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현재 우리는 한국사회와 운동 진영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갈구하는 소리들을 듣는다. 무언가가 막힌 것이다. 이 막힌 무엇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진보라고 자처했던 그룹들이 하나씩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 소리는 속삭임에서 더 큰 소리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운동의 새로운 문제설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방향성을 잡을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현재 운동은 저항의 지점들을 찾아 저항하고, 대응하지만, 대안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사회주의를 붙잡고 가거나, 페미니즘을 붙잡고 가거나, 생태주의를 잡고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현장중심, 아래로부터,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움직임을 갈구하는 소리들은 현재의 운동이 부문운동으로 진행되고, 그 부문운동의 방향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막힌 상태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대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접근하거나 최대한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노동, 환경, 여성, 장애인, 청소년, 학생, 성적 소수자 운동 등 다양한 운동들이 현 시대의 문제를 좀 더 넓은 폭으로 보면서 각각의 운동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사회운동 진영은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방향 설정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운동들이 전환점을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을 보자. 지난 20년 동안 여성운동 또한 풀뿌리 운동, 노동조합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운동들을 전개해 왔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계급적 측면이나 생태적 측면에 대한 운동이 미미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여성운동은 여성환경운동과 여성노동운동을 전개해 오면서 환경, 여성, 노동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해 왔지만 아직은 아주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또한 성의 문제를 중심에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진보운동은 일부 여성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변화를 기해왔거나, 진보진영의 여성활동가들이 페미니즘 의식을 갖고 여성위원회를 만들고 성폭력과 할당제를 의제화하여 활동하였지만 근본적으로 그 운동과 담론에서 성의 구조적 측면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고 보기 힘들다. 계급을 주요 의제로 두는 좌파운동은 생태와 성을 중심축으로 가져오지 못했고, 생태/환경을 주요의제로 다루는 생태/환경운동 또한 계급의 문제나 성의 문제를 중심축으로 가져오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계급 없는 성과 생태, 성 없는 계급과 생태, 생태 없는 성과 계급이 현재 담론과 운동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모순지점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지 못하고, 보지 않음으로써 현재의 움직임이 서로 분리되어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각 운동이 주요모순이 있지만 그 주요모순의 한 축만을 강조함으로써 그 운동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각각의 주요모순에만 머물지 않는 새로운 움직임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1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운동들의 출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가능한 새로운 패러다임들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문제만 하더라도 반자본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환경생태와 성을 고려하면서 새롭게 문제설정할 필요가 있다.
적녹보라 패러다임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재 체제와 시대의 문제설정이 극히 부분적이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생태주의, 맑스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설정들이 지구환경의 위기, 신자유주의-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의 위기, 성적 불평등으로 자리매김된다. 환경의 위기를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건드리지 않거나, 자본주의를 문제 삼는 쪽에서 환경생태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이 갖는 문제점, 그리고 페미니즘이 지금까지 제기한 것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성적 불평등 문제로 접근하는 것, 이데올로기 문화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성의 문제를 평등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로 제대로 보지 않고 있음을 말해 준다. 가장 오래된 체제인 가부장체제 혹은 성체제를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자본주의나 환경생태의 문제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적녹보라를 연대나 동맹으로 제안하지 않고 ‘패러다임’으로 제안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적녹보라가 제안된 이후 몇 가지 쟁점들이 제기되었다. 적녹보라라는 개념을 반기는 쪽은 연대로 접근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쪽은 적녹보라 각각의 진영 사이를 너무 쉽게 연결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한다. 적녹보라는 동맹, 연대, 연합의 문제로 보지만 적녹보라는 동맹의 문제, 연대의 문제, 연합의 문제, 접점의 문제를 넘어선다. 현재로서는 패러다임의 문제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패러다임은 문제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대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각각의 운동이나 이론의 지점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
적녹보라 패러다임
적녹보라 패러다임은 현재 운동의 내용과 형식이 관련된 문제다. 하나의 부문 운동 중심의 운동이 갖는 운동이론의 보수성을 고려할 때 현재의 적, 녹, 보라 각각의 패러다임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각각 진보적 의식을 갖는다고 스스로 간주한다. 그러나 각각이 갖는 그 진보적 의식이라는 것이 어떤 한계를 지니는지를 보아야만 세상의 변화도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운동들의 운동이 필요한 시기이다. 자본주의,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고, 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시 살펴야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제는 연동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적/녹/보라 각각의 행동이론적 입장과 그것이 정의하는 모순은 단순화시켜 말하면 적은 행동이론의 근간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주요모순으로 계급모순을 제기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 때 운동이란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것을 다 의미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도 운동임을 의미하고, 그에 입각한 노동운동도 운동을 의미한다. 녹은 생태주의와 생태환경모순 혹은 종모순을 주요모순으로 간주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보라는 페미니즘과 성모순을 주요모순으로 간주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적, 녹, 보라는 이론과 현장운동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점에서 상징성을 띤 개념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이 현재 운동과 이론의 관계 설정에 적합하다. 이제 지구지역적 차원의 변혁을 위해서는 이론가/연구자는 현장활동가 정체성을 향하고, 현장활동가들은 이론가/연구자의 정체성을 향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복잡하게 분화된 세상, 중층적으로 얽혀있는 세상,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현장활동이 만나야 한다.
적, 녹, 보라는 그 자체로 완결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범주를 형성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 교차점을 안고 있는 개념들이다. 적 안에도 녹과 보라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고, 녹 안에도 적과 보라가, 보라 안에도 적과 녹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적이 설정하는 모순을 계급모순으로 녹을 환경, 생태적 모순으로 보라를 성적 모순으로 생각한다면 여성이 계급의 문제를 안고 있고, 환경이 계급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성별이 계급이 될 수 있으며 여성과 노동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주요모순을 상정하고 그 모순에 명칭을 붙인 지점이 각각 다르고, 각각의 운동에 있는 중심성을 간주할 때, 적과 녹과 보라는 그 자체의 범주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제를 문제로 설정하고 있다.
적-녹-보라가 갖는 이론으로서의 성격과 현장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즉 적이 상징하는 노동운동이 바로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의 현실적 실천인 것은 아니다. 또한 보라가 상징하는 여성운동이 지금까지의 페미니즘과 본격적으로 연계를 맺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여성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어떤 운동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론과 연계되어 왔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출발된 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은 이론과는 거리가 있는 운동이기도 하였다. 현장에서는 이론을 탁상공론이라고 일축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론의 관점에서는 운동이 충분히 그 관점을 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경우가 이를 설명한다. 적-녹-보라의 접점찾기란 이론적 지점과 현장 운동의 거리 좁히기 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노동조합 중심의 노동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이 다를 것이고, 노동운동 진영도 다른 이론적 토대 위에 세워져 서로가 생각하는 방향이 다를 수 있다.
적, 녹, 보라라는 개념을 운동과 이론에 끌어들이고 사용하려는 이유는 이론과 현장 사이의 접점찾기만이 아니라 운동들 사이의 접점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문운동들 사이의 접점을 찾음으로써 현 사회의 변혁에 한 발 다가가자는 뜻이다. 적-녹-보라의 접점찾기는 현 시점의 운동들(노동, 환경,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 지역)이 각각의 중심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운동들과 새로운 운동에 열려있기 위함이다. 이 점에서 적녹보라는 패러다임의 성격을 갖는다. 적녹보라가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성-계급-생태적 모순을 직면하고 그에 대한 대안적 제시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계급-종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도 있고, 성-계급-생태환경 패러다임이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적, 녹, 보라 각각을 의미하는 빗금으로 표시된 ‘적/녹/보라’와 빗금을 없애고 연결선을 넣은 ‘적-녹-보라’와 아예 연결선조차 없앤 ‘적녹보라’라는 세 가지 다른 개념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각 행동이론+운동이 중심성을 갖는 단계에서 단계적 변화를 표시하는 것이다. 적/녹/보라적 생산, 적-녹-보라적 생산, 적녹보라적 생산이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적녹보라’적 생산은 어느 시점에서는 아예 다른 언어로 바뀔 수밖에 없는 시간 제한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현재로선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찾기 위해서 이 세 가지 단계적 언어들을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적과 녹과 보라 각각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적녹보라적 생산, 적녹보라적 노동, 적녹보라적 가치, 적녹보라적 정의, 적녹보라적 주체 등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그 자체들의 내용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적녹보라가 패러다임으로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용으로서 적/녹/보라는 노동/환경생태/성 혹은 계급/자연/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페미니즘 혹은 반자본주의/반인간중심주의/반가부장제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동으로서 적/녹/보라는 반자본주의/반인간중심주의/반가부장제의 운동 테제와 운동 주체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녹/보라가 흔히 생각하듯이 노동운동/환경운동/여성운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운동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운동, 장애운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운동들이 노동의 문제를, 성의 문제를, 그리고 환경의 문제를 안고 있고, 그런 지점들을 찾아내고 그것의 문제설정을 하고 그에 대한 대응과 대안적 움직임을 한다면 거기서 문제설정과 관련하여 ‘적녹보라’가 패러다임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녹보라 패러다임이란 노동, 생태환경, 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운동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적을 적녹보라 관점에서 보면, 노동운동의 범주와 방식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녹은 자연의 노동이라는 노동을 끌어들여오며 보라는 여성, 성적 노동이라는 노동을 끌어들여올 것이다. 그리고 적녹보라는 노동운동의 방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노동조합 중심의 노동운동, 지구적 환경생태를 생각하는 노동운동, 여/성노동을 생각하는 노동운동. 이렇게 되면 노동운동의 주체의 확장 혹은 변화가 가능해진다. 노동운동 안에서 여성들에 가해지는 성적 폭력이나 할당제에 머물지 않는 운동을 상상하고 실천하게 될 것이다. 노동운동의 범주의 변화는 노동 범주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성노동, 성노동, 그림자노동, 돌봄노동, 감정노동 등의 노동에 대한 관심과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확장을 의미한다. 단순히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도가 아니라 노동의 구도를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녹과 관련하여서는 특히 자연의 노동에 대한 관심과 그에 대한 고려를 요구한다. 자연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없이 인간노동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한계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적녹보라 패러다임에 입각한 노동운동은 남성노동에만 초점을 맞추고 산업공장노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노동운동이 여성노동과 자연의 노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성, 인종, 민족, 계급적 노동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주노동, 전지구적 노동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그리고 노동의 성격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사회주의 세계, 공산주의 세계를 상상할 것인지,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고려할 것인지, 적녹보라가 고려된 노동과 경제는 어떤 것일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녹을 적녹보라의 관점에서 보면 환경생태운동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일단 적의 관점에서 녹을 보면 녹이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전제로 한 녹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를 기조로 하는 세계화, 군사주의를 기조로 하는 세계화, 제국주의를 기조로 하는 세계화가 주는 문제를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앞에서 가부장체제를 성체계+군사-제국-자본주의로 놓았다는 점에서 가부장체제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유기농, 비누만들기, 허브, 공정무역 등을 넘어서서 운동을 확장하게 될 것이다. 환경운동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며 반군사주의적 환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녹이 성, 여성을 고려하면 어떤 운동을 펼치게 될까? 녹은 여성노동의 환경이나 여성의 재활용운동, 소비자 운동을 넘어서서 상품생산중심, 임금노동중심의 자본주의-가부장체제에 반대하고 대안을 찾는 운동을 녹의 관점에서 하게 될 것이다. 반핵, 반전과 대안에너지, 기후변화 등은 현재의 자본주의-가부장체제를 극복하는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여성운동이 적녹보라 패러다임에서 운동을 한다면? 현재의 보라에 노동, 계급문제와 환경생태 문제를 고려하게 되고, 여성이 인간으로서 지배-피지배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타자화된 자연/동식물과의 관계를 보게 될 것이며, 성인(?)여성은 아동-청소년들과 자신의 관계를 보게 될 것이다.
적, 녹, 보라와 패러다임의 전환
적녹보라 각각은 각각에게 전환을 요구하는 셈이다. 가능한 선에서 적/녹/보라가 각각 서로에게 요구하는 지점들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 각각으로 보고 있는 문제설정이 어떻게 전환할 필요가 있는지를 말해준다. 현단계에서 적에게 보라와 녹이 요구하는 것, 녹에게 보라와 적이 요구하는 것, 보라에게 적과 녹이 요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야겠지만 현재 부분적으로 보라가 적과 녹에게 요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다른 부분은 다음 기회로 하기로 한다.
적색의 전환, 보라색의 요구 :자본주의에서/와 가부장제로3
좌파운동, 진보운동은 현재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주요 문제로 부각시킨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가부장제도 중요한 억압의 기제이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는데 한국의 남성중심적 좌파, 진보진영의 운동과 학술/이론적 지식생산은 계속해서 가부장제를 도외시한다. 현재 진보진영은 가부장제를 아주 극히 부분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전체의 패러다임과 관련된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오랜 가부장제는 계속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를 본격적으로 좌파운동의 의제로 놓지 않으면 현재의 이론과 운동이 더 나아가기 힘든 상태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진보담론은 끊임없이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의 문제에 천착함으로써 의제를 재생산한다. 주요모순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천착해야 하지만 그 문제를 의제화하는 방식과 내용이 가부장적이라 가부장제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는 페미니즘 운동과는 소통이 어려운 상태다. 이러한 공간의 정치, 담론의 정치가 결과적으로 의제와 운동의 남성중심적 편향성을 낳으면서 가부장제가 계속 재생산되는 구조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특히 좌파, 진보 진영의 남성들은 자신들의 가부장성을 제대로 깊이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 연결되는 문제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 있듯이, 가부장제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가부장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에 천착하는 것만큼 천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들이 의제화하고 있는 것들이 중요하고, 최종적이며 근본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가부장제를 문제화하면 본인들 스스로 너무나 괴로운 그 어떤 것을 직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 그것을 여성들의 문제로, 하나의 코너로, 하나의 부분으로, 전체를 해체한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본인들은 보편의 문제, 전체의 문제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들이 전체의 문제라는 생각하는 곳이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따로 두고, ‘여성운동’도 따로 두어야할 정도로 자신들이 의제화하는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전체’의 문제로 두고 싶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내용과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의제와 운동의 방향이 달라짐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의 보수성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먼저 계급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해보자. 그 방법의 차이가 계급만 생각하지 않고 계급과 성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켜 왔다. 페미니즘은 맑스주의와의 만남을 시도하여 맑스주의 페미니즘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의 맑스주의에 입각한 좌파운동에게 요구할 거리를 만든 셈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이러한 시도 자체가 계급을 중심에 둔 남성중심적 이론과 운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페미니즘은 맑스주의 페미니즘을 통해 성 없는 계급, 계급 없는 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계급을 다른 각도로 볼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성의 변증법, 성의 정치, 성적 계약, 성매매 혹은 성거래 등으로 성을 중심에 놓으면서 기존의 계급을 다시 설정하려는 시도를 시작하였다.
자본주의 논의를 적어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논의로 놓거나, 가부장제 논의로 이동해 본다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제로 논의의 틀이 바뀐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 노동, 계급의 재개념화와 재구성이 필요하다. 현재의 생산, 노동, 계급은 제한적이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 노동, 계급 개념에 기초한 패러다임으로 보면 현재의 진보가 희망으로 제시된다. 자본주의적 모순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하는 이론과 운동이 상정한 노동자는 누구인가? 이 때, 희망은 누구의 희망인가? 노동자계급의 희망? 그럼 그 노동자계급은 어떤 노동자계급인가? 주로 사회적 영역, 공적 영역이라 불리는 곳의 노동자들이다. 여기에는 성별과 성애의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 성적으로 분류된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성노동자라는 개념은 성별과 성애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성노동에는 모성노동, 섹스노동, 가사노동 그리고 성별-성애화된 임노동이 포함된다. (실상 더 크게는 남성이 하는 노동과 여성이 하는 노동 전체가 성적 노동인 셈이다. 공/사로 구분하여 사회적 노동을 주로 남성들이 담당해 온 것 또한 큰 범주에서는 성적/성별적 노동인 셈이다.)
자본주의를 주요 모순으로 보는 이론가들과 운동가들은 생산을 상품생산으로 제한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들의 노동과 성별/성애적 노동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보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을 노동의 시야에서 가려버렸다. 이렇게 되면 상품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개념은 다른 생산들을 포함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거나 다른 생산들을 재생산으로 놓는 우를 범한다. 인간생산을 담당하는 여성들을 신비화하거나 비가시화하고, 여성들이 쾌락생산 그리고 가사노동을 전담하게 하는 가부장제를 이론과 운동의 의제로 삼지 않는 우를 범한다. 특히 여성이 하는 인간생산(임신+출산+양육)을 자연의 영역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노동과정을 담당하는 여성들을 사회적 담론과 운동의 시야에서 밀어낸다. 여성들은 구체적으로 임신과 출산과정을 겪으면서 그 과정에서 부여되는 노동을 한다. 이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생산된 인간을 자본주의적/맑스주의적 시각에서는 노동력의 재생산으로 본다. 이렇게 생산된 인간은 양육의 과정, 보살핌/돌봄 노동을 통해 성장한다. 이 노동을 주로 어머니-여성이 맡는다는 면에서 모성노동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성관계-성노동-성장치를 가부장체제를 유지하는 삼각구도로 본다. 성관계로는 생산/거래/권력/계급관계를 놓고, 성장치로는 신체, 가족, 서사-미디어, 시장, 국가, 종교, 교육을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장치들은 한 사회의 여성을 주체화하는 장치들이다. 신체는 성별화가 일어나는 장치다. 가족은 가부장제 혹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토대가 된다. 시장은 산업을 통해 성별화한다. 예를 들어 의복산업을 보자. 여성의복과 남성의복을 구분하여 생산한다. 이러한 의복을 입는 사람들은 가부장제의 재생산 고리를 유지한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중성적 복장, 복장전환 등. 그러나 복장전환의 경우 성별화를 재생산하는 역할도 한다.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끊임없이 남녀의 로맨스와 결혼, 이별 등을 재생산한다)
패러다임의 내용이 달라지면 소유와 분배의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적 모순을 계급적 모순으로 보는 진보진영의 축은 노동자계급의 분배를 문제 삼는다고 볼 수 있다. 잉여가치를 통제하는 쪽이 자본가계급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국가간의 불균등구조에 따라 어떤 국가에 그 분배가 쏠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면 분배의 문제는 남녀 분배의 문제가 된다. 물론 국가, 인종, 계급에 따라 분배가 달라질 수는 있다. 현재 전지구적으로 토지, 자본 등의 얼마를 남성이라는 성이 소유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그 분배가 노동자계급의 통제하에 있게 되는 것과 여성의 통제하에 있게 되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가져올 것인가? 혹은 여성노동자계급에게 있다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사회의 양극화를 말할 때도 남성과 여성의 양극화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양극화를 물질적인 차원에서 빈부로만 구분하는 현재의 시점을 남성과 여성의 양극화로 옮겨 여성적 빈곤을 보게 된다면 양극화 현상도 다르게 드러날 것이다. 20대 80의 사회라는 사회의 양극화에 대한 생각에 젠더가 도입된다면 20에도 남녀가 80에도 남녀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80이 모두 같은 80은 아니고, 20에 속한 여성도 남성과 같이 20을 나누어 10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을 누가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의 문제가 새로운 논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문제 삼으면 성적 생산양식이 주요 문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보다 오래된 제도이며 체제다. 250년(혹은 그보다는 더 오래된)의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와 수천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가부장제에서 그 자체의 생산양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의 생산양식으로 사회적 생산양식을 구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성양식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성양식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바뀐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이런 지점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접근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사실 그 어느 문제보다 성별화된 문제다.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운동을 만들어 온 대표적인 사례들은 KTX, 이랜드, 기륭전자 그리고 여러 곳에서 시작된 미화원 노동자들의 운동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비정규직의 문제로만 접근하지 젠더화된 사회의 노동양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사회운동 내부의 여성들은 이렇게 보려고 한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성차별화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문제로 접근할 때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맑스주의 이론가와 노동운동 진영이 페미니즘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론과 운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싸움을 늦추는 것이거나 달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수정이 필요하다.
녹색의 전환, 보라색의 요구 : 인간주의에서/와 가부장제로
심층 생태주의는 맑스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측면이 있다. 생태주의와 사회주의의 엄격한 분리주의를 강조하는 진영에서는 그 이유로 맑스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성장이 사회주의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는 가정이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맑스의 경우 자연은 극히 수동적이거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아가 현실 사회주의의 주된 특징은 정치적, 경제적 중앙집권화이고, 맑스주의가 갖는 기술주의적 입장이 문제라고 본다. 기술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체제에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반영체이며 동시에 정치적 선택의 핵심주체라고 본다. 사회주의가 혁명주체로 산업노동계급에 기대하는 점 또한 산업사회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를 유물론적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를 또한 거부한다. 이러한 심층생태주의에 대해 맑스주의는 생태주의가 환경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이해관계라는 이름하에,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녹색과 기술관료 및 부르주아 계급과의 동맹 가능성을 우려한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환경 파탄의 원인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박은 생태주의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머레이 북친같은 사회생태주의자는 이렇게만 보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환경파탄의 원인이 보편 인간으로 상정되어 버리면 인간 내의 차등화된 관계가 만들어 내는 환경파괴의 결과가 간과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파탄은 <사회적> 파탄의 결과가 아니게 된다. 억압받는 소수 원주민 집단인가, 여성인가, 제3세계 민중인가, 아니면 제1세계--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환경 파괴에 관하여 강력한 기업 엘리트와 공범 관계에 있다--의 민중인가와는 무관하게 <인류>라는 신화적인 것이 조작된다. 새로운 종류의 생물적 차원의 <원죄>가 조작되어, <인류>라는 동물의 애매한 집단이 생활 세계의 존속을 위협하는 파괴 세력으로 간주된다.”(머레이 북친,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Remaking Society』, 11)
한국에서 녹색대안을 찾는 움직임들에는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초록정치’는 지역자치나 생명공동체 등에 관심을 갖고 ‘생명평화’에 가치를 두는 쪽이 있다. 개인의 수행을 더 중시하며 생태적인 공동체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황대권). “한국 현대사는 한마디로 경제인간들만 존재했고 모든 것이 경제로 환원되어 왔”다고 보면서 근대산업사회의 폐해를 주장하기도 한다(주요섭).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맑스의 모든 이론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다. 그리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 혹은 노동자는 자본가 계급을 폐지하고 노동자가 관리하는 사회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 모든 전제 속에 자연은 빠져 있”으며 “자연 때문에 먹고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연을 가공해서 만든 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문제에 초첨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연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좌파의 논쟁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게 된다(황대권). 박승옥은 맑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맑스는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은 무한하고 유한하고를 떠나 자연 자체가 논의에서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맑시즘의 발전사관이 추구했던 바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며 그런 면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뉴라이트의 사상적 아버지는 맑스인 것 같은데요.”(이 문단은 『문화/과학』2008년 겨울호 ‘생태주의’ 특집 참조)
일찍이『녹색평론」을 펴낸 김종철은 생태학적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은 생태학적 관심을 중심에 두지 않는 어떠한 새로운 창조적인 사상이나 사회 운동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계 전역에서 뭉게구름이 사라지고, 여름이 되어도 제비를 볼 수 없게 된 지금 우리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종래의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문화는 이제 인간 자신의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뼈저린 성찰 없이는 지속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하였다(김종철, 『시적인간과 생태적 인간』5) 그리고 이어서 “아마도 오늘의 산업 사회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생태학적 사유의 빈곤은 오랜 세월 ‘어머니 대지’를 섬기며, 생태적으로 지극히 지혜로운 삶을 살아온 토착 민족들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정신적 균형을 상실한 데 따른 불가피한 귀결일지 모른다(6)”고 말한다.
맑스가 생태와 자연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착취적인 것을 부추킨 셈이라는 지적까지 나오는 데 대해 한국의 좌파 진영에서는 “에코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거나(이득재) ‘생태학적 맑스’(심광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타리의 환경생태학, 사회생태학, 정신생태학이라는 ‘세 가지의 생태학이 소개되며(윤수종) “맑스주의와 생태주의의 그릇된 반목을 넘”고자는 시도들이 제기된다(심광현). “소유와 분배의 문제만을 혁신하려고 했던 구좌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맑스주의의 확장을 시도”하겠다고 한다(심광현). 그러나 심광현은 환경생태와 사회생태와 정신생태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주범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놓는데 환경, 여성, 노동, 문화 운동 “각 운동 진영에서도 이견이 없는 듯하다”고 단정하여 버린다.( 이 문단도『문화/과학』2008년 겨울호 ‘생태주의’ 특집 참조) 그러나 이 단정은 어디까지나 좌파진영의 한정적 단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기의 주범을 달리 상정함으로써 각각의 운동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환경운동은 87년 민주화운동과 함께 성장하였고, 실제 운동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예를 든 생태운동과 다소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단체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지만 환경연합이나 녹색연합같은 환경운동단체들이 노력을 기울였던 새만금, 부안 등의 문제는 먹거리 문제만이 아니라 전세계 에너지 문제, 변형유전자, 광우병, 지구온난화 등과 함께 생태, 환경운동의 의제가 됨을 보여준다. FTA와 공정무역, 대안무역의 문제로 오면 녹색과 적색의 문제의식이 한층 가까워짐을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맑스주의가 자본주의만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앞에서 말했듯이 생태주의 또한 인간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를 문제삼으며 성차별구조를 건너뛰고 있음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생태환경의 위기를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친이 말하듯이 그 인간이라는 종 내부의 책임여부를 간과할 경우, 자본가들, 과거와 현재의 제국주의자와 식민주의자들, 남성들, 상층계급의 여성들의 책임이 약화된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옥죄는 가부장제에 공모해야 생존할 수 있어서 공모했다 하더라도, 그 책임 자체가 여성들에게 먼저 돌아가지 말아야 하듯이, 생태계에 대한 책임도 제3세계 여성, 남반구의 여성, 하층계급의 여성, 노동자계급에게 책임이 먼저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를 문제 삼는 생태주의와 환경운동 또한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할 것을 페미니즘은 요구한다.
서구와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생태주의와의 만남을 시도하여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과 여성환경운동의 영역을 열었다.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자연의 지배와 여성의 지배 사이에 비판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이는 여러 이론적 입장을 포괄하는 페미니즘 운동 내의 주요한 경향을 지칭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처음 등장했을 때 성별관계(gender relations)와 경제체계의 틀 안에서 지배적인 권력구조를 폭로하고, 그것에 도전하고, 변화시킬 것을 약속했다.4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을 개념화한 것이 오히려 가부장제와 같은 다른 형태의 지배를 은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근본생태주의에 가부장적 편견이 존재하며 남성중심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 ‘지구먼저!’와 같은 운동이 지향하고 있는 급진적 생물중심주의의 흐름은 재생산권 옹호운동을 벌이고 있는 여성들에게 비판받고 있는데 이는 그 흐름이 남쪽 여성을 겨냥한 강제적인 인구조절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여성과 환경, 그리고 지속가능한 개발』7장 참조)
캐런 J. 워런이 말한 생태여성주의의 기본 원칙 네 가지를 소개해 보자. 첫째, 여성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자연의 억압과 착취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둘째, 이러한 연관성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과 자연의 이중적 억압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모든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반드시 생태학적 관점을 포함하여야 한다. 넷째, 생태 문제에 대한 해결은 반드시 페미니즘적 관점을 포함하여야 한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생태사상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자연과 여성을 신비화하는 경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자연과 여성의 혐오증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과 여성이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적 가치를 강조하고 ‘어머니 대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성적 가치의 강조는 주로 어머니대지, 모성적 여성의 베품의 강조로 연결되면서 기존의 자연과 여성을 등치시켜온 남성중심사상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 그리고 토착종교, 민족의 문화, 동양의 정신문화를 재고하지 않고 신비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토착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 그리고 농촌사회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할 때, 이러한 특징들이 갖는 가부장적 지점들을 보지 않고 이상화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나 서구의 생태론자들이 풍류도, 노자, 공자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페미니즘이 해 온 비판적 역사를 지워버리게 된다. 토착종교, 민족문화, 농촌사회, 불교, 도교, 유교의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과 그 사회의 계급, 신분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들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내놓을 때, 전통에 대한 신비화를 통해 성/계급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노자, 공자의 사상에 배어 있는 성계급적인 문제를 파헤치면 그들의 무위사상이나 인의예지가 어디에 기반하는지 나올 것임에도 근대산업사회의 대안적 정신문화로 이러한 사상을 놓게 되면 결국 자연도 여성도 보이지 않는 초자연의 세계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물질에 대한 정신을 강조하느라 결국 물질문명의 폐해를 가져온 계급적, 성적 주체에 대한 비판은 빠지고 인류, 인간이라는 종의 일반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종으로서 원죄의식을 느낄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여성도 이 문명의 한 희생자이면서 수혜자로서, 동물살해와 육식의 문화, 가죽옷 문화의 동참자로서 분명 돌아보아야 할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주역이 누구인지 더 특화되어야 할 필요도 있다.
서구의 남성 생태주의자들이 지구적 차원의 생태와 환경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지적하는데 있어 시간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같아 보일 때가 있다. 먼저 북반구의 부와 남반구의 빈곤에 대한 인식이 첨예하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지금까지 자연자원과 여성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한 북반구의 국민, 시민인 북반구 생태론자들이 자연의 착취문제를 이야기할 때, 제국주의의 식민화문제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채, 자연보호를 논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지구온난화와 유전자변형농산물에 대한 환경론자들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지만 오히려 서구 생태주의자(자연을 위한 항거, 녹색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들의 일부는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인간들만의 세계로부터 자연공생계로” “자연에 대한 책임” “자연국가/사회국가”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연을 위한 항거』는 “모든 나라에게 단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하나만 있다는 생각, 개발도상국가들이 단지 자기의 문화와 역사와 상관없이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그 순위를 통해서만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제3세계와 공생이라는 말이 언급되지만 문제는 인간들만의 세계와 인간중심주의를 말하다보면 인간세계의 계급과 성적 착취가 부재대상이 되어버린다. 지속가능한 개발이 문제라고 할 때 그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 ‘선진국’의 국민으로 느껴야 할 책임과 의무조항이 나오지 않는다. 선진국도 다른 모든 국가들도 공생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제3세계의 산업발전이 더 이상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한다. 독일이나 미국의 구성원이 국가자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공유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반성이 있으려면 철저하게 이 문제에 대한 자성과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남성생태주의자들도 다른 측면에서 비슷한 행동을 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말하려면 남성으로서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항상 가진 자들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더 복잡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 불공평함을 바꾸기 위한 이론과 실천이 필요하다.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들의 것이 잘못되어 있는데, 그냥 나는 가지지 않아야 되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앞에서 밝힌 대로 적이 녹과 보라에게, 녹이 적과 보라에게 요구하는 전환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적녹보라 패러다임에 입각한 운동의 가능성 : 생산-노동-경제 다시보기
이 부분은 ‘적녹보라 패러다임’에 입각한 운동을 위해 자본주의적 생산, 노동, 경제를 다시보는 방법으로 가부장체제적 생산과 노동의 재범주화가 필요하고, 자본주의 생산과 노동의 재범주화가 필요하다는 전제와 자연이라 불리는 땅과 동식물 그리고 더 광범위한 자연의 생산과 생산의 결과, 생산의 과정, 그리고 가능하다면 ‘노동’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인간 사회의 생산-노동-경제를 다시 보고, 문제를 재구성하고, 그에 입각한 방향을 설정하고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서 생산-노동-경제를 다시보자는 제안이자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을 다시보고, 가부장체제적 생산과 노동을 재범주화하는 일은 현재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체제적 생산과 노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삶, 생산, 노동, 성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작업이다.5 이 작업은 크게 페미니즘 경제의 구축과 적녹보라적 생산과 노동의 설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부장체제에 대한 현실분석을 토대로 한다. 성적 생산관계는 크게 보면 ‘생산’과 ‘재생산’을 나누고 돌아가는 것, 그 자체가 성별 분업이면서 성적 생산관계이다. 남자는 사회노동을 여자는 가사노동을, 남자는 공적 여자는 사적 영역이라는 이분화가 크게 작동하면서 생산의 영역을 남성의 영역으로 재생산의 영역을 여성의 영역으로 놓은 구도 자체가 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체제적이다.
성과 노동과 생산을 함께 고려하면 기존 생산과 노동의 범주가 드러난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범주 설정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통상 우리가 말하는 생산은 상품생산이고, 노동은 상품생산노동이 된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가부장제이고, 그것의 생산과 노동이 생산이며 노동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기제가 성적 생산과 노동을 배제하는 결과 가능해진다. 생산을 인간이 생산수단을 통해 생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먹고사는 일 전체가 직업과만 연결되며 화폐와만 연결되는 사회를 형성하고 그것에 매달려 끌려가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구조는 자본주의-가부장체제의 구조를 통해 재생산된다. 어느덧 (비 혹은 반)자본주의적 가부장체제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대안적 삶을 생각할 여지를 없애버린 것도 ‘상품생산’이 생산의 전부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제학과 이론이 낳은 현실이기도 하다. 브로델의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삼층구도는 역으로 생각하면 물질문명이 우리의 삶의 기저에 있다는 것이고, 물질문명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방향을 달리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성이 생산과 노동에 도입되면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난다. 하나는 기존 상품생산의 영역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부장체제로부터 혹은 그것을 넘어갈 다른 방향 혹은 출구 혹은 틈새가 보인다는 점이다.
성적 생산과 성적 노동이 없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이 불가하다는 것을 안다면,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이 아닌 방향을 설정할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생태라는 요소가 들어가게 되면 자본주의적 생산, 잉여가치, 축적의 가능성을 원초적으로 달리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진다. 다시 말해 성적 생산관계에 인간이 의지하는 정도와 자연 자원이라 불리는 살아있는 자연, 동식물의 생산에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정도를 강조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으로부터 다른 방향을 틀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노동이라 하는 것을 인간이 손이나 도구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인간 삶의 일부분만을 노동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생산과 노동이 인간 삶에 필요한 것이라면 인간이 하는 행위로 범주를 넓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인간 삶의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배포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배짱이 필요한 영역인데, 구조가 우리를 옥죄이고, 그 구조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그런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사고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인데 우리는 구조에 핑계를 댄다.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엎드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계 앞에서 구조의 핑계를 대며 자신이 그 욕망의 사다리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한다. 남들과는 달리 나는 살고, 나의 가족은 살고, 나의 국가는 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이 만드는 사다리를 끊고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을 페미니즘 경제의 재발견과 적녹보라적 생산과 노동을 통해 진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적녹보라적 생산이란 기존 노동자의 생산과 성적인 생산과 자연이라 불리는 존재들의 생산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을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체도 적녹보라적 노동이 될 것이다. 적녹보라적 생산과 노동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생산이고 노동이 된다. 현재의 노동, 노동운동이 방향을 틀어야 할 지점이 여기에 있다.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이 조합주의로 빠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포함한 가부장체제적 생산을 바로 보는 것이 노동운동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생산력, 생산중심성을 비판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결국 노동자계급 사이의 경쟁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 자본은 그것을 노렸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여성과 남성 사이의 분리와 분열을 조장하는 것 또한 자본의 이해관계의 결과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남성중심적 가부장체제적 남성과 여성들은 이 자본의 이해관계를 묵인하고 도와주고 받쳐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 논의를 하지 않는 남성이론가나 학자나 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은 일차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 혹은 성계급적 관계에서 밀려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할 자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되게는 남성들의 책임으로도 볼 수 있다.
적녹보라적 노동이란 무엇이든 생산하는 것을 노동이라 할 것이 아니라 가치를 생각하는 노동이어야 할 것이다. 이 때 가치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시간의 가치나 노동력의 가치나 화폐가치를 넘어서는 가치를 의미한다. 적녹보라적 패러다임에 입각한 가치의 재설정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한 생산, 노동, 가치, 성의 급진적 재조직화가 일어나야 한다. 자본주의-가부장체제적 생산, 생산성, 남성중심적 생산성, 생산력, 제1세계 중심의 생산성을 넘어 남반구-성-자연의 노동과 노동력을 착취/수탈하지 않는 그런 생산은 일차적으로 적녹보라적 생산이란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적녹보라적 생산을 고려하기 위한 전단계 작업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은 가부장적 생산과 노동임을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가부장적 생산과 노동이란 여성의 생산과 노동을 생산으로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여성억압, 여성배제, 여성소외를 불러온 생산과 노동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이기도 하며 마르크스주의적 생산과 노동관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을 비판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이 가부장적 생산과 노동임을 확실히 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안적 행동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내재적 접근을 통해 순환론적이고, 환원론적인 대안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산-노동-경제에 대한 다시보기는 운동의 측면에서도 방향 설정을 다시 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 여성, 환경,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 등의 운동이 각각의 지점에서 생산을 재설정하는 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각각 달리하면서 노동의 방향을 잡고, 자본주의적 속도와 생산-노동을 바꾸어내는 것을 지향한다면 변혁의 가능성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주석
1 이 문단은『진보평론』(2009년 여름호)과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실린 글의 일부다. 「적, 녹, 보라의 관계 설정을 위한 시론--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사회운동과 패러다임의 전환」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사회운동과 패러다임의 전환--적, 녹, 보라의 관계 설정을 위한 시론」이란 제목으로 진보평론 2009여름호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글이다.
2 NGA는 ‘적녹보라 패러다임’에 입각한 운동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것을 지구지역적 차원의 운동으로 볼 필요성을 제안한다.
3 이후 3장의 부분은『진보평론』(2009년 여름호)과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실린 글의 일부다. 「적, 녹, 보라의 관계 설정을 위한 시론--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사회운동과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제목으로 실림. 애초에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사회운동과 패러다임의 전환--적, 녹, 보라의 관계 설정을 위한 시론」이란 제목으로 진보평론 2009여름호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글임.
4 『대지의 회복--여성이여 대지의 삶에 대해 떠들어라』(1983), 『상처의 회복』(1989) 『세계를 다시짜기: 에코페미니즘의 대두』(1990)를 참조.
5 이 문단 이하는 「가부장체제와 적녹보라 패러다임」『세계 자본주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2013, 한울)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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