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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5장 2절 : 부적절한 대체물로서의 화폐

부채 5장의 2절 : 부적절한 대체물로서의 화폐

 

필리프 로스파베 (경제학자 출신 프랑스 인류학자) : 원시화폐는 원래 부채상환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끝내 지급될 수 없는 부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1926년 국제연맹 신부값을 노예제도의 한 형태로 보고 금지하려함. 인류학자는 3가지 이유로 반대. 1 남편도 아내에게 많은 책임을 진다. 2 아내를 판매할 수 없다. 3 남자가 돈을 주고 산게 있다면 아이들을 자기아이들이라고 부를 권리정도이다.

 

인류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짐. 신부값은 노예를 구입하는 돈이 아니라 해결될 수 없는 부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방식. 돈으로 어떤 여인에 대한 권리를 결코 획득 할 수 없음을 원시부족인들은 잘 알고 있었음. 한 여인에 대한 대가로 합법적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또 다른 여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

 

누에르 족, 살인 사건의 발생시 소(40마리)를 지급. 추장이나 친척들이 나서서 소를 받을 것을 권유. 피해자 가족은 완강하게 저항하지만 마지못해 나중에 받음. 소로 그 빚이 청산되지 못함을 모두 잘 알고 있음. 최종적으로 목숨으로 갚기 전까지는 그 살인죄가 결코 용서되지 않음.

이로쿼이 족의 경우 살인 사건의 경우 흰색 조가비 구슬 벨트가 건네짐. 범죄에 대한 용서와 참회가 담겨있음. 북아프리카 베두인 족, 살인자의 가족이 딸을 내놓음.

 

렐레족 피의 부채

 

콩고의 카사이 강 유역의 평탄한 곳에 살던 인구 1만 명 정도의 집단.

천은 일종의 통화 역할. 음식이나 도구 그릇등을 구입하는데는 사용안함. 옷은 화해를 위한 선물로 긴장을 해소. 이별과 축하의 선물. 성인이 되는 남자는 아버지에게 옷을 20벌 줌.남자는 자식을 낳을때마다 아내에게 옷 20벌 줌. 벌금과 수수료 치료비등으로 사용. 젊은이들은 아버지 어머니 삼촌등에게 존경의 표시로 옷 선물. 결혼시에 옷이 많이 요구됨. 캠우드라는 고액권도 결혼협상에 필요함. 늙은이들은 옷을 여유분으로 가지고 있음.

 

만약 누군가가 죽는다면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죽였음에 틀림없음. 아기를 낳다 죽으면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인 것. 간부가 그 죽음에 책임을 짐.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은 피의 부채를 짐. 희생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목숨을 빚짐. 범죄자는 자기 가족의 젊은 여자를, 자신의 여자형제나 딸을 희생자의 피후견인 또는 볼모로 넘겨줘야 함. 볼모는 상속됨. 그녀의 자식도 손자도 볼모가 됨. 자연히 남자들이 여자 볼모들을 가능한 한 많이 두길 원함.

 

렐레 족의 성인 남자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볼모로 잡혀 있거나 볼모를 얻고 교환하고 도로 찾아오는 게임을 줄기차게 벌임.

 

중요한 점 : 교환되고 있는 대상이 인간의 목숨.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 인간의 생명이 여자의 생명을 더 구체적으로 젊은 여자의 생명을 의미함.

 

볼모가 된다는 것 :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형식일 수 있음. 그럼에도 볼모지만 여자입장에선 어머니와 형제뿐만 아니라 별도로 돌봐줄 영주를 한명 더 가진 것. 그녀의 약혼자는 그녀에 대한 통제권 그 이상 절대로 확보 못함. 남자들이 여자들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책략을 쓸 여지가 많음. “마을 아내”가 되는 경우도 있음.

 

마을이라는 법인 : 렐레족 개인들은 서로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일상에서 무력이 동원되기는 불가능 함. 볼모제도가 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아내제도와 마을과 마을 사이엔 마을 아내를 서로 만들려는 경쟁과 폭력의 사용이 가능했다. 마을자체는 요새화되어있었음. 생명의 가치와 돈 사이에 구축되었던 높다란 벽이 갑자기 붕괴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의 가능성이 대두되었을 때임. 어떤 여자가 도망쳐 다른 마을의 마을 아내가 되었을 때 그 여자의 볼모채권자는 그 권리를 마을에 팔수 있음. 마을은 그 권리를 마을 공동 기금으로 구입한 후 다른 마을을 공격해서 그 권리를 강제로 집행함. 생명의 권리와 화폐가 폭력을 통해 연결되는 지점.

 

무력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 인간 생명은 오직 다른 인간 생명으로만 교환가능하고 재화로는 절대로 교환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지워버림. 볼모의 권리를 마을에 팔때의 가격 = 노예의 가격.

 

A=A(생명하나는 다른 생명 하나와 같다)에서 A=B(생명하나는 라피아야자 옷 100벌=노예가격)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그 방정식이 무력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인육부채(티브 족)

 

렐레족의 통화 : 전형적인 사회적 통화. 방문과 약속, 삶에서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는데 사용. 라피아야자 천은 옷, 캠우드 나무는 화장품, 육체를 적당히 사회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 것.

 

인간경제 : 사람들이 신체 장식으로 사용한 물건들이 돈으로 먼저 사용. 구슬, 조개껍질, 깃털, 개나 고래의 이빨, 금과 은. 아름답게 보이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들. 보리나 치즈 담배 소금등은 정부와 그 다음에 시장이 생기면서 통화가 됨. 인간경제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지님. 다른 것과 교환 불가능한 것. 그러나 티브 족, 렐레 족 모두 그 내부에서 여자들을 교환하는 시스템은 존재함. 여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발생하자마자 사람들이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창조한 부채 시스템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파괴하는 수단이 됨.

 

일반적인 원칙하나 : 무엇인가를 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때까지의 사회적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 할 때 가능. 어머니와 아버지, 혈육으로 분리되었을 때 노예로 팔리는 게 가능.

 

티브 족 : 폴 보하난과 로라 보하난에 따르면 3개의 독립된 교환영역 존재. 일상적인 소비재와 관련된 영역, 남자들의 위신재, 여성에 대한 권리. 이 3영역은 철저히 분리. 일상적 소비재의 영역에선 오크라, 남자들의 위신재와 관련해선 놋쇠막대가 통화로 사용됨. 아무리 많은 양의 오크라가 있어도 당신에게 놋쇠막대 하나를 안겨줄 수 없다. 원칙적으로 놋쇠막대가 아무리 많아도 당신에게 여성에 대한 권리를 주지 못한다.

 

차브와 인육부채 : 심장에 자라는 사람에게 에너지와 매력과 설득의 능력을 주는 어떤 생물적 물질.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부릴 수 있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인간의 살점을 먹으면 차브가 얻어진다는 믿음을 가짐. 차브를 키운 남자들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무당으로 간주됨. 차브가 큰 강심장을 가진 무당은 당신에게 당신과 가까운 친척들의 시신에서 살점을 떼어내어 당신의 음식에 슬쩍 넣을 수 있다. 당신이 어리석게도 그 음식을 먹게되면 당신은 그에게 “인육부채”를 지게 된다. 그 인육부채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은 당신이 죽거나 당신의 가족 한 사람을 대체물로 약속하는 것이다.

 

강심장을 가진 남자들은 권력과 카리스마를 갖고있는 남자, 부채를 조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여자를 자신의 아내와 볼모 딸로 바꾸는 권력을 상징. 뱀파이어 이야기 좀비 이야기와 같은 공포이야기는 사회적 삶의 한 측면을 솔깃하게 보여주는 듯. 대부분의 티브족 사람들은 남자 늙은이들을 무당이라 생각, 젊은이가 죽으면 그들이 인육부채를 회수한다고 생각.

 

티브족 사람들은 왜 구리막대 통화를 제한된 영역에서만 사용토록 했을까?

 

18세기 말 티브 족의 땅에 통용되었던 구리막대들, 노예무역업자들에 의해 수입된 것, 그 당시 티브 족 땅의 남쪽에 붙은 지역에선 구리막대들이 일상의 통화로 이용되었음.

 

대서양 노예무역 : 신용거래의 거대한 네트워크. 리버풀이나 브리스톨에 근거지를 둔 선박소유주들은 앤틸레스열도(서인도제도)와 미국의 농장주들에게 노예를 팔아 큰 돈을 남김. 선박 소유주들 올드 칼라바 같은 아프리카 항구로 구슬, 무기, 강철과 구리제품을 대량으로 가지고 옴. 아프리카 현지 상인들에게 볼모(상인들의 가족을 선호)를 잡고는 물품을 신용으로 거래. 현지 상인들은 노예를 잡아와서 대금을 치름. 폭력이 만연하면서 아프리카 기존 인간경제의 모든 제도들이 체계적으로 타락. 비인간화와 파괴의 거대한 도구로 인간경제 시스템이 작동. 남자들은 들판에서 일을 할 때도 무장을 하고 무리를 지어야 했음. 아로 동맹이라는 상인단체(?)가 중무장한 용병으로 질서를 어느정도 회복. 그들은 강제납치범들을 추격해 납치범들을 노예로 팔아 넘김. 또한 너무 엄격한 정의체계를 확립함. 나중에는 법을 어기는 사람은 아로동맹에게 넘겨져 노예로 팔려감.

 

엑페라는 상인모임 : 화려한 가면극을 후원. 부채를 발생시키고 집행하여 노예로 팔아버림. 액페공연을 위한 장비와 의상을 구입하기 위해 빚을 지게 됨.

 

상인협회들이 구리막대를 유통시킴. 노예를 사고 팔때나 장례식과 지위를 드러내는 장소, 선물과 부조등에 구리막대가 사용됨. 상인들의 존재 때문에 구리막대가 티브 족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게 됨.

 

“크로스 강의 상류 지역에서는 옛날에 누군가가 곤경에 처하거나 빚에 신음하는 상태에서 돈을 필요로 했다면, 그 사람은 대체로 자기 아이들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아니면 다른 가족을 주기적으로 마을을 탖던 아쿠나쿠나의 무역업자에게 ”저당“을 잡혔다. 아니면 빚을 진 사람이 이웃마을을 급습해 아이를 잡아와 노예로 팔곤했다.”

 

중앙권력이 없어서 자기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겐 엄청난 책임감,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에겐 별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환경, 다른 마을의 아이 납치는 현실적 대안.

 

채무자에서 그 다음엔 아로동맹으로 넘겨지고 그리고는 영국인에게 마지막엔 쇠사슬에 묶여 바다건너 플랜테이션으로 팔려나갔다.

 

<인간 경제의 붕괴>

 

인육 부채 이야기는 그 당시 노예무역의 참상을 담은 이야기 일 수 있다. 티브 족 채무자들은 자신이 부채상환을 집행하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아이들로 부채를 상환하다 자신의 몸뚱이까지 내놓아야 했다. 마을 노인네들이 아로동맹의 엄격한 법집행을 도운 측면 = 강심장.노예 무역업자들이 노예를 고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노예가 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과 친족, 친구, 공동체에서 뿌리째 뽑혀 이름과 정체성과 존엄을 빼앗기는 것. 인간경제라는 원시 부족들에서 부족민들사이의 서로 관계를 맺어주는 시스템이 노예 무역선과 아프리카 상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거대한 살인기계 즉 인육 부채라는 시스템의 하나로 작동하게 되었다.

 

인간경제가 상업경제라는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태국과 발리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발리의 그 유명한 투계도 발리의 왕실이 인간 교역품(노예)을 만들기 위해 장려한 것이다.

 

“ 심지어 왕들은 수도에서 대규모의 투계를 개최하여 사람들이 빚더미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이 스포츠의 자극적인 면에 끌려 많은 농민들이 흥분한 너머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돈을 걸었다. 여느 도박에서나 마찬가지로,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희망과 경쟁의 드라마가 사람들을 열정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 가운데 마지막 남은 수탉에게 박수가 쏟아지고 날이 저물게 되면, 많은 농민들이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자바로 팔려나가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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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부채(2장) 발제 : 석류

부채 2장 원초적 부채 : 석류

 

그래도 물물 교환의 신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애덤 스미스 <국부론>. 경제학이라는 학과를 독특한 연구 영역을 가지는 과학으로 정착시키려 함. 동 시대인 뉴턴 : 신을 우주의 시계공으로 이해. 우주가 인간에게 이로운 쪽으로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 시장도 시계공처럼 보이지 않게 사회의 보편적 복지를 증진 시킨다고 생각.

 

경제학자들은 개인들과 국가들의 주된 활동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거라 생각. 애덤스미스와 나중의 경제학자들은 정부정책의 역할을 이해 못함. 법과 경찰 특별한 통화정책 소액권 통화의 양적 확대 등이 시장의 육성을 위해 필요했다.

 

데이비드는 주류경제학자들이 화폐를 단지 물물교환을 편리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 물물교환과 시장이 발생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했다고 주장.

 

국정화폐론(화폐국정설)과 신용화폐론

 

신용화폐론 : 화폐는 회계도구에 불과. 역사적으로도 추상적인 회계시스템이 특정환 교환도구 보다 앞서 등장. 돈이란 부채를 측정하는 회계도구다라고 주장. 차용증서가 돈의 기원이다.

돈은 신뢰를 측정하는 것. 실제로 여러 공동체들에서 신뢰를 측정하는 도구(신용화폐)로서 돈을 사용함. 중요한 것은 신용과 부채를 측정할 통일된 시스템이 있고 그게 안정적이어야 함.

 

현대의 은행권 발생도 이와 비슷. 영국은행 왕실에 120만 파운드 빌려줌. 차용증서를 왕국 내 거주자들에게 유통시킴. 왕실의 부채가 화페로 됨.

 

이와 비슷하게 왕국들이 돈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현물대신 돈으로 세금을 내도록 함. 왕은 단 한번의 조치로 국가경제전체를 군수품을 제조하는 거대한 기계로 바꿔놓음.

 

시장들이 고대 군대 주변에서 형성됨.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시장이 창조됨.

국가와 시장은 반대된다는 경제학자들의 끈덕진 가설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시장은 동시에 존재하고 상호 서로를 전제한다. 반면 국가가 없는 사회들은 시장을 갖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마다가스카르 사례 : 프랑스 장군 갈리니에가 1901년 그 섬을 정복. 인두세 부과. 새로 발행된 마다가스카르프랑으로 내도록 함. 돈을 찍어놓고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돈 중 일부를 내놓으라고 요구. 교육세, 교화세라고도 불림. 노동의 가치를 가르친다는 의미. 납부기간이 농작물 추수 직후. 농작물 가격이 매우 낮음. 농민들 낮은 가격으로 농작물을 팔아서 세금 납부. 그러다 빚을 짐. 커피나 파인애플 같은 작물을 짓거나, 자식이 임금노동자가 되거나,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 일을 하면서 빚을 갚아야 함. 즉 값싼 노동력으로 팔림.

 

신화의 실체를 찾아서

 

오즈의 마법사(프랭크 봄, 1900년) 이야기 : 동부와 서부의 사악한 마녀들= 동부와 서부해안의 금융가들, 허수아비= 농민들(빚의 함정을 피할 만한 두뇌가 없었다.) 양철나무꾼= 산업프롤레타리아(농민과 연대할 가슴이 없었다.) 겁쟁이 사자= 정치계급(개입할 용기가 없었다.) 오즈= ounce

 

케인스 : 화폐를 당시 주류경제학의 설명과는 달리 국가의 창조물이라 과감하게 이해. 돈은 신용이다. 그렇지만 국가는 개인들 사이의 계약적 합의를 집행하고 법적 조건을 만든다. 대표적인 국정화페론자라 할 수 있음.

 

국가가 화폐를 유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세금을 통해)했다면 1. 초기의 국가는 세금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2. 국가가 무슨권리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할수 있다.

 

원초적 부채이론. 이글리에타, 오를레앙 중심으로 주장됨.

 

정부는 세금을 이용해 화폐를 창조. 정부가 시민들이 서로에게 진 부채의 감시인. 이 부채는 돈과 시장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고 부채를 감시하는게 정부임. 화폐와 시장은 단지 그 부채를 잘게 잘라 나누는 방법에 불과.

 

사회에 드리워진 혹은 인간 존재에 주어진 부채에 대한 설명

<베다> <브라흐마나>에서 인용하면서 설명. 부채=죄=죄의식, 인간존재자체가 부채의 한 형태.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체가 하나의 빚이다. 인간은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나며, 제물을 바쳐야만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브뤼노 테레(원초족 부채이론가) : 화폐, 인간 종에만 고유한 정신적 기능의 산물이자 상징. 출생을 모든 인간들이 지는 원초족 부채, 우주의 권력자에게 지는 부채로 그리는 상징. 제물은 산 자의 신용을 다시 채워줌. 생명 연장. 경우에 따라서 신들에 합류. 빚을 통해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통치권의 출현과 관련. 통치권의 합법성은 통치권자가 우주를 대표하는 능력에 달렸음. 신앙이 주권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통화로 옮겨진다.

 

영국 사회학자 잉햄 : 원초적 부채는 산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존재를 보장해주는 사회의 연속성과 영속성에 대한 부채라고 주장. 우리모두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 죄인 범죄자임.

 

왕 : 우리가 자신을 창조해준 사회에 진 원초적 빚의 보호자 역할. 사회를 보호하는 자. 따라서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있음.

 

세금이 우리를 창조한 사회에 대한 절대적 부채를 뜻한다면, 우리가 사회에 진 빚들을 구체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진정한 화폐의 창조를 향한 첫걸음이다.

 

웨일스 법들이나 바바리아 법전 이야기 : 구체적 계산의 예들을 제공. 109쪽 참고.

벌금의 징수가 등가 계산을 끊임없이 요구. 주먹구구식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값나가는 물품들의 가치를 비교하는 기준은 마련.

 

죽음과 세금.

 

사회에 빚진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 이것을 부채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치에 맞는 걸까? 원초적 부채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어떤 신화를 묘사하고 있는 것인 아닌가? 그들은 모든 사회들에 언제나 존재해온 인간 조건의 심오한 진리를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만의 어떤 신화를 날조하고 있는가?

 

고대 문명을 보면 제물이 이자로 지급된 경우는 없었다. 인간존재들이 신들과 상업적 관계를 맺는다는 게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원초적 부채에 의해 세금을 낸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른다. 고대 세계에서 자유 시민들은 세금을 대체로 내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사회로부터 수고비나 식민지 정복의 과실을 나눠받았다. 로마시민들도 점령지 주민들에게서 받은 공물을 구호품형식으로 나눠받았다.

 

우주적 통치자로서 백성들의 삶에 개입해야 할 때면 수메르 통치자들은 공적 부채를 부과하는 방법보다는 사적 부채를 탕감하는 쪽이었다.

 

신전 행정관들, 대상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대줌. 대상무역이 절실히 필요. 돌과 목재, 금속 은 같은 것들이 신전유지에 필수품. 재화를 지방 상인들에게 빌려줌. 상인들은 빌린 재화를 팔아서 신전에 필요한 물품과 이자를 챙겨줌. 아마 이것이 최초의 이자혹은 신용이 발생한 형태인듯하다.

 

융자가 자리를 잡자마자 소비자 융자 까지 발생. 고리대금업 성행. 많은 농민들이 채무노예가 됨. 흉년엔 농민의 절대다수가 채무노예로 전락. 사회붕괴의 위기에 직면한 수메르 왕들과 바릴로니아 왕들은 주기적으로 일반사면(깨끗한 서판)을 단행.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채무 노예들이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함.

 

왕들은 스스로를 그야말로 인간 사회를 다시 창조하는 존재로 파악하기도 함. 원초적 부채이론가들이 상상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회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인민들의 삶에 왕국과 제국들이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던 적은 무척 드물었다. 왕국들은 일어났다가 몰락한다. 정부들은 민중의 삶에 매우 드물게 존재감을 발휘. 비교적 최근까지 이 세상의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 지를,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사회 혹은 국가라는 단위가 자연스럽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진정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원초족 부채이론가들이 근거하는 <브라흐마나>에서도 국가나 사회에 대한 부채는 얘기하지 않고 신과 현자 아버지에 대한 부채를 언급한다.

 

우리 모두는 인류와 사회, 자연 또는 우주에 무한한 빚을 지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 빚을 어떤 식으로 갚으라고 말할 수 없다. 기성 권위의 거의 모든 시스템, 말하자면 종교와 도덕, 정치학, 경제학, 형벌제도 등에 대해 감히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 들고 또 우리들에게 그 무한한 빚 중 일부를 반드시 갚으라고 말하기 위한 제도라고 지적할 수 있다.

 

사회적 부채

 

국경통제. 전쟁, 국가간 스포츠, 국가 화폐. 사회를 실체로 만드는 제도들.

우리는 사회에 빚지고 있는가? 정부가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가? 프랑스 혁명시기 근대 민족 국가라는 사상이 탄생했다.

 

콩트 : 사회학이란 용어를 처음 만듬.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 해야 할 온갖 의무들을 짊어진 가운데 태어난다. 우리의 출생 뒤, 이 의무들은 계속증가하거나 축적되다가 마침내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서비스라도 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할진대 인간의 어떤 바탕에 “권리”라는 사상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원초적 부채라는 사상를 깊이 파고들다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갖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때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창조한 신들에게 빚졌고 그 빚에 대한 이자로 동물을 제물로 바쳤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목숨으로 원금을 갚았다. 오늘날엔 우리는 생명을 사회에 빚지고 있으며, 그 빚에 대한 이자를 세금의 형식으로 내고 있으며, 적들에 맞서 국가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원금을 상환한다. 이것이 20세기의 위험한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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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요

페이스북에 있던 글은 지웠습니다.

통보하듯이 올린 행동에 대해 제가 생각이 짧았던거 같아서요. (달린 댓글들도 감정적인 글들이 올라왔고.)

 일단은 제가 7월은 당분간 부모님 댁에 있을거 같아요 후에는 공부집으로 돌아올지 다른 집으로 갈지 아니면 계속 부모님 댁에 머물지는 확실하지가 않아요.(이 문제는 제가 집으로 돌아간 후 돌아온 다면 미리 연락드릴께요.)

 그런데 사실 제가 부모님 댁으로 가는 것에 대해 이유를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그래도 필요하다면 간단하고 일부분으로 말해, 저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요)그치만 그래도 저 나름대로는 길지도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계속 지내보고 잘 지내볼려고 노력도 했고 고민도 많이 했었요.그러니 너무 섭하다거나 책임감 없이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저의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이번주의 집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근래 집에서의 일들도 잘 하지 않아 죄송하네요.

어서 빨리 정신차리고 돌아올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그동안 잘 지내요 공산당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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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ity와 공동체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167.50 KB) 다운받기]

 

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 부재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김환희

 

 

<<1. 사랑이란 게 혼란스럽다.>>

 

A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는 현대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나 관행과 같이 통상 미리 규정되어 있던 것들이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되고 불확실해진 세계는 사람들을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안전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종교를 대체해서 새로운 위안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사고 방식이 만연한 이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것마저도 확신을 잃고 혼동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해 놓고는 말과는 달리 함정에 빠트리고 마는 것이다.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현대인의 이러한 사랑은 성애(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성애적 사랑이라는 의미로 축소되어,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 섹스와 사랑이 더 이상 분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울리히 벡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책에서 성해방(1960년대 성의 상품화) 이후, 초자아에 내려진 '즐겨라'는 명령이 지배하는 황폐화된 세상에 대해 분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과 성의 이율배반에 초점을 맞춘다. 섹스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섹스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들어 소멸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섹스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섹스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해진다.섹스는 "전형적인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와 같이 증식하여, 자유주의 사회가 가진 비인간적 본성을 재생산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영구히 훼손시킨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섹스가 사랑을 파멸시킨 것이다."(Slavoj Žižek. 2011.) 따라서, 데리다의 용어를 빌자면 섹스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심적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대인의 정서는 최근 대중문화 속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는 소재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작인 웹툰『발광하는 현대사』와 영화『돈의 맛』의 내용을 이 글에서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현대사회의 섹슈얼리티의 위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탈근대 시대, 종교적 윤리의 붕괴는 현대인의 에로스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현대인의 에로스의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이러한 위험사회에서‘혼란스러운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

 

B :

 

C : 나의 동거인이자, 대안가족. 좋은 대화상대이자 친구인 OO는 비연애주의자라고 자신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OO는 항상 누군가와 연애중이다. 분명 특정한 상대와 같이 1:1로 데이트도 하고, 스킨쉽도 하고, 잠도 같이 자는 것 같은데 왜 자신의 연애를 비연애하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언어모순적인 상황에 흥미를 느꼈다. OO는 예전 여자친구와 대화중에 “친구 랑도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연인과도 그러고 친구 랑도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연인의 의미는 무엇일까? OO는 연인과 친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나누기가 쉽지 않듯이, 친한 사이에 느끼는 사랑, 가족 간에 느끼는 사랑, 혹은 좋은 책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고양이나 동식물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우주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그러한 사랑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은,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섹스어필하는 관계에서 만나는 에로스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논리보다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OO가 연인과 사랑하는 관계이듯이, 나는 OO에게 또 다른 사랑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모순점이 생긴다. 만약 연인이 친구와 특별히 차이가 없다면, 왜 특정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만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하기 때문이 아닌가. 결국 특별히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고, 그러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편적으로 연애라 부르는 것 아닌가. OO의 답은 이랬다. “물론,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한테 더 끌리긴 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를 연인(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규정내리고 싶진 않다. 이러한 일시적 감정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인데, 마치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착각), 혹은 그래야하는 것처럼(의무) 행동하고 싶진 않다.”OO는 구속을 싫어한다. 만나는 사람한테도 누가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맘에 들면 없다고 대답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있다고 대답하라고 알려주곤 한다. 구속하지 않는 사랑. 마음이 있을 때까지만 만나는 사랑. 사랑이 익숙해져, 처음의 경이로움이 떨어지면 습관적인 사랑만 한다, 결국 권태에 지쳐 헤어지길 반복한 나에게 OO의 사랑은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너무 이기적이고 문란한 사랑이 아닐까? 마치 플레이보이의 사랑 같아 보이고 말이다. 그러나 OO는 이러한 비연애적인 연애방식은 매우 힘들고 자신한테도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고 말한다. 사귀고 나서 관계에 질리면 헤어지는 식으로 일방적인 관계맺기가 아니라, 사귀기 전에 자신의 이러한 관계맺기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하면 사귀고, 동의하지 않으면 아예 이런 관계를 시작도 하지 않기에, 상대방을 이해시키기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왜 비연애를 고집하냐고 물어봤다. “일단, 구속되는 관계가 너무 싫고, 아무리 처음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이 변할 것을 아는데, 헛된 약속을 하고 싶지 않”다고 OO는 이야기 했다. OO의 비연애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연애일까? 아니면 (OO가 주장하듯)비연애일까?

 

 

<<2. 사랑이 변하니? 사랑아~ 도대체 우리, 왜 이렇게 된 거니? >>

A :오늘날 종교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종교는 처음부터 에로스를 엄격히 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베버에 따르자면, 종교와 성적사랑은 “원래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계(Max Weber. 2008: 245)”를 맺고 있었다.즉 “성교는 매우 주술적인 광란축제의 일부분이었고, 신성한 매음은 모든 망아경지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Max Weber. 2008: 245)” 종교적 관습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섹슈얼리티는 종교적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성생활은 그 자체, 다른 모든 기능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만의 정령과 신을 가지고 있었다(Max Weber. 2008: 246).” 즉 이시기의 섹스는 ‘단순한 자연주의적인 성’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때때로 종교적 몰입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신성시’ 혹은 최소한 성(聖)스러운 것과 대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그러나 후에 “예언종교와 사제층이 통제하는 생활체계들은 혼인제도의 보호를 위해 거의 예외없이 성행위를 규제(Max Weber. 2008: 247)”하였는데 이는 “모든 합리적인 생활규제체계가 주술적 주신제와 비합리적 도취형태 일반에 대해 가진 적대적 입장의 표현(Max Weber. 2008: 247)”이었다. 성애에 대한 종교적 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는 구원종교가 주지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문화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 주지주의와 결합된 신앙(구원종교)에 의해 성애는 금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종교의 형재애 윤리와 성애 간의 치열한 긴장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자극하며 서로를 심화 발전시키게 된다.문화의 합리화도 진행되었지만 한편으로 “성적영역에서는 성이 성애(에로틱)로 승화되고 이와 함께 성은 하나의 의식적으로 즐기는 비일상적 영역으로 승화(Max Weber. 2008: 247)”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구원윤리는 성생활은 동물적인 것이라고 에로스적 관계에 대하여 더욱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되려, 에로스를 대중들에게 자연적 속성에 속한 신비한 영역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급기야 에로스가 “창조주적 힘의 화신으로 긍정(Max Weber. 2008: 253)”되며 사람들이 “모든 순수한 동물적인 것을 미화하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에로틱한 감각체계(Max Weber. 2008: 252)”를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동한다. 즉 성애는 “현세 내적인 구원감정과 함께, 개인주의화에 신비화 경향(Max Weber. 2008: 253)”을 부여하였다. 성애의 이러한 신비화, 유사-종교적 특성은 구원종교와 계속해서 대립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이러한 극심한 갈등에도 불교하고 카톨릭교에서 결혼을 성사(聖事)로 인정함으로써, 종교는 ‘성애의 비일상적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 양보하고 만다. 하지만 욕정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규제된 혼인으로 한정함으로써 “금욕주의는 혼인관계를 에로틱으로 변질시키는 어떠한 교묘한 시도도 극히 사악한 피조물 신격화로 보고 거부”한다. (Max Weber. 2008: 256)

결국 베버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구원종교는 (자연주의적인)섹스 자체에 대해서 반대 했다기보다는, 성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삶의 전반에 걸친 금욕주의적인 규제는 오히려 비합리성의 분출구로서 성애의 신비화 내지 관심의 증대를 부추겼다. 구원종교는 최후의 수단으로 섹스의 허용을 결혼제도 안에 봉인 한 채, 에로스적 관계화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종교의 도덕적 규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에로스의 힘에 대한 봉인이 깨지고 말았다.도덕률의 준수에 대한‘개인화’의 경향이 나타났고, 최후의 보루인 결혼마저도 에로스의 직접적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붕괴된 데에는 주지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에 의한 세속화의 여파는 마지막 남은 신비화의 영역인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이와 같은 모든 부문의 화폐적 세속화(혹은 교환적 관계화)는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하였다. 결혼에 있어서도 조건과 스펙이 맞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됨으로써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결혼 외부에서 찾는 모순이 생겨나 버렸다. 돈의 맛에서 필리핀가정부와 볼륜의 관계를 맺는 윤회장(백윤식)의 애정도피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관계 (윤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결혼관계를 포함하여) 중 제일 순수하다고도 느껴질 정도로 자본주의는 결혼마저도 물질화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가족이라든지, 결혼이 자신의 사랑(행복, 가치)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위험사회에 각 개인들이 홀로 놓이게 되었다.개인주의화의 강화(이로 인한 구원종교의 규제력 약화)와 성애적 신비주의의 유지는 각 개인들의 사랑을 각개전투로 만들었다.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사랑에 있어서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하게 됨.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왜곡현상에 자본주의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변화를 초래했을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남녀 간의 독점적 사랑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성향은 화폐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화폐는 자신이 모든 사물에서 일자로 위치하는 독점적 교환질서 안에서만 기능한다. 호혜적 관계가 각 개인의 모든 인간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호혜적 증여(선물)만이 이루어진다면, 교환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소유권을 명확히 한 개인에게 한정하고, 그 가치를 하나의 화폐로 단일화하여 시장내에서 거래되게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 질서는 꼬뮌적이고 코스모폴리탄 식의 사랑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심화의 과정은 사랑의 관계를 계속 축소시키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사랑의 소유화. 호혜적 관계에 의한 선물의 관계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인 화폐교환 질서만 남게 되는 선형적 과정인 것이다.

 

B :

 

<<결론 : 3. 사랑, 어떻게 해야 할까? >>

A:자본주의의 이와 같은 부작용(섹스와 사랑의 동일화-관계의 해체)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보수적인‘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막스베버의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성의 신비화(비합리적 요소의 강화)를 막는 것은 다른 비합리성(과거에는 종교)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비합리성의 영역에 있어서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요구된다. 새로운 윤리가 위험상황에 빠져있는 혼동하는 개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는 보수주의의 윤리로 가서는 안 되고, 또 불가능할 것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와 결탁했던 비합리성, 혹은 가부장제 윤리와 결합했던 비합리성은 부적합한 비합리성이라는 것이 합리주의화의 경향(인류의 진보, 혹은 약자의 투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합리주의의 (건강한) 진전을 위해 (기존의 비합리성을 대체할) 새로운 비합리성이 요구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다.

나는 새로운 윤리가 평등한 관계(수평적 네트워크)를 보장해야 하며, 이는 각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합리성 중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차이의 정치’ 및 이웃간에 공존을 도모하게 만드는 사상은 결국 사랑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사랑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예상할 때, 그 사랑은‘비독점적 사랑’이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으로‘공동성’을 어떻게 창출하고 더 늘려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관계를 해체한다. 개인 단위의 것들만 남기고 모두 해체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꼬뮌적 방식은 개인/핵가족 단위에서 더 큰 단위로 상호부조, 호혜의 관계망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대융합에의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개인의‘사랑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느냐? 그것은 가족로맨스(가족단위)라든지, 운명적 사랑(연인단위)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창출해야 가능한 것이다. 연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1:1 사랑의 독점적 소유관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욕망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공동성의 장’(꼬뮈니즘)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꼬뮈니즘 안에서의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편협한 관계성은 ‘새로이 확장된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고, 성애는 비신비화되어 자연주의적 성으로 지상추락할 것이다.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꼬뮈니즘 안에서의‘새로이 확장된 사랑’이 막스 베버가 구원종교에서 에로스의 대쌍 개념으로 이야기했던‘형재애’와 매우 유사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말하는 형재애적 사랑은 에로스와 대결하며 금욕주의를 강조하는‘형재애’가 아니라 에로스와 대치되기 이전에, 즉 성애 자체가 자연주의적 성으로 머물며 비합리적인 신비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존재했던 원래의 ‘형제애’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재애’는 분명 ‘에로스’와 구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형재애, 코스모폴리탄적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가족 등 기존의 위계적 관계망을 해체해야만 한다.

자기 지역 내에 대안가족을 구축하고 꼬뮌의 범위를 넓히라. 그리고 전국적으로 또한 전세계 꼬뮌에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하라.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넓혀가라. 다시 꼬뮌적인 방식의 사랑을 획득하라.

- The End -

 

참 고 문 헌

1. 외국문헌

Erich Fromm. 2000.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Slavoj Žižek.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3인역. 난장이.

Max Weber. 2008. ≪종교 사회학 선집≫. 전성우 역. 나남.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3인역. 새물결.

Wilhelm Reich. 2006.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역. 그린비

 

 

<부록1. 주간한국 기사 >유부녀들의 금지된 사랑의 은밀한 유혹

‘유부녀 쉽게 유혹하는 방법’ ‘유부남에게 통하는 애교 베스트 10’….

인터넷을 하다 보면 이런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부남. 유부녀들의 ‘애인 만들기’ ‘애인 되기’ 퇴폐적 열풍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음을 적나라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녀와 탈선하는 불륜행각은 동서고금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이들은 이른바 세컨드 라이프를 위해 ‘유부클럽’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고민을 함께 나누는 등 상담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A 카페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혼녀’들을 위해 개설된 곳이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꾸 보다 보니 정이 들었죠. 그 사람도 저랑 같이 있으면 좋고, 와이프보다 더 편하대요. 빨리 끝내야 하는 걸 알지만 쉽지 않아요. 주변에서 눈치챌까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끝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얼마 전 이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유부녀이면서도 이 카페에 흥미 삼아 가입한 회원들은 “어떻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를 치냐” “가정 파괴범이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등 비난하는 글을 대거 올렸다. 반면 미혼 여성 회원들은 “오죽하면 결혼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한 눈을 팔겠느냐” “남편 바람나게 한 와이프가 문제다” 등 양측이 팽팽하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

사태가 너무 소란스러워지자 결국 카페 주인은 이후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등급제를 적용해 일정 등급 이상만 게시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바꿔버렸다.

이 카페 또 다른 회원 박모(25세)씨는 여대생이다. 얼마 전 30대 중반의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박 씨는 앞서 동갑인 남자와 2살 연상인 미혼 남자를 각각 사귄 적이 있었는데 만날 때 마다 데이트 비용 걱정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남친이 영화를 보여주면 나는 밥이나 커피를 사야 했고, 항상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 애인은 유부남이기는 하지만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해준다.” 나이 차이가 크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고 있어서 자신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준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A카페 개설자 김모씨는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카페와 이웃을 맺은 카페도 3곳이나 된다”며 유사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후죽순 생겨난 유부클럽이 유명 사이트마다 수백 개씩이나 되고, 회원 수도 각각 수십~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의 유부클럽은 유부남. 유부녀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중시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불륜이 유행하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본래 클럽의 취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마음 놓고 외도할 수 있는 장소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대한민국 유부남, 유부녀를 위한 커뮤니티로 육아. 건강 정보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시간이 지나 회원들간의 편안한 만남을 주선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유부 탈선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현재 회원수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지난 9월에는 ‘정모(정기적인 모임)’를 가졌고, 일주일에 2~3번은 ‘번개(갑작스러운 모임)’를 한다. 참여율도 높고, 참석한 사람들은 하루 정도 짧은 만남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만남을 이어간다.

“오늘 영화 번개 좋았어요. 특히 ‘sdy20’님 게시판에서 얘기만 주고 받다가 직접 만나니까 더 반가웠어요. 답답한 일상에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조만간 또 만나요.” 이 커뮤니티의 한 회원이 남긴 번개 후기다.

또 다른 회원 김모씨는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하면서 만난 이모씨와 함께 얼마 전 여행을 갔다 왔다. 김씨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워크숍을 간다고 둘러댔고, 상대방 역시 남편에게는 동창생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꾸며 둘만의 밀월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김씨는 자신 뿐만 아니라 회사 동기들도 ‘애인 만들기’를 꿈꾼다며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외도를 알고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커뮤니티 가입 방법을 묻는 친구도 있다.

현택수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이 같은 세태를 두고 연애지상주의와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쾌락추구 성향이 강한 대중문화가 개인을 자극하기 시작하면서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줄고 있다”며 “쾌락권 추구가 곧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사랑이라면 사회 도덕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남의 사람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결혼생활에 대한 후회와 절대시됐던 일부일처제에 대한 도전이 늘면서 불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불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인 부부가 갖고 있다”며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부부 사이의 진짜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할 것을 권고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됐다고 해서 둘 사이가 언제나 굳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항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긴장된 애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현 교수는 말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심리학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들어 불륜을 설명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장애가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불륜 커플이 늘고, 그들의 사랑이 더 열정적으로 달아오르게 되는 이유이다.

 

 

C: OO의 연애는 비연애가 맞았다. 동시에 OO의 비연애는 연애인 것이 맞다. 자본주의 내의 정형화된 관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OO의 연애는 비연애일 것이고, 꼬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에서의 OO의 비연애는 우리가 모두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연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 모두 OO를 본받아 비연애를 실천해야 할까? 개인적인 실천만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비연애는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뒷밤침해 줄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공동체는 공존할 수 있을까? 진지한 공동체든, 노는 공동체든, 사실상 많은 공동체들이 연애문제로 깨지고 만다. 공동체와 사랑이 지금까지 공존하지 못했던 것은 둘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로 영원히 독점하고자 했던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따라서 공동체적 실천(마르크스)과 개인적 실천(프로이트)은 만나야 한다. 사회적 대타자, 심리적 대타자를 모두 깨부셔야 한다. 라깡의 말마따나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대타자’따위는 없으니까. 경계를 넘어서 모두와 사랑의 네트워크로 접속하라. 소유가 없을 때, 질투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섹스는 신과 같은 신비적 지위를 잃어버린채 대소변과 같은 생리작용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다. 결국 사랑만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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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에 대한 서평(영어인데 한번 읽어보세요!)

Debt and Punishment

 

David Graeber’s book Debt: The First 5,000 Years is missing an analysis of capitalism

 

by Ingo Stützle

 

(article originally published in the May 18th, 2012 issue of the newspaper analyse & kritik)

 

The last few years of crisis politics were a prime example of how on the one hand profits are privatized, while on the other hand losses are socialized. The deep crisis of capitalism has left in its wake a sovereign debt crisis. The answer of the political class has been fiscal consolidation. Finance capital’s claims on returns are guaranteed and collected by the state. The invisible hand of the market is joined by the visible fist of the state. Struggles over state finances will be central battlefields in the next few years.

 

That is no doubt the reason why the publication of David Graeber’s book Debt: The First 5,000 Years was greeted with euphoria, even by the bourgeois press. In the Frankfurter Allgemeine Sonntagszeitung, Frank Schirrmacher wrote that Graeber “opens the reader’s eyes to what’s going on right now,” and furthermore, “Graeber’s text is a revelation, since one is no longer forced to react to the system itself within the system of apparent economic rationality.” Der Spiegel opines: “his book on the nature of debt and its economic and moral basis is already regarded as an anti-capitalist standard work of the new social movements which have emerged during the world economic crisis.” This is in reference to the Occupy protests. Even the chief economist of the Deutsche Bank group reviewed Graber’s book positively in the monthly economic policy journal Wirtschaftsdienst (4/2012) with regard to the question of the future of central banking. Since May 2012, the book has been available in a German edition.

 

Promises Become Debts

 

David Graeber, anthropologist and anarchist, is a Professor at Goldsmiths College of the University of London. Until 2007, he taught Ethnology at the ivy league university Yale. For political reasons, his contract was not renewed – Graeber is a political activist. Since the protests against the World Economic Forum in New York City in 2002, he has been an important figure. The role that he has played in the Occupy movement underscores this: not only has he participated, but he has published books on the movement.

 

Graeber’s point of departure is the question as to why in capitalism the human appreciation of morality and justice is reduced to an economic quantity and the language of a business transaction – debt. The moral-economic double meaning of the word “debt” in many languages is striking. How have moral obligations and promises between people become an economic debt, and what does that mean for society?

 

For Graeber, debts constitute a promise – which is to say, a moral obligation – which also existed before capitalism and independent of money. Money makes the mutual promise between people into something impersonal and transferable: debt. Human cooperation, community, and possible forms of renegotiating promises are thus disturbed, existing relations of power and domination become cemented.

 

In this way, money makes it possible to “turn morality into a matter of impersonal arithmetic” with which promises can be balanced against each other. A settlement by means of debt cancellation, renegotiation, or non-commodified exchange relationships (gift giving or donation), as was still prevalent in pre-capitalist societies, is thus no longer possible.

 

Graeber thus concentrates upon a classical question of political economy, with which the book also begins: what is money? In the first part, Graeber correctly criticizes the theoretical mainstream of economics. Economics textbooks always begin with barter, an exchange of products without the mediation of money. Economists usually proceed from unhistorical models in which people pursue their “natural dispositions”, among others their drive to barter and exchange.

 

The State Invents Money

 

Graeber opposes all this with a historical argument. He proceeds from the assumption that credit and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creditor and debtor historically precedes money. “The standard account of monetary history is precisely backwards”, namely the sequence from exchange to the discovery of money to the developed credit system. Graeber further hones his argument: money is not only a thing, but a means of making things commensurable. But exactly what is measured or compared? Graeber’s simple answer is: debt. Money and credit (that is to say, promises to pay) are for him de facto the same.

 

Graeber reconstructs the genesis of money from promises through various historical phases. From the time of early urban civilizations (Egypt, Mesopotamia, China) around 3000 to 800 B.C., through the Middle Ages (600-1450 A.D.) to the “Age of Great Capitalist Empires” from 1450 (to 1971).

 

In Graeber’s account, the state is responsible for the emergence of money, which was introduced in order to pay soldiers. The state thus at the same time also establishes the “currency” in which it collects taxes and generalizes the use of money. Simultaneously, markets arise alongside barracks and mass war production, and in turn money plays an increasingly important role in these markets. According to Graeber, state force, money/credit, and the dominance of markets are tightly interwoven.

 

Graeber’s account exhibits a rather vague understanding of capitalism, and in accordance with the anarchist tradition assigns a dominant role to the state. At the same time, this role is subordinated to the economy of obligation. The same is the case for other characteristics of capitalism. Monetary phenomena have existed long before factories and wage labor. However, one searches in vain in Graeber’s work for an exact determination of what capitalism is. One characteristic he offers is endless growth and the production of “an endlessly expanding volume of material goods”. Also central is the state’s promotion of an “economy of interest”; the history of capitalism is the history of “the gradual transformation of moral networks by the intrusion of the impersonal – and often vindictive – power of the state.” Against this background, it’s no wonder that Graeber concludes that markets and money will continue to exist after capitalism.

 

It’s not difficult to recognize that Graeber’s understanding of capitalism is not oriented toward Marx’s. However, whoever struggles against capitalist relations should nonetheless have an idea of what it is he or she is against. In the future, this must be a concern within the radical left. It is at this point that a critique of Graeber’s book should be applied.

 

Relations Without Classes

 

In principle, Graeber proceeds from the starting point of a socioeconomic relationship that generates interest – the relationship between creditor and debtor; but class relations, the relation between wage labor and capital, and the form of production are not at the center of his focus. Thus, numerous relationships that characterize capitalism become indistinct in Graeber’s account.

 

Various actors engage in credit relationships. Debtors can be states, wage laborers, or businesses – for different reasons. The state, because it does not collect enough revenue from taxes or because it nationalizes bank losses; wage laborers, because they don’t earn enough; businesses, in order to make as much profit as possible. The perspective of credit, however, causes them to all look the same; the reason for the credit relationship that arises appears irrelevant.

 

This blurring of social relations is also apparent in the categories of money, credit, and capital, which in Graeber’s conception are indistinguishable from one another. According to Marx, on the other hand, they are forms that mediate quite distinct relations. Money completes a promise to pay, it is therefore itself the “general equivalent.” Money is accepted and used by all, whether wage laborer or capitalist. It mediates commodity exchange. Labor-power is also compensated in the form of money.

 

If money is supposed to be credit, as Graeber thinks, that raises the question as to what “real” act of monetary payment it supposedly refers. Capital is valorized value. When money is spent as capital, it always presupposes a class relation. Money is spent with the goal of making a profit. At the same time, this relation presupposes the existence of people who, free of both means of production and of personal ties of dependency, have nothing to sell but their labor-power. When capital takes the form of a property claim such as a stock, bond, or another security, Marx refers to it as “fictitious capital”. For Graeber, it’s again merely credit. Since he ascribes no relevance to these distinctions, all cats are grey to him.

 

Cancel All Debt

 

The same is true for his historical observations. Graeber does not recognize what money and credit mean in pre-capitalist societies, what distinguishes them from each other. He works with trans-historical phenomena, without raising questions as to their historical-social form. This is a trait he shares with the economic mainstream that he otherwise criticizes. Graeber writes that systems of credit and accounting are as old as civilization itself. He admits that he finds it difficult to distinguish between gift-giving and credit; but this is only a problem if one discusses these forms of social intercourse independent of their respective dominant forms of production, when one does not clarify exactly what is characteristic of capitalism, what makes it capitalistic and thus what distinguishes it from other social formations.

 

Historically speaking, a social obligation is not the same thing as credit, and even credit is not the same thing as credit. This observation can be found in Marx’s work: “There was borrowing and lending in earlier situations as well, and usury is even the oldest of the antediluvian forms of capital. But borrowing and lending no more constitute credit than working constitutes industrial labour or free wage labour.” (Grundrisse,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7/grundrisse/ch10.htm)

 

What does Marx mean by that? Under pre-capitalist relations, in which production was conducted to meet needs, credit was a means of impoverishment. In contrast, under capitalism, credit is a means of augmenting money – of profit maximization. Similarly, industrial labor (or factories in the case of Graeber's book) cannot be simply identified with capitalist profit logic.

 

Although it is often asserted that a historical approach is able to show that something existed before capitalism, and that one can learn from history, the differences between capitalist and pre-capitalist societies are often obliterated (and not just in Graeber's book) if one does not first clarify what is specific about capitalism, in order to use that as the starting point for delving into history –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1

 

According to Graeber, every revolution begins with debt that society can no longer repay. “Cancel the debts and redistribute the land.” This sentence by the historian of antiquity Moses Finley is the only revolutionary program, recurring throughout the centuries. And most revolutions were preceded by (excessive) debt. However, before we can think about revolution, we should agree first on what exactly is supposed to be revolutionized. Debt cancellation is indeed a correct demand, but only when the social relations that constantly bring about indebtedness are abolished as well. It seems difficult to reach an agreement with Graeber on exactly what those social relations are.

 

1.For that reason, historical research influenced by Marx controverts Graeber's accounts of the market, credit, and money. On the imposition of the market as an imperative, see Ellen Meiksins Wood's The Origin of Capitalism. On money, see Jacques LeGoff ‘s Your Money or Your Life: Economy and Religion in the Middle Ages. On credit, see Karl Polanyi’s Primitive, Archaic, and Modern Economies: Essays. [↩]

6 Kommentare zu “Debt and Punishment: A Critical Review of David Graeber’s De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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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3. Juni 2012 um 03:28

Graeber has responded to this review, but sadly he did it in the form of a world-historical Twitter flipout that culminated in him blocking Alex Callinicos (?). Here are the tweets from Graeber that actually engage with the review’s content:

 

* it does not in fact say money and markets will exist after capitalism, but only that they have and could. Not that they should

 

* the book does in fact talk of class and even has a class analysis of many key historical changes if read w/out hostile bias

 

* to say I ignore class is especially odd since central argument is debt between classes treated as diff than debts within

 

* I believe free wage labor is the dominant ideological form but rarely exists in reality

 

* class consists of REAL social rels not ideologicl fantasies-no matter how important those are on social reproduction

 

* in short what you call “forms” I think largely = ideological illusion, obscuring the empirical reality of class

 

* meanwhile the argument I don’t clearly distinguish credits and gifts is crazy – I spend a whole chapter doing so!

 

* I say social currencies (credits) and commercial ones are so dif its hard to conceive one turning into another

 

* Honestly I’m v sad. I really wanted to engage with Marxist thought & threw out ideas to do so. Reviewers ignore them & just repeat orthodo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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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된다

 

 

드디어 저도 글쓰기가 되는 군요 히힛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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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서론 발제 : 석류

부채 서론 발제 : 석류

 

IMF : 부채회수기관. 구조조정 강요. IMF는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주장. 특히 가난한 국가에 대해. 빈국들은 식료품 가격안정 정책, 무상 교육, 무료 건강 보험 정책등을 포기.

마다카스카르 : 말라리아모기 퇴치 프로그램 시행 못함. 1만명 사망.

 

“빚은 반드시 갚아야한다”는 전제를 엄격히 따지고 들면 정통 경제 이론을 따른다 하더라고 그 말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게 되어있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대출이라 할지라도 대출이 언제나 상환 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헷갈리게 만드는 경험>

 

프랑스 1895년 마다카스카르 침공. 주민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 침공당한 비용을 물리기 위해. 철도 고속도로 플랜테이션 교량 건설. 반대한 주민들을 상당수 학살.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은 아직도 프랑스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 국제 공동체도 마스가스카르가 빚을 지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냄.

 

아이티 옛 플랜테이션 노예들이 세운 나라. 프랑스 실패한 군사원정비용과 몰수된 플랜테이션에 대한 배상으로 1억 5천만 프랑의 부채를 짊어져야 한다고 주장. 국제사회 아이티와 통상 중단 결정. 아이티는 부채와 빈곤 인간의 불행과 동의어가 됨

 

미국 제3세계 부채상환에 엄격한 조건을 내걸음. 제3세계 부채 총합보다 더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음. 갚을 생각 없고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독일, 일본, 대만, 태국, 걸프만 국가들)의 기관투자자들이 미국 재무부 채권의 형식으로 보호. 일종의 공물.

 

미국의 경우는 ‘캐딜락’ 채무자. 마다가스카르는 그 옆 감방에 굶주리고 있는 극빈자 채무자.

 

 

미국 코미디언 스티븐 라이트(steven wright)의 개그

 

일전에 친구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좁은 길에서 권총을 든 녀석이 튀어나오더니 "손들어" 라고 외치더군. 그래서 지갑을 끄집어내는데 불쑥 "몽땅 빼앗길 수는 없지"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내가 돈 일부를 빼낸 친구에게 주면서 "프레드, 너에게 꾼 50달러야"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강도가 화를 버럭 내며 자기 지갑에게 1천 달러를 뽑아 프레드에게 주면서 강제로 나에게 빌려주게 하더군. 그래 놓고 강도는 그 돈을 빼앗아 가던데.

 

부채의 역사를 돌아볼 경우, 심각한 도덕적 혼동이 발생. 돈을 갚는 것은 도덕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돈을 빌려주는 것도 사악하다고 생각.

 

가톨릭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언제나 금지. 탁발승들이 고리대금업자들 심판하는 설교들을 하고 다님.

 

중세 힌드교 법전, 대출이 용납 가능한 것,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 노예나 소로 다시 태어난다고 설교.

 

불교 경전 : 채무자는 꿩이고 채권자는 매, 채무자는 노예이고 채권자는 주인

 

모든 종교들은 부채와 관련해서 도덕적으로 타협적인 태도(채무자는 빚을 갚아야 하고 채권자는 너무 가혹하게 채무자에게 독촉하지 않아야 한다)를 취함.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나?>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핵심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도덕관념과 정의감이 상거래 언어로 압축된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도덕적 의무를 부채로 환원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언어가 시장에 의해 다듬어질 때, 우리는 도덕적 의무와 부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게 되는가? 어떻게 보면, 의무와 채무의 차이는 간단하고 명백하다. 채무는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할 의무이다. 그 결과 채무는 다른 형태의 의무들과 달리 정확히 양이 정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채무는 단순하고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성격이 부채를 이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양 당사자가 상대방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그렇지 않고 만약 빚진 것이 호의나 존경, 감사라면 양 당사자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양 당사자는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오로지 원금과 이자율, 벌금과 차감잔액만 따지면 된다. 만일 당신이 가정을 포기하고 다른 지방을 떠돌아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채권자에게는 지엽적인 일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돈은 돈이고, 거래는 거래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며 또한 이 책에서 길게 탐험할 주제는 도덕성을 객관적인 산수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도한 것으로 보였을 것들을 정당화하는 돈의 능력이다. 폭력과 양적 계산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이 책에서 계속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곳곳에서 폭력이 인간관계를 수학으로 바꿔놓는 방법이 거듭 소개될 것이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자유와 도덕성과 사회성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전쟁과 정복, 노예제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그런 전쟁과 정복, 노예제도 등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대의 제도들을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부채의 역사다>

 

2008년 9월 금융위기, 첨단 금융상품들이 거대한 거짓말에 불과함이 드러남. 채무 불이행이 불가피한 모기지론을 가난한 가족들에게 팔고, 기관 투자자들에게 팔고, 그 위험을 거대 보험회사에 떠넘김. 부채에 눌러 침몰, 공적자금 투입.

 

미국의 도덕성 = 부채를 상환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옴. 파산법 가장 늦게 제정. 미국시민들 이제는 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됨. IMF는 다음에는 어떠한 구제 금융도 불가능 할 수 있다고 경고.

 

이 시대는 먼저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IMF 같은 글로벌 기관들의 창설로 시작 되었다.

 

<인간관계의 본질을 다시 생각 한다.>

 

이 책은 먼저 일련의 신화들을 깨뜨리는 시도로부터 시작.

물물교환의 신화, 원초적 부채에 대한 신화. 이 신화들이 경제와 사회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가설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것을 해체하고 싶다.

 

상식적인 관점에선 국가와 시장은 서로 정반대의 원칙을 추구하는 듯 보임. 국가=규제, 시장=자율. 역사적 사실을 들춰보면 국가와 시장은 함께 태어났으며 밀접하게 얽혀있다. 국가와 시장은 모든 인간관계를 교환으로 압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만일 인간관계가 교환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제 4장에서는 인류학 분야의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경제생활의 도덕적 근거를 설명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추구.

 

그런 다음 화폐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교환의 원칙이 폭력의 결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제시될 것이다. 돈의 기원이 범죄와 배상, 전쟁과 노예제도, 명예와 부채, 상환 등에서 발견된다는 말이다.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은 자본주의 제국들이 지배한 지난 5백년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무대를 세워주며 또 오늘날 아주 중요한 질문들을 던질 기회를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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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고 문제에 대한 공부집 입장정리

<<빈고, 빈집 문제에 대한 논의점 정리>>

- 논의에 앞서서 기본전제.

1. 빈고와 빈집에 대한 문제제기를 감정적 반응(신뢰)문제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2. 문제제기를 하면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논의를 중단하자고 말하면 안된다. 어떤 결론이나든 끝까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자. 한마디로 답을 도출하기 전까지는 토론을 중단하지 말자.

3.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신규장투들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논의에 모든 사람을 강제로 참여시키자는 말은 아니다.)

 

- 빈고와 빈집 문제에 대한 논쟁지점들.

 

1. 빈고와 빈집의 관계 변화

화니짱) 삼각형에 점하나만 찍어도, 그 도형은 전혀 다른 도형인 사각형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관계의 측면에서도 빈고에 ‘만행공간 대출’ 등 외부 ‘공동체 대출’을 시작한 이상 빈고와 빈집의 관계는 이전과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빈고와 빈집의 위상 변화에 대등해서, 그 안에 있는 시스템이라든지, 관계의 방식을 어떤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쿠) 빈고의 선물이 타공동체의 위기대응자금으로 쓰일 수 있게 됨, 예전처럼 빈고에 대한 빈집의 선물이 빈집을 위해서만 쓰이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음. 따라서 이제 빈집은 빈집 자신을 위한 별도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하는게 필요. (예전처럼 잉여금을 안심하고 빈고에 선물할 수 없음. 빈집을 위해서 쓰인다고 확실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예전에는 선물이지만, 보험 내지 저축의 의미로 선물한 거였음.)

 

2. 빈집의 정의 문제:

 

쿠) 게스트룸운영, 열린공간 (빈마을에) , 접근가능한 공간 (물리적으로), 자의성(우리집은 빈집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봤을 때 이음집과 까페 해방촌과 행간은 빈집이 아니다.

 

3. 선물로 운영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쿠) 선물받은 사람이 선물한 사람보다 많은 선물을 하나고 요구받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빈집)자신의 긴급한 필요에 대한 당당한 요구가 아닌, (빈고에) 호혜적인 선처를 바라는 수동성을 양산한다. 따라서 빈고에 대한 적립이나 선물 방식이 아닌, 빈집회계를 통한 빈집 내부의 상호부조 강화가 대안으로 요구됨.

 

4. 빈고의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화니짱) 한 사람에게 모든 일처리와 의사결정권이 집중된 조직은 비정상적이다. 일의 효율성 측면을 떠나서, 조직의 집중도를 즉각 해체 시킬 필요가 있다. 대안으로 1-2달 단위로 대표를 변경시키는 안이 있을 것이다. 대표에게 통신비 명목 등으로 매달 활동비 지급하고 빈고 관련 각종 셈나나 강의에 대표로서 나가도록 함.

 

쿠) 빈고의 운영위원제의 대의방식은, 조합원들의 목소리들을 반영할 수 있는 민주적 방식이 아니다. 더군다나 빈고의 운영위원들이 빈집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5. 현실적 대응방안

쿠) 빈집이 기존에 빈고를 통해서 상호부조하는 방식을, 빈집 회계를 통한 빈집 차원의 상호부조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또한 빈고에 기존에 선물로 적립되어 있는 빈집적립금의 일부를 빈집에 반납해줄 것을 요구한다.

 

화니짱) 빈집적립금은 빈고적립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맞음. 그리고 기존에 적립되어 있는 자금 중 일부를 빈집에 반납해주어야 함. 또한 빈고적립금의 변환과 발맞춰 빈집은 빈집 차원의 상호부조를 위한 자체 내부의 적립금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음.

빈고 운영회의에 빈집 대표들을 몇사람 참여시킨다. (빈고 내에 빈집 관련 예산이 운영되는 비중만큼 빈집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참여해야 한다.) 빈고 대표 체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반중심적, 평등한 네트워크 구축. 1인에 의해 돌아가지 않고 시스템에 의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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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주석 내용을 보려면 다운 받아서 한글파일로 보시오.>[[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27.50 KB) 다운받기]

 

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김환희

 

서론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는 현대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나 관행과 같이 통상 미리 규정되어 있던 것들이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되고 불확실해진 세계는 사람들을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안전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종교를 대체해서 새로운 위안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사고 방식이 만연한 이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것마저도 확신을 잃고 혼동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해 놓고는 말과는 달리 함정에 빠트리고 마는 것이다.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현대인의 이러한 사랑은 성애(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성애적 사랑이라는 의미로 축소되어,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 섹스와 사랑이 더 이상 분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울리히 벡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책에서 성해방(1960년대 성의 상품화) 이후, 초자아에 내려진 '즐겨라'는 명령이 지배하는 황폐화된 세상에 대해 분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과 성의 이율배반에 초점을 맞춘다. 섹스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섹스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들어 소멸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섹스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섹스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해진다. 섹스는 "전형적인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와 같이 증식하여, 자유주의 사회가 가진 비인간적 본성을 재생산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영구히 훼손시킨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섹스가 사랑을 파멸시킨 것이다."(Slavoj Žižek. 2011.) 따라서, 데리다의 용어를 빌자면 섹스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심적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대인의 정서는 최근 대중문화 속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는 소재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작인 웹툰『발광하는 현대사』와 영화『돈의 맛』의 내용을 이 글에서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현대사회의 섹슈얼리티의 위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탈근대 시대, 종교적 윤리의 붕괴는 현대인의 에로스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현대인의 에로스의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이러한 위험사회에서‘혼란스러운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

 

본론

오늘날 종교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종교는 처음부터 에로스를 엄격히 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베버에 따르자면, 종교와성적사랑은 “원래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계(Max Weber. 2008: 245)”를 맺고 있었다. 즉 “성교는 매우 주술적인 광란축제의 일부분이었고, 신성한 매음은 모든 망아경지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Max Weber. 2008: 245)” 종교적 관습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섹슈얼리티는 종교적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성생활은 그 자체, 다른 모든 기능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만의 정령과 신을 가지고 있었다(Max Weber. 2008: 246).” 즉 이 시기의 섹스는 ‘단순한 자연주의적인 성’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때때로 종교적 몰입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신성시’ 혹은 최소한 성(聖)스러운 것과 대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후에 “예언종교와 사제층이 통제하는 생활체계들은 혼인제도의 보호를 위해 거의 예외없이 성행위를 규제(Max Weber. 2008: 247)”하였는데 이는 “모든 합리적인 생활규제체계가 주술적 주신제와 비합리적 도취형태 일반에 대해 가진 적대적 입장의 표현(Max Weber. 2008: 247)”이었다. 성애에 대한 종교적 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는 구원종교가 주지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문화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 주지주의와 결합된 신앙(구원종교)에 의해 성애는 금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종교의 형재애 윤리와 성애 간의 치열한 긴장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자극하며 서로를 심화 발전시키게 된다. 문화의 합리화도 진행되었지만 한편으로 “성적영역에서는 성이 성애(에로틱)로 승화되고 이와 함께성은 하나의 의식적으로 즐기는 비일상적 영역으로 승화(Max Weber. 2008: 247)”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구원윤리는 성생활은 동물적인 것이라고 에로스적 관계에 대하여 더욱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되려, 에로스를 대중들에게 자연적 속성에 속한 신비한 영역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급기야 에로스가 “창조주적 힘의 화신으로 긍정(Max Weber. 2008: 253)”되며 사람들이 “모든 순수한 동물적인 것을 미화하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에로틱한 감각체계(Max Weber. 2008: 252)”를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동한다. 즉 성애는 “현세 내적인 구원감정과 함께, 개인주의화에 신비화 경향(Max Weber. 2008: 253)”을 부여하였다. 성애의 이러한 신비화, 유사-종교적 특성은 구원종교와 계속해서 대립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극심한 갈등에도 불교하고 카톨릭교에서 결혼을 성사(聖事)로 인정함으로써, 종교는 ‘성애의 비일상적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 양보하고 만다. 하지만 욕정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규제된 혼인으로 한정함으로써 “금욕주의는 혼인관계를 에로틱으로 변질시키는 어떠한 교묘한 시도도 극히 사악한 피조물 신격화로 보고 거부”한다. (Max Weber. 2008: 256)

결국 베버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구원종교는 (자연주의적인)섹스 자체에 대해서 반대 했다기보다는, 성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삶의 전반에 걸친 금욕주의적인 규제는 오히려 비합리성의 분출구로서 성애의 신비화 내지 관심의 증대를 부추겼다. 구원종교는 최후의 수단으로 섹스의 허용을 결혼제도 안에 봉인 한 채, 에로스적 관계화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종교의 도덕적 규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에로스의 힘에 대한 봉인이 깨지고 말았다. 도덕률의 준수에 대한‘개인화’의 경향이 나타났고, 최후의 보루인 결혼마저도 에로스의 직접적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 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붕괴된 데에는 주지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에 의한 세속화의 여파는 마지막 남은 신비화의 영역인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이와 같은 모든 부문의 화폐적 세속화(혹은 교환적 관계화)는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하였다. 결혼에 있어서도 조건과 스펙이 맞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됨으로써 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결혼 외부에서 찾는 모순이 생겨나 버렸다. 돈의 맛에서 필리핀가정부와 볼륜의 관계를 맺는 윤회장(백윤식)의 애정도피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관계 (윤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결혼관계를 포함하여) 중 제일 순수하다고도 느껴질 정도로 자본주의는 결혼마저도 물질화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가족이라든지, 결혼이 자신의 사랑(행복, 가치)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위험사회에 각 개인들이 홀로 놓이게 되었다. 개인주의화의 강화(이로 인한 구원종교의 규제력 약화)와 성애적 신비주의의 유지는 각 개인들의 사랑을 각개전투로 만들었다.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사랑에 있어서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하게 됨.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왜곡현상에 자본주의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변화를 초래했을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남녀 간의 독점적 사랑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성향은 화폐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화폐는 자신이 모든 사물에서 일자로 위치하는 독점적 교환질서 안에서만 기능한다. 호혜적 관계가 각 개인의 모든 인간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호혜적 증여(선물)만이 이루어진다면, 교환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소유권을 명확히 한 개인에게 한정하고, 그 가치를 하나의 화폐로 단일화하여 시장내에서 거래되게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 질서는 꼬뮌적이고 코스모폴리탄 식의 사랑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심화의 과정은 사랑의 관계를 계속 축소시키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사랑의 소유화. 호혜적 관계에 의한 선물의 관계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인 화폐교환 질서만 남게 되는 선형적 과정인 것이다.

 

결론

자본주의의 이와 같은 부작용(섹스와 사랑의 동일화-관계의 해체)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보수적인‘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막스베버의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성의 신비화(비합리적 요소의 강화)를 막는 것은 다른 비합리성(과거에는 종교)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비합리성의 영역에 있어서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요구된다. 새로운 윤리가 위험상황에 빠져있는 혼동하는 개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는 보수주의의 윤리로 가서는 안되고, 또 불가능할 것이다. 종교와 결탁했던 비합리성의 허상이 합리주의화의 경향(인류의 진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윤리는‘비독점적 사랑’이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으로‘공동성’을 어떻게 창출하고 더 늘려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관계를 해체한다. 개인 단위의 것들만 남기고 모두 해체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꼬뮌적 방식은 개인/핵가족 단위에서 더 큰 단위로 상호부조, 호혜의 관계망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대융합에의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개인의‘사랑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느냐? 그것은 가족로맨스(가족단위)라든지, 운명적 사랑(연인단위)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창출해야 가능한 것이다. 연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1:1 사랑의 독점적 소유관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욕망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공동성의 장’(꼬뮈니즘)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꼬뮈니즘 안에서의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편협한 관계성은 ‘새로이 확장된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고, 성애는 비신비화되어 자연주의적 성으로 지상추락할 것이다.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꼬뮈니즘 안에서의‘새로이 확장된 사랑’이 막스 베버가 구원종교에서 에로스와 대치되는 사랑으로서 이야기했던‘형재애’와 매우 유사한다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1. 외국문헌

Erich Fromm. 2000.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Slavoj Žižek.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3인역. 난장이.

Max Weber. 2008. ≪종교 사회학 선집≫. 전성우 역. 나남.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3인역. 새물결.

Wilhelm Reich. 2006.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역. 그린비

 

 

 

<부록1. 주간한국 기사 >유부녀들의 금지된 사랑의 은밀한 유혹

 

‘유부녀 쉽게 유혹하는 방법’ ‘유부남에게 통하는 애교 베스트 10’….

인터넷을 하다 보면 이런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부남. 유부녀들의 ‘애인 만들기’ ‘애인 되기’ 퇴폐적 열풍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음을 적나라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녀와 탈선하는 불륜행각은 동서고금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이들은 이른바 세컨드 라이프를 위해 ‘유부클럽’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고민을 함께 나누는 등 상담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A 카페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혼녀’들을 위해 개설된 곳이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꾸 보다 보니 정이 들었죠. 그 사람도 저랑 같이 있으면 좋고, 와이프보다 더 편하대요. 빨리 끝내야 하는 걸 알지만 쉽지 않아요. 주변에서 눈치챌까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끝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얼마 전 이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유부녀이면서도 이 카페에 흥미 삼아 가입한 회원들은 “어떻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를 치냐” “가정 파괴범이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등 비난하는 글을 대거 올렸다. 반면 미혼 여성 회원들은 “오죽하면 결혼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한 눈을 팔겠느냐” “남편 바람나게 한 와이프가 문제다” 등 양측이 팽팽하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

사태가 너무 소란스러워지자 결국 카페 주인은 이후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등급제를 적용해 일정 등급 이상만 게시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바꿔버렸다.

이 카페 또 다른 회원 박모(25세)씨는 여대생이다. 얼마 전 30대 중반의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박 씨는 앞서 동갑인 남자와 2살 연상인 미혼 남자를 각각 사귄 적이 있었는데 만날 때 마다 데이트 비용 걱정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남친이 영화를 보여주면 나는 밥이나 커피를 사야 했고, 항상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 애인은 유부남이기는 하지만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해준다.” 나이 차이가 크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고 있어서 자신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준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A카페 개설자 김모씨는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카페와 이웃을 맺은 카페도 3곳이나 된다”며 유사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후죽순 생겨난 유부클럽이 유명 사이트마다 수백 개씩이나 되고, 회원 수도 각각 수십~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의 유부클럽은 유부남. 유부녀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중시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불륜이 유행하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본래 클럽의 취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마음 놓고 외도할 수 있는 장소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대한민국 유부남, 유부녀를 위한 커뮤니티로 육아. 건강 정보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시간이 지나 회원들간의 편안한 만남을 주선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유부 탈선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현재 회원수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지난 9월에는 ‘정모(정기적인 모임)’를 가졌고, 일주일에 2~3번은 ‘번개(갑작스러운 모임)’를 한다. 참여율도 높고, 참석한 사람들은 하루 정도 짧은 만남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만남을 이어간다.

“오늘 영화 번개 좋았어요. 특히 ‘sdy20’님 게시판에서 얘기만 주고 받다가 직접 만나니까 더 반가웠어요. 답답한 일상에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조만간 또 만나요.” 이 커뮤니티의 한 회원이 남긴 번개 후기다.

또 다른 회원 김모씨는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하면서 만난 이모씨와 함께 얼마 전 여행을 갔다 왔다. 김씨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워크숍을 간다고 둘러댔고, 상대방 역시 남편에게는 동창생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꾸며 둘만의 밀월여행을 다녀온 셈이다.[[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27.50 KB) 다운받기]

김씨는 자신 뿐만 아니라 회사 동기들도 ‘애인 만들기’를 꿈꾼다며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외도를 알고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커뮤니티 가입 방법을 묻는 친구도 있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이 같은 세태를 두고 연애지상주의와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쾌락추구 성향이 강한 대중문화가 개인을 자극하기 시작하면서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줄고 있다”며 “쾌락권 추구가 곧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사랑이라면 사회 도덕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남의 사람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결혼생활에 대한 후회와 절대시됐던 일부일처제에 대한 도전이 늘면서 불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불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인 부부가 갖고 있다”며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부부 사이의 진짜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할 것을 권고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됐다고 해서 둘 사이가 언제나 굳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항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긴장된 애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현 교수는 말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심리학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들어 불륜을 설명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장애가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불륜 커플이 늘고, 그들의 사랑이 더 열정적으로 달아오르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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