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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민주적 계급사회’로 가고 있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리’는 시민운동의 비운동화와 체제내화를 의미한다. 계급사회라는 현실에 맞서지 않고 투명성과 민주성에 매달리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지난 9월 29일 참여연대 시민강연회에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시민운동의 딜레마’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개념어를 많이 쓰고 새로운 용어를 많이 만들어내는” 그의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다. 대신 조 교수는 ‘21세기 시민운동과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수많은 화두를 던져 주었다. 바로 “정치적민주화에서 사회적민주화로 시민사회운동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공공성 의제 강화”가 놓여 있다. 53년체제-61년체제-87년체제로 한국사회 변화를 구분한 조희연 교수는 “민주개혁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87년체제는 이제 전환적 위기의 양상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가 보기에 87년체제는 양면적 성격이 있다. 그것은 6월항쟁과 6.29선언으로 상징되는 양면성이다. 시민운동은 87년체제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민주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주체로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시민운동의 정점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였다. “정점에 올랐다는 것은 다시 말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민주개혁 자체가 갖는 내재적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면서 민주화와 지구화가 결합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진단이다. 조 교수는 이를 “투명하게 민주적인 계급사회”라는 다소 모순돼 보이는 용어로 설명했다. 조 교수는 “개혁의 진전과 민주개혁의 내재적 한계에서 오는 병목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민주개혁은 정치개혁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투명성과 민주성만으로는 진보가 실현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보기에는 정치개혁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별다른 고민이 없다”며 “시민운동 스스로 진보성을 거세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조 교수는 민주개혁 담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정치적 민주주의 운동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가 보기에 과거 ‘독재 대 반독재 대립구도’는 ‘시장사회 실현 대 공공성 실현’ 대립구도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시기 ‘보수 대 진보’의 핵심구도를 이룬다. 가령 평준화 논쟁은 “공공성 확장을 통해서 교육이 계급적 불평등 재생산의 기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운동과 계급적 불평등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교육체제를 재편하도록 요구하는 운동 사이에 벌어지는 각축”이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조 교수는 먼저 “정치경제적 의제에 집중하는 운동에서 문화적·생활세계적·지역풀뿌리 의제로 확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나 스스로 죽을 때 내 재산을 우리가 비판했던 독재세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자.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내 친구 가운데 5.18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사원 수십명을 거느린 사장이다. 가끔 우리가 비판했던 기업주의 모습과 내 친구가 얼마나 다른지 의문이 든다.” 그러면서도 조 교수는 “최후의 반개혁적 영역에서의 민주개혁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재 대 반독재’ 전선의 경계를 허물어 반독재세력의 폐쇄적 연대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전선’을 창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령 조선일보는 친일이나 독재적 유산과 유착된 신문에서 점차 ‘민주적 계급사회’의 상층계급, 자본가 일반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적 신문’으로 성격을 전환했다. 친일이나 독재 문제로만 조선일보를 보면 일면만 보는 것이다. 조선일보 반대운동조차 새로운 대립전선을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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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30일 오후 17시 1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
그는 도망치고 있다. 잡히면 죽는다. 다행히 명마를 훔친 덕분에 겨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 투멘[頭曼]은 돌아온 아들이 별로 반갑지 않은 눈치다. 원래 죽었어야 할 아들이다. 그러라고 인질로 보냈다. 약소국의 비애라고 해야하나, 작은 부인에게 정신이 나가 맏아들도 귀찮아진 걸까? 나라를 위해 아들조차 희생시키는 '구국의 결단'? 아버지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놓고는 바로 그 나라를 공격했었다. 월씨(月氏)라는 나라다. 흔히 월지국이라고 한다. '천리마'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선진국에 군사강국이다. 인질로 가있는 동안 아들은 그 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래도 살아 돌아온 아들이다. 아들에게 1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만인대장(萬人大將), 보통 만호장(萬戶長)이라고 하는 자리다. 그의 이름은 묵특(冒頓). 뜻이 뭔지는 잘 모른다. 바아타르(Baatar)라고도 하고 '복트(Bogdo)'라고 한다. 바아타르는 용사란 뜻이다.
아들은 신기한 걸 만들었다. 명적(鳴鏑)이라는 화살이다. 끝이 둥글게 되어 있어서 그걸 쏘면 새 울음 소리가 난다. 소리화살이다. 일종의 신호탄 구실을 한다. 그는 1만 명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내가 무슨 표적에 소리화살을 쏘든지 모두가 그 쪽으로 화살을 날려야 한다. 안쏘면 죽인다."
처음에는 들짐승이나 날짐승에게 소리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때마다 닥치는 대로 죽였다. 명령불복종은 죽음이다. 자기가 아끼는 말에 소리화살이 날아갔다. 주저하는 자들은 죽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소리화살을 쐈다. 이번에도 머뭇거린 자들은 어김없이 죽였다. 아버지와 사냥에 나간 아들이 소리화살을 아버지가 아끼는 말에 날렸다. 1만개의 화살이 그 말에 박혔다. 이만하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아들의 소리화살이 아버지를 향했다. 그는 계모와 이복 동생, 그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자들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單于)가 되었다. 선우는 그 나라에서 하늘의 아들을 가리킨다. 이름하여 천자(天子).
그가 훈련시킨 1만 병력은 이제 절대 복종과 충성을 생명으로 하는 최정예부대로 거듭태어났다. 1만 개의 화살이 투멘선우를 죽였으니 모두가 공범이고 한배를 탄 셈이다.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한번이면 1만 명이 언제라도 불속이라도 뛰어든다.
아직 그의 나라는 약소국이다. 서쪽엔 그가 도망쳐왔던 월지국이란 강대국이 있다. 동쪽은 더 문제다. 동호(東胡)라고만 알려져 있는 그 나라의 왕이 사신을 보냈다. 아버지가 아끼던 천리마를 요구한다. 아무리 그래도 천리마는 나라의 보배다.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줘 버렸다. 다음에 온 사신은 아내를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내주었다. 세 번째는 두나라 사이에 있는 천 여리에 이르는 땅을 내놓으란다. 신하들 중에서도 그냥 주자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던 땅이다. 묵특은 땅을 주자는 신하들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전쟁이다. 그는 동호로 내달렸다. 그간 천리마며 아내까지 군소리없이 주길래 자기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한 동호의 왕이 제대로 대비를 했을 리가 없다. 묵특은 동호를 정복했다. 내친김에 쉬지 않고 서쪽으로 말을 달려 월지국도 차지해 버렸다. 수십년전에 진시황에게 빼앗겼던 땅도 되찾았다. 이제 묵특은 최강대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그 힘으로 중국의 한(漢)나라를 공격했다. 유라시아 역사에서 절대 잊혀질 수 없는 이름, 훈나(Hun-na). 그 흉노(匈奴)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긴 혼란기를 끝내고 한나라가 막 통일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초창기. 기틀이 제대로 잡혔을리 없다. 지방 곳곳에 강대한 세력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 황제 '유방'의 동지들이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언제 칼을 빼들지 모른다. 하나씩 하나씩 토사구팽이 진행되었고, 심심찮게 반란도 일어났다. 그 중에는 묵특에게 투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방도 능력있는 사람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릴 만한 식견이 없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다. 기원전 201년 드디어 묵특은 중국을 공격했다. 유방은 직접 32만의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다. 자신감이 생긴 유방은 계속해서 전진을 거듭했다.
평성(平城)이라는 군사 요충지가 있다. 지금의 대동(大同)으로, 북경 서쪽에 있는 공업중심지이다. 평성을 빼앗기면 황하의 북쪽 땅이 모조리 위험해진다. 평성까지 진격한 유방은 근처 백등산(白登山)에서 묵특에게 포위당했다. 그간에 유방이 전투에 이긴 것은 모두가 묵특의 계략이었다. 거기에 속아 유방은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주력부대가 도착하려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유방은 백등산에서 이레를 포위당한 채 꼼짝못하고 있었다. 유방은 묵특의 상대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묵특의 군대는 40만이었다고 전한다. 물론 모두가 기병이다. 묵특은 모든 군대를 말색깔에 따라 다섯으로 나누었다. 동쪽은 얼룩말(검은 털과 흰 털이 섞인 말), 서쪽은 흰 말, 남쪽은 절따말(붉은 말), 북쪽은 가라말(검은 말)이다. 그와 함께 화살을 날렸던 1만의 용사들이 지금은 40만으로 늘어나 있다.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위기에서 벗어나 장안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록에는 유방이 알씨(閼氏; 선우의 아내, 곧 황후를 가리키는 말)에게 뇌물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다. 전투도 없이 다잡은 적장을 풀어준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그것도 전투한번 하지 않고. 40만의 대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뇌물을 갖고 알씨를 만난다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묵특 몰래 그 일이 가능할까? 소리화살 하나에 묵특이 아끼는 여자까지 주저없이 죽이는 군사들을 뚫고? 백등산 전투 후에도 묵특은 여러번 한나라를 공격했고, 결국 한나라는 묵특과 화친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화친이 목적이라면 백등산에서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가지 더, 백등산 전투는 결코 전면전이 아니었다. 일종의 맛뵈기일 뿐. 전면전은 그 후로 70여년 후에 벌어진다.
흉노와 한 사이에 맺은 조약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한나라에서 종실(宗室)의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해마다 흉노에게 솜, 비단, 술, 쌀과 여타의 물자를 제공하며, 흉노와 한은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분명한 건 흉노가 한나라를 압도했고, 한나라에서 해마다 흉노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한의 공주를 흉노에 시집 보내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고대인의 눈으로 보면 여자는 일종의 전리품일 뿐이다. 그 여자가 공주라면, 체면때문에라도 막대한 혼수품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많은 조공품을 모두 어디에 사용했을까? 흉노가 야만인이나 오랑캐라는 편견을 지녔다면 대답은 뻔하다. 한나라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주가 흉노로 시집을 가서 그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다음 선우가 되고, 한나라의 좋은 물건들을 쓰게 되면 저 북쪽의 야만족들이 중화의 높은 문화를 동경하게 될 거고, 그러다보면 오랑캐의 힘도 미약해져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될 거라고. 그러나 그런 일은 미몽에 지나지 않았다. 비단을 예로 들어보자. 흉노가 한창 잘나갈 때도 비단은 생활필수품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당시 흉노로 망명했던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흉노의 선우조차 비단옷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에 20-30%정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장건이란 사람이 서역에서 수십년간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와 한무제에게 서역의 상황을 보고했고, 그 때부터 동서교류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인 최초로 장건이 서역을 여행하기 전에 이미, 흉노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왕래를 하고 있었다. 흉노가 동서교역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던 것이다. 한나라에서 받은 조공품이 큰 교역품 구실을 했다. 한나라의 조공품이 흉노를 통해 서역으로 수출되는 구조였다. 훗날 한무제가 서역을 공격하여 그 연결로를 차단하자 흉노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묵특은 인질로 가 있으면서 월지국에서 무었을 보았을까? 혹시 동서교역과 문화교류의 현장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20세기 중반 어느 날, 몽골 수도 울란바아타르의 북쪽 노욘올이란 곳에서 흉노의 '떼무덤'이 발견되었다. 흉노 귀족의 묘에서 수 많은 중국 비단과 서역 물품이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는 흉노인의 초상화도 있었는데, 흉노하면 사람의 탈을 쓴 짐승같은 놈들(人面獸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그림을 권해주고 싶다. 악몽 같은 번역이 유일한 흠인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유목민이 본 세계사}에 삽화로 나와있는 그림이다.
Last Updated: 2001/11/7
"카간(可汗)이 (뮬란에게) 바라는 바가 뭐냐고 묻는데, 뮬란이 대답하길, '상서랑(尙書郞)의 벼슬도 싫소. 원컨대 명타천리족(明駝千里足)을 빌려주어 나를 고향으로 보내주오.'"
이 시는 북위(北魏)에서 유행하던 "뮬란시(木蘭詩)"이다. 뮬란이라는 한 소녀가 아버지를 대신해 남자처럼 꾸미고 전쟁에 나가 용감히 싸웠던 무용담을 담은 것이다. 몇 해 전에 디즈니에서 만든 악몽 같은 영화, "뮬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 시에서는 북위황제를 카간이라 불렀다. 왜 그럴까? 중국인들은 황제란 칭호를 쓰고, 칸이나 카간이란 칭호는 북방오랑캐나 쓰는 표현이 아니었나? 북위를 세운 건 타브가치(Tabgachi)라는 북방민족이었다. 흔히 지배민족인 타브가치가 한족의 '높은 문화수준'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북위에서조차 카간이라는 호칭은 살아있었다. 북위를 세웠던 타브가치는 보통 탁발선비(拓拔鮮卑)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내몽골 흥안령산맥 북쪽의 알선동이란 동굴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지는 민족이다.
칸이라는 칭호가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오래된 일이다. 부여나 고구려의 가(加), 백제의 하(瑕), 가야의 한기(旱岐), 거란의 가(呵)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칸은 선비족(鮮卑族)이나 맥족(貊族)계통의 민족들에서 지도자나 수장(首長)을 뜻하는 칭호였다. <자치통감>의 주석에는 "카간은 북방의 존칭이다. 한나라 때의 선우와 같다. 송백(宋白)은 '북방민족의 풍속은 하늘을 칸(汗)이라 부른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방의 유목제국에서 최고통치자를 부르는 최초의 칭호는 흉노의 선우(單于)였다. <사기>에 보면 선우란 '넓고 크다(單于者, 廣大之貌)'는 뜻이다. 흉노의 최고통치자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 선우"라고 불렀다. 한때 흉노가 한(漢)나라에게 조공을 받으면서 선우란 칭호는 중국의 "황제" 이상의 위상을 가졌다. 하지만 흉노가 분열되고, 일부는 후한(後漢)에 명목상으로나마 예속되면서 선우의 위상은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선비족과 맥족 계통의 민족들이 북방을 제패하면서 칸계통의 칭호가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태종 이세민도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이라 하여 중국인에게는 황제였고, 북방민족에게는 카간이었다. 몽골인들은 금나라 황제를 알탄칸(Altan Khan)이라 불렀고(몽골어로 알탄은 금이란 뜻), 청나라 황제도 몽골을 비롯한 북방민족에게는 카간이었다.
그럼 카간(Khagan)과 칸(Khan)은 어떻게 다를까? 종래 많은 학자들이 중국의 역사책에 기록된 돌궐의 경우를 들어, "칸은 소부족장, 카간은 대부족장"이라고 단정지어 왔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내몽골 출신의 역사학자들인 하칸촐로(Hakanchulu)나 작치드-세첸(Jagchid-Sechen)에 따르면 칸은 카간의 준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인 어거데이카간이 공식적으로 둘을 구분했다. 그때부터 청나라까지 카간과 칸은 대소의 구별을 갖게 되었다. 카간은 황제, 칸은 제왕(諸王)정도로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하지만 실제 말을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카간은 13세기 후반기부터 Khagan〉Kha-an〉Khaan으로 발음이 바뀌고 지금에 와서는 '하안'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칸은 현대몽골어에서 '한'으로 발음한다. 장모음과 단모음 차이밖에 없기 때문에 발음으로 구별하기가 애매해졌다.
그렇더라도 카간과 칸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몽골시대 문서에서도 카간과 칸은 명확하게 구분되었으며, 대원(大元)의 '황제'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카간이란 칭호를 쓰지 못했다. 사실 칸이라는 칭호를 쓴 사람은 많았다. 동유럽원정으로 유명한 바토칸, 코빌라이카간에 대항했다는 카이도칸, 훌레구 올로스(올로스는 나라라는 뜻의 몽골어)의 훌레구칸, 유럽에도 잘 알려진 카잔칸이나 울제이투칸... 카간과 칸을 구별하지 않으면, 마치 이들이 동격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생긴다.
칭기스칸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칸이나 카간을 구별하지 않고 썼다. 물론 <몽골비사> 202절의 "칭기스카간에게 칸이라는 칭호를 그곳에서 주었다"는 기록과 같이, 칸이 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칭기스카간이란 표현은 후대에 나왔다. 그래서 <몽골비사>의 첫 구절은 "칭기스카간의 근원은 위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던 버르테-치노이다."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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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길, <몽골비사역주>1, 두솔, 1997, 35-38쪽.
--- ,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15-18쪽.
박한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 일조각, 1988, 70-176쪽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옮김,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현직 경찰들 과반수가 과도한 정원으로 인한 인사적체를 경찰대학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안으로는 ‘폐지 후 재교육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높았다. 이런 설문결과는 경찰대학 존폐론이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경찰대학 폐지론에 적잖은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의뢰해 전국 경찰 2백54명을 대상으로 지난 9월5일부터 9일까지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9월 22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행정자치부 국정감사에서 공개하며 ‘경찰대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했다. 경찰대학 존폐를 현직 경찰에게 묻는 설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설문결과에 따르면 경찰대 폐지에 대해 찬성한다는 대답이 56.0%로 반대한다는 41.2%보다 높았다. 특히 직위와 출신별로 상반된 입장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폐지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비간부급(64.3%)에서 특히 높게 나왔다. 경찰대 출신과 간부 후보생 경정 이상 직급에서는 '반대한다'는 응답이 월등히 높았으나, 경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 경사급 이하에서는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64.6%로 나타나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33.1%보다 2배가까이 높았다. 경찰대학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는 ‘과도한 정원으로 인한 인사 적체’(53.8%)와 ‘경찰대 출신의 폐쇄성’(44.8%), ‘이로 인한 경찰 조직 내부의 마찰과 위화감’(46.8%) 등을 지적한 응답이 높았다. 특히, 과반수의 응답자들이 경찰대 문제의 가장 핵심으로 '과도한 정원'을 지적한 점이 주목된다. 경찰대 현행유지 18.5% 그쳐 향후 경찰대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폐지 후 재교육기관 전환’이 34.8%로 가장 높았고 ‘현행대로 유지’는 18.5%에 불과했다. ‘입학정원 대폭축소’는 17.8%, ‘폐지 후 경찰고시제 신설’ 15.8%, ‘대학원제 전환’ 10.2% 순이었다. 경찰대학 폐지 여부와 마찬가지로 직급에 따라 대답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간부들은 ‘유지’ 형태를 비간부는 ‘폐지’ 형태를 선호하는 것이다. 경찰대학을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에도 불구하고 경찰대학이 그동안 경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높았다. 경찰대학이 인재유입과 경찰의 이미지를 쇄신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는 응답이 76.4%에 이르렀다. 특히 간부(90.7%), 수사 분야 경찰관(84.6%), 20대(82.4%), 30대(80.8%)에서 높은 응답이 나왔다. 경찰대 출신 간부의 업무능력에 대해서도 다른 간부와 비슷하다는 응답이 44.4%, 더 뛰어나다는 응답이 48.3%로 높게 나타났다. 경찰대 출신 간부들의 지휘능력에 대해서는 여타 간부들과 비슷하다는 응답이 52%로 나타난 가운데 뛰어나나 27.8%, 미흡하다 19.9%로 나타났으며 경찰대 출신 간부의 인성에 대해서도 비경찰대 출신 간부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평가가 48.4%로 나타났다. 최 의원은 이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9월 26일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경찰대학이 조직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제는 시대여건이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최 의원은 “경찰이 수사권조정을 주장하는 것은 검찰이 수사권을 독점하는 폐해를 극복하고 견제와 균형을 이루자는 취지”라며 “마찬가지로 경찰 안에서도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찰대학을 설립할 당시에는 대졸 순경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순경 대부분이 대졸자이고 경찰관련 학과가 75개를 넘어 경찰대 설립취지가 사라졌다”며 “이제는 순경출신 가운데 우수인력을 선발해서 교육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 하위직 자질향상이 엘리트 양성보다 중요하다”며 “경찰은 병영에서 생활하는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대학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인력이 경찰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허 청장은 “육군을 대상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대해 질문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며 “해마다 경위로 승진하는 경찰이 2천명 가량 되는데 그 중 경찰대학 출신 120명은 우려할 만한 숫자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는 “앞으로는 순경으로 입직해도 자기만 열심히 하면 3-4년 안으로 경위가 될 수 있도록 승진제도를 보완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경찰대학을 대학원 중심으로 하면서 순경출신을 일정수 입학시키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가운데 78%에 이르는 경찰관이 경찰노조 설립에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출신별로 대답은 엇갈렸다. 경찰대 출신과 경사 이하 출신 경찰관들은 노조 설립에 대해 '찬성한다'는 입장이 우세한 반면 간부후보생 출신들은 반대한다는 입장이 우세했다. 계급별로는 비간부급(82.9%), 연령대로는 30대(83.5%)에서 높게 나타났으며 경찰대 폐지 찬성자의 81.7%가 경찰노조 설립을 찬성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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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9일 오후 16시 4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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