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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가난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 빈고의 발생에 대한 이야기(석류에 의한) -

 

빈집 초창기는 전셋집의 형태로 주로 있었던 듯합니다. 아랫집과 옆집(낭만집)이 대표적인 경우였죠. 아랫집은 특정 개인이 거의 전세자금을 모두 혼자 부담한 형태였던 것 같고 옆집은 구성원들이 조금씩 전세자금 마련에 동참은 했지만 실질적으론 몇몇 개인이 주로 부담한듯합니다.

 

전세자금으로 운영되었으니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담금 부담이 별로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세자금을 부담한 몇몇 개인이 호혜적(선물?)이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 당시 분담금은 어떤 방식으로 책정되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동안 빈집의 변천사속에 분담금은 어떤 방식으로 책정되었을까요?

초기 전셋집에선 생활비 분담과 전세자금을 부담한 사람에 지급하는 이자(아마 저리)로 분담금이 책정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개인이 전세자금을 주로 부담하는 형태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듯 합니다. 그가 돈이 필요한 경우 혹은 빈집과 같은 공동 주거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에 그 개인의 판단여부에 따라 집이 사라질 수 있는 사태도 발생했겠죠. 특히나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삶에서 항상 불화의 긴장은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소한 일이 큰 감정싸움이 되고 이것이 집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특히 전세자금을 많이 부담한 사람과 관련될 때)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을 거라 추측해봅니다.

 

초기 빈집의 모습은 몇몇이 전세자금을 거의 모두 부담하는 형태였던 듯 하고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때는 집이 사실상 붕괴할 수도 있었겠죠. 공동 주거하는 방식에 있어서 수많은 다른 의견이 제출될 수 있었을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의견 제출이 감정 충돌로 이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 지점이 안정된 자금이 필요하다를 느끼는 순간이었을 듯 합니다.

 

이때 안정된 자금은 대형 전세자금 부담자가 이탈했을 때도 공동 주거를 계속하기 위한 것일겁니다. 안정된 자금을 모아서 공동 주거를 지속가능하게 하자. 특정 개인의 이탈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동 주거를 실현하자. 뭐 이정도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이런 주장도 공동체 내부의 어떤 합의의 형태로 출현했는지는 의심이 됩니다. 안정된 자금을 모으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을 하고 돈을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형태로 진행될 만큼 빈집의 내부 역량은 없었던 듯합니다. 사실 현재도 그 정도의 빈집 내부 역량은 존재하지 않죠??

 

공동 주거 방식에 대한 여러 주장들 중 하나의 주장이 빈고라는 형식을 제안한 듯 합니다.

처음부터 협동조합 형식을 구상했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안정된 전세자금을 모으자는 형태로 진행되었는지? 어느 정도 규모의 돈을 모으겠다는 목표액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구상한 게 아닌가? 라는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협동조합(빈고)의 출자금 대부분이 사실상 아랫집의 전세자금의 형식이었던 듯합니다.

 

빈집 초창기 주거형태는 주로 전셋집이었습니다. 전셋집의 형태로 계속 빈집을 구상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꽤 큰 목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근데 빈집이 생기고 좀 지나면서 사실상 전셋집이 사라지고 있죠. 대부분 월세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월세의 비중이 보증금 혹은 전세자금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애초 시작이 안정된 공동 주거의 확보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면 월세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굳이 협동조합이라는 형식을 띨 필요가 있을까? 협동조합 형식을 띨 경우 목적도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출자를 받고 출자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고 조합원 교육도 실시해야하고 복잡한 회계처리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지 않나?

 

- 빈고라는 협동조합에서 빈가게라는 수익사업으로 또 한 번의 도약 혹은 퇴보

 

빈가게 발생은 좀 더 복잡한 듯합니다. 빈가게를 시도한 이들의 최초 주장은 “일 놀이터”였습니다. 옆집 주도로 빈가게가 시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랫집은 소극적으로 응해주는 정도 였던 듯합니다. 빈가게는 빈고와 달리 따로 조합원을 모집하기도 했죠.

 

빈가게 주장자들이 어떤 고민속에 가게를 만들려고 했을까요?. 고민의 깊이는 어떠했을까요? 다만 빈마을이 많아지면 즉 빈집이 다섯 채 이상정도 되면 가게를 하나 운영해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지나가는 말을 통해 들었던 듯 합니다.

 

빈마을이 많아지면 풍부해진 역량을 가지고 일자리도 창출 가능 하지 않을까? 라고 고민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빈마을이 풍부했는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랫집이 빈고라는 협동조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강하지 않았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빈가게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두물머리로 떠났고 그 자리를 지음과 살구가 메꾸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좀 아이러니하게도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들은 가게운영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듯 합니다.

 

빈가게가 해방촌으로 옮겨갑니다.

옮겨가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나요?

예전 가게에서 역세권을 찾아 옮겨간 것이죠.

 

덧붙이며...

 

빈집에서 빈고로 그리고 빈가게로 그 발생의 역사를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빈집의 발생에 대해선 거의 다뤄지진 않았습니다. 제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개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전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공동 주거 운동에서 당연하게 느껴지는 게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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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줄

열린집사회의에 일때문에 참석은 못하고 또 글줄이나 쓰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 글을 통한 소통

게시판에 글을 쓰니 사람들은 만나자고 하네요. 제가 생각키로는 만나서 이야기 해보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도, 뭔가 말은 헛돌고 답답하기도 하여 글로 썼습니다. 글이 인격적이냐 말이 인격적이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하였음에도 흘려듣는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것이며, 글로 했음에도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비인격적일 것입니다. 글은 그래도 기록으로 남아, 마음 다스리고 다시 읽을 여유가 있습니다. 감정을 덜어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글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게시판 글소통에 대한 어떤 반감들이 있는 것 같아 변명해 봅니다.

## 신뢰의 문제?

어떤 문제의 지적이 신뢰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의사소통을 방해합니다. 빈고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를 했는데, 그것이 '너 나 못믿냐?'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제기를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지음이 한 '빈집회계'에 대한 질문이 '응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질문의 성격은 제가 던지는 질문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음은 왜 자신을 못믿냐 묻겠지만,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번에 빈집회계를 맡게 된 들깨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음이 날치기 빼돌리기 등등의 의혹이 있냐 하는데, 그 말은 저에게도 적용될 말입니다. 제가 빈고적립금 빈집적립금으로 바꿔서 제 사적으로 유용을 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지금 제기되는 문제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신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필요한 감정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음이 저의 선의를 신뢰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 빈고와 빈집 : 수많은 공동체 중의 빈집이냐,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이냐

저는 빈고가 빈집을 바라 볼 때 어떤 곳으로 바라보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대출이 만들어져 다양한 공동체와 빈고가 관계하였을 때, 그 다양한 공동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빈집에 대한 대출이 검토되는 것과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에 대한 대출이 되는 것은 그 중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전자의 경우 빈고와 공동체가 관계한 것이지 빈집과 관계한 것은 아니며, 후자의 경우 빈고와 관계맺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빈집과 관계맺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저는 만행공간 대출을 통해 빈집사람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빈집과 빈고의 위상문제'라고 일컬어 지는 의문들을 갖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제 빈고가 '공동체 대출'을 신설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와 소통을 시도하는 이상, 빈집 외부의 공동체와 빈집이 차별적으로 대우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여태껏 견고하게 이루어졌던 빈고의 선물이 타 공동체의 위기상황에 선물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가 더욱 확장되는 것이며,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예상되는 만큼 다양한 공동체 중의 하나인 빈집은 그것 자체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할 필요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 무엇이 빈집이냐?

저는 기본적으로 빈집은 1)손님을 받을 수 있으며, 2)열려 있으며, 3)접근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행공간이 손님을 받는다고는 하나, 우리의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 경우 만행공간에서 숙박이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그 열림의 정도가 빈집들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친구를 데려다 재우는 기능은 특별히 빈집이라 이름 붙일것도 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급되는 이음집, 만행공간, cafe 해방촌은 빈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파른집이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도 빈집이라고 불리어졌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 빈집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이 되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공간이 부족해서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 한에야,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는 닫힌 공간이 어떻게 빈집개념에 들어맞는건가요?

 

지음은 빈고가 처음부터 빈집이 아닌 곳에 대출했다고 하는데, 이는 대출의 '목적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말인 듯 합니다. 해방채나 계단집의 경우 빈집을 구성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아마 언급된 대부분의 집들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빈집43 또한 빈집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으며, 그 대출에 분명한 목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 구성에 대하여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빈집 구성원들에게 의사를 묻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 빈집의 확장과 관계의 확장

저는 '빈집의 확장'이라고 말해지는 개념이 하나의 뜻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은 두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1)빈집들이 늘어나는 것과 2)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빈집이라 말할 수 있는 집들이 늘어나는 것을 '빈집의 확장'이라 규정 하고, 빈집과 관계맺는 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을 '관계의 확장'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cafe 해방촌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빈집으로부터 cafe 해방촌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cafe 해방촌이 풍성하게 이룬 것을 cafe 해방촌의 이름으로 가져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과도 cafe 해방촌의 몫이고 책임 또한 cafe 해방촌의 몫입니다. 그 풍성함이 빈집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빈집과 cafe 해방촌이 관계맺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미묘한 차이들이 너무 뭉뜽그려 대화되고 있으며, 저는 이러한 불분명한 개념규정이 오해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에 살고 있는 쌩쌩과 잔잔이 빈집들과 관계를 가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과의 관계의 고민에서 이음집을 빈집이라 칭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이 빈집이냐의 문제와 그것과 관계맺는 문제는 분명히 구분되는 문제입니다. 쿠우가 잔잔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여 잔잔이 쿠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수동적으로 만드는 시혜에 대하여

지음은 수동적으로 만드는 선물의 구조에 관한 문제제기에 되돌려 더 많이 선물함으로써 주체성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교환일 뿐 주체성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물받은 사람이 보다 더 많은 선물을 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봅니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편은 선물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키로 빈고운영위원은 운영위원회의만 있을 뿐,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민주적 회의체가 비교적 약하다고 평가합니다. 또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문제도 빈집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 보입니다. 빈집이 빈고의 무수한 공동체 중의 하나일 뿐이라면, 빈고 운영위원이 빈집 구성원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번 빈집회계에서 구성하고자 하는 상호부조는 빈집 구성원들에 속한 집사가 있고, 집사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매번의 집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빈집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점 때문에 빈고의 선물식 상호부조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빈집회계의 상호부조가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사람이 줄어 부담되는 분담금들도 빈집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며, 집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용이나 책임의 문제 또한 빈집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회의체가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다 주체적일 수 있습니다.

 

 

@@ 다른 세세한 주제들은 만나서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견해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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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학

차이의 정치학

 

한때 여성주의라는 말 속에 여성은 남성에 대립한다는 의미를 가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에 대해 강조. 여성은 가부장제하에서 만들어진다는 중요한 지적등이 나옴

 

마르크스 주의 여성학은 여성이라는 단일한 개념안에 다양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줌.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이 인권에 반대된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함. 그리고 성매매 금지를 주장하는 여성주의 그룹을 중산층 여성운동이라고 공격. 기존에 여성이라는 동일한 관념에 차이가 존재함을 잘 드러냄.

 

성노동자 인권 옹호그룹은 성 판매자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 판매자에게 붙여지는

주홍글씨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주장을

 

* 운동이란 처음에는 단일해 보였던 것이 그 내부에 차이가 존재함을 드러내고, 차이를 생성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동주거운동 내부에도 사실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그 차이들을 증폭시키고 생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제는 잘 알고 있듯 화폐는 전제 군주적 기표. 화폐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돈 되는 방식으로 집중화 하는 메커니즘이지 않은가?

 

우리가 차이의 정치를 말할 때 그것은 이런 화페의 전제군주적 기표에 대한 저항이고 또한 집중화 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의 정치는 욕망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주의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생산했듯 차이의 정치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차이의 발생과 생성을 긍정해야 하지 않을까?

 

공동 주거 운동의 반 자본주의 성격

 

함께 살아가면서 돈을 아낄 수 있다. 그 아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더 많은 돈을 지향한다면 공동주거운동은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사회의 새로운 가족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공동 주거 운동이 일종의 파트너 쉽을 생산해내는 신자유주의하에서 새로운 투자양식으로도 변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 거주를 통해 발생한 인맥과 에너지를 새로운 돈 벌이 수단으로 얼마든지 확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신자유주의 하에서 수많은 실업자와 자발적 노동거부자, 비정규직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 주거를 선택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공동 주거는 최소의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건 돈으로부터 탈주할 수도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최소의 돈으로 살아가며서 돈버는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 돈 버는 행위(노동)보다 훨씬 재미있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정말로 화폐로 대변되는 욕망과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생산하고 즐기지 않을까?

 

그리고 공동 주거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희석화 시킬 가능성도 매우 크다. 물론 공동 주거를 통한 관계들을 파트너 쉽 이라는 투자개념의 가족으로 변질 될 우려도 있는 듯 하지만.

 

공동 주거는 또한 사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함께 사용함으로써 희미해지는 소유 관념. 함께 사용하다 보면 어떤 공통적인 것이 발생하지 않나? 어떤 사물에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가 닿을 때 정말 그 사물이 어느 한명의 소유라는 사실이 어색해진다.

 

아마 공동 사용의 절정은 함께 돈을 사용할 때 일 것이다. 아마 그것은 정말이지 자본의 절망이지 않을까? 이자를 낳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공동사용. 그건 아마 서로의 신뢰와 우정이 깊어질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정말로 우리는 화폐와 자본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라”라는 저 절대적 명령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 삶에 박아놓은

저주로부터 탈주하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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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사태와 새로운 진보정치

 

통진당 사태와 새로운 진보정치  -화니짱- [2012 SKHU 레포트]

 

통진당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자는 주사파나 NL이 아직까지 진보진영 내부에서 정리되지 않고, 역사적 진보를 하지 못한 구이데올로기파의 구시대성으로 인한 촌극이라 여기기도 하고, 혹자는 진보진영 내부에서 비민주성(의회민주주의의 기본 절차도 준수하지 못한- 운동권의 몸에 밴 하부조직적 과격성이 표면화된)이 드러난 비상식적 사태라고 말하고, 혹자는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권력만을 쥐기를 원하는 특정집단의 무서운 권력에 대한 집착이 드러난 일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종합해보자면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한 비상식적인 일이 통진당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이 이번사태를 보는 공통된 의견이다.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인가?

그러나 사태를 특정 인물이나 특정정파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근시안적인 접근이 아닌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자면, 오히려 ‘절차적 민주주의’의 비상식적 훼손이라기보다는 이미 축적되어있었던 ‘의회 민주주의의 허상’이 대중에게 드러난 일례에 불과해 보인다.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당권파가 다수로서의 물리적 힘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여(실제로 당대표들을 폭행도 하며) 처리한 점이 비민주적 만행이니 국회에서 당장 퇴출해야 된다.”라고 통진당 사태를 ‘절차적 정당성’ 차원에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사실은, 한나라당이(지금의 새누리당) 다수의 물리력을 동원해서 날치기로 여러 법안을 수차례 통과시키며 (통진당을 향한 기준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댈 때) 국회에서 퇴출되었어야 할 행위를 과거에 이미 수차례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들의 폭력과 한나라당의 폭력 중에, 왜 어떤 폭력은 의회민주주의 내부에서 허용 가능하고, 어떤 것은 존재론적으로 제거해야 할 만큼 위험한 것인가? 요컨대, 통진당 사태의 본질은 ‘민주적 절차’의 적합성 여부가 아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일개 작은 정당(통진당) 내부의 극심한 의견불일치를 볼 때, 훨씬 많은 수의 의원과 당원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거대 정당 내부에서 (파워게임이 이정도로 분출되지 않고) 통일된 형태로 의견이 분출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내부의 권력다툼이 이정도의 내홍을 불러오지 않는 것은 다른 정당은 정당내부의 위계적 권력 차이가 그 안에서 확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소대의와 과잉대의

다원주의를 따르자면 다양한 지지세력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여성, 장애인, 청년 등의 특정층을 대변하는 비례대표는 더욱 그러하다.)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일까? 통진당의 당권파가 통진당을 지지해준 국민들을 대의하지 못하고(과소대의), 일부의 당파적 당원들만을 과잉대의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과잉대의와 과소대의의 문제는 다른 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장애인, 여성,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을 대변하여 격렬하게 내부권력 싸움을 전개한 국회위원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있었던가? 이 문제를 투표과정 등에서의 ‘절차적 적합성’의 문제나 당원관리의 ‘투명성’문제로 환원시키면 안 된다. 수단의 적합성을 성취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오독된다면, 실질적 민주주의의 미성취 문제가 발생할 뿐 만 아니라 국가의 공안권력(법치주의)이 대의민주주의를 좌지우지하는 위험성만 증대시킨다.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수단’의 정당성이 아닌 ‘목적’에의 적합성을 놓고 보자면, 어느 당이든, ‘목적없는 수단’으로서의 의회민주주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진당과 다를 바 없는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다.

 

목적없는 수단

정치권의 논쟁이 사법부의 판단력에 놓여지곤 하는 최근의 사례들은 ‘수단적 민주주의’의 강화현상, 즉 대의민주주의의 과소대의화의 경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Democracy(민중의 힘이라고 번역되는)에서 ‘민중의 힘이 발현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 목적은 그 ‘수단’의 적합성만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국가권력의 힘 앞에서 논의되지도 못한채 사라지고 있다. 자유주의의 상황 하에서 국가가 약화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약화된 부분은 자본을 견제, 감시하는 힘으로서의 국가의 역량인 것이고, 국민을 규율하는 공안적 권력의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국가주권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개별 국민들의 시민권은 국가권력의 강화 앞에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통진당 사태를 통해 우리는 진보의 위기를 말하기 이전에, 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본의-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어떻게 제도권 안에 충실히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진보진영의 총체적 위기와 해법

지금은 보다 급진적으로(Radical의 어원대로 뿌리부터 따져 들어가며) 아래(운동,민중)에서부터 시작할 때이다. 특히, 진보진영은 자신이 처한 위기상황을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현재의 정치체제 안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고민함을 통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와의 차별점을 구축해나감으로써 극복해야 한다. 현실 공산주의의 실패 이후에 맑스주의를 대체해 진보진영을 이념적으로 모아줄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고,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 다양한 분파(급진민주주의, NL, PD, 신좌파, 포스트맑스주의, 신구조주의학파 등)가 서로 전략적으로 힘을 모을 구체적 적(독재권력)이 없는 상황은 진보진영의 위기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이념의 구심점, 현실정치에서의 구심점도 없는 진보진영이 이들을 대체한 구심점으로서의 하나의 기반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이는 서로 대립하는 3자구도적 관점(국가권력, 자본권력, 민중의 힘)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자본권력의 막강한 힘과 함께, 국가의 규율권력 또한 강력해졌음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민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입장으로서 진보진영이 연합해야 한다. 자본과 국가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민중의 입장에서의 해법은 최근에 세계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직접행동, 특히 운동정치의 큰 흐름에서 나타나는 반자본주의적 저항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정치’의 직접적 발현이라는 새로운 기반 위에서 민중 모두의 보편적 권리, 시민권을 어떻게 강화시킬 것인지, 위로부터의 정치와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진보진영에서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치와 복지담론

최근 장하준, 정태인 등이 경제민주화와 재벌 문제에 관해서 여러 지면을 통해 여러 논쟁을 벌인 일이라든지, 최태욱 등이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등의 저작을 통해 이슈가 되고 있는 현상 이면에는 ‘(진보적)자유주의 진영’과 ‘사회민주주의 진영’ 사이에서 진보정치의 주도적 헤게모니를 가져오기 위한 내부투쟁적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논쟁적 구도를 바탕으로, (앞에서 제시한 ‘아래로부터의 정치-민중’에 기반한) 새로운 진보정치의 방향성을 복지담론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좌파진영, 자유주의 진영, 보수진영

이번 선거에서, 모든 정당이 민통당과 통진당, 심지어 새누리당 마저도 복지정책의 확대를 이슈로 들고 나온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보수당이 똑같이 진보정책의 혜택을 이야기한다면 좌파진영은 보수진영, 혹은 자유주의진영(장하준)과 어떤 차별점을 둘 수 있을까? 복지문제에 대해, 빈부의 개념으로 접근하자면, 보수진영이나 자유주의 진영과의 본질적 차이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지문제는 (부자나 국가로부터) 수혜개념이 아닌 권리. 국가의 시민으로서, 국방의 의무와 교육의 의무가 당연시 되는 것만큼이나, 시민권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보편권으로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본소득’은 그런 점에서 좌파진영의 정책이 될 수가 있다. 복지의 확대가 (국가의 확대로 인한 상대적) 시민역량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강화를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국가의 축소를 (특히 재정 지출측면에서) 이야기하며, 복지정책을 확대 하면 국가가 확대된다고(특히 관료제적 체계) 경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에 불과하다. 보편적 복지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국가조직이 확대되는 측면은 국가의 주권적 힘이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무제한적인 시장적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권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이다.

 

소렐의 예언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회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운행을 저지할 목적으로 도덕론자들이나 교회세력 또는 민주정치와 손잡으려 한다.” 소렐은 의회사회주의의 이와 같은 도구적 시도를 우려했다. 100여년이 지난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소렐의 우려대로,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다원주의적 질서를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 기반으로서 여긴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슈 메이커’를 따르자면, 좌파와 우파 사이의 다양한 이념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극단적 분열로 이어지지 않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으려면 다원주의야 말로 최소한 합의 가능한 지점으로서의 공공 정치철학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좌파의 모든 주장들을 ‘대의 민주주의’ 정치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정치’, ‘화석화된 급진성’,‘득표를 위한 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렐이 그렇게나 비판했던 진보적 의회주의자들의 허상적 대의가 바로 다원주의 정치 안에서의 진보의 최전선인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정치

따라서 우리는 민주적인 다원적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권력을 가진 측에게 직접 도전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저항적 직접행동을 통해 정책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목표이다. 오히려 이러한 ‘직접행동’을 통해 (한국에서의 촛불집회의 경험이 좋은 예이다.) 대중이 스스로의 의식을 고양해 ‘기존체제 수용, 무관심, 허위의식’의 정신을 극복하고 주체적 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한 목표이다. 이러한 자각은 결국 통상적인 다원적 사회에서 개인들을 이탈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이러한 직접행동이 이어지면, 항거자들이 서로 간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창출해 내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식의 나의 전망이 현실 정치에의 대안으로서 실현되기에는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비판받을 여지도 있으나, 엘리트나 정치인에 의해 대의되는 ‘위로부터의 정치’를 거부하고 대중의 역량이 스스로 발현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지향함에 있어, 오히려 그 방향성을 명확히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윤리의 제시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다원적 정치로부터 결국 민중들이 이탈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원적 정치의 부도덕성(물질 만능주의, 경쟁 사회 내에서 개인의 자신감만 강조하는 풍조, 억압에 눈감는 분위기 등)에 환멸을 느끼고, 더 고귀한 도덕성을 따라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진보이념은 과학적 판단(옳고 그름)에 대한 강조가 아닌 가치판단(좋고 나쁨)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한다. 다원적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아나키즘에서의 상호부조의 정신,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심층 녹색주의가 도모하는 것처럼, 생태적 규범 등에 의해 개인들에게 강제적 상벌을 부과하는 방식의 또 다른 형태의 거버넌스는 강권적, 전체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아나키즘의 윤리적 판단이 개인의 자발성과 자의성에 온전히 의지하듯이 새로운 도덕성도 그래야 할 것이다. 자발성 안에서 자기규율(푸코)을 통해 시행될 때만 개인의 개성과 집단의 공동체성이 모두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윤리에 대한 모색에 있어서 아나키즘의 ‘차이의 존중과, 꼬뮌적 관계의 중시, 공통성(the common -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강조’ 라는 측면은 다원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공공 정치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새로운 아나키즘’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참고문헌

고병권 외. 2007.『코뮨주의 선언 :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교양인.

박영균. 2011.『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박영균. 2012『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그린비.

조현연 외. 2011.『한국 진보정치운동의 역사와 쟁점』한울아카데미.

최태욱 외. 2011.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하승우. 2008.『아나키즘』책세상.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 2009. 백용식 역.『아나키즘』개신.

Chantal Mouffe. 2007. 이보경 역.『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Colin Ward. 2004. 김정아 역.『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돌베개.

George Katsiaficas. 2009. 이재원 역. 『신좌파의 상상력』난장.

John Holloway. 2002. 조정환 역.『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갈무리.

Goerges Sorel 2007. 이용재 역.『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Paul Schumaker. 2010. 조효제 역.『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후마니타스.

Sabu Kohso. 2010. 김향수 역.『뉴욕열전』갈무리.

박영 균. 2012a. 서울리다리티 역. 『유체도시를 구축하라!』갈무리.

박영 균. 2012b. 「새로운 아나키즘의 위상」『수유너머위클리』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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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세미나 - 페미니즘의 도전 발제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구도 : 근절 / 허용

성매매 근절론자들 : 데모에 나온 성판매 여성들을 업주의 꼭두각시로 간주

허용론자들 : 자신들이 성판매 여성들의 노동권. 생존권.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

 

여성관련법 제정에서 모든 여성의 이해를 동일하게 가정할 수 있는가? 여성운동가와 여성학자와 여성부의 관계는? 여성 내부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여성은 전체 여성을 위해 말하는 여성에 의해 침묵당할 수 밖에 없는가? 전체 여성을 위해, 성매매 근절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을 거두는 것이 더 효과적인가? 성판매 여성만이 성매매에 대해성들에게 말할 수 있는가? 성판매 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반성매매운동운 불가능한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여성의 몸 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와 지배의 권리 체제로 정의한다. 이들은 성매매를 남성의 돈과 여성의 몸이라는 평등한 자유로운 교환이 아니라 성착취라고 보며 사랑, 성폭력, 성매매를 연속선으로 파악한다.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와 성폭력, 성매매의 억압성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성 구매자와 판매자는 압도적으로 성별화되어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매매는 성 보수주의나 윤리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이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 것을 정상화,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 시스템의 핵심이다. 성매매는 성폭력고 다르지 않다.

 

대만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조세핀 호 : 성매매 근절은 중산층 여성의 이해일 뿐. 성매매가 인권침해가 아니라 성판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권침해. 성 판매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성 전문가라고 주장.

 

성 노동자 인권옹호 페미니스트 :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성판매여성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고, 비참한 피해자로만 본다고 비판. 가부장제 시각과 다르지 않다. 성판매 여성들의 주체성을 완전히 말살한다고 비판.

 

성 노동자 페미니즘 : 성매매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낙인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기존 페니니즘이 자칫 성 보수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를 강화할 위험성을 지적.

 

보부아르 : 그리스 사회는 창녀는 세가지 계급. 고객에게 몸을 팔기전에 철저히 조사당하는 가장 낮은 계층의 여성, 예술연주자인 여성, 부와 지식으로 공적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높은 계층의 성판매 여성. 여성이 성을 파는 행위가 공적영역에 진출하고 교육의 기회에 접근하는 기회였음(아내,어머니인 여성은 교육받지 못했다.)

 

제국주의 국가 남성들의 매춘관광

마리아 미즈는 유럽백인 남성의 섹스관광 : 자본주의 노동의 소외의 결과. 레저활동

 

역사와 문화를 초월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성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거나 동

일한 방식으로 억압적인 것이 아니다. 성매매는 근절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매매를 젠더 모순으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사회에 대한 맥락화 없이는 판단 불가능하다.

 

남성들이 서로 다르듯 여성들도 모두 다르다.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에게 가족은 젠더 공장으로, 여성억압의 장소이자 젠더를 인식하는 출발이다. 그러나 장애 여성이나 레즈비언에게 가족은 종종 쟁취해야할 정치적 투쟁의 목표가 되고, 흑인 여성에게는 인종 차별에 저항할 근거지가 된다.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기존 여성주의를 해체, 재구성할 것이다.

 

군사주의와 남성성

 

폭력은 행위자와 대상자 사이에 그 어떤 공감, 소통, 연민, 관계성이 없다고 믿을 때 가능해지므로 폭력은 극단적인 형태의 이분법적인 인식론을 전제한다.

 

젠더는 군사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제다. 군사주의는 남성성, 여성성, 성별 이분법 같은 개념과 문화에 의존하는, 그 자체로 성별화된 사회현상이며 동시에 성별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제도이다.

 

체제를 초월하여 어느 사회에서나, 국가에 헌신한 남성에게 젊고 예쁜 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의 희생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다.

 

<군 가산점>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남성성의 이중성: 군 면제된 특권층 남성들의 계급적 지위에 대해 열등감 즉 면제받는 능력에 대한 부러움. 반면 여성 방위병등에 대해 여성적이라고 비난

 

군사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싸워야할 적, 지키는 주체, 보호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남성이 군대에 복무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남성다움을 검증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해야하고, 그들의 경험은 여성에 대한 지배와 보호, 여성들의 고마움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한국 평화운동의 군사주의와 남성성

 

2003년 6월 윤금이 씨 주검 게재, 사진을 전교조 교사가 수업용으로 이용. 반미의식 고양용도로 이용. 미군이 한반도 (윤금이 씨)를 강간했다.  윤금이 몸에 뿌려진 화이타이는 미군의 정액이다. 여성의 몸을 대상화 수단화하는 남성중심주의

섹스는 군대의 사기에 결정적. 섹스가 남성의 긴장을 풀어줌. 군대 내부 남성들 간의 계급갈등과 이로 인한 불만과 폭동의 가능성을 환화, 약화.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도 여성에 대해서는 지배자가 됨

 

지배세력에 의해 군대나 전쟁에 끌려간 일반 남성들은 용병 희생자일 뿐이며 진짜 문제는 체제나 구조에 있다고 보는 거시적 시각은 계급 환원의 단순한 논리이며, 많은 남성들이 피해자이자 행위자가 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명령한자는 명령한 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한 자는 실행한 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군대나 전쟁터에서 살아있는 인간을 해부하라는 식의 명령을 피하는 병사도 있고, 명령이상으로 과잉 수행하는 병사도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단호하게 명령를 거부하는 남자다운 사람이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손이 떨려서 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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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quo;오해하셨습니다.&rdquo; 라는 말.

여러분들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빈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듯 싶습니다. 하지만, 오해도 일종의 이해인 한에야, 그러한 인식이 형성되기 위한 인식의 재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오해가 단지 제가 빈고를 이해하는 능력이나 노력이 떨어져서 그러한 점도 있겠지만, 그러한 오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네가 오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대방에게로 돌리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 분들께서 저더러 ‘네가 오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러한 논란의 원인이 ‘저의 오해’이며, 저만 제대로 이해하면 이러한 논란이 불필요하다는 뜻처럼 읽혀져 불쾌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빈고나 빈마을에 대해 말하는 추상적 단어들에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단어들에는 냉소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러한 단어들이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가치를 내세워 활동들을 합니다. 종종 같은 가치를 내세워 활동을 하지만 그들이 현실화하는 활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관찰할 때 본질은 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활동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빈집이나 빈고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는 것은, 빈집 홈페이지나 위키에 적혀 있는 이미 오래되어 버린 글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다른 공동체에 빈고나 빈마을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 자료화 된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다니고 있는 수유너머R 에서는 매주 화요일 발표회를 합니다. 그 ‘화토회’에 지음을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표회 이후 수유너머R 에서는 빈고에 출자를 했습니다.

 

죠스, “3월 12일 월 저녁 7시 빈마을의 대안금융 ‘빈고’ 설명회합니다!”, 수유너머R, 2012.03.09.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495000

 

지음, “수유+빈고 수다회 자료”, 수유너머R, 2012.03.13.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504705

 

빈고 수다회인데 빈마을 이야기가 잔뜩 있습니다. 빈고의 돈 움직이기 부분이 빈고에 관한 적극적인 부분인 듯한데, 그 부분도 주거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잔뜩 채워집니다.

 

무엇보다 빈고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말들을 봅시다.

 

11. 지금 빈고는

  • 빈집을 위한 빈고. 빈집이란 무엇인가? 빈집을 넘어서기.
  • 공동체 공간 대출의 확장
  • 전세에서 월세로
  • 빈집에서 해방촌으로
  • 공동체 주거공간과 모임공간 보증금을 공유하는 주거협동조합으로
  • 공동체들의 연대와 상호부조를 위한 공동체은행으로
  • 신뢰할 수 있고 안정적인 조직으로 체계화하기.
  • 교육 프로그램 만들기.
  • 홍보 방안 만들기.
  • 출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인센티브 제공하기.
  • 정관 규약 등 정비하기.
  • 조합원 활동을 활성화하기.
  • 일꾼 키우기.
  • 빈고에서 확장된 형태로 개편 / 개명

 

지음이 만든 자료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빈고의 성격이 어떻게든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 공간 대출의 확장을 기획하고 있으며, ‘빈집’에서 해방촌으로 중점이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기존의 빈고가 ‘빈집’에 중점이 있었으며 이제 그것을 해방촌으로 넓게 확장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더해서 빈고에서 확장된 형태로 개편 / 개명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빈고’는 켄짱이나 잔잔이 말하는 것처럼 확장된 ‘빈고’개념인가요? 그런 개념이라면 새로이 확장할 필요가 무엇에 있는가요? 정말로 여러분들이 말하는 빈고의 애초 취지와 정신처럼 빈고는 고정불변의 무엇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인가요? 그것의 추상적 단어들과는 별도로 실재로 작동하는 것들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닥쳐진 사건에 우리가 새로이 반응한 것이지, 애초부터 상상력이 현재 그리는 그것만큼 뻗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빈고 취지문의 첫 주어가 왜 집인지 의아합니다. 빈고와 빈집의 관계가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라면, 채권자가 자신의 활동을 홍보함에 있어서 채무자의 활동을 가져다 들어 쓰는 것은 일종의 착취일 뿐입니다. 지음이 발표한 수다회 자료를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습니다. 구체적 내용들은 전부 빈집에 관한 이야기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빈집이 빈고가 없으면 만들어 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건 일면 맞기도 하고 일면 틀리기도 합니다. 빈집이 지불하는 이자가 사실상 빈고의 주 수입원이고, 빈집이 빈고에게 대출받지 않았다면 빈고의 성격은 단순한 저리의 금융기관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됩니다. 빈고는 빈고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반자본적 성격 또한 사라져 버립니다. 고리대금업자나 저리대금업자나 돈이 돈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로도 맞지 않습니다. 빈고는 빈집에 의해 배태되었고, 빈고와 빈집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또 만약에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였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출자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받아내는 그것 이상으로 받아낼 이유 없습니다.

 

사람들은 빈집이 유지되기 위한 물적 토대를 빈고에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의 집 보증금으로 쓸 바에야, 자신의 거주지를 빈집으로 옮겨오고, 빈고에 출자를 합니다. 애초부터 빈집과 빈고가 분리되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빈고에 출자하면 빈집이 유지 확장되리라 믿었습니다. 신규 조합원이 유입되는 경로 또한, 빈고 자체의 활동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빈집을 거쳐 조합원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빈고의 성장은 빈고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주된 기여는 빈집에서 한 것입니다. 빈고를 외부에 소개할 때 빈집의 고민이야기를 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도 오해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해에 기반한 믿음 또한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원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과정에서 빈집과 얽어 홍보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를 적극 조장한 이상 빈고에서는 그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빈집적립금’이라는 것에 ‘빈집의 유지와 확장’을 목적으로 선물된 돈들이 들어가 있는 이상, 빈고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성질의 자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빈집적립금’의 내용들이 대부분은 ‘빈집의 유지와 확장’의 이름으로 조성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조합원들의 이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오해하신 분들의 오해에 기반한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일부라도 빈집회계로 넘어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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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과 빈고에 대한 인식의 변화

빈고와 빈집의 재정분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빈고 조합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빈고 운영회의에서는 빈집적립금이 빈고적립금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약간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글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 8월 말부터 빈집에서 장기투숙 하고 있으며, 그간의 기간 동안 나태하게 파악한 것을 바탕으로 쓰겠습니다.
 
빈집과 빈고의 관계에 관한 인식변화의 진행과정
 
빈집이 먼저 있었고 빈고가 생겼습니다. 빈고의 성격은 빈집의 마을금고였고, 빈집의 공공기금을 처리하는 목적으로 빈고가 생겼습니다. 빈고는 우주협동조합으로 주거문제를 고민하는 조합형태로 운영되었고, 그 주거문제의 구체적 해법 모델로 빈집이 제시되었습니다. 빈집에 거주하지 않는 많은 외부 사람들도 빈집의 정신에 동의하여 출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빈고는 몇몇 운영위원들이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계속해서 이러한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빈고와 빈집의 분리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만행공간과 빈가게가 빈고로부터 대출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시기가 빈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빈집 사람들은 빈집에 살면서 주인의식을 갖는 일종의 마음의 표시로 출자할 것이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말해지는 것처럼, 빈집의 확장과 유지에 필요한 자금에 자신 또한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만행공간과 빈가게 대출은 빈고가 주거나 공간의 측면에 있어서 빈집만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빈고에 어떤 자금적 지원을 한다는 것은 곧바로 빈집에 쓰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공동체에 쓰일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만행은 빈집과는 구분된 집단이고, 빈가게(cafe 해방촌) 또한 이번에 해방촌 오거리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빈집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이라는 공적 성격을 벗어버렸습니다. 만약 기존의 빈가게가 진정 빈집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회관의 성격이 있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빈집 사람들의 의사 또한 물어져야 했을 것이며, cafe 해방촌이 생겨나는 과정에서도 빈집 사람들의 의사가 물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이 빈집사람들 모두가 함께 공간을 책임질 수 없었거나, 혹은 의지가 없는 것이 원인이 되었거나, 몇몇 사람들만의 생각으로 추진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cafe 해방촌이 새로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빈집 사람들과 묶여서 뭔가를 하기보다는, 그들의 멤버쉽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더불어 많은 집들은 지난 겨울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간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남아버린 공간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고 이는 보다 부담되는 분담금으로 사람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부담은 빈고에서 선물로 어느 정도 매꿔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빈고에 의존하여 ‘선물’로 행해지는 상호부조에도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빈집의 특성상 인구의 유입-유출이 자유롭고, 그 누구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혹자는 떠나는 사람들이 책임의식이 없으며 자신은 떠날 때도 분담금을 일부 부담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떠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강제할 현실적 장치 또한 없습니다. 남은 공간에 대한 부담은 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선물’이라는 불확실한 것 보다, 보다 안정적으로 주체적으로 그러한 불안을 상호부조로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빈고 운영위원들은 각 집의 의사를 대표 혹은 대의하지 못한다는 의사소통 구조상의 문제도 있었고, 빈고는 빈집에 살지 않는 사람들 또한 조합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회의체이기에, 빈집의 문제를 주체가 되어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빈집 사람들은 수도관 파손, 보일러 동파 등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능동적 주체로 상호부조의 방식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라는 회의체가 선물이라는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수동적으로 반응해야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빈집 자체의 상호부조를 조직해보고자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존의 빈고와 빈집의 관계는 빈집의 유지를 위한 상호부조라는 측면에서, 빈집을 주체가 아닌 선물을 받는 수동적 객체에 머물게 하며, 무력한 집단으로 만듦니다. 빈고와 빈집의 회계가 분리될 경우, 빈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대사소한 사고들의 경우 빈집의 적립금으로 우선적으로 보다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빈고는 빈집문제에 대한 안건비중을 낮출 수 있으며, 빈집에서 별도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만 안건화 시켜 논의하므로 보다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조합원들을 관리 교육하는 빈고의 다른 업무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빈집적립금 그리고 빈고적립금
 
저는 빈집적립금이 빈고적립금으로 바뀐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도 빈집과 빈고의 회계가 분리되는 시점에서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것이 더욱 더 의아스럽습니다.
 
빈고는 빈집의 금고였고, 사람들은 빈고에 출자 할 때, 빈집의 정신에 동의하여 출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빈집자체의 금고가 빈고였던 상황에서 빈고에 선물한다는 것은 곧 빈집에 선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집의 잉여금을 미래의 빈집사람들에게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빈고에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음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선물한다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빈집사람A 가 빈집에 선물하는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빈고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타 공동체 대출에 대한 의사결정은 집사회의의 대의제화에 민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빈고 운영위원 몇 사람의 주도에 의해 결정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빈집적립금이라고 이름 붙여져 모여오던 돈이, 빈고적립금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위원 몇몇의 결정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음은 그 돈이 주인이 없고 모든 사람의 것이며 지금 현재 사는 사람이 그 돈의 용도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빈고 운영위원들이 돈의 용처를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진정 그 돈이 주인이 없는 돈이라면, 빈고 운영위원들 또한 돈의 용처를 결정할 수 없어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아니, 정말 주인 없는 돈이라면, 우리 모두가 모여 용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비록 지음의 말처럼 실질은 그대로이고 명목상 변화라 할지라도, 그 명목상 변화가 사람의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나 구성원들이 쉽게 바뀌는 빈집의 특성상 그 영향은 더욱 크다 할 것입니다. 분명 논쟁 여지가 있는 중대 사안인 것 같은데, 운영위원 몇몇의 논의로 이런 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들과 그것을 유지시키는 자들
 
빈집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초기의 여러 가치를 지향하던 운동적 성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렇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며 추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런 맥락에서 빈집 5주년 수기 같은 것들이 진행되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고 바깥으로 보일 어떤 환상이지, 정작 중요하다 할 수 있을 우리가 살면서 부닥치는 크고 작은 윤리적 문제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은 미래의 천국을 기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현실도피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이렇게 변화하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러 다른 많은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사건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공간을 지키고 이곳에서 살 수밖에 혹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만들어진 사건 또한 중요하겠지만, 그 사건들이 빈집의 이름으로 사건화 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때로는 비록 귀찮고 폐가 될 수 있을지언정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또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나의 삶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입 다물고 빈집에서 살면, 그저 지낼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빈집이라고 하는 곳은 여유 있는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놀이나 실험 따위가 아니라, 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고 현실적 생존 전략입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은 이곳 자체가 유지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지내는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서로를 질시하고 미워하면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다. 어떤 이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그친 다기 보다는 대게는 감정이 상하고 싸움으로 변질 되기도 합니다.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 할 때면, 빈집을 위해 사고하고 어떤 의견을 내세우는 것 보다는,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 유들유들하게 시시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빈집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에는 깊게는 관심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 사는 것은 빈집에서 그저 머무는 것이지 진정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2년 6월 6일의 새벽, 어떤 마음이 동하여 글을 썼습니다. 읽어주신 분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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