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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난뱅이의 역습!! (2) 2009/04/30

하이퍼텍스트

from 퉥을 읽자 2009/05/15 12:54

뭐 요즘에야 인터넷으로 머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 열린 문학을 지향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소설을 썼을까.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사이의 이야기임. 예전에 갖고 있던 자료인데 정리하다가 새로이 발견하고 나름 내혼자 재미있어서 올린다 ㅋㅋ

 

1. 하이퍼 픽션

 

-스토리스페이스 : 하이퍼텍스트를 쓰는 수단

프로그램 이름인데 아직까지 존재는 하고 있다. 웹사이트 가서 프로그램 다운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난 어떻게 하는건줄은 몰겠다. 방법이 꽤나 귀찮어;;
근데 소설을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스토리만 좋고 흥미진진하다면 빠져들 수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작가는 마이클 조이스.

 

 

마이클 조이스는 "스토리스페이스"라는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의 개발자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스토리스페이스"는 전통적인 텍스트를 쓸때 이용하는 연필이나 타자기와 같이 하이퍼텍스트를 쓰는 수단인데, 미국의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사에서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최초의 본격하이퍼텍스트 픽션 작가인 조이스는 {오후, 하나의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많은 다른 페이지들 속의 문단들이 또다른 페이지들 속의 문단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이 인쇄된 책에 의해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문단을 이동할 수 있는 일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이스의 방식은 저자가 미리 정해놓은 일정한 계획과 구도 속에서 독자들이 문단에서 문단으로 이동해 나가는 것이므로, 랜도우가 지적하듯이 저자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 모더니즘의 강령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짧은 삽화들로 구성되는데, 각 삽화는 낱말, 문장, 문단으로 되어 있다. 독자가 키 보드로 입력하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여 방향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삽화들 사이의 연결의 하이퍼텍스트적 네트워크이다. 물론 독자가 스토리를 실제로 변경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게 되는 첫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문장들이 보인다.
I try to recall winter. "As if it were yesterday?" She says, but I do not signify one way or another.By five the sun sets and the afternoon melt freezes again across the blacktop into crystal octopi and palms of ice--rivers and continents beset by fear, and we walk out to the car, the snow moaning beneath our boots and the oaks exploding in series along the fenceline on the horizon, the shrapnel settling like relics, the echoing thundering off far ice. This was the essence of the wood, these fragments say. And this darkness is air. "Poetry" she says, without emotion, one way or another.
Do you want to hear about it?
문장들 아래에는 화살표와 "예"/"아니오" 등의 몇 가지 표식들이 있다. 만약 "예"를 택하여 마우스로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떠오른다.
She had been a client of Wert's wife for some time. Nothing serious, nothing awful, merely general unhappiness and the need of a woman so strong to have friends. ...
그러나 "아니오"를 택하면 다른 삽화가 출현한다.
I understand how you feel. Nothing is more empty than heat. Seen so starkly the world holds wonder only in expanses of clover where the bees work. ...
또한 문장들 속의 어떤 낱말을 클릭함으로써 다른 삽화들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스토리의 네트워크에는 500개 이상의 삽화들과 900개 이상의 지선(支線)들이 있다. 한 삽화에도 대개 6 개 이상의 지선들이 있다. 이 스토리는 모호한 사건, 사고가 난 차에 내레이터의 아들이 타고 있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한 일종의 미스테리적 추적의 과정이 독자의 읽기의 과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볼터는 이 작품을 해설하면서 이 작품 그 자체가 "독서행위의 알레고리"(an allegory of the act of reading)라고 말한다(1992:29)

 

 

결국 스토리스페이스를 통한 하이퍼텍스트는 인생극장인 셈 ㅋㅋㅋㅋㅋ

마이클조이스의 소설 경우 87년에 쓰여졌는데, 머 여튼 돈내고 사야하니 진정한 열린 네트웍이 아니라도 볼 수 있겠따.

 

2. 공동창작
미국-작가 중심의 하이퍼 픽션
유럽-공동 창작 형식의 네트워크 실험형식


유럽의 시초는 84년 파리의 철학자 료따르에 의해 진행된 공동 창작 이벤트(처음에는 게임의 성격이 강했던 프로젝트에서 점차 다수에 의해 작성되는 문학적 텍스트로 변모)

이것도 문제점은 있따. 참여자의 수와 텍스트의 질은 반비례?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열린 네트워크이자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지만, 문제는 재미없따는거/////////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그냥 장난질같은 느낌/
지금의 검색 시스템과도 좀 유사하다. 어떠한 단어를 딱 치면 그것을 바탕으로 누구나 소설을 등록할 수 있따.

 

 

 

그래서 나온것이 기획자가 텍스트를 심사하는 공동 창작 프로젝트


하루를 1440분으로나누어 매 분마다 하나의 텍스트가 편집, 또는 읽혀진다. 언어가 달라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정시간+주인공의 기억이 접목되는 새로운 형태. 이 역시도 기획자의 편집이 가해지기 때문에 열린 네트웍인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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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5 12:54 2009/05/1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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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from 퉥을 읽자 2009/04/30 14:36

 

 

가난뱅이의 역습을 봤다. 표지부터 포스가 ㅋㅋㅋ

만국의 듣보잡이여 궐기하라 ㅋㅋ

 

저자는 대략 이런 사람 ㅋㅋㅋㅋ

 

그림은 최규석씨가 그렸다.

 

 

저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더 나은 삶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자신만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실천한다.

책은 가난뱅이들이 살아가는 메뉴얼 북과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 다는 아니다.

내가 책에서 감동 받았던 것은 그가 했던 특이하고 기괴한 형태의 실천?이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였다. 자세한 것은 뒤에 쓰겠어.


저자가 한국에 온다고 해서 어제 부리나케 달려갔다. 다다다
생각보다 잘생겼어!!!!!!! 어찌나 피부도 고운지 +_+

출판사에서 초청한게 아니라 자기가 자비들여서 오고, 본인이 출판사한테 연락한거 ㅋㅋㅋㅋ 여튼 이사람 재미있다.

 

여튼, 간단한 자기소개 후,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간담회는 이루어졌다.
내가 빵하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는데, 질문했던 사람이 '당신의 이벤트, 데모와 같은 행위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당신 스스로가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끼친다.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 할꺼냐'라는 거였는데, 하지메짱의 대답은

 

'나의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평가한다. 어떤 사람은 저놈 미친놈이네, 또 다른 사람은 당신 너무 멋져 좋아~, 또 다른 사람은 음..학술적으로 연구해볼 만하군.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생각이고 그게 다르게 읽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존의 정당이건, 운동들이건 너무 재미없고 사람들에게 효과도 없다. 어차피 기존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기 때문에, 나는 아예 다른 삶을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멍청이들과 다른 삶. 다른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가 무엇보다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흠. 과연 그랬다. 나도 운동이라고 생각했을 때, 솔직히 내가 이러한 운동을 한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의 질이나 행복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었다. 뭐랄까, 의미있는 행동이긴한데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래를 위한 구호라고나 할까. 운동 자체를 나는 기존의 노동운동 혹은 그 아류의 스테레오타입만 생각한 것이다. 거리에서 MB악법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비정규직 철회 등등. 구호부터 낯설고 끼리끼리 모임이라는 생각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집회에 가도 똑같은 양식에, 지겹고, 귀에 안들어오고, 사람들은 피하고 등등. 작년 촛불이 그렇게 대중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은 미친소를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직접적 내 삶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문제가 많았지만, 끝이 없으니 패스하고, 여튼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면 이것이 어떻게 직접적으로 나에게 피해를 주고, 내 이웃이 힘들어지는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이미지를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맑스를 공부해야하고, 사회주의를 이해해야하고... 공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어렵게 풀어간다는 것이지. 갑갑해

 

근데 사실 운동이라고 하는 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세제를 안쓰는 것도 운동이고, 집안 청소하는 것도;; 나한테는 운동이고, 산에 오르는 것도 운동일 수 있겠고, 뭐 운동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니깐.
어제 깐돌이랑 왜 일본의 운동세력은 저렇게 죽어가는 것일까(학생운동 등등)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냥 내 생각은 그렇게 운동을 해도 내 삶과 직결되고 당장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의 소득은 올라가고 취미생활도 다양해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미래를 위해 재미있는 삶을 포기하긴 좀 그렇지 않나?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이 진짜 가치있는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현재와 과거의 운동을 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단지 나한테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다 전환되고 복지수준이 유럽만큼 엄청 올라간다고 해도, 그 부를 누리는 만큼 또 제 3세계나 혹은 다른 사람들, 동물들, 생명들에게 어떤 착취와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고, 거창하게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나부터의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행복하면서 타인에게 아프지 않는거. 엄청 고결하게 살고 싶은 맘은 없지만, 누군가 나때문에 다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싫으니깐. 물론 찾기가 너무 어렵다. 그치만, 그 또한 숙제라고 생각하고, 즐거이 풀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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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14:36 2009/04/30 14:36