한다. 이전 카한의 특허장은 무효가 되고, 새롭게 주어지지 않으면 종래와 같은 권익을 가지기 어렵다. 대카한의 교체는 왕조의 교체와 비슷하다" (스기야마 마사아키,『몽골세계제국』에서)

우리는 흉노 이래로 북방민족에게서 발견되는 제천행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흉노의 예에서 살펴보았듯이 각 집단의 우두머리가 모두 모여 서로의 분쟁을 해결하여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내와 국외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며 후계자를 검증하는 자리가 바로 제천행사였다. 새 풀이 돋는 4월이나 마유주가 산출되는 5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제천행사를 살펴 볼 때, 코릴타는 이 제천행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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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길,『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옮김,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김호동,<고대유목국가의 구조>,『강좌중국사』2,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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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Khan)

"카간(可汗)이 (뮬란에게) 바라는 바가 뭐냐고 묻는데, 뮬란이 대답하길, '상서랑(尙書郞)의 벼슬도 싫소. 원컨대 명타천리족(明駝千里足)을 빌려주어 나를 고향으로 보내주오.'"

이 시는 북위(北魏)에서 유행하던 "뮬란시(木蘭詩)"이다. 뮬란이라는 한 소녀가 아버지를 대신해 남자처럼 꾸미고 전쟁에 나가 용감히 싸웠던 무용담을 담은 것이다. 몇 해 전에 디즈니에서 만든 악몽 같은 영화, "뮬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 시에서는 북위황제를 카간이라 불렀다. 왜 그럴까? 중국인들은 황제란 칭호를 쓰고, 칸이나 카간이란 칭호는 북방오랑캐나 쓰는 표현이 아니었나? 북위를 세운 건 타브가치(Tabgachi)라는 북방민족이었다. 흔히 지배민족인 타브가치가 한족의 '높은 문화수준'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북위에서조차 카간이라는 호칭은 살아있었다. 북위를 세웠던 타브가치는 보통 탁발선비(拓拔鮮卑)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내몽골 흥안령산맥 북쪽의 알선동이란 동굴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지는 민족이다.

칸이라는 칭호가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오래된 일이다. 부여나 고구려의 가(加), 백제의 하(瑕), 가야의 한기(旱岐), 거란의 가(呵)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칸은 선비족(鮮卑族)이나 맥족(貊族)계통의 민족들에서 지도자나 수장(首長)을 뜻하는 칭호였다. <자치통감>의 주석에는 "카간은 북방의 존칭이다. 한나라 때의 선우와 같다. 송백(宋白)은 '북방민족의 풍속은 하늘을 칸(汗)이라 부른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방의 유목제국에서 최고통치자를 부르는 최초의 칭호는 흉노의 선우(單于)였다. <사기>에 보면 선우란 '넓고 크다(單于者, 廣大之貌)'는 뜻이다. 흉노의 최고통치자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 선우"라고 불렀다. 한때 흉노가 한(漢)나라에게 조공을 받으면서 선우란 칭호는 중국의 "황제" 이상의 위상을 가졌다. 하지만 흉노가 분열되고, 일부는 후한(後漢)에 명목상으로나마 예속되면서 선우의 위상은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선비족과 맥족 계통의 민족들이 북방을 제패하면서 칸계통의 칭호가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태종 이세민도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이라 하여 중국인에게는 황제였고, 북방민족에게는 카간이었다. 몽골인들은 금나라 황제를 알탄칸(Altan Khan)이라 불렀고(몽골어로 알탄은 금이란 뜻), 청나라 황제도 몽골을 비롯한 북방민족에게는 카간이었다.

그럼 카간(Khagan)과 칸(Khan)은 어떻게 다를까? 종래 많은 학자들이 중국의 역사책에 기록된 돌궐의 경우를 들어, "칸은 소부족장, 카간은 대부족장"이라고 단정지어 왔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내몽골 출신의 역사학자들인 하칸촐로(Hakanchulu)나 작치드-세첸(Jagchid-Sechen)에 따르면 칸은 카간의 준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인 어거데이카간이 공식적으로 둘을 구분했다. 그때부터 청나라까지 카간과 칸은 대소의 구별을 갖게 되었다. 카간은 황제, 칸은 제왕(諸王)정도로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하지만 실제 말을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카간은 13세기 후반기부터 Khagan〉Kha-an〉Khaan으로 발음이 바뀌고 지금에 와서는 '하안'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칸은 현대몽골어에서 '한'으로 발음한다. 장모음과 단모음 차이밖에 없기 때문에 발음으로 구별하기가 애매해졌다.

그렇더라도 카간과 칸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몽골시대 문서에서도 카간과 칸은 명확하게 구분되었으며, 대원(大元)의 '황제'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카간이란 칭호를 쓰지 못했다. 사실 칸이라는 칭호를 쓴 사람은 많았다. 동유럽원정으로 유명한 바토칸, 코빌라이카간에 대항했다는 카이도칸, 훌레구 올로스(올로스는 나라라는 뜻의 몽골어)의 훌레구칸, 유럽에도 잘 알려진 카잔칸이나 울제이투칸... 카간과 칸을 구별하지 않으면, 마치 이들이 동격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생긴다.

칭기스칸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칸이나 카간을 구별하지 않고 썼다. 물론 <몽골비사> 202절의 "칭기스카간에게 칸이라는 칭호를 그곳에서 주었다"는 기록과 같이, 칸이 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칭기스카간이란 표현은 후대에 나왔다. 그래서 <몽골비사>의 첫 구절은 "칭기스카간의 근원은 위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던 버르테-치노이다."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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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길, <몽골비사역주>1, 두솔, 1997, 35-38쪽.
--- ,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15-18쪽.
박한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 일조각, 1988, 70-176쪽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옮김,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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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경찰 과반수가 경찰대 폐지 찬성

현직 경찰들 과반수가 과도한 정원으로 인한 인사적체를 경찰대학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안으로는 ‘폐지 후 재교육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높았다. 이런 설문결과는 경찰대학 존폐론이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경찰대학 폐지론에 적잖은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의뢰해 전국 경찰 2백54명을 대상으로 지난 9월5일부터 9일까지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9월 22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행정자치부 국정감사에서 공개하며 ‘경찰대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했다. 경찰대학 존폐를 현직 경찰에게 묻는 설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설문결과에 따르면 경찰대 폐지에 대해 찬성한다는 대답이 56.0%로 반대한다는 41.2%보다 높았다. 특히 직위와 출신별로 상반된 입장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폐지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비간부급(64.3%)에서 특히 높게 나왔다. 경찰대 출신과 간부 후보생 경정 이상 직급에서는 '반대한다'는 응답이 월등히 높았으나, 경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 경사급 이하에서는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64.6%로 나타나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33.1%보다 2배가까이 높았다.

경찰대학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는 ‘과도한 정원으로 인한 인사 적체’(53.8%)와 ‘경찰대 출신의 폐쇄성’(44.8%), ‘이로 인한 경찰 조직 내부의 마찰과 위화감’(46.8%) 등을 지적한 응답이 높았다. 특히, 과반수의 응답자들이 경찰대 문제의 가장 핵심으로 '과도한 정원'을 지적한 점이 주목된다.

경찰대 현행유지 18.5% 그쳐

향후 경찰대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폐지 후 재교육기관 전환’이 34.8%로 가장 높았고  ‘현행대로 유지’는 18.5%에 불과했다. ‘입학정원 대폭축소’는 17.8%, ‘폐지 후 경찰고시제 신설’ 15.8%, ‘대학원제 전환’ 10.2% 순이었다. 경찰대학 폐지 여부와 마찬가지로 직급에 따라 대답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간부들은 ‘유지’ 형태를 비간부는 ‘폐지’ 형태를 선호하는 것이다.

경찰대학을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에도 불구하고 경찰대학이 그동안 경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높았다. 경찰대학이 인재유입과 경찰의 이미지를 쇄신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는 응답이 76.4%에 이르렀다. 특히 간부(90.7%), 수사 분야 경찰관(84.6%), 20대(82.4%), 30대(80.8%)에서 높은 응답이 나왔다.

경찰대 출신 간부의 업무능력에 대해서도 다른 간부와 비슷하다는 응답이 44.4%, 더 뛰어나다는 응답이 48.3%로 높게 나타났다. 경찰대 출신 간부들의 지휘능력에 대해서는 여타 간부들과 비슷하다는 응답이 52%로 나타난 가운데 뛰어나나 27.8%, 미흡하다 19.9%로 나타났으며 경찰대 출신 간부의 인성에 대해서도 비경찰대 출신 간부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평가가 48.4%로 나타났다.

최 의원은 이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9월 26일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경찰대학이 조직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제는 시대여건이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최 의원은 “경찰이 수사권조정을 주장하는 것은 검찰이 수사권을 독점하는 폐해를 극복하고 견제와 균형을 이루자는 취지”라며 “마찬가지로 경찰 안에서도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찰대학을 설립할 당시에는 대졸 순경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순경 대부분이 대졸자이고 경찰관련 학과가 75개를 넘어 경찰대 설립취지가 사라졌다”며 “이제는 순경출신 가운데 우수인력을 선발해서 교육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 하위직 자질향상이 엘리트 양성보다 중요하다”며 “경찰은 병영에서 생활하는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대학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인력이 경찰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허 청장은 “육군을 대상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대해 질문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며 “해마다 경위로 승진하는 경찰이 2천명 가량 되는데 그 중 경찰대학 출신 120명은 우려할 만한 숫자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는 “앞으로는 순경으로 입직해도 자기만 열심히 하면 3-4년 안으로 경위가 될 수 있도록 승진제도를 보완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경찰대학을 대학원 중심으로 하면서 순경출신을 일정수 입학시키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가운데 78%에 이르는 경찰관이 경찰노조 설립에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출신별로 대답은 엇갈렸다. 경찰대 출신과 경사 이하 출신 경찰관들은 노조 설립에 대해 '찬성한다'는 입장이 우세한 반면 간부후보생 출신들은 반대한다는 입장이 우세했다. 계급별로는 비간부급(82.9%), 연령대로는 30대(83.5%)에서 높게 나타났으며 경찰대 폐지 찬성자의 81.7%가 경찰노조 설립을 찬성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9월 29일 오후 16시 4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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